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170화 (170/634)

170.

며칠 뒤.

데이브 렐처는 자신의 사무실 의자에 앉아 그 남자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신이었다.

한 차례 전화로 이야기하고 난 뒤, 그에게서 나중에 연락을 주겠다는 일방적인 메시지가 왔다.

하지만 이후 신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그렇게 며칠이 지나 다시 월요일이 찾아왔다.

자신과 WWF의 비밀스러운 소통 창구가 무너졌으나, 렐처는 그보다는 사실 기대감을 느꼈다.

과연 어떤 제안일까.

처음에 전화를 했을 때, 신은 분명 자신에게 이처럼 이야기했다.

[내가 각본 문제로 분쟁을 빚고 있는 선수는 러셀이라고 해줘.]

갑작스러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말 한마디에서 렐처는 의도를 단숨에 읽어냈다.

확실히 그렇게 현실의 일인 것처럼 각본을 포장하면 팬들은 스토리에 더 몰입을 할 터였다.

하지만 이런 제안을 받은 건 처음이라 솔직히 좀 당혹스러웠다.

뭐라고 대답하지?

거절을 해야 하나?

‘완전히 내부자가 되는 거잖아.’

이윽고, 길게 한숨이 나왔다.

기다리는 것도 지쳤다.

렐처는 잠시 주변을 살폈다.

그가 10대 후반부터 40대 중반이 된 지금까지 일해 온 작은 사무실은 완전히 낡아빠진 곳이었다.

나무 바닥은 삐걱거렸고, 페인트칠이 벗겨진 창문은 기름칠을 해도 여는 게 무척 불편했다.

거기다 정리도 하지 않아 바닥 곳곳에는 서류가 굴러다녔고, 그 위로는 뽀얀 먼지가 쌓였다.

거기다 담배로 인한 너구리굴 현상까지도 일어나 상당히 우울한 장소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과 닮아있다.

렐처는 머리가 벗겨진데다가 깡마른 전형적인 미국의 백인 중년이었다.

학창 시절에도 딱히 무언가에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던 너드.

그런 그가 프로레슬링이라는 컨텐츠에 빠져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지역 레슬링.

닉 플레어를 아이콘으로 각 지역마다 있던 단체들이 협력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던 시대.

그런 가운데, 세계 최초의 프로레슬링 전문지를 발간한 데이브 렐처는 꽤나 큰 명성을 얻었다.

그것이 번듯한 직업이 되어 아내와 두 딸을 얻게 되었다.

모두 프로레슬링의 덕이었다.

하지만 그는 바트 맥센을 위시로 한 WWF의 메인 스트림에는 항상 비판적인 견지를 보였다.

그들…… 아니, 바트 맥센이라는 남자는 프로레슬링이라는 문화를 왜곡시켰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수많은 경쟁자들을 짓밟으며 업계 자체를 황폐하게 만들고 말았다.

하지만 WWF가 현재 프로레슬링 업계의 유일무이한 메이저라는 사실은 절대 부정할 수 없었다.

따라서 렐처로서는 기자의 입장에서 그들을 계속 비판해왔다.

물론, 바트 맥센은 그러한 비판에는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지만.

회사는 계속해서 성장했고 프로레슬링이라는 문화를 메이저 중 하나로 끌어올렸기 때문이었다.

렐처는 비판을 쏟아내고.

WWF는 듣는 척도 않는다.

바로 그것이 데이브 렐처라는 한 기자와 WWF가 수십 년이 넘게 맺어온 이상한 관계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 렐처는 굉장히 묘한 현상과 맞닥뜨렸다.

바로 자신이 한 남자가 연관된 일에 대해서는 어린아이처럼 프로레슬링을 즐긴다는 것이었다.

그게 바로 신이었다.

그는 최근 들어 시작한 씹는담배를 질겅거리며 몇 년 전의 일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대략 3년 전인가?

GCW에 들어온 직후부터 렐처는 그가 달라졌음을 알아차렸다.

바로 신이었다.

인디 시절에는 범프만 좋아하고 기본기는 없는데다가 인종적인 이유로 크게 주목하진 않았는데.

사람이 변했다.

모든 게 나아졌다.

외모, 프로모 능력, 레슬링 실력, 그리고 백스테이지에서 간간히 들려오는 소문까지도 말이다.

그의 GCW 커리어는 정말 환상적이었고, 그래서 좀 아쉬웠다.

그림이 뻔히 보였으니까.

위로 올라가서 바트에게 동양인이라며 한 줌의 관심도 못 받고 자버로 굴려지다 망할 미래가.

하지만 신은 렐처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터프한 남자였다.

거기다 지능적이었다.

메인 쇼에서 렐처는 GCW 시절보다 정보를 더 얻을 수 있었다.

그쪽에는 아예 정보원을 바꿔가면서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들은 정보들은 매번 렐처를 황당하게 만들었다.

신은 마치 이 회사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도저히 신인의 발상이 아니다.

아니, 그 어떤 레슬러도 이런 발상을 할까 싶을 정도의 치밀함.

그렇게까지 해야 그 재능이 빛을 발할 수 있다는 사실은 어딘가 좀 안타깝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한 부분이 성공적이었다.

바로 사람들의 반응.

어쩌면 우리 모두가 미디어가 주고 있던 편견에 빠져서 몰랐던 게 아닐까 싶었다.

미국 사회는 대상이 충분히 매력적이기만 하다면 인종 같은 건 결국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게 아닐까.

‘아니, 그건 비약이겠지.’

그냥 신이 너무 뛰어난 거다.

인종의 벽을 부술 정도로.

그런 그의 행동은 미래에 마치 이 땅에 첫 발을 내디딘 콜럼버스와도 같이 여겨질 터였다.

그렇기에 렐처는 신의 제안을 받아들여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딱 잘라 거절하지 못했다.

왜냐면.

업계에 소속된 사람으로부터 최초로 받은 제안이었으니까.

바로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렐처는 곧바로 통에 씹는담배를 뱉어버리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신입니다.]

사람을 며칠 간 떨며 기다리게 한 주제에 신은 무척이나 여유로운 목소리였다.

[일단, 지난번에 무례하게 군 것은 죄송했습니다.]

“…….”

그럴 것이라고 어렴풋이 느끼기는 했으나 실제로 사실임을 알자 머리에 띵한 감각이 일었다.

이제야 확실히 느꼈다.

‘신’과, 지금 수화기 너머에 있는 ‘남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언제나 당당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와일드한 신과.

[듣는 귀가 많았거든요.]

지금 냉정하게 자신의 발언을 사죄하는 그는 전혀 달랐다.

그렇기에 묻고 싶었다.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내가 정말 WWF에 붙은 기생충이라고 생각하나?”

[전혀 그렇지 않죠.]

유쾌할 정도로 시원한 부정.

렐처는 어쩐지 목 뒤쪽이 서늘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물론, 캐릭터를 연기하는 프로레슬러가 현실에서도 똑같은 성격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에서 ‘자신의 캐릭터’를 이용하는 경우는 처음 봤다.

그렇기에 렐처는 지금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대가 보통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파격적인 인간이다.

이쯤 해야 인종 사이에 드리운 벽을 부술 수 있는 거구나 싶었다.

그것을 깨달은 렐처는 깊은 고양감이 몸에 감도는 걸 느꼈다.

자연스럽게 이번 제안을 거절해야 한다는 생각은 뇌에서 사라졌다.

어쩌면 WWF를 비판하면서도 내부 정보를 폭로하며 먹고사는 삼류 신문 기자로서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메인 스트림의 가장 핫한 선수로부터의 관심에 간이며 쓸개며 모조리 내줄 수밖에 없는.

“……러셀과 그쪽이 백스테이지에서 문제가 있는 걸로 해달라고?”

[예, 그 뒤로 조금 더 각본의 디테일이 잡혔습니다. 우리 둘이 ‘샤프 슈터’를 사용하는 걸 가지고 진짜 다퉜다고 말씀해주시죠.]

“뭐?”

[오늘 방송에서 말이죠. 재미있을 겁니다.]

“잠깐, 오늘…….”

렐처는 모니터에 떠올라있는 시간과 날짜를 확인했다.

월요일 11시 23분.

버닝콩의 방영이 끝나고 다크 매치가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전화를 기다리느라 주간 쇼를 보는 것조차 깜빡하고 말다니.

그는 황당한 기분을 느꼈다.

처음 겪는 일이었다.

[라디오 방송 준비도 하셔야 하니 오늘은 이쯤에서 끊죠. 부탁드린 것만 확실히 보도해주십쇼.]

그리고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결국 궁금했던 사실은 하나도 묻지 못했던 렐처는 황당한 기분에 휩싸였다.

하지만 신이 말한 것처럼 일단은 방송 준비를 해야 할 때였다.

* * *

렐처의 목소리가 조금 흔들렸다.

[……일단 방송에 앞서서 지난주 이야기를 하나 정정해야겠어.]

러셀, 오튼과 함께 캠핑 버스에 올라탄 나는 그 이야기를 흑막 같은 기분으로 듣고 있었다.

[신이 바티스타에게 질투를 느꼈다는 건 사실이 아니야. 대신, 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어.]

[뭔데?]

[오늘 방송에서 신과 러셀의 세그먼트가 어땠는지 기억나?]

[물론 나지. 둘이 이번 페이퍼뷰에서 샤프 슈터의 사용권을 걸고 싸우기로 했잖아?]

[어, 어. 그래.]

역시 이 양반, 전화를 할 때 느꼈는데 방송을 안 본 모양이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상황을 설명해달라는 식으로 넘기고 말이다.

[왜 그래?]

[사실 러셀이 샤프 슈터의 사용권에 관해서 신과 분쟁을 빚으면서 시작된 각본이라고 하던데.]

[음? 신의 샤프 슈터는 러셀에게 배운 게 아니었나?]

[이제는 뭐 그렉 하트를 이으면서 가져온 기술이 되었지.]

[허 참, 이거 굉장한데?]

[그, 그래?]

렐처가 되물었다.

[안 느껴져? 저런 현실의 요소를 각본으로 쓸 생각을 하다니! 정말이지 미친 자식들이로군!]

[현실의 일이긴 하지.]

[그래! 하지만 뭔가 위험하게 느껴지는군. 둘이서 정말로 샤프 슈터를 두고 다툰다니. 자칫하다가 정말로 싸우는 게 아닐까.]

[그게 신이 의도한 바겠지.]

[응?]

[아무것도 아니야. 일단 다음 주제로 넘어가도록 하지.]

순진한 동료의 대답에 제대로 말도 못하고 앓는 렐처.

바로 저 반응이 우리가 기대한 대로였다.

나는 의자에 주저앉아있던 러셀을 돌아보며 물었다.

“러셀, 괜찮지?”

“물론이지. 신.”

우리는 이들의 보도를 통해 샤프 슈터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는 러셀의 캐릭터를 좀 더 다양한 방향으로 표현할 생각이었다.

프로레슬링의 캐릭터를 현실에서도 똑같이 연기하는 ‘케이페이브’를 저들이 대신 수행해주고 있다는 표현이 적절할 터였다.

“GCW 때와 같은 거라고.”

“내가 바쿠 앞에서 케이페이브를 지켰던 때를 말하는 건가?”

“그래. 그때 정말이지 바쿠도 정말 우리 둘이 다투는 줄 알고 풀어주려고 노래도 부르고.”

“하하하, 장난 아니었지.”

우리는 잠시 과거를 회상했다.

그때와 같은.

하지만 좀 더 커진.

원래부터 ‘해볼까’ 생각했었지만 그 계기가 생각나지 않아서 망설이던 부분이었는데.

생각보다 괜찮을 것 같았다.

렐처의 매거진은 일반인들이라면 몰라도 마니아나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꽤나 유명했다.

특히나 프로레슬링 관련 칼럼의 집필자나 잡지 기자들도 한 번씩은 확인하는 게 바로 렐처의 기사였다.

그들의 소스를 바탕으로 2차 기사가 나오고, 점점 미국 내에서 우리 의도대로 이야기가 퍼지면.

사람들은 우리 두 사람의 싸움에도 깊이 몰입해줄 터였다.

게다가, 이번에는 이것 하나였지만 다음 주가 되면 또 다른 소스를 사용해도 좋을 터였다.

우리가 쓰는 각본이 현실을 교묘하게 비튼 것처럼 사용할 수 있는 소스는 엄청나게 많았다.

“그런데, 렐처가 계속해서 우리 거래를 받아들일까?”

“분명히 그럴 거야.”

상황이 반대로 된 셈이었다.

WWF 내부에 정보원을 두고 실컷 뽑아먹었던 렐처가 이제 반대로 내 정보원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서로가 이긴다는 점에서 거래는 확실히 매력적이었다.

“아예 내가 정보원이 되어주는 ‘척’을 해도 되겠지?”

“척?”

“그래, 돈 안 내고 쉽게 정보를 받아가는 것 같지만…… 그조차 우리가 조작할 수 있단 거야.”

“악마적인 발상이군.”

“나한테 걸리고 싶지 않았으면 내 이야기를 하지 말던가.”

새침하게 대답한 나는 그대로 화제를 다음으로 넘겼다.

“그보다, 넌 정말 괜찮은 거지?”

“샤프 슈터를 넘겨주는 거?”

“그래, 난 여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고 싶은 기분이 들거든.”

러셀이 시원하게 웃어 보였다.

그 말대로, 녀석은 이번 페이퍼뷰에서 나에게 패배하며 샤프 슈터를 쓰지 않을 예정이었다.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싶었는데.

아무래도 생각하고 있는 꿍꿍이가 있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신기술도 개발했거든.”

“응?”

고개를 갸웃거린 나는 옆에서 쿨쿨 자고 있던 오튼을 깨웠다.

“으어, 무야……?”

무슨 기술인지 궁금했고.

그러므로 교보재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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