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페이퍼뷰가 끝난 뒤.
연락을 달라는 문자를 받은 나는 버스에 타자마자 곧바로 티파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러셀과 오튼은 피곤했는지 침대에 들어가 곯아떨어진 상태.
나 역시도 피곤했으나, 오랜만에 목소리도 듣고 싶었고…….
이런저런 이유로 전화를 건 나는 고요한 가운데,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캠핑 버스가 고속도로를 달려가는 감각이 전해져왔다.
몇 번의 신호가 간 끝에 반대편에서 전화를 받았다.
[신, 내일 연락해도 되는데.]
“괜찮아. 잘 지냈어?”
[저야 일에 치여 가면서 살고 있죠. 오늘 경기도 봤어요. 바뀐 경기복이 아주 멋지던데요.]
“노력 좀 했지.”
나는 피식 웃었다.
오늘 하루의 피로가 싹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부드럽고 가녀린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티파니는 내가 피곤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좀 독특한 제안이 왔어요.]
“뭔데?”
[리얼리티 프로그램.]
순간 눈이 크게 뜨였다.
미국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언제나 유행했다. 가짜가 아닌 진짜를 보고 싶다는 사람들의 열망에 의해서 만들어진 결과였다.
물론, 리얼리티 프로그램도 각본이 있었지만 실존 인물의 삶을 따라가며 촬영한다는 점에서 사람을은 크게 열광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WWF에서도 미래에 여성 레슬러들을 중심으로 진행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런칭했었지.
그리고 그게 인기를 끌었다.
링 뒤의 선수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가. 쉴 땐 무엇을 하는가.
그런 심리를 저격한데다 셀럽으로서 대리만족까지 시켜주니까.
대박이 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생각해?”
[시기적으로 봤을 때는 괜찮은 일 같아요. 어차피 영화 촬영도 아직 제안만 들어온 상태니까.]
“일정이 어떤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쪽은 바로 촬영에 들어가고 싶다는데.]
“내 일에 크게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나쁘진 않겠는데.”
[글쎄요.]
“왜 그래?”
티파니의 목소리가 점점 어두워지는 탓에 난 의아해 되물었다.
[아마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라면 당신 부모님도 조건에 넣을 거예요. 성공한 동양계 이민자를 그린다고 했으니까.]
“그렇군.”
[굳이 그런 이미지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을까요? 만약 의도한 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걸 확실히 해둬야겠지.”
난 동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유독 동양인만큼은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 취급을 하는 경향이 컸다.
“촬영할 때 그 점에 대해 확실히 선을 그어둘 수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좀 이야기를 해봐야겠네요.]
“부탁해도 될까?”
[예, 맡겨만 두세요.]
그렇게 전화가 끊어졌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라고.’
무척 괜찮은 제안 같았다.
영화 쪽 일은 계약부터 촬영, 개봉까지 적어도 1년 이상은 봐야만 한다. 그리고 그건 영화의 규모가 커질수록 훨씬 더 길어졌다.
때문에 그간의 공백을 채워간다는 느낌으로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촬영하면 괜찮을 듯했다.
물론, 난 프로레슬링에서도 계속 활약을 하긴 했지만, 그게 매일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거기다 프로레슬링을 보지 않는 대중들을 위해서라도 외부 활동은 계속해서 이어져야만 했다.
헬 쏘우는 계속해서 대박행진을 이어나가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것도 언젠가는 끝나기 마련.
곱씹을수록 매력적인 제안이다.
하지만 나는 완전히 기뻐할 수만은 없는 것을 느꼈다.
문제가 하나 존재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라고 한다면 결국 우리 가족에 관한 이야기도 한 번쯤 나와야한다는 건데.
‘괜찮을까.’
아버지와 어머니가 TV에 나오는 상황이 전혀 상상이 되지…….
아, 아버지는 있군.
L.A. 폭동 당시에 한인 자경단의 리더로서 복면을 쓰고 뉴스 인터뷰에 촬영하신 적이 있었다.
그때 소소하게 ‘Korean Badass’라는 별명으로 화제가 되었는데.
그랬던 아버지가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촬영하면 어떻게 될까.
나는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일단 L.A. 폭동에서 유령으로 불렸다는 사실은 숨겨두어야겠지?
* * *
티파니가 리얼리티 프로그램 관계자와 만나는 동안, 나는 향후의 각본과 관련된 회의에 참석했다.
나와 레볼루션 멤버들 헌터가 참석한 우리 여섯 사람의 각본.
총괄자인 각본팀장과 각 라이터들, 그리고 바트 맥센까지 포함.
열 명이 참석한 대형 회의에서 바트는 일단 앞으로의 일정에 관해 이야기를 꺼냈다.
“7월 페이퍼뷰를 열 생각이다.”
거기에 나는 눈썹을 치켜떴다.
8월에 있을 섬머 수플렉스까지의 일정을 생각하면 당연했다.
페이퍼뷰를 하나 끼워 넣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흐름이겠으나.
‘뭔가 생각하는 게 있나.’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바트의 성격상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전생에서 이 시점의 페이퍼뷰는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뭔가 이유가 있고 그에 따라서……. 아, 대강 알겠군.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바트는 우리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이유를 묻는 녀석이 없군.”
“헌터에게 월드 챔피언 타이틀을 넘기실 생각이로군요.”
내가 대답하자 바트는 기가 차다는 듯이 웃었다.
“자네는 부두술사 같군.”
“…….”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좀 설명을 해줄 수 있겠나?”
관심을 갖는 건 바트만이 아니었다. 자리에 있는 모두가 어째서 그런 결론에 이르렀는지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얼굴들이었다.
좀 동물원 원숭이 같지만.
여기서는 설명을 해볼까.
“현재 월드 챔피언인 실버백의 재계약이 불발되었을 테니까요.”
“그렇네.”
“새로운 챔피언이 필요하겠죠.”
“그렇지.”
“그게 헌터고. 최종적으로는 바티스타에게 넘기는 것이 목표.”
“바로 맞췄군.”
바트가 혀를 내둘렀다.
지난번의 일 이후로 그는 딱히 내게 적개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쨌거나 같이 일하는 입장에서 공과 사는 확실하게 해주어서 나쁘지는 않았지만.
“좀 보고들 배우게나. 이렇게 읽어낼 줄 알아야지.”
……아니, 정정한다.
기분 나쁘다.
마치 폭격이 떨어지기 직전의 기분 나쁜 고요함 같아서 말이다.
이 양반이 날 칭찬한다고?
“그렇게 되었네. 헌터, 자네는 보관함 역할을 맡아줘야겠어.”
“……알겠습니다.”
“사실, 방안은 세 가지였네.”
바트가 활짝 웃었다.
“하나는 러셀 하트나 랜스 오튼이 월드 챔피언에 등극하는 것.”
“…….”
러셀과 오튼이 날 돌아보았다.
하지만 나는 예상한 바였던 터라 무시하고 계속 말을 들었다.
“하나는 부커나 카인 같은 베테랑들에게 벨트를 넘기는 것.”
“나머지 하나가 이제 새로운 스타를 발굴해내는 것이로군요.”
“그렇지.”
바트가 ‘설마, 설마.’ 하며 자리에 앉아있는 바티스타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월드 챔피언이 되게.”
“제, 제가요?”
“그래, 안 될 거 뭐 있나?”
“어, 음…….”
모두가 바티스타를 돌아보았다.
사실, 전생에서 그는 올해 있었던 레슬 임페리움에서 월드 챔피언에 오를 예정이었다.
다만 내가 헌터를 예상보다 일찍 보내(?)버리면서 떠오를 기회가 없어서 이렇게 된 것이었지만.
그렇게 바뀌었던 역사를 바로 잡고자 하니 당연하다는 듯 월드 챔피언이 포함되었다.
‘신기한데.’
그래도 이야기가 잘 풀려갔다.
바티스타가 월드 챔피언을 가지고 랙다운으로 넘어가는 게 사실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으니까.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각본 흐름도 좋고 헌터가 7월에 월드 챔피언을 가지고 자네에게 넘겨주면 딱 이겠군.”
“저 녀석 아이디업니다.”
헌터가 슬쩍 날 가리켰다.
저 양반은 왜 저러나 싶어 바라보자니 헌터가 씨익 웃어보였다.
바트가 노골적으로 내 칭찬을 하자 한번 어디까지 가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은 것이리라.
“그래! 신. 우리 복덩이. 정말이지 대단한 일을 해주었군.”
“……기분 나쁩니다. 보스.”
“비아냥이 아닐세.”
“그래서 더요.”
“자네와 러셀의 각본은 그럼 어떤 식으로 진행될 예정인가?”
“…….”
이제는 아예 물어보네.
그렇다면 슬쩍 떠볼까.
“이번에 저도 랙다운 쪽으로 넘어가게 되겠죠?”
“글쎄.”
“만약 그렇다면 저는 현재 제가 8월 마지막에 러셀에게 타이틀을 넘겨주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그래? 러셀, 어떻게 보나?”
“…….”
“러셀?”
“월드 챔피언의 후보군에 오르는 건 제가 아니라 신이어야 합니다. 회장님.”
러셀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나 역시 전혀 예상치 못했던 한마디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들 그렇게 놀라는 와중, 오튼이 피식 웃으며 말을 거들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책임 있는 자리는 그럴 수 있는 사람에게 맡기는 게 옳은 것이겠죠.”
야, 너희 둘 다 왜 그러냐.
나는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당황해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바트는 박수를 쳤다.
“두 사람이 이렇게 말하다니. 자네 아주 신임이 깊군.”
“그러게요.”
“하지만 현재도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신과 달리 바티스타는 띄워줄 가치가 있지 않겠나?”
“……그건, 그렇습니다.”
“그래, 그러니 여기에서는 그와 관련된 이야기만 하지.”
입을 다무는 러셀.
그게 고맙게 느껴진 나는 생각이 더 확고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랙다운에 가는 이유.
그것은 시나가 버닝콩에 오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이유였다.
현재, 회사에서도 내 이미지 메이킹에 따라 나와 시나, 러셀과 오튼을 하나로 묶어서 생각했다.
배합도 적절했다.
나와 시나가 선역.
러셀과 오튼이 악역.
그렇기 때문에 시나가 와서 러셀과 선역과 악역으로서 버닝콩의 한축을 담당해 꾸려나가고.
반대로 나와 오튼이 이적해 랙다운의 하이미드 진을 담당한다.
‘이게 맞는 흐름이겠지.’
그렇게 생각했기에 나는 이적하기 전에 최대한 러셀을 띄워주고 가야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적을 하는 선수는 패배하더라도 위상의 하락이 최소화된다.
내가 타이틀을 넘겨주고 GCW에서 버닝콩으로 올라왔듯이, 랙다운으로 이적할 때도 잡을 해주고 가는 게 맞는 것이다.
바트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신. 이건 어떤가.”
“뭐죠?”
“굳이 져주고 갈 이유는 없지 않나? 러셀이 저렇게 말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들은 나는 바트의 의중을 곧바로 파악했다.
바트는 자신감 없는 선수의 태도를 싫어했고, 나에게 월드 챔피언의 자격이 있다는 러셀의 말을 듣고는 의심을 하는 것이었다.
“저희도 7월에 있을 페이퍼뷰에서 경기를 가질 예정입니까?”
“아마 그렇겠지?”
“그때도 제가 이기는 거겠죠.”
“……글쎄, 러셀. 어찌 생각하나?”
“그건 모를 일입니다.”
러셀이 나를 바라보았다.
예상과는 다른 대답에 바트가 다시금 그에게 주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8월, 섬머 수플렉스까지는 반드시 신에게서 타이틀을 빼앗아올 수 있을 정도로 반응을 쌓고 말겠습니다. 회장님.”
“호오…….”
자신감 있는 발언을 들은 바트가 러셀에게 다시 관심을 보였다.
* * *
한낮의 봄 햇살이 맨해튼 시내를 따스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사무실 근처의 커피숍.
아직 일이 확정되지 않아, 티파니는 방송국 쪽 사람을 사무실이 아닌 일부러 이곳으로 불렀다.
거기에, 방송국 사람들 이전에 만나야만 할 사람도 있었고.
하얀색의 정장 바지.
금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선글라스를 쓴 그녀는 커피를 즐기며 약속 시간을 기다렸다.
리얼리티 프로그램.
일단 걱정하는 바가 해결된다면 그 자체는 앞으로 신의 커리어에 꽤나 도움이 될 것 같았지만.
‘문제는 WWF네.’
S&T라는 이름의 에이전시를 차린 그녀는 현재 WWF에서 영향력을 빠르게 잃어가고 있었다.
회사 내에서 그녀가 후계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퍼졌다.
예상한 바였다.
티파니의 오빠인 케인 맥센이 회사에서 나갈 때도 사람들은 대부분 이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 회사 내에서 티파니의 영향력이 커졌다.
어쨌든 바트 맥센이 죽거나 물러난다면 그 뒤를 이을 것은 그녀가 확실시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티파니는 극히 적은 지분을 가지고도 회사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가 있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회사를 나와 다른 사업을 시작한 티파니를 도울 사람은 없었다.
사실, 그게 좀 의아했었다.
아무리 WWF에서 손을 뗀 상태라도 티파니는 아직 수많은 선수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와 그 연인인 신을 중심으로 하나의 파벌이 만들어진 상태였다.
러셀 하트, 랜스 오튼, 숀 시나를 중심으로 해서 부커-리 파벌의 사람들과도 꽤나 친했고.
회사의 미래라고 불리는 네 사람이 포함되어 자신은 얼마간은 충분히 매력적인 카드일 거라고 봤다.
하지만 그 생각은 좀 안일했다.
‘이렇게 움직일 줄이야.’
얕볼 수가 없는 사람이다.
티파니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그런 생각을 가지며, 이어 천천히 품안에서 양철 케이스를 꺼냈다.
담배 하나를 물고 불을 붙였다.
타들어가는 연기.
맨해튼의 현대적인 시내.
그 너머에서 천천히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한 사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갈색 가죽 재킷에 청바지.
특유의 세운 머리.
“담배는 내가 끊으라고 했지?”
“그게 쉽지가 않네요.”
티파니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앞으로 온 남자를 환영했다.
“오라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