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164화 (164/634)

164.

내가 왜 굳이 섬머 수플렉스를 대립의 종결지로 정해놓았는가.

그 이후가 되면 회사에서 ‘WWF 드래프트’라는 이름의 각본을 시행할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WWF 드래프트.

회사에 소속된 모든 선수들을 대상으로 버닝콩과 랙다운을 재편성하는 커다란 이벤트였다.

원래대로라면 1픽으로 버닝콩으로 이적하는 게 당시 WWF 유니버스 챔피언이었던 숀 시나였다.

전생에는 5월 페이퍼뷰 이후 바로 실시되었는데, 이야기를 듣자 하니 우리 각본이 수익성이 기대가 되어서 밀렸다는 모양이다.

나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좀 고민을 해보았지만, 역시 바티스타는 저대로 그냥 묻히도록 놔두기에는 아까운 선수였다.

비록 데뷔를 늦게 해서 선수 생활이 짧았지만, 그는 엄연히 회사를 이끈 메인 이벤터였으니까.

‘뭐 사실, 내가 그렇게까지 신경 써야 할 문제냐 싶기도 하지만.’

헌터를 그냥 놔둔다면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또 자신만 주목받는 각본을 하려고 들 테니까.

그러면 관객 반응은 다시 최악이 될 테고, 헌터는 이를 애써 무시하는 비참한 흐름이 이어지겠지.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나는 전생의 각본에서 한 계단 더 나아가 헌터의 이미지를 챙기는 동시에 바티스타를 크게 띄워주는 각본을 쓸 생각이었다.

개요는 간단했다.

링 위에 오른 레볼루션의 멤버들이 뒤이어 나타난 헌터를 호기로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디 한번 보여 달라고! 네 미스테리 파트너가 누군지를!]

호기롭게 외치는 오튼의 바로 뒤. 바티스타는 입술을 꾹 다문 채 헌터를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

내 주문대로였다.

저런 식으로 남들과 다른 모습을 보여 조금씩 그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음을 어필하는 거다.

그렇게 반응이 올라올 때를 기다린 뒤, 각본을 진행하는 거지.

하지만 오늘은 나의 날이었다.

성가와 같은 전조가 흘러나오자 관객들이 환호성을 내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작 일주일을 쉬었을 뿐이지만 나에 대한 열망은 엄청났다.

당황하며 물러나는 러셀.

사람들이 다함께 내 음악을 노래했다.

아니, 이것까지 포함해야만 진짜로 내 음악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열광적으로 노래하는 관객들에게 반응을 해주고는 헌터와 함께 링 위로 달려서 올라갔다.

그런 우리의 기세에 밀려 링 아래로 도망치는 레볼루션 멤버들.

경기장 전체에 울려 퍼지는 엄청난 환호 속에서 나는 링 아래에 서있는 러셀을 노려보았다.

처음에는 무척 당황했던 러셀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자신의 분노와 투지를 드러내 보였다.

그렇게 경기가 시작되었다.

링 벨이 울리며 먼저 나선 것은 트리플H와 랜스 오튼이었다.

나는 약간의 불안감을 느끼며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왜냐면 두 사람의 상성 자체가 경기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데는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게 트리플H의 단점인데.

그는 자기 경기 스타일에 대한 확고한 철학이 있어, 절대로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스타일이 선역으로서 호응을 얻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이름하야 ‘올드 스쿨’.

테크니션 계통의 하위 호환으로, 화려한 기술과 위험한 범프를 절제하고 그래플링 위주로 경기를 풀어나가는 스타일을 뜻했다.

닉 플레어가 이 방면의 달인이었고, 그를 가장 존경하는 트리플H 역시도 그런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솔직히 이야기해서 선역으로서 관객들의 호응을 받을 만한 경기 스타일은 절대로 아니었다.

선역은 빛나야 한다.

브롤러로서 빠른 템포로 상대를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거나.

테크니션이나 하이 플라이어 계통으로서 화려하게 싸우거나.

아니면 정말 단순하게 파워 하우스로서 자기 힘을 과시하거나.

하지만 올드 스쿨은 선역으로서 빛나는 레슬링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상대를 조롱하거나 하면서 느릿하게 경기를 끌어 악역 운영을 하기 적합한 레슬링이지.

그것에 트리플H가 부린 고집 하나로 인해 경기장의 분위기는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가 오튼에게서 주도권을 가져가기로 한 것이었다.

여기서 생각해보자.

트리플H의 미스테리 파트너로 당신이 가장 고대하던 선수인 신이 나왔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장면을 가장 기대할 것인가?

‘그야 당연히 헌터가 당하다가 신이 핫 태그를 해서 레볼루션 놈들을 박살 내는 시나리오죠!’

대부분 그렇게 이야기하리라.

유치한 스토리였지만, 애초에 대부분의 사람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유치하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불꽃놀이에 눈을 빼앗기는 이치와 같지.

그렇기에 그들이 가장 기대하고 있을 이야기를 타이밍을 잘 잡아 멋지게 보여주는 것.

나는 그런 제안을 했지만 헌터는 여기서 고집을 부렸다.

이해는 하고 있다.

오랜만의 복귀니까 자신이 나서는 게 더 좋다고 생각을 했겠지.

하지만 문제는, 그의 경기 스타일이 딱히 환호를 이끌어낼 만한 종류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역으로서의 트리플H는 싱글 레슬러보다 태그 팀이.

그것도 팀원을 돋보이게 해줄 때가 가장 빛나는 법이었다.

……안타깝게도 자기는 몰랐지만.

자기 자신이 로마의 유일한 신…… 황제라도 되는 양 굴었지만.

관객들의 반응이 점점 죽었다.

느릿하게 오튼을 압박해가는 헌터의 경기 방식을 이곳의 관객들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러셀이 침묵했고, 나 역시도 하품이 나오는 걸 애써 참았다.

헌터 선생님은 쓰러진 오튼을 일으켜 세우고는 그대로 느릿하게 들어 올려 파워 슬램을 갈겼다.

콰앙-!

자신의 몸에 상대의 몸을 겹치며 함께 떨어지는 호쾌한 기술.

좀 분위기를 끌어올리고자 시전한 것 같은데, 저렇게 느릿해서야 보는 맛이 전혀 없었다.

거기다 안 그래도 작위적인 프로레슬링 기술이 더 작위적으로 느껴진다는 단점도 존재했고.

‘언제쯤 시작되려나.’

나는 딱히 관객들의 호응을 이끌어줄 생각도 없이 가만히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사실 여기에서 헌터의 고집을 꺾으며 경기 퀄리티를 올리기 위해 나는 한 가지를 제시했다.

위대한 선역(비아냥) 헌터가 악역의 ‘반칙’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장면을 연출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거기에 동의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튼이 심판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거기에서 관객들이 다시 반응했다. 나는 씨익 웃어 보였다.

예상한 대로다.

오튼은 굉장히 평범한 선수였으나 비주얼이 좋았고, 동시에 두 가지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했다.

찌질이와 사이코.

그렇기에 나는 그에게 찌질한 사이코를 연기할 것을 주문했다.

오튼은 심판을 물고 늘어져 시간을 번 뒤, 그 시선이 팔린 틈을 타 헌터의 눈을 찔렀다.

“그/아/아/앗!”

속이 뻔히 보이는 어색한 연기와 함께 뒤로 돌아서는 헌터.

분명 비겁한 악역의 행동에 큰 고난을 겪는 선역으로서 자기 자신을 포장하고 싶은 것이겠지.

‘그럭저럭 먹히는 게 놀랍군.’

씁쓸하게 웃은 나는 그대로 이어지는 경기 양상을 지켜보았다.

오튼이 주도권을 가져갔다.

녀석의 경기 스타일은 딱히 어떻다고 특정 지을 수가 없었다.

뭐든지 어느 정도는 해냈지만, 반대로 딱히 특출 난 점은 없다는 의미에서의 올라운더였다.

그래도 계속 성장하면서 점점 자신만의 개성이 가미된 경기 스타일을 습득해나가기는 했지만.

그건 나중의 이야기였고.

현재로는 많이 부족했다.

그래서 나는 오튼에게 두 가지를 요구해 그걸 극복하려고 했다.

하나는 경기 템포를 좀 더 빠르게 가져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바로 관객들과의 소통이었다.

지금 선수로서 오튼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젊음이었다.

그렇기에 템포를 올려서 관객들이 경기에 집중하도록 하고.

그다음으로 야유에 반응을 함으로써 분위기를 끌어올린다.

[Boooooooo……!]

“하하, 귀청 떨어지겠네.”

헌터의 머리채를 붙잡은 오튼은 귀를 긁어대는 시늉을 하며 관객들의 야유에 반응을 보였다.

멋진 퍼포먼스였다.

역시 오튼은 평소 그랬던 만큼 쓰레기 같은 짓도 곧잘 해냈다.

딱히 배우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풍겨 나오는 쓰레기 냄새.

역시 타고난 찌질이였다.

‘멋져, 멋져.’

러셀과도 잘 어울렸다.

콰앙-!

링 위로 나온 러셀은 테크니션으로서의 면모를 살려 여러 기술들로 헌터를 압박해나갔다.

각종 수플렉스와 슬램, 서브미션 기술의 물 흐르는 듯한 향연.

사람들은 계속해서 당하고 있는 헌터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Tiple-H! Tiple-H! Tiple-H! Tiple-H! Tiple-H! Tiple-H!]

하지만 헌터가 나에게 태그를 시도하려고 할 때마다 오튼이 반칙을 써서 계속 방해를 했다.

관객들이 레볼루션에게 보내는 야유는 점점 커졌다.

러셀이 아무리 멋지고 화려한 기술로 이목을 집중시켜도 나오는 것은 야유일 뿐이었다.

[You S-ck! You S-ck! You S-ck! You S-ck! You S-ck!]

하지만 그런 반응은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방식대로 헌터를 제압해나가는 러셀.

역시 녀석을 레볼루션에 가입하도록 한 것이 정답이었다.

턴 힐을 하고도 러셀은 그대로였다. 오히려 악역 스타일의 비겁한 행동을 안 하는 게 맞았다.

왜냐면 그런 짓은 나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말인즉슨 러셀의 경기는 전보다 더 올바른 스타일이 되었고, 야유를 받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따라서 악역으로서 확실하게 빌드 업을 해나가는 동안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있어줘야만 했다.

그게 바로 레볼루션.

러셀은 그들과 한데 묶여 경기 내내 큰 야유를 받을 수 있었다.

경기가 과열되던 중, 로프 반동 이후, 기습적인 엘보가 터졌다.

[Yeeeeaaahhhh!]

드디어 헌터의 반격이 나왔다.

자리에서 일어선 사람들이 태그를 기대하며 챈트를 시작했다.

‘Yes’와 ‘SIN’이 번갈아 이어지며 헌터가 내 쪽으로 기어왔다.

러셀도 순간 큰 충격을 받아 오튼을 향해 기어가고 있는 상태.

분위기가 최고조에 이르렀고, 러셀이 먼저 태그를 함으로서 순간적으로 위기감이 조성되었다.

하지만 오튼이 링 위로 달려 나옴과 동시에 뛰어오른 헌터가 내 손바닥을 강하게 후려쳤다.

쫘악!

“태그!”

[Yeeeeeaaaaaaaaghhhhh!!]

심판의 선언과 동시에 최고조에 이르렀던 분위기가 폭발했다.

아예 탑 턴버클 위로 올라간 나는 링 중앙까지 달려 나온 오튼을 향해서 힘차게 뛰어올랐다.

탑 로프 보디 스플래시.

투콰앙-!

몸의 전면부로 상대를 들이받는 호쾌한 기술. 그것을 시작으로 나는 곧장 달려 나온 러셀까지 쓰러뜨리며 링을 완벽히 정리했다.

거기다 방해를 위해 링 안으로 들어오려던 플레어의 안면을 후려치고, 오튼의 위에 올라타 주먹을 날리며 마구잡이로 날뛰었다.

헌터의 리드와 레볼루션의 득세로 실컷 지루함을 맛봤던 관객들이 크게 환호성을 내질렀다.

* * *

멋진 브롤러 파이팅 끝에, 신이 오튼을 커버하면서 메인이벤트는 멋지게 마무리되었다.

이번에 새로 계약한 사무실에서 그걸 보고 있던 티파니는 멋진 경기에 박수를 보냈다.

헌터가 경기를 이끈 초반부는 영 별로였지만 그로 인해 경기 종반, 핫 태그가 이루어졌을 때의 쾌감이 훨씬 더 커졌다.

앞으로 나온 신은 관객들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능력을 마음껏 보여주었다.

각본이 잘 풀려서 다행이었다.

‘거기에 부상도 입지 않았고.’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했다.

미국 뉴욕의 한 사무실.

아직 새 건물의 냄새가 남아있는 와중, 티파니 옆에 있던 작은 소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겼다아~!”

스눕-덕의 사촌인 메르시였다.

티파니는 쓰게 웃었다.

분명 대륙 반대편에서 살고 있는 소녀와 왜 사이좋게 월요일 밤의 버닝콩을 시청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간단했다.

“메르시, 재밌었니?”

메르시를 무릎에 앉혀 두고 있던 스눕-덕이 웃으며 말했다.

“응! 삼촌!”

“그래, 좋아. 삼촌이랑 언니랑 할 이야기가 좀 있는데. 나가서 트위즐러라도 하나 먹고 있을래?”

“알았어! 삼촌!”

활짝 웃은 메르시가 그대로 사무실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이로서 분위기를 애써 잡아주고 있던 요소가 사라진 셈이었다.

‘저런 꼬마가 사라지는 게 이토록 아쉬울 줄은 몰랐는데.’

티파니는 어색하게 웃으며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스눕-덕이 입을 열었다.

“저 애가 이번에 홈스쿨링을 시작하게 되어서 말이야.”

“……우연이네요. 저도 홈스쿨링으로 학업을 끝마쳤는데.”

“그러는 김에, 저 아이의 꿈을 위해서 좀 지원을 해주고 싶어.”

“그래서 절 찾아오셨나요?”

“그런 셈이지.”

“……호의로 도와드리기에는 너무 큰 일이 아닐까 싶은데요.”

“이번에 너희 쪽에서 계약하려는 친구 하나 있잖아?”

“…….”

올 게 왔군.

티파니는 침을 삼켰다.

이번에 신이 말을 해서 계약을 진행해보려던 가수 하나가 바로 스눕-덕 쪽의 인물이었다.

그로 인해 열이 받은 그가 곧바로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다.

“에이전시를 만들었다고 듣기는 했는데. 이렇게 사람 뒤통수를 먹일 줄은 또 몰랐어.”

이를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티파니는 입안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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