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172화 (172/634)

172.

링 위에 올라간 나는 곧바로 챔피언으로서 과시를 시작했다.

러셀과 마주 보고 서서 벨트를 들어올리자 관객들의 열화와 같은 환호를 내게 보내주었다.

물론 그걸 보고 있는 러셀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사실, 화가 날 것이다.

자신의 능력과는 별개로. 그동안 쌓아온 것은 전혀 상관없이.

녀석은 날 이기고 싶어 했다.

내가 더 잘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물러서지 않으려고 들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런 러셀에게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가졌다.

하나는 함께 멋진 경기를 만들 수 있는 믿음직한 동료라는 것.

다른 하나는 선역 탑 독으로서 격침시켜야 할 적이라는 것.

그런 두 가지가 결합된 상태에서, 나는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링 벨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땡땡땡-!

일단 첫 번째 스팟이다.

우리는 으레 큰 경기에서 그러듯이 ‘마인드 게임’을 펼치며 관객들에게 보여줄 생각이었다.

우리의 바뀐 경기복에 대해.

러셀을 보며 링 위를 크게 돌던 내가 이윽고 자리에 우뚝 섰다.

러셀 역시도 멈췄고, 심판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관객석을 돌아보았다.

여기서는 좀 장난스럽게.

러셀을 멍청이 취급하며 자연스럽게 경기 복장이 바뀌었음을 어필하는 것이었다.

탑 턴버클 위로 올라간 나는 그대로 발을 올리고 바뀐 경기복을 관객들에게 과시해보였다.

[Waaaaaaaaaaaaaghhh!!]

환호를 보내는 관객들.

사실 이 판토마임을 준비하는데 나는 꽤나 공을 들였다.

사람들에게 동작만으로 ‘나 바지 바꿨어!’라고 말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로프 너머로 부츠와 바지를 과시하는 형태로 그것을 겨우 알릴 수가 있었고.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사람들이 반응을 보내주었다.

검은 바지는 스판 재질이 아니고 가죽에 비닐을 덧대 만들었다. 덕분에 튼튼하고 잘 늘어났다.

부담스럽게 달라붙지는 않으며 흰색 실로 라인을 그린 바지.

엉덩이와 허리 쪽 옆단에 내 로고가 그려져 있는 게 특징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뜬금없이 옷 자랑(?)이나 하고 있으므로 러셀이 화가 난 것은 당연했다.

“신-!”

녀석이 내 이름을 부른다.

그것이 신호였다.

탑 턴버클을 밟고 뛰어오른 나는 그대로 뒤쪽으로 한 바퀴 회전하며 멋지게 링에 착지했다.

[Oooooooooohhh!]

깜짝 놀라는 관객들.

나는 뒤쪽에서 습격해오던 러셀을 보지도 않고 피한 것이었다.

덕분에 턴버클에 부딪힌 녀석은 신음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

나는 곧바로 그런 녀석의 엉덩이를 힘차게 걷어찼다.

“꺼흑?!”

놀라며 펄쩍 뛰어올라 2단 로프를 밟고 올라가는 러셀.

녀석 역시 경기복이 변했으므로 거기에 대해서 말해야만 했다.

내가 비웃듯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관객들이 야유로 보답했다.

[Booooooooooooooo-!]

우리의 현재 상황이 어떤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시퀀스였다.

분노한 러셀이 아래로 내려왔고 곧바로 ‘싸움’이 시작되었다.

관객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이 세 번째.

다시금 시작된 원한 관계.

녀석과 나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연달아 주먹을 주고받았다.

뺨을 후려치고 이마를 긁어내고 머리를 쥐어박고 목을 쳐내고.

빈틈을 노리고 날아든 러셀의 발길질을 쳐내고, 나는 그대로 녀석의 다리를 팔꿈치로 쳐냈다.

찹 블록.

콰앙-!

러셀의 몸이 곧바로 넘어졌다.

쪼그려 앉은 내 어깨 위로 러셀의 다리가 올라와있는 상태였다.

나는 거기서 곧장 다리를 붙잡고 꺾어 샤프 슈터로 연계했다.

“크윽……?!”

러셀이 경악했다.

관객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석적인 방식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예상 밖의 기술 시전이 나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나는 팔로 러셀의 다리를 엮은 뒤 내 다리를 넣고 일어서는 형태로 샤프 슈터를 걸어버렸다.

기술이 완성되는 과정까지 넋을 잃고 내 모습을 바라보던 관객들이 이어 환호를 보내주었다.

[Uoooooooooooooohhh-!]

아니, 감탄에 가까웠다.

러셀의 다리를 단단히 붙잡고 스쿼트 자세로 하체를 내린 나는 그대로 팔에 힘을 주었다.

“끄아아아악-!”

비명을 내지른 러셀이 몸을 뒤틀며 저항했으나 나는 단단히 자세를 취하고 서서 버텨냈다.

관객들이 깊이 몰입해 바라보았고 심판의 러셀의 의사를 물었다.

물론, 이 시점에서 경기가 끝나는 건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러셀과 내가 샤프 슈터의 사용권을 두고 다퉜다는 정보 하나가 몰입감을 더해주었다.

이 경기에서 샤프 슈터는 현실과 각본, 양쪽 모두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린 그 요소를 적극적으로 사용해 경기를 풀어나갔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러셀이 이내 내 다리를 붙잡고 잡아당겼다.

거기에 이끌려 중심을 잃고 쓰러지자 이제는 반대로 러셀이 내 다리를 꺾으며 벌떡 일어났다.

아니, 정확히 아슬아슬한 순간 나는 곧바로 기술을 빠져나왔다.

긴장이 흘렀다.

잠시 마주 본 우리는 지체하지 않고 경기의 속도를 높여나갔다.

단숨에 팔을 엮어 체인 레슬링을 한 뒤, 러셀이 내 뒤로 돌아들어와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내가 타이밍에 맞춰 뛰어오르자 몸이 뒤쪽으로 부웅 날아갔다.

투콰앙-!

충격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낙법은 완벽했음에도 그 정도였다. 순간적으로 몸에 전류가 흘렀다.

나는 주도권을 빼앗겼다.

경기 내용뿐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랬다. 러셀이 속도를 높여서 나는 순간 거기에 휘말렸다.

“수플렉스.”

나를 일으켜 세운 녀석이 짧게 말을 전하고는 빠른 속도로 기술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쾅-!

“윽?!”

관객들의 반응이 끌어 올랐다.

야유 사이에 감탄사가 섞였다. 그들은 러셀의 탁월한 레슬링 스킬에 점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렇기 때문에, 러셀은 야유를 끌어내기 위한 액션을 취했다.

“뭐야. 겨우 이거야?!”

녀석은 자리에서 일어서는 내 뺨을 기분 나쁘게 툭툭 때렸다.

[Boooooooooooooo-!]

야유를 보내는 관객들.

그런 반응에 분통을 터뜨리며 러셀은 잔뜩 반응을 끌어 모았다.

‘잘하는군.’

이 녀석이 이처럼 악역 연기에 능통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살짝 위기감을 느낄 정도.

오히려 현실에서 좋은 놈이기에 남을 기분 나쁘게 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런 모습을 본 나는 생각했다.

‘속도를 올려볼까.’

이 녀석이라면 내가 최대로 속도를 높여도 받아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화려한 무브는 선역 쪽에서 해야 맞는 거니까.

반격이 이루어졌다.

쫘악-!

슈퍼 킥.

순간적으로 턱을 후려치는 강력한 일격에 러셀이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숨을 몰아쉰 나 역시도 그의 옆에 힘이 빠져 털썩 누웠다.

날카로운 반격에 환호를 보냈던 관객들이 순간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바닥에 엎드려있던 상태에서 양 손바닥을 바닥에 붙였다.

갑작스러운 동작을 보고는 의아해하는 관객들.

이어, 팔에 힘을 주어 바닥을 밀어내며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깨를 툭툭 털어내며 내가 무사한 것을 모두에게 과시했다.

[Yeeeeeeeeeeaaaaahhhhh!]

박수를 치며 좋아하는 관객들.

나는 반응을 더 끌어올리기 위해 러셀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기술 하나가 들어갈 때마다 나오는 환호가 장난이 아니었다.

GCW에서는 정반대로 내가 맞을 때마다 환호가 나왔지만.

어찌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지금의 나는 꽤나 오랫동안 사랑 받는 선역으로서 활약하고 있었다.

러셀은 정반대가 되었고.

그렇지만, 결국 성공을 열망하고 경쟁에서 이기고자 하는 우리의 의식은 전과 변한 것이 없었다.

또한 그 대상에는 서로가 포함되었다. 나는 호흡을 정돈하며 러셀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녀석이 이를 질끈 깨물었다.

* * *

한편, 백 스테이지.

“…….”

“…….”

“…….”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네 사람은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거.”

헌터가 뭔가 말을 하려고 했으나,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했는지 한동안 다시 침묵을 했다.

그리고 신이 탑 턴 버클 위에서 엘보우 드랍을 내리 꽂은 순간.

[탑 로프 엘보우 드랍!]

[신이 완전히 주도권을 가져옵니다!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해설과 챈트가 어지러이 오디오를 수놓고 있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바티스타는 침을 삼켰다.

경외감을 느낄 정도였다.

술집 바운서 출신이었던 바티스타가 보기에는 그렇게 느껴졌다.

러셀의 솜씨를 보고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신은 한술 더 떴다.

그가 무슨 행동을 해도 사람들은 압도적인 환호를 보내주었다.

과연 저런 경기를 제치고 자신들이 세미 메인이벤트를 맡아도 되는 것일까.

헌터의 복귀전이라는 명분이 있기는 했으나, 바티스타는 자연히 긴장이 되는 것을 느꼈다.

신과 러셀이 공방을 주고받으며 계속해서 경기가 이어졌다.

두 사람은 링과 아래를 가리지 않고 제멋대로 활보하며 서로에 대한 원한을 마음껏 풀어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헌터는 결국 마음을 굳히고 여기에 가장 어울리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미쳤군.”

“그래. 걸물이 나왔어.”

“……어느 쪽입니까?”

곧바로 이어진 플레어의 말에 바티스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플레어는 당연한 이야기에 피식 웃었다.

“물론 저 녀석이다.”

“신…….”

“저건 이견의 여지가 없이 천재야. 링 사이콜로지는 마이클스, 기술 구사는 그렉과 같고, 호쾌함은 락콜드를 연상시키는군.”

“그 정도입니까?”

“개인적인 의견이네. 헌터.”

“끄응…….”

“물론, 여기에 있는 모두는 나와 같은 생각을 품고 있겠지.”

플레어가 말한 직후였다.

러셀은 경기가 영 풀리지 않자 심판이 보지 못하는 사이 신의 눈을 찌르는 반칙을 저질렀다.

[아, 저런 비겁한……!]

[영리하다고 볼 수도 있죠! 바로 샤프 슈터로 연결됩니다!]

문제는 그 직후 발생했다.

관객들이 경악했다.

옆으로 돌아가다 멈춰선 신의 머리 위에 러셀의 발이 걸쳐졌다.

[저런 잔혹한 무브가!]

[Booooooooooooooo-!]

하지만 러셀은 개의치 않았다.

[크하아아아아아악!]

샤프 슈터의 개량기.

심드렁하게 경기를 보고 있던 오튼이 간만에 입을 열었다.

“아, 저거 나왔네.”

“……뭔지 알고 있나?”

플레어가 의문을 가지고 묻자 오튼은 허리를 두드렸다.

“러셀이 새로 개발한 기술이에요. 저거 완성시키느라 신하고 둘이서 하루 종일 절 쓰던데.”

“써?”

“교보재로.”

“허, 참.”

플레어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만약 현재 라이징 스타라고 할 수 있는 네 명의 선수를 나란히 놓고 본다면 대강 이러했다.

일단 선두는 시나다.

하지만 그는 현재 신과는 전혀 다른 트랙을 달리고 있었다.

WWF라는 회사에서 안전하게 깔아준, 아주 멋진 포장 도로였다.

그 옆에 있는 신은 자갈길을 맨 발로 달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상황에서도 뒤쪽에 따라오고 있는 선수들을 생각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자기 페이스로 느긋하게 가려는 오튼을 질질 끌고 갔고, 더욱 잘 해내길 갈망하는 러셀에게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시나가 혼자 달리는 건 브랜드가 다른 이유도 크겠지만.

만약 시나가 신처럼 자갈길을 달려도 뒤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있을지 싶었다.

러셀의 새로운 기술은 신의 허리를 위험한 각도로 꺾고 있었다.

하지만 선수로서 봤을 때는 아슬아슬하게 허용될 수 있는 강도의 서브미션 기술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아!]

[러셀이 미끄러집니다……!]

[아직 기술이 완성되지 않은 것일까요! 신의 항복을 받아내기 직전에 기술이 풀어집니다!]

[제기랄! 제 속이 다 시원하군요! 러셀이 반드시 비겁한 수단을 쓴 대가를 치러야 할 텐데요!]

[하지만 승리의 여신은 러셀을 더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직 신은 로-블로의 잔혹한 충격에서 회복하지 못한 것처럼 보입……!]

쫘악-!

[아, 슈퍼 킥!]

해설자가 버럭 소리쳤다.

상황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하지만 지켜보고 있는 네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극적으로 느껴진 나머지 오히려 느리게 보였다.

관객들의 야유가 환호로 바뀌는 과정이 생생히 전달되었다.

러셀이 분노해 신을 일으켜 세울 때까지만 해도 야유였던 것이.

그걸 쳐내고 신이 슈퍼 킥을 먹이자, 관객들의 야유가 삽시간에 환호로 뒤바뀐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시대를 이어받은 신의 피니시 무브는 전보다 더 강화되었다.

러셀이 무릎을 꿇었고, 로프 반동을 한 신이 힘차게 도약했다.

쩌억-!

러셀의 안면에 꽂히는 무릎.

커버가 이어졌고, 심판과 관객들이 다 함께 카운트를 셌다.

1……!

2……!

3……!

땡땡땡!

신의 승리가 결정되는 순간, 마치 메인이벤트가 끝난 것처럼 경기장에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그것을 본 헌터는 씁쓸하게 웃었다.

“망했군.”

아마 이 경기를 보고 있는 모든 선수가 그렇게 생각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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