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고릴라 포지션으로 돌아오자 수많은 사람들이 날 반겨주었다.
“신! 고생 많았어요!”
“수고하셨습니다.”
“최고의 오프닝 매치였어요!”
모두가 나에게 존경을 표했다.
거기에 대답하며 인사를 나누던 나는 가장 안쪽의 자리에 앉아있던 바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늙은 식빵의 테두리처럼 보였다. 사람들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저 양반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끝내주는 경기였으니까.
잠깐 시선이 마주쳤다.
바트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자신의 자존심을 최대한 지키는 한편, 나의 경기를 인정했다.
광고 시간이 이어지는 동안, 다음 경기가 준비될 예정이었다.
적당히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나는 앞장서 안으로 들어간 러셀과 락커룸으로 돌아갔다.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완전히 지쳤다.
뭔가 달달한 것이 먹고 싶다고 생각할 무렵, 숨을 몰아쉬던 러셀이 조용히 주먹을 내밀었다.
‘역시 이 녀석과는 잘 맞아.’
만족스러웠던 경기 내용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녀석의 주먹을 힘차게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수많은 사람을 기쁘게 하고.
회사에서 자신의 가치를 보이고.
동료와 고민하며 이루어낸 결과가 이와 같은 가치를 창출하고.
정말이지 보람찬 일이었다.
거기다 돈도 되고 말이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락커룸으로 돌아가던 내 등을 누군가 손톱으로 확 긁어냈다.
“윽?!”
“……죽일 거야.”
돌아보자 스테이시가 서있었다.
얇은 가운만 입고 있는 그녀가 갑작스럽게 화를 내서,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 입을 열었다.
“예?”
“그런 경기를 오프닝으로 보이면 나는 대체 어쩌라는 건데!”
“어, 다음 경기였던가?”
“그래요! 브라 앤 팬티 매치!”
“…….”
울상이 된 스테이시가 달려들어 나는 그 양팔을 일단 붙잡았다.
그러고 보니 이 시기에 스테이시는 한창 랙다운 소속의 디바인 토니 윌슨과 대립 중이었다.
‘누가 더 섹시한가?’를 주제로 다투면서 남성 팬들의 마음에 불을 지른 것으로 유명했지.
“걱정 말아요. 사람들은 분명 당신의 경기에 저희보다 더 큰 열광을 보내줄 테니까.”
“여자들도?”
“……그건 아니겠지만.”
“키이익!”
괴물 같은 소리를 낸 스테이시가 계속해서 날 때리려고 들었다.
함께 일을 해서 친해진 이후로 스테이시는 가끔 내게 이런 식으로 장난을 치고는 했다.
가끔 거기에 여성으로서의 유혹이 섞여서 조금 곤란했지만.
바로 이렇게 말이다.
“맞아. 오늘 나 경기에서 질 건데, 속옷 잘 어울리나 봐줄래요?”
“……아뇨.”
“에이, 일인데 뭐 어때요.”
“괜찮아, 잘 어울릴 거예요.”
나는 딱 잘라서 이야기했다.
브라 앤 팬티 매치.
말 그대로 서로의 옷을 벗겨 상대의 복장을 속옷만 남기면 이기는 경기였다.
심의 문제나 회사 이미지가 있기에 자주 열리지는 않았지만 매번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디바들도 자신의 미모나 인기를 인정받는 일인데다가 수당도 짭짤해 즐겁게 경기를 수행했다.
단지 스타일이 다를 뿐, 현재의 ‘디바’들은 나름대로 쇼 비즈니스로서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그렇게 스테이시를 달래서 돌려보내자 누군가 등을 툭 때렸다.
순간 찌릿한 충격에 깜짝 놀라며 돌아보자 오튼이 서있었다.
“너 등이 왜 그래?”
“……뭐?”
“스테이시가 심하게 긁었는데.”
러셀의 말을 들은 오튼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뭐?! 스테이시라고?! 너 스테이시랑 그렇고 그런 사이였냐!”
“무슨 헛소리야.”
“이 자식이! 부러워 죽겠네!”
설마, 이 자식도 스테이시처럼 긴장해서 일부러 이러는 건가?
“오튼, 신은 지금 티파니와 만나고 있는 사이잖아.”
“……그랬나?”
아니, 그냥 멍청한 거였군.
“티파니도 좋지. ……대체 왜 너한테 그렇게 멋진 여자들이 계속 꼬이는 건가 모르겠지만.”
“신이면 괜찮지. 자상하고 사람을 잘 돌봐주는 성격이니까.”
“나도 그런데.”
오튼의 말에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 * *
페이퍼뷰는 계속해서 진행되어, 세미 메인이벤트가 찾아왔다.
메인이벤트인 실버백과 크리스 젠코의 WWF 챔피언십의 전.
트리플H와 랜스 오튼의 싱글 경기. 거기에 나는 헌터를 보조하기 위해 함께 경기장에 나섰다.
사실상 메인이벤트보다도 더 큰 관심을 받고 있는 경기였다.
레볼루션에서는 플레어와 바티스타가 오튼과 함께 나왔다.
관객들은 그들에게 아낌없는 야유를 보내 반응을 보여주었다.
고릴라 포지션에 서서 몸을 푼 헌터가 이내 나를 돌아보았다.
“준비됐나?”
“당신의 테마에 맞춰서 함께 입장할 수 있다니. 영광이군요.”
“……가지.”
피식 웃은 그가 자신의 긴 머리칼에 야성미를 더하기 위해 물을 뿌렸다.
그리고 테마가 시작되었다.
[It’s time to play the game……!]
녹색의 조명이 경기장 안을 가득 채웠고 관객들이 일어섰다.
강렬한 메탈 음악.
나는 헌터를 앞장세우고 그대로 경기장으로의 입장을 시작했다.
헌터의 입장 씬은 독특했다.
그는 철저하게 음악에 맞춰 움직였으며 음악의 절정 부분에서 링에 올라 입에 물을 머금고 내뿜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나는 거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금 떨어져서 입장했다.
하지만 그렇게 최대한 스포트라이트를 양보해도, 몇몇 관객들은 헌터의 뒤에 선 날 돌아보았다.
‘이건 어쩔 수 없군.’
피식 웃은 나는 링 위로 오르는 헌터의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팔을 양옆으로 뻗으며 자신의 거대한 몸을 과시한 헌터가 이어 힘차게 허공을 향해 물을 뿜었다.
푸화악-!
순간 흰색으로 바뀌는 조명.
머리 위로 피어오른 물이 떨어졌다. 헌터는 ‘왕 중의 왕’이라는 별명에 걸맞은 카리스마를 보였다.
확실히, 아직까지 애송이인 오튼이 상대할 선수는 아니었다.
변수는 하나.
레볼루션의 다른 멤버들.
하지만 반대편에 내가 있어 그런 변수도 차단되기 쉬웠다.
거기다가 바티스타는 페이퍼뷰 직전, ‘정정당당하게 헌터를 이겨야 한다.’고 선언한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인 경기 양상으로 흘러갔을 때에는 헌터의 승리가 확실한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관객들이 생각하지 못한 변수를 통해 이 경기를 흥미롭게 끌고 갈 생각이었다.
무난한 흐름으로 시작된 경기.
느릿느릿하게 상대를 압박하는 헌터와 내 지시로 템포를 조금 더 올려 경기를 진행하는 오튼.
그로 인해 이전 경기와는 달리 관객들의 반응이 좀 더 나왔다.
[Triple H! Triple H! Triple H! Triple H! Triple H! Triple H!]
나는 그런 가운데에서 레볼루션 멤버들과 신경전을 벌이며 경기의 긴장감을 계속 유지해주었다.
템포가 늘어질 때마다 일부러 바티스타에게 슬쩍 다가가고.
그 역시도 내 행동을 이해해 금방이라도 싸울 것처럼 굴었다.
거기에서 헌터가 선호하는 느릿한 경기의 약점을 보충했다.
물론, 그렇게 심리전을 이어가는 게 절대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었다.
프로레슬링 실력으로는 정점이라고 하는 닉 플레어도 그런 올드 스쿨한 경기 스타일을 가졌다.
하지만 악역일 때는 반칙을 통해 분위기를 환기시킬 수라도 있지, 선역일 때는 그러지도 못해 정말로 지루한 양상이 이어졌다.
하지만 헌터는 고집을 꺾지 않았고, 그것을 커버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되었다.
“해볼까?”
“……재미있군.”
바티스타가 주먹을 뚜둑 꺾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콰앙-!
그리고 그때, 헌터가 스파인 버스터와 같은 호쾌한 기술로 다시 반응을 가져가는 것이었다.
물론, 오튼 역시도 가만히 거기에 당해주고만 있지는 않았다.
녀석은 크게 다쳤던 헌터의 무릎을 독사처럼 집요하게 노렸다.
그리고 그게 먹혔다.
“크윽……!”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는 헌터.
어떤 스타일이던 가리지 않고 소화하는 오튼은 그야말로 올라운더라 불리기에 적절했다.
긴 팔다리로 호쾌하게 기술을 꽂고 상대를 압박하는 모습은 확실한 재능이 느껴졌다.
그래서 스스로 그다지 의욕이 없어도 잘 된 거겠지.
확실히 모든 걸 익힌 커리어 후반부의 카리스마는 대단했으니까.
각종 슬램류부터 시작해서 주먹질과 스톰핑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한 번 상대를 조지고 난 뒤에는 어그로도 끌어주고.
[Boooooooooooooo-!]
큰 야유를 받으면서도 오튼은 개의치 않고 경기를 이어나갔다.
녀석이 배짱 역시도 보통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단순히 신경을 안 쓰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경기는 후반부로 이어지며 마지막 스팟이 시작되었다.
“뭐야, 고작 이거야?!”
기세를 잡은 오튼은 의기양양해 바닥에 쓰러진 헌터를 놔두고 링 위를 크게 돌기 시작했다.
[Boooooooooooooo-!]
“하하! 얼마든지 야유하라고!”
관객들의 반응 속에 크게 웃어재끼던 녀석이 이윽고 링 아래의 나를 보란 듯이 도발했다.
“신~ 이거 어쩌나! 기껏 팀 업을 한 의미가 없이 헌터가 지게 생겼는데 말이야!”
그렇게 이야기한 녀석이 링 아래로 내려와 나를 도발했다.
“때려보던가!”
“…….”
나는 그 도발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이를 악 물고 버텨냈다.
내가 여기에서 오튼을 때린다면 경기는 헌터의 반칙패로 끝난다.
바로 그때였다.
뻐억-!
등에 이어지는 둔탁한 통증.
“크학?!”
나는 비명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뒤에 서있던 플레어의 손에 철제 의자가 들린 게 보였다.
러셀과의 경기에서 허리를 당한 나는 그 한 방에 바로 무너졌다.
그 뒤를 이어 오튼과 플레어의 매서운 협공이 이어졌다.
러셀의 패배를 갚아주겠다는 듯 두 사람은 공격을 계속해왔다.
바티스타는 눈썹을 찡그린 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
그렇게 실컷 나를 두들겨 팬 오튼이 방심하며 링 위로 올라갔고.
상처를 회복하고 일어선 헌터가 녀석의 배를 힘차게 걷어찼다.
페디그리.
투콰앙-!
방심한 틈에 이어진 강렬한 피니시 무브. 오튼의 몸 앞쪽이 헌터의 체중과 함께 바닥에 꽂혔다.
경악하는 플레어.
그대로 커버가 이어졌다.
1……!
당황한 플레어는 바티스타가 했던 경고를 무시하고 카운트를 방해하기 위해 링으로 올라갔다.
2……!
하지만 그것을 알고 있던 바티스타가 링 위로 올라가려던 플레어의 몸을 잡아서 제지했다.
3……!
그와 함께 종료되는 경기.
링 벨이 울렸고, 자리에서 일어난 헌터가 놀란 눈으로 링 아래의 바티스타를 내려다보았다.
그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으로 오늘 경기 결과가 요약되었다.
[Triple H! Triple H! Triple H! Triple H! Triple H! Triple H!]
[Batista! Batista! Batista! Batista! Batista! Batista!]
예상한 대로의 결과에 나는 바닥에 쓰러진 채로 웃어 보였다.
방심한 오튼만 불쌍하군.
* * *
기가 백 래시가 막을 내렸다.
“후우.”
업무를 일찍 끝마친 뒤, 사무실에서 쇼를 시청한 티파니는 만족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대로 멋진 페이퍼뷰였다.
마지막 경기가 조금 메인에 걸맞지 않았다는 걸 빼면 말이다.
‘실버백은 조만간 회사와 계약이 만료될 예정이라고 했으니.’
태업을 한다는 건, 재계약을 진행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리라.
하지만 젠코가 현재는 회사에서 딱히 밀어주는 선수가 아니었으므로 벨트를 유지하는 것이겠지.
실버백으로부터 벨트를 이어받는 선수는 과연 누가 될 것인가.
‘신은 아니겠지.’
침대에서 들었던 게 떠올랐다.
신은 분명 자신은 아직 월드 챔피언이 될 생각이 없다고 했다.
[보관함이라는 소리니까.]
벨트 보관함.
여러 이유로 벨트를 넘겨주기 위해 들고 있는 선수를 뜻했다.
영광스러운 첫 월드 챔피언을 그런 식으로 가져가고 싶은 선수는 분명 그 어디에도 없겠지.
자신이 월드 챔피언에 오르는 것은 모든 것을 끝낸 이후다.
모든 이들의 인정을 받으며.
티파니도 거기에 동의했다.
신의 월드 챔피언 등극.
바트 맥센의 처절한 몰락.
그것을 위해 지금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서 싸우고 있었다.
휴식은 끝.
자리에서 일어난 티파니는 사무실에 들어온 보고서를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현재 신에게 들어와 있는 일은 크게 봤을 때 세 가지였다.
하나는 인터뷰.
다른 하나는 영화 출연 제의.
‘마지막으로…….’
사실 이게 가장 흥미로웠다.
다음 영화를 정하면서 동시에 진행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 일.
바로 리얼리티 쇼 촬영이었다.
[신의 프로레슬러로서의 삶, 인간으로서의 삶 전반에 관해서 촬영하면서 동양인 이민자들에 대해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호기심을 관찰의 형태로서…….]
하지만 이게 좀 걸렸다.
신이 미국인이 아니라 동양계로 포장되는 것이 과연 괜찮을까.
내일쯤 한번 연락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티파니는 서류를 책상 아래로 집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