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167화 (167/634)

167.

레볼루션의 네 사람이 링에 나온 뒤, 러셀이 마이크를 쥐었다.

그는 스스로 생각했던 스스로의 열등감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사실, 처음에는 레볼루션의 이 요상한 음악이 듣기 싫었어.]

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테마. 혁명의 시간이 왔음을 상기시키는 거라고 했지.

[하지만 써보니 확실히 좋군. 내 혁명에 정말 걸맞은 음악이야.]

[Boooooooooo……!]

말도 안 되고, 이해조차 할 수 없는 소리에 야유하는 관객들.

하지만 러셀은 개의치 않았다.

저런 뻔뻔함.

자신의 신념에 추호도 의심의 여지는 없다고 생각하는 게 바로 러셀이란 남자의 매력이었다.

[그래서 이들과 함께 하기로 결의한 것이지. 닉 플레어라고 하는 좋은 멘토도 있으니까.]

이들은 각각 그렉과 헌터라는 과거를 딛고서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하지만 그 방식은 좀 달랐다.

러셀은 그렉의 유지를 이어받은 나를, 그리고 레볼루션은 셋이 헌터를 직접 상대하는 형태였다.

[나는 하트라는 이름을 이 회사에서 다시 쓰겠어. 그렉 하트의 마지막이 너무도 추잡했으니까.]

야유가 좀 더 강해졌다.

아니, 거기에 더해 관객들은 그렉의 이름을 외쳐대기 시작했다.

[Grek Hart! Grek Hart! Grek Hart! Grek Hart! Grek Hart!]

[얼마든지 외쳐봐! 나는 이 회사에서 그렉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킹 오브 하트가 될 테니까!]

자신의 의지를 보이는 러셀.

그는 나에게 패배한 그렉을 부정하고 자신이 킹 오브 하트가 될 것임을 당당하게 선언했다.

물론 내가 보기에 그것은 단순히 열등감의 발로에 불과했다.

[너희 모두……!]

그 헛소리를 끊어내며 내 음악이 경기장 안에 울려 퍼졌다.

[Yeeeeeeaaaaahhhhhhh!]

관객들이 환호성으로 나의 난입을 환영했다.

입장로 위로 내가 나타나자 환호성은 마치 오디오의 볼륨을 올린 것처럼 훨씬 더 커졌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에게 반응하지 않고 곧장 링으로 올라갔다.

지금 나는 러셀의 헛소리를 듣고는 잔뜩 열이 오른 상태였다.

링 위에는 레볼루션의 멤버들이 전부 모인 상황이었으나 나는 그런 건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러셀의 손에 쥐어져 있던 마이크를 빼앗는 도발까지 한 나는 그대로 마이크워크를 시작했다.

오튼이 앞으로 나섰으나 가볍게 제지한 러셀은 링 아래에서 마이크를 받아 나와 마주보았다.

나는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킹 오브 하트라고? 러셀?”

“그래, 불만이라도 있나?”

“아니, 불만은 없어. 사실, 너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것 같아.”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는 왕이라고 해도 왕은 왕이겠지. 혼자서 그렇게 생각하라고.”

관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거기에 표정이 잠시 굳어진 러셀은 이윽고 감정을 드러냈다.

분노.

“넌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야.”

“내가? 운이 좋았다고?”

“그래, 내가 없었기 때문에 네게는 과분한 걸 가지게 된 거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군.”

“그게 사실이야. 내가 있었다면 지금의 넌 존재하지 않았어. 왜냐고? 나는 너를 이겨봤으니까.”

러셀의 실제 감정이 느껴졌다.

악역으로서 뒤틀리고 과장되었지만 그것은 확실히 러셀이 나를 보고서 느낀 감정 중 하나였다.

그렇기 때문에 캐릭터에 대한 확실한 충실성이 느껴졌고, 나 역시도 할 말이 무척 많아졌다.

“내가 멋진 삼촌을 은퇴시켜서 방에서 베개 좀 적셨나본데.”

“전혀 아니지. 오히려 화가 났어. 그리고 깨달았지. 내가 킹 오브 하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러셀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뭔가 지금 네가 착각하고 있는 게 있는데. 일단, 그렉 하트는 절대 한심한 남자가 아니야.”

내 말에 호응하는 관객들.

환호와 ‘그렉 하트’라는 챈트가 번갈아 쏟아졌다. 나는 선역으로서 그런 반응을 좀 더 유도했다.

[Grek Hart! Grek Hart! Grek Hart! Grek Hart! Grek Hart!]

“그리고 싸워봤던 내가 보증하지! 그는 마지막 순간에 정말 질투가 날 정도로 멋졌다고!”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실제로 그러했다.

나도 저런 은퇴를 할 수 있을까.

순간 경외감이 들었을 정도였다.

레슬 임페리움에서의 그렉은 벨트를 걸치고 걸어 나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을 울게 만들었다.

그의 20년은 헛되지 않았다.

최악의 상황도 겪었고, 한때 회사에서 버림받기도 했지만 끝까지 자신의 커리어를 수행해냈다.

마지막 순간에 그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큰 영광이었다.

챔피언 벨트는 결국 돌고 돌기 마련이었지만 그렉 하트를 은퇴시킨 것은 오직 나 하나뿐이었다.

변하지 않을, 바뀌지도 않을.

불멸의 기록.

그렇기에 난 그걸 내 자부심으로 여겼고 반대로 부정하려는 러셀에게는 큰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팬들의 반응이 내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기에 굳이 분노를 드러낼 필요는 전혀 없었다.

2만이 넘는 사람을 등에 업은 나는 레볼루션의 네 사람을 앞에 두고도 의기양양해 대답했다.

“이들은 아니라고 하는데.”

“…….”

“러셀, 우리 한번 솔직히 말해보자고 넌 지금 네 삼촌의 유지를 잇지 못해서 화가 난 거잖아?”

나는 곧바로 자기주장을 끝마친 러셀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그러니 그렉을 부정하는 것 이외에는 내가 세운 업적을 깎아내릴 수가 없는 거지. 안 그래?”

“네가 뭘…….”

“킹 오브 하트니 뭐니, 레볼루션이라며 혁명을 꿈꾸는 것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칭호지만.”

나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는 헌터를 잡았을 때도 그랬고, 그렉을 은퇴시켰을 때도 그랬고. 말하자면 왕 시해자라고?”

킹 슬레이어.

그 말을 입에 담자 우리 두 사람의 캐치프레이즈가 완성되었다.

킹 오브 하트와 킹 슬레이어.

지금의 상황을 적절하게 표현한 단어의 등장을 들은 사람들이 곧바로 그걸 챈트로 이어나갔다.

[King Slayer! King Slayer! King Slayer! King Slayer! King Slayer!]

대중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 왕과 이미 인정을 받은 왕 시해자.

흥미로운 구도였다.

관객들의 호응은 점점 커졌고,

그런 가운데 갑작스러운 러셀의 습격이 이어졌다.

퍼억-!

안면을 맞고 나가떨어진 나를 그대로 레볼루션 멤버들이 덮쳤다.

“크윽……!”

바닥에 쓰러진 채 짓밟혔다.

그런 와중, 뒤쪽에서 어슬렁거리며 걸어온 바티스타가 날 들어 반대편으로 힘차게 내던졌다.

콰앙-!

[Booooooooooooooooo-!]

야유를 보내는 관객들.

레볼루션 멤버들은 그에 아랑곳 않고 나를 계속해서 짓밟아댔다.

나는 팔다리를 들고 몸을 비틀며 안전하게 공격을 받아냈다.

사람들의 야유는 점차 거세졌고 그럴수록 날 끝장내기 위한 레볼루션의 공세도 더 심해졌다.

[Booooooooooooooo-!]

야유의 절정에서 트리플H의 음악이 분위기를 뒤집어 놓았다.

녹색 라이트에 물드는 경기장.

관객들이 환호와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트리플H가 링 위로 달려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반격이 시작되었다.

* * *

헌터의 도움을 받아 링 위에서 레볼루션을 몰아낸 우리는 일을 마치고 백스테이지로 돌아왔다.

락커룸으로 돌아와 땀을 닦고 있자니 미리 찍어둔 백스테이지 세그먼트가 흘러나오는 것이 보였다.

레볼루션과의 싸움을 끝마치고 락커룸으로 돌아온 헌터의 앞에 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상으로만 생각했던 태그의 성립에 사람들이 큰 환호를 보냈다.

[이게 웬일이래? 그쪽이 나를 다 돕고 말이야.]

[…….]

[지난주에는 내가 도와주었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레볼루션에 맞서서 힘을 합쳐보자는 거요?]

[확실히 해두지. 애송이.]

헌터가 날 돌아보았다.

193cm의 키.

프로필 상으로는 130kg이었지만, 실제로는 대략 110kg 정도.

마치 출항을 위해 바람을 머금은 돛처럼 크게 벌어진 광배근.

키 188에 100kg 정도인 나와 나란히 섰을 때에도 충분히 거한 같이 보이는 체격.

그것이 트리플H였고.

그런 그가 분노를 드러낼 때의 포스는 장난이 아니었다.

[난 너에게 지지 않았어.]

[졌는데.]

[그건 온전한 내가 아니었지. 기억해둬라. 이 게임을 지배하는 남자가 드디어 돌아왔다는 걸.]

[그래서 뭐 어쩌자고.]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원한다면 여기서 그런 변명으로 넘어갈 수 없게 만들어줄까?]

나는 헌터와 마주 보고 섰다.

입사 당시만 해도 까마득하게 위였던 헌터와 나의 위상은, 현재 꽤나 좁혀진 상태였다.

그 거의 대부분이 내가 그렉 하트를 은퇴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헌터와 마주보고 서있는 게 전혀 어색하지가 않았다.

일촉즉발의 상황.

헌터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지금의 넌 아니지.]

그가 날 인정해주었다.

쇼에서 그가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몇 년 만의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사실 악역이라는 이유로 그랬었기는 하지만.

[내 뒤를 부탁해도 될까?]

[공공의 적을 앞에 두고 잠시 힘을 합친다는…… 그런 거로군.]

나는 내밀어진 헌터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그 순간, 경기장 쪽에서 어마어마한 환호가 들이닥쳤다.

‘나쁘지 않군.’

벽에 기대어 서있던 나는 셔츠를 갈아입을까 하고 잠시 생각했다.

이따가 또 메인이벤트 경기에서 일을 해야만 하는데, 땀으로 젖어서 완전히 엉망진창이었다.

‘역시 경기복을 바꾸기로 한 것은 꽤나 잘한 선택 같군.’

외주를 맡긴 우리의 경기복은 다음 주말에 있을 페이퍼뷰를 목표로 삼고 제작이 진행 중이었다.

반응도 잘 나오고 있는데다가 선수들 간의 케미도 맞으니 환상적인 결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내 생각은 어깨를 툭 때린 남자에 의해서 변하게 되었다.

‘이놈이 있었지.’

“잠깐 나와 봐라.”

트리플H였다.

여섯 명이 회의 끝에 납득하고 나온 각본이었지만, 그는 매번 관객들의 반응을 이유로 들어 각본을 수정하려고 시도했다.

자신이 좀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쪽으로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서 전과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현실의 그도 나를 어느 정도 인정했다는 점이었다.

복도의 조용한 한 구석.

땀을 털어낸 헌터가 약간 지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이제 그도 슬슬 40대가 되어가는 나이였다. 많이 힘들겠지.

그런데도 아직까지 욕심을 부리는 게 그의 가장 큰 단점이었다.

“어떠냐. 오늘 반응.”

“글쎄요. 예상대로였죠.”

“우리 반응이 죽여주던데. 오늘 메인이벤트에서 사용할 각본은 아무래도 좀 아닌 것 같지 않냐?”

“아뇨, 써야 합니다.”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좀 더 모두에게 나은 방법으로 가는 게 어때? 지금 건 그다지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할 것 같은데.”

“아뇨, 이거면 충분합니다.”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너무 아깝게 생각하지 말라니까요? 장기적으로 스타가 나와야 이 판이 훨씬 더 커지는 거라고요.”

“과연 바티스타가…….”

“제가 보증합니다.”

“놈은 나이가 너무 많아.”

“그래도 확실히 매력적인 선수죠. 거기다 당신 편이고요.”

내 지적에 헌터는 더 이상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오늘 메인이벤트에서는 헌터와 오튼의 싱글 경기가 벌어질 예정이었다.

그전에 나는 러셀과 백스테이지 세그먼트로 난동을 부리며 빠졌다가 마지막에 등장할 예정이고.

그리고 마지막 순간.

“알겠죠? 링 밑의 플레어가 오튼에게 반칙 도구를 건네려는데 바티스타가 그걸 막는 겁니다.”

거기에서 지금껏 쌓아온 바티스타의 특별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 각본에서 바티스타는 다른 레볼루션의 멤버들과는 다른 동기로 헌터를 배신한 것이었다.

“바로, 당신과 정정당당하게 싸우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죠.”

“……그렇군.”

“당신이 그걸 알고 바티스타에게 자신을 넘어서보라고 말하는 거고. 둘 다 선역으로 부킹하는데다 아주 멋진 각본이잖아요?”

전생의 바티스타가 떠올랐던 각본과 코어는 완전히 똑같았다.

서로를 정말로 감정적으로 증오하며 싸우고 있는 나와 러셀.

혹은 헌터와 레볼루션과 달리.

그 안에서 혼자만 특별한 모습을 보이는 바티스타는 분명 대중들에게 큰 반응을 얻을 터였다.

“하지만 말이야.”

이렇게 설명했음에 헌터는 쉽사리 물러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만약 오늘 바티스타가 큰 반응을 얻지 못하면 어쩔 거야?”

“……내기라도 할까요.”

“뭐?”

“오늘 만약에 생각한 것 이상의 반응이 나온다면 8월까지 각본에서 절대로 토 달지 마세요.”

“그건, 어떻게 정하지?”

“플레어 스텝으로 정하죠.”

플레어 스텝.

닉 플레어가 흥이 날 때 사용하는 특유의 발 구름 동작이었다.

플레어는 관객들의 반응이 좋을 때 꼭 백스테이지로 돌아와 한 번은 이 스텝을 밟고는 했다.

“좋아. 어디 해보지.”

“플레어가 스텝 밟으려고 하면 방해하지 말고 놔두는 거예요.”

“너나 유도하지 말라고.”

트리플H가 씨익 웃었다.

절대로 바티스타 따위가 그런 반응을 얻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뭐어.

그 잠재력을 익히 알고 있는 나는 그저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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