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아직 이른 아침이었다.
각본에 의하면 방송은 내가 아침에 일어나며 시작될 예정이었다.
‘적당히 자르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침대에 눕기 전에 일단 내 모습을 확인했다.
평소와 같았다.
포마드를 발라서 넘긴 검은 머리. 약간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
“음.”
일단 머리를 감을까.
머리를 감고 적당히 물기를 털어낸 나는 와일드한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서 적당히 드라이를 했다.
말했듯, 이것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흥미를 이끌기 위한 슬로건일 뿐.
철저하게 연출해서 사람들이 원하는 스타의 일상을 보여주는 게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특징.
그렇기에 나는 잠에서 깨어나는 상황에서조차 멋지게 보여야 했다.
그렇게 세팅을 마친 나는 셔츠를 벗고 곧바로 자리에 드러누웠다.
그러고는 막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천천히 연기를 시작했다.
쏟아지는 햇살.
“끄으…….”
뒤척거리던 나는 슬며시 눈을 뜨고는 곧바로 크게 기지개를 폈다.
이런 내 모습을 카메라가 다양한 각도로 찍어주고 있을 터였다.
그걸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단단한 복근을 긁적이며 화장실로 향했다.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한 뒤, 다시 한 번 포마드로 머리를 만졌다.
‘아마 여기에서 내레이션으로 내가 부모님 댁에 와서 하룻밤 묵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겠지.’
사실 미국의 주류 인종들이 보기에는 이렇게 부모님 댁에 묵는 일조차도 특별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한인이라는 사실을 굳이 숨길 생각은 없었다.
이런 미국인도 있다.
그게 나다.
‘좋아.’
머리 세팅을 끝마친 나는 곧바로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부엌에서 한창 아침 준비를 하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했다.
“좋은 냄새 나네.”
“아, 일어났니?”
“오랜만에 엄마 밥 먹네.”
우리는 현재 한국어로 대화를 하고 있었지만 나중에 이 부분을 따로 영어 녹음을 할 예정이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아버지는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고.
자막을 달 수도 있겠으나, 미국인은 자막을 못 읽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아서 녹음하기로 했다.
아침 식사는 한식이었다.
어렸을 적에 입양을 왔던 엄마는 미국 사회에서 좋지 못한 일을 겪으며 아예 마음의 문을 닫았다.
그래서 오히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먼저 먹었어.”
“오늘 뭐 집안일 없어요? 온 김에 거들어주고 갈 테니까.”
“네 아빠가 다 했어.”
“윽, 또…….”
“아들은 편하게 쉬고 와.”
“이따 마트라도 좀 다녀오려고 하는데, 뭐 필요한 거 있어요?”
“음, 오늘 바비큐라도 할까?”
“그거 좋지!”
나는 활짝 웃었다.
그나저나, 한식 진짜 맛있다.
내가 미국인이기는 해도 오랜만에 먹는 엄마 밥이라서 그런가.
거기다 탄수화물도 있고.
평소 탄수화물을 악마로 생각하던 나에게는 최고의 식사였다.
된장찌개에 김, 젓갈에 달걀 프라이와 김치라는 최적의 조합.
최고의 맛이다!
……지켜보고 있는 티파니는 찌개를 보고 트라우마를 느낄 테지만.
진입 장벽이 있을 뿐, 한식은 확실히 든든하고 먹기에 좋았다.
일상적인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아, 엄마도 마트 가야겠다.”
“같이? 왜?”
“최 권사님이 저번에 반찬 주신 거 다 먹었거든. 거기다가 뭐 김치라도 담아서 돌려드려야지.”
“나도 오랜만에 인사드려야겠네.”
그렇게 식사를 끝마친 나는 설거지를 하고는 차고로 향했다.
그 안에서는…….
‘적응 안 돼.’
검은 가면을 쓴 아버지가 한창 트럭을 손보고 있는 중이었다.
“준호냐?”
“예, 아버지.”
“거기 몽키 좀 줘봐라.”
“무슨 문제 있어요?”
“그건 아니고.”
“…….”
설마 의식하고 있는 건가.
엄마도 평소에는 ‘니가 차려 먹어!’라고 하시더니 오늘은 순순히 아침 식사를 준비 중이셨고.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방송이라고 하니 좀 들뜨신 두 분의 모습이 어딘가 귀여웠다.
‘그럼 분량을 좀 뽑아볼까.’
사람들에게 입이 떡 벌어질 만한 우리 집안의 모습을 보여주자.
“더 작은 걸로.”
아버지가 이야기했다.
나는 공구함에 들어 있던 한 사이즈 작은 몽키 스패너를 꺼내 실수인 척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그걸 타이어 사이로 밀어 넣었다.
“어, 이런.”
“뭐냐.”
“아버지, 죄송한데 몽키가 타이어 사이로 들어가버렸네요.”
“…….”
“좀 도와주셔야겠는데.”
나는 씨익 웃어 보였다.
* * *
한편, 주차된 방송국 차량 안.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영상을 보고 있던 PD와 티파니는 생각보다 심심한 것을 느꼈다.
부모님이 한인에다가 캐릭터가 독특해 보여서 뭔가 재미있는 연출이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적당히 아침 먹고 차량 정비 하고 계시는 아버지 도와드리고.
‘평범하네.’
PD는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한인에 대한 폐쇄적이라는 편견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
이어진 장면을 본 그는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넌 조심 좀 해라. 애가.]
[죄송합니다.]
한숨을 내쉰 신의 아버지가 자동차의 범퍼를 확 쥐더니 그대로 위로 번쩍 들어올렸다.
“…….”
“…….”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저걸 한 손으로?
[주웠어요.]
[줘봐라.]
몽키 스패너를 꺼낸 신이 그것을 건넸고, 부자父子는 다시금 평범하게 차량 정비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지켜보고 있는 방송국 사람들은 도저히 그런 상황을 평범하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엄마가 마트 가자던데 가기 전에 장작이나 좀 패놓을까요?]
[그럴까.]
[누가 많이 패나 경쟁해요.]
[너무 많이 패두면 쓸 곳이 없는데.]
[옆집에 줘도 되고.]
장작을 패는 간단한 작업부터가 차원이 다를 정도의 재미였다.
“이거 대박인데.”
PD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퍼억! 퍼억! 퍼억!
두 사람이 연달아 장작을 패는 솜씨가 아주 일품이었다. 서로 경쟁을 하니 누가 더 속도가 빠른가 보는 맛도 있었다.
“정말 대단한데요?”
PD는 옆에 앉아 있던 티파니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그런 신을 자랑스럽다는 듯 보았다.
“프로레슬러니까요. 이런 식으로 쇼를 만들어가는 것이 특기죠.”
“확실히 그렇군요. 이거, 시청률이 꽤나 기대가 됩니다. 하하!”
PD는 유쾌하게 웃었다.
사실 화제성을 기대했을 뿐, 이렇게 방송을 재미있게 뽑아줄 것이라고는 기대도 하지 못했는데.
아주 좋았다.
평범한 일상을 지금처럼 재미있는 형태로 연출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으리라.
PD는 대박을 잡았음을 느꼈다.
* * *
그렇게 신은 마치 쇼 호스트의 진행자라도 되는 것처럼 방송 분량을 마구 뽑아대기 시작했다.
마트에 가서도 일부러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게 한 뒤 갑자기 즉석에서 사인회를 열지를 않나.
자신의 팬이라며 다가온 소년에게는 꿈을 심어주면서 더없이 멋진 장면을 연출해냈다.
그런 과정을 보는 내내 방송국의 사람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무대 위에서 살아온 사람다웠다.
티파니까지 방송에 참여하자 방송의 재미는 한층 더 강해졌다.
그 이유를 잠시 고민해보던 PD는 이내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아, 감사히 먹겠습니다!]
정말로 즐거워하고 있다.
보통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가장 힘든 점은 공과 사가 전혀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단순히 일반 프로그램이라면 파파박 촬영을 끝낼 수도 있겠지만.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재미있는 방송 분량을 뽑아내기 위해서 진득하니 기다려야 할 때가 많았다.
그렇기에 출연자들이 계속 카메라로 관찰을 당한다는 스트레스에 짜증을 부릴 때도 많았다.
하지만 이들은 아니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아들을 아껴주었으며.
주변 관계도 좋았다.
아들은 그런 부모님과 주변인들의 매력을 최대한 보여주었다.
‘거기에 티파니라는 신선함.’
WWF의 공주님이자, 최근 사업가로서 전환했다지만 여전히 숨은 팬층이 많은 그녀의 일상적인 모습이라니.
[하하하! 신, 이게 뭐에요? 아버님께서 만드신 건가요?]
[……다산의 상징 같은 거야.]
[푸하하하! 아, 좋아요, 좋아. 예뻐! 사무실에 장식해둬야지!]
[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괜찮아. 티파니.]
[흐음~ 진지하면요?]
[…….]
저 둘의 로맨스도 무뚝뚝한 신과 반대로 적극적인 티파니의 조합이 아주 괜찮게 느껴졌다.
“함께 활용해도 좋겠는데요?”
옆에서 같이 촬영을 지켜보던 카메라 감독도 굳이 말을 건넬 정도였다.
“예상과는 다르네요.”
“좋은 의미로 말이죠.”
“맞아요. 솔직히 잘 모르는 분야라서 의심했는데, 프로레슬러는 그야말로 ‘쇼의 달인’이군요.”
“저 사람이 특별한 거죠.”
PD는 단언했다.
모든 프로레슬러가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이 특별하게 말재주가 빼어나고 임기응변에 능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일반인과 함께라도 방송을 만들어갈 수 있는 거겠지.
PD는 안심하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신의 ‘원 맨 쇼’를 지켜보았다.
저녁에 있을 바비큐 파티의 규모는 생각보다 훨씬 더 커졌다.
근처에 사는 한인 가족들이 일을 마친 후 모여서 제각기 음식을 가지고 신의 집으로 모여들었다.
신은 그 중심에서 사람들을 맞이하며 계속 방송을 이어나갔다.
소재가 계속해서 쏟아졌다.
하지만 그 덕분에 PD와 촬영팀의 인원들은 눈코 뜰 새 없이 계속해서 바쁜 시간을 보냈다.
“3번 카메라 확대해.”
“2번도. 지금 신하고 대화 나누고 있는 사람 목소리 잡아.”
“주변에 노이즈가 좀…….”
“그 정도야 후시 녹음으로 넘기면 돼. 좀 흥미로운 내용인 것 같은데 일단 따두자고.”
“저, 그런데. 이 사람들을 죄다 방송에 쓰려면 계약서라도 하나 정도 쓰는 게 맞지 않을까요.”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고.”
정 안 되면 아쉽겠지만, 이 부분은 들어내면 되니까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PD는 그러한 생각이 점차적으로 옅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 바비큐 파티 내용을 2화 방송의 마지막에 쓰고 싶어졌다.
굉장히 흥미로운 상황이었다.
불판에서 익어가는 고기.
모닥불을 피우고 밤이 깊어가는 와중 유쾌하게 떠드는 사람들.
그 중심의 신.
그리고 그 옆의 티파니.
멋진 일상이었다.
거기다 코리안 바비큐가 상상 이상으로 훨씬 맛있어보여서.
“음식 좀 확대해봐.”
“……맛있어 보이는데요.”
지글지글.
사운드가 환상적으로 잡히는 가운데, 종일 먹은 거라고는 샌드위치 하나뿐인 촬영팀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밴에 대고 노크를 해왔다.
“응?”
“확인해봐.”
PD가 지시를 내리고 촬영팀 막내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니 반대편에 쟁반을 든 신이 서있었다.
“배고프시죠?”
“시, 신……!”
“이거 코리안 바비큔데, 괜찮으면 좀 드셔보시라고 가져왔어요.”
쟁반에 한가득 담긴 고기.
그것을 본 촬영팀 사람들은 반쯤 눈이 뒤집혀서 달려들었다.
거대한 밴 뒤에서 쪼그라들고 있던 사람들은 코리안 바비큐의 맛에 빠져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와, 이거……! 이거 진짜!”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부족하시면 전화로 말씀해주세요. 더 가져다 드릴 테니까.”
“와, 이건 뭐죠? 굉장한데!”
“아, 구운 김치요.”
“이건 뭐죠? 내가 알던 돼지고기의 맛이 절대 아니야!”
“그, 그렇군요.”
신은 적당히 대답을 넘겼다.
이 고기가 야생멧돼지(크고 강함)이라는 사실은 이들에게 전해두지 않는 것이 낫겠지.
“방송은 좀 어떤가요?”
“최곱니다. 오늘 하루만 해서 벌써 방송 하나가 뚝딱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요.”
돼지고기를 한 움큼 입에 쑤셔 넣은 PD가 육즙을 이빨 사이로 뚝뚝 흘리며 이야기했다.
“그거 다행이네요.”
중간에 티파니가 반응이 아주 좋다고 이야기해줘서 안심했지만.
본인에게 직접 듣자 이대로 계속 해나가면 되겠다는 확신이 섰다.
“사실 이것만 하더라도 하나의 방송이 되겠다 싶을 정도군요.”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놀라기에는 아직 이른데요.”
“왜죠?”
“제 ‘일’과 관련되어서 촬영을 하는 건 훨씬 더 재밌을 겁니다.”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한 신은 그대로 밴의 뒷문을 닫고 돌아섰다.
파티가 열리고 있는 앞마당으로 돌아간 그는 자신을 맞이해주는 티파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해주고 왔어요?”
“다들 좋아하더군.”
고개를 끄덕인 신은 자연스럽게 티파니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일과 가족.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그 두 가지 토끼를 모두 잡게 되었다.
그렇기에 신은 그 누구보다 행복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