163.
어제의 적이 오늘의 아군.
영화나 만화 등에서 각종 매체에서 흔하게 쓰이는 클리셰.
그리고 오늘 쇼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묘사할 부분이기도 했다.
헌터와 나의 연합.
그것을 어떤 식으로 풀어내야 보다 더 드라마틱할 것인가.
거기에 대해 깊이 고민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바로 ‘미스테리 파트너’였다.
먼저, 러셀을 영입한 레볼루션의 멤버들이 나와 오프닝을 맡는다.
그들은 지난주에 벌어졌던 일을 회상하며 업계에 혁명을 일으키겠다는 자신들의 야망을 말하고.
그 앞에 나타난 헌터가 경기를 요구하자 레볼루션 멤버들은 태그 팀 경기로 하자며 비웃는다.
레볼루션에서 축출당한 이후, 주변에 누구도 남지 않게 된 헌터의 처지를 비꼬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헌터는 좋다면서 경기를 받아들이고. 경기 중간마다 백스테이지 세그먼트에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대체 누가 헌터의 파트너로서 레볼루션을 상대하게 될 것인가.
“물론 나지.”
쇼가 시작하기 전.
러셀과 나는 락커룸에서 마지막으로 각본을 정리하고 있었다.
“뻔한 반전이지만 사람들은 분명히 좋아할 거야. 그렇잖아?”
“맞아. 공공의 적을 앞에 두고 어제의 적이 손을 잡는 거니까.”
고개를 끄덕인 러셀이 이어 주변을 살피고는 말을 이었다.
“사실, 헌터가 군말 없이 이 각본을 받아들여서 좀 놀랐어.”
“그래?”
“응, 너를 띄우는 각본이잖아? 헌터는 각본에서 좀 자기중심적인 경향이 있다고 들었는데.”
“맞는 말이네.”
“근데 이건 왜 받아들인 걸까?”
“그러지 않도록 유도했거든.”
“어떻게?”
러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역시 이 녀석은 이런 방면으로 요령이 영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니 오튼과의 대립도 망했던 거지.
사실 내가 느꼈을 때 오튼 정도면 다루기 쉬운 편에 속했지만.
“거래를 제시하는 거야.”
“거래?”
“가령, 오튼이 선수로서 가장 중시하고 있는 부분이 뭐일 것 같아?”
“글, 쎄.”
“생각 안 해봤지?”
“……보통 그런 걸 생각해?”
“해야지. 네가 원하는 바를 상대가 받아들이게 하려면 말이야.”
“음, 모르겠는데.”
“오튼이 좋아하는 건 두 개야. 돈과 안정. 이 두 가지를 충족시켜주면 열심히 하는 녀석이지.”
“돈을 주라고?”
“……아니,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거라고 설득하라는 말이지.”
“안정은?”
“바트가 이번에 정리 해고 대상을 찾고 있다고 말하는 거야.”
“구, 굳이 그렇게 해야 돼?”
“아니면 뭐, 그놈이 대충대충 하는 거 보면서 혈압 올라서 죽는다는 선택지도 있고.”
“……참고할게.”
내 말에서 트라우마를 떠올린 듯 러셀은 단번에 받아들였다.
선수를 대강 프로레슬링이라는 행위 자체를 좋아하는 쪽과 성공의 도구로서만 생각하는 걸로 이분하자면.
러셀은 왼쪽 끝, 프로레슬링만을 생각하는 타입이고, 반대로 오튼은 오른쪽 끝에 있는 타입이었다.
나는 정확히 중간에 있어서 둘 모두와 편하게 일하는 쪽이고.
물론 프로레슬링 그 자체를 사랑하는 걸로는 내가 제일일 거다.
어쨌든 이걸로 러셀이 좀 요령을 익힌다면 좋을 것 같았다.
놀랍게도 오튼은 말이 통하지 않는 인간이라서 말이다.
“음……. 그래서 이번에 헌터에게는 어떤 거래를 제안한 거야?”
“뭐긴 뭐겠어.”
나는 씨익 웃었다.
“이 각본에 포함되어있는 그 인간 쪽 사람이 네 명이잖아. 그걸 거래의 대상으로 둔 거지.”
“위상을 올려주겠다고?”
“맞아. 제대로 이야기를 한 건 아니지만 대충 각본 개요만 봐도 반응이 대박일 게 느껴지잖아?”
“확실히 그렇지.”
“그러니까 입 다물고 있는 거지. 자기 위상은 반응이 충분히 올라온 다음에 뽑으면 되는 거고.”
내가 봤을 때, 헌터가 지금 바라고 있는 건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번에 멋진 각본으로 턴 페이스를 해서 자신이 선역으로서 자리를 잡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기 파벌로 밀어주고 있는 오튼, 바티스타의 위상이 크게 높아지는 것.
‘뭐, 턴 페이스야 나와 같이 팀을 맺으면 자연히 되는 거고.’
그 외에는 글쎄다.
사실 나는 이번 각본을 통해서 가장 이득을 보게 되는 것은 러셀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야만 했다.
녀석이 그렇게 해서 내 라이벌로의 위치까지 성장해줘야만 선역으로서의 나도 훨씬 좋아졌다.
모든 선역에게는 반대편에서 치열하게 대립을 진행해줄 멋진 악역의 존재가 필수적이었다.
아치 에너미였다.
GCW 시절 러셀과 내가 그랬고.
캡틴 로건의 상대였던 기간트.
락콜드의 상대였던 바트 맥센.
그리고 숀 시나의 상대였던 랜스 오튼, 엣지 같은 선수들까지.
그걸 위해서는 일단 러셀의 위상을 되는 대로 키워줘야 했다.
어디까지나 악역으로서.
바로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직원 하나가 안으로 슬쩍 고개를 들이밀었다.
“선수들, 쇼 시작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러셀과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나는 러셀 하트에게서 생각 외의 가능성을 한 가지 발견했다.
바로 악역이었다.
[물론, 이해받을 수 있는 행동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어.]
녀석의 악역 캐릭터는 평소의 진중한 성향에서 따와 자꾸 논리를 설파하는 게 특징이었다.
심지어 그게 틀린 말은 아니라서 오히려 더 재수가 없었고, 스스로 나쁜 짓을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자행한다는 점이 무척이나 꼴 보기 싫었다.
덕분에 쏟아지는 야유는 단숨에 녀석을 탑 힐로 만들어버렸다.
[Booooooooooooo-!]
[GCW 시절에 한 번 배신을 당한 뒤 녀석을 용서했던 내가 이번에는 반대로 배신을 하다니?]
농담이 아니다.
녀석은 단숨에 최악의 야유를 이끌어내는 선수가 되고 말았다.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내 뒤통수를 쳤기 때문이었다.
[그래, 알고 있어. 그게 시사하는 바가 뭔지 알아? 바로 내가 더 이상 ‘착한 러셀 하트’로서 살기를 거부하게 되었다는 말이지.]
레볼루션의 멤버들과 함께 러셀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천천히 복선을 깔았다.
[이 재수 없는 옷도 벗어야겠어. 왜냐고? 내가 이제부터 하트 패밀리를 재규정할 생각이거든.]
스스로의 의지가 담긴 발언인지라 연기력이 폭발할 지경이었다.
[이제부터 난 ‘킹 오브 하트’다. 너희가 아는 패배자의 이름은 머릿속에서 지우는 게 좋아.]
[You Suck! You Suck! You Suck! You Suck! You Suck!]
[그렇게 모여 떠들어봤자 상황은 변하지 않아! 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러셀의 말을 끊어내며 동시에 트리플H의 입장 음악이 입장로 위에 자욱하게 깔리기 시작했다.
환호와 함께 일어서는 사람들.
당당히 커튼을 걷고 나간 헌터는 분노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내가 폼으로 월드 챔피언을 허리에 감았던 것 같나?! 오늘 밤 제대로 한번 붙어보자고!]
[그렇다면 어디 태그 팀으로 붙어보는 건 어떨까? 헌터 나리.]
오튼이 그를 비웃었다.
거기에서 헌터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관객들이 의아해하자 오튼이 낄낄대며 말을 이었다.
[레볼루션을 뺀 너에게 남는 건 뭐지? 아무것도 없잖아! 벨트도 없고, 동료도 없고! 이제는 늙어가는 이빨 빠진 사자에 불과하지!]
‘이 각본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오튼은 정말 열심히 일을 했다.
[어디 한번 열~심히 파트너를 구해보라고! 그렇게 하면 오늘 밤 나와 이 킹 오브 하트께서 상대를 해줄 테니까 말이야!]
[……그래, 좋다.]
하지만 헌터는 그걸 받아들였다.
[붙어보자! 오늘 밤! 메인이벤트에서 말이야!]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그렇게 기대감을 끌어올린 상태에서 링 세그먼트가 끝났다.
광고가 이어지는 가운데, 나는 차례대로 돌아온 헌터와 레볼루션 멤버들을 환영해주었다.
“다들 멋졌어요.”
“……락커룸으로 가자.”
나를 힐끔 돌아본 헌터는 그대로 복도 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무뚝뚝한 반응에 쓰게 웃고 있자니 플레어가 내 등을 때렸다.
“부끄러워하는 거야.”
“같이 일할 때 제가 얼마나 괜찮은 녀석인지 알아서요?”
“그래, 반응 자체가 메인에서 각본 진행할 때와는 완전 다르니까.”
“음.”
바티스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와 다시 일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꿈만 같군.”
“……그 정도에요?”
“앞으로도 많이 가르쳐줘.”
“기대에 응해보죠.”
너스레를 떨며 대답한 우리는 그대로 헌터를 따라 경기장 한 구석의 락커룸으로 이동했다.
쇼는 계속되었다.
광고가 끝나자 화면에 오늘의 메인이벤트로 태그 팀 경기가 이어진다는 매치 카드가 나왔다.
하지만 왼쪽에서 포즈를 취한 오튼, 러셀과는 달리 트리플H의 파트너 자리는 텅 빈 채였다.
[트리플H의 태그 팀 파트너가 누가 될지 정말로 궁금하군요!]
[글쎄요. 지금껏 그에게 당한 선수들이 너무 많은데 락커룸에서 선뜻 나서는 이가 있을까요?]
[흠, 그렇게 되면 헌터는 혼자서 레볼루션에게 맞서야겠군요!]
해설자들도 걱정을 표했다.
그런 식으로 떡밥을 뿌려두고 다른 대립들이 계속 이어졌다.
쇼의 중간 중간 백스테이지 세그먼트로 파트너를 구하는 헌터의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주었다.
그동안 우리는 락커룸에서 각자 할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나는 헌터의 부름을 받아 그와 함께 락커룸에서 잠시 나왔다.
역시 앞으로의 각본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자 헌터는 내 예상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고 곧바로 본론을 이야기해왔다.
바로 이렇게 때문에, 헌터가 상대하기에 편하다는 것이었다.
마이클스에게서 뭔가 들었는지,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고 내게 드러내게 되었다.
따라서 쟁점이 있을 때 서로 좁혀나가기에 편한 것이었다.
“반응이 아주 좋더군.”
“제가 짠 각본이니까요.”
“여전히 거만하군.”
“한결 같다는 말이죠?”
“……뭐, 그렇다고 치지. 앞으로 각본은 어떻게 할 생각이냐?”
“글쎄요. 오늘 경기 반응을 보고 정하는 게 맞지 않나 싶은데.”
“그거야 뻔하지.”
헌터가 씨익 웃었다.
“너와 나에게 엄청난 환호가, 그리고 레볼루션에게 엄청난 야유가 쏟아질 거다. 그렇지 않나?”
“그렇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생각해봅시다. 왜 반응이 그렇게 나오는 걸까요?”
“그야 당연히 너와 내가 배신을 당했고, 공동의 적을 앞에 두고 힘을 합쳤기 때문이 아니겠나?”
“그렇죠. 그러면 이제 그 반응을 어떻게 끌어가는 게 좋을까요.”
“계속해서 협력을 해야지.”
“그리고?”
“……레볼루션과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우리가 마지막에 이긴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지만, 너무 단순한 각본이 아닐까요?”
“사람들은 단순한 걸 좋아해.”
“그러니까 뉘앙스를 담아 천천히 빌드 업을 해가는 거죠. 대중의 무의식을 건드리는 겁니다.”
“……그런 것까지?”
“예, 뭐. 반응이 급격하게 줄어든다면 안 하고 끝낼 수도 있으니 저희가 잃을 건 없는 셈이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바티스타죠.”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레볼루션의 충직한 행동 대장.
원래의 역사대로라면 올해 치러진 레슬 임페리움에서 월드 챔피언 자리에 올랐어야 할 사나이.
러셀이 나의 도움을 받듯이.
바티스타도 뜨기 위해서는 현재 트리플H의 도움이 절실했다.
“당신이 그렇게 ‘무책임’하게 떠나버린 이후로 회사에서 레볼루션의 존재가 붕 떴단 말이죠?”
분명히 말해두자.
레볼루션이 써내려갔던 시대는 락콜드의 시대 이후 새로운 스타를 찾기 위한 과도기였다.
그렇게 해서 떠오른 스타가 바로 바티스타와 랜스 오튼이었다.
현재에도 오튼은 나와의 대립으로 나름 자리를 잡기는 했지만.
바티스타는 아직 아니었다.
“이번에 확실히 레볼루션의 결말을 짓자는 거죠.”
“바티스타를…….”
“좋은 선수잖아요?”
“글쎄, 나이가 너무 많아.”
“그래도 앞으로 3년 정도는 선수로서 큰 인기를 끌 겁니다.”
“……마지막으로 묻자.”
“그러세요.”
“이번 각본을 대체 언제까지 끌고 갈 생각이냐?”
“여름까지입니다.”
“이유라도?”
“4대 페이퍼뷰 중 하나인 섬머 수플렉스가 그때 열리니까요.”
“하긴, 대립을 길게 끌고 나갈 생각이라면 그때를 기점으로 마무리 짓는 게 일반적이겠지.”
“그 외에도 하나 더 있습니다.”
“하나 더?”
“딱히 헌터 당신과 관계가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요.”
“……뭐냐, 기분 나쁘게.”
퉁명스럽게 말하는 헌터.
하지만 사실이었다.
실제로 이건 ‘우리 네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