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178화 (178/634)

178.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촬영은 며칠에 걸쳐서 계속 진행되었다.

그동안 나는 휴가라도 즐기는 기분으로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생각 외로 할 일은 많았다.

아버지와 엔젤레스 국유림에 가서 멧돼지 사냥을 해온다거나.

내 성공에 대한 코리아타운 사람들의 반응을 보여준다거나.

때로는 티파니의 저택에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거나.

그와 함께 밤에는 방송에 쓸 인터뷰 분량을 촬영하기도 했다.

나와 부모님, 티파니가 번갈아가며 PD와 인터뷰를 해나갔다.

“바비큐 파티는 어떠셨나요?”

“정말 대단했죠. 오랜만에 코리안 바비큐를 먹으니 고향에 돌아온 것 같아서 정말 즐거웠습니다.”

“아버님께서 힘이 무척 좋으시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뭔가 신비로운 무술의 고수라던가.”

“그럴 리가요.”

나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그냥 군인 출신이십니다. 사람들이 막연히 생각하는 닌자나 쿵푸 마스터 같은 건 절대 아니죠.”

“……아, 음. 실례했습니다.”

“하하, 아닙니다.”

나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대부분의 미국인은 이것이 차별적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나도 가볍게 지적하는 정도에서 그쳤다. 일하는 사이에 얼굴을 붉힐 필요는 없으니까.

아마 이건 방송에서 잘리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평소 하던 생각을 이어서 이야기했다.

“저는 이런 문화를 가진 집안에서 태어난 게 자랑스럽습니다.”

“한국이라고 하셨죠?”

“예, 사실 제가 자란 환경이 좀 유달리 한국만의 문화를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기는 하죠.”

“음식이라던가?”

“이웃 간에 정이 넘치는 문화도 그렇고요. 동시에 저는 다양한 친구들을 사귀면서 여러 문화를 겪고 미국인으로 자라난 거죠.”

PD가 흥미로운 듯 나에게 계속 말을 이어가라고 손짓을 했다.

나는 그 요구에 응했다.

“미국은 다양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모인 국가죠. 그렇기에 저는 저 자신이 누구보다도 가장 미국인답다고 생각합니다.”

“흥미로운 말씀이군요.”

PD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런 식으로 ‘미국인’이라는 이미지를 공고히 해두었다.

전생의 나는 미국인임에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동양인’으로 취급되었다. 이번 생애에도 똑같은 편견에 사로잡히고 싶지는 않았다.

이해는 한다.

미국에 동양계 이민자들이 본격적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백인이나 흑인이 미국에 온 것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지나서니까.

나쁘지 않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럴 수도 있다고 보는 거지.

그러니까 나는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부드럽게 그 편견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었다.

PD도 인터뷰가 이어지며 그런 의도에 대해 좀 이해한 것 같았다.

그렇게 집에서의 촬영이 끝났다.

나는 살짝 아쉬워하시는 부모님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고향인 로스 엔젤레스를 떠날 준비를 했다.

일단 교외에 주차되어 있었던 캠핑 버스를 불러와서 촬영을 어떤 식으로 이어나갈 것인지 점검했다.

거대한 캠핑 버스 내부에 집에서처럼 소형 카메라 여러 대가 설치되었다.

밴은 캠핑 버스 뒤를 바짝 쫓아오며 촬영을 해나갈 예정이었다.

“시설이 꽤 좋은데요.”

“그렇죠.”

“프로레슬러들은 다 이런 버스를 사용해서 이동하나요?”

“모두가 그렇진 않습니다. 유지비 때문에 웬만큼 급이 높은 선수가 아니면 사용하기 힘들죠.”

“신 선수도 그런 급인가요?”

“흠, 딱히 그렇진 않지만 전 이제 투자를 해주시는 분이…….”

“티파니 맥센이요.”

“옙.”

나는 쓰게 웃었다.

“자신이 WWF의 회장이 될 때를 대비한 거라고 하더군요.”

“무슨 말씀이시죠?”

“사내 복지의 일환으로 선수들에게 이동 수단을 지원해주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확실히 멋진 일이었다.

1년 내내 전 세계를 여행하는 만큼, 프로레슬러들에게는 이처럼 아늑한 장소가 필요했다.

나 역시도 캠핑 버스를 사용한 이후로는 선수로서 겪는 고통의 반 이상이 해결되었다.

“호오, 이 정도 버스를 여럿 운용하려면 돈이 꽤 나갈 텐데요.”

“회사가 선수들로 인해 벌어들이는 돈은 그보다 훨씬 많으니까요.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봐야죠.”

바로 그때, 우리를 따라서 버스에 올라탄 티파니가 말했다.

“연봉부터 시작해서, WWF는 다른 메이저 스포츠에 비하면 선수 복지가 열악한 편에 속해요.”

“그런가요?”

“예, 그러니까 저는 미래를 대비해서 현재 신이라는 선수에게 개인적으로 투자를 하는 거죠.”

“연인으로서도?”

“어머, PD님. 너무 개인적인 부분을 물어보시네요.”

“…….”

우리 분명 촬영할 때 수영장에서 놀고 할 거 다 하지 않았던가.

“뭐, 방송에서는 못할 이야기니 적당히 그런 이유로 투자를 받았다고 하는 것도 좋겠네요.”

“연인에게 보내는 선물?”

PD가 씨익 웃었다.

“그거 멋지네요.”

묘한 눈빛을 주고받는 티파니와 PD를 본 나는 한발 물러섰다.

……둘이서 알아서 조율하겠지.

* * *

그 후.

티파니와도 작별을 한 나는 캠핑 버스에 탄 채 다음 버닝콩이 개최될 라스베이거스로 이동했다.

그리고 나는 조금씩 지금 상황에 대한 피로감이 쌓이는 걸 느꼈다.

24시간 감시를 당하는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람이라면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그냥 가만히 버텼다.

‘뭐.’

스트레스를 해소할 좋은 방법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다른 일이 바빠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감내해야 하듯이 나 역시도 이 정도의 불쾌감은 그냥 버텨냈다.

그리고 나는 캠핑 버스 안에서 쇼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팩스로 받은 각본을 읽고.

친구들과 여행하며 하나둘씩 모았던 덤벨을 써서 운동을 해주고.

기사 양반과 농담도 따먹고.

그리고 중간 지점에서 기다리고 있던 오튼과 러셀과 합류했다.

오튼은 놀랍게도 레볼루션 시절에 입던 정장을 입고 있었다.

거기에 선글라스를 쓰고 머리에는 ‘무스’를 잔뜩 바른 모습.

거기에 황당해 바라보자 오튼은 무척 어색한 연기를 했다.

“친구여.”

“…….”

“버스 타기 전까지만 해도 네가 어떻게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나가냐면서 험담을 하던 녀석이.”

러셀의 말에서 모든 상황을 이해한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오튼은 카메라를 의식하면서 자신의 지정석에 멋지게 드러누웠다.

키도 크고 근육질인 녀석이 그러고 있자 솔직히 말해 그렇게 나쁜 그림은 아니었지만.

“야, 게임이나 하자.”

이걸 좀 하나의 컨셉으로 밀자면 방송에서 재미있는 그림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비겁한 악역이었던 랜스 오튼이 실제로는 허당 기질이 있는 거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녀석과 평소 자주 하던 게임을 켜고 놀았다.

그사이 러셀은 신경도 안 쓰고 각본을 확인하고 나와 똑같은 운동 메뉴를 소화하면서 보냈다.

이게 평소 캠핑 버스에서 우리가 지내는 방식이었다.

평균 10시간에서 12시간의 이동.

뭐, 그동안 할 게 뭐 있겠는가.

그냥 적당히 놀고 일하고를 무작정 반복하는 것이었다.

놀 때 주로 하는 것이 얼마 전 발매한 프로레슬링 게임이고.

그리고 거기에서도 보통 우리는 자기 캐릭터를 골라서 싸웠는데.

“……치, 친구야? 네 캐릭터는 내 캐릭터에 비해 예상보다 훨씬 더 강한 것처럼 느껴지는구나.”

오튼은 항상 나에게 졌다.

“너무 현실적이지 못한데?”

“사기는 무슨. 평소 하던 게 반영되어서 이렇게 나오는 거지. 넌 딱 그 정도 선수라는 거야.”

나는 녀석을 마구 놀려댔다.

“하하, 다시 해볼까?”

오튼의 이마에 힘줄이 새겨졌다.

2004년 말에 발매한 이 WWF 레슬링 게임에서는 선수의 능력치를 섬세하게 나눠 구분했는데.

시나가 87.

내가 85.

러셀이 75.

그리고 오튼이 80이었다.

거기다 게임 실력까지 차이가 나서 오튼은 내게 매번 지고는 했다.

러셀은 아직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스탯이 낮아서 자신이 아닌 그렉 하트(83)로 싸웠다.

그러다 열 받으면 그렉 하트의 전성기 버전(94)를 가지고 덤벼들어서 오튼을 박살 냈는데.

어쨌거나, 이런 식으로 스탯 비교를 하는 게 또 재미기는 했다.

그 한 해에 그 선수가 얼마나 큰 임팩트를 보여줬는지가 게임의 스탯을 통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시나는 나중에 아이콘으로서 그렉보다 높은 98까지 올라갔고.

캡틴 로건이 97이었다는 걸 감안하자면 그때 시나가 얼마나 압도적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전생의 난 항상 60이었지.’

여성 레슬러들보다도 낮은 수치였다. 그야말로 자버로서 비참했던 전생을 상징하는 스탯이었다.

지금은 신인들 중에서는 시나 다음으로 높은 수치니 그럭저럭 해나가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다시 한 번 붙자고 말하는 오튼을 아주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주었다.

콰앙! 콰앙! 콰앙!

구린 폴리곤 캐릭터(나)가 구린 폴리곤 캐릭터(오튼)을 철제 의자로 힘차게 내리쳐댔다.

1, 2, 3!!

“아, 이 새끼 얍삽이 써!!”

결국 버티지 못한 오튼이 가면을 벗고 분노를 터뜨렸다.

* * *

그렇게 하룻밤을 고속도로 위에서 보낸 우리는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경기장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 나는 일단 PD와 함께 바트의 사무실로 향했다.

방송 촬영 허가는 미리 받아두었고, 인사를 시키고 싶어서였다.

걱정거리를 자신의 아들에게 떠넘긴 바트는 눈엣가시인 나를 보고도 활짝 웃으며 반겨주었다.

이전에는 어디 아픈가 싶었지만 이제는 이유를 알아서 나 역시도 편하게 그 행동을 받아들였다.

“어이쿠, 먼 길 오셨구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회장님. FOX의 제레미 위너입니다.”

“그래, 만나서 반갑군. 우리 하이퍼 루키를 잘 부탁하네.”

“신 선수는 요즘 방송계에서 블루칩으로 각광 받으니 오히려 저희가 부탁을 드리는 쪽이죠.”

웃으며 이야기한 PD는 이어 내 칭찬을 계속해서 늘어놓았다.

“촬영도 능숙하게 해주시고. 프로레슬링이라는 신선함까지 있어서 시청률은 잘 나올 것 같습니다.”

“신선함?”

“예, 프로레슬러의 사생활은 지금껏 철저히 감쳐져 왔으니까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바트가 감탄을 했다.

“즉, 지금까지는 없던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된다는 겐가.”

“…….”

“예? 하하, 그럴지도 모르죠!”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이해하지 못한 PD는 마냥 웃을 뿐이었다.

좀 기분 나쁘기는 하지만.

‘그래도 뭐 내 일은 완전히 케인에게 위임해두려는 모양이니.’

딱히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그렇게 인사를 마치고 나오자 경기장 곳곳에 촬영팀의 카메라가 설치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사용할 락커룸 앞과 주차장, 경기장까지 이어지는 복도.

그 앞을 PD와 함께 돌며 설치를 확인하자니 오늘 있을 쇼를 위해 선수들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어디 한번 해보자고.’

오늘은 나와 오튼의 싱글 매치.

거기에서 러셀과 7월 페이퍼뷰를 향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던 대립을 다시 이어갈 예정이었다.

* * *

그 뒤로 오늘 있을 버닝콩의 시작될 때까지 계속해서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촬영이 이어졌다.

PD는 신의 곁에서 그 모든 준비 과정을 지켜보면서 점점 자신이 생각하는 기대치를 높여나갔다.

이건 일종의 다큐멘터리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큐멘터리가 무엇인가.

설명하는 것이다.

실재에 대한 설명.

모두가 자세히 알고 있지 못하던 업계 뒷면에 대한 묘사.

그걸 알게 된 사람들은 과연 프로레슬링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흥미롭군.’

적어도 PD는 이 업계가 완성되는 과정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프로레슬링이 가짜라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1997년, 바트 맥센이 텔레비전 쇼에서 그 사실을 인정하며 모두가 이 업계의 몰락을 예견했다.

하지만 프로레슬링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팬들은 더 결속력을 가지고 응원을 보내주었다.

PD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이들이 보이는 형제애.

링 위에서 싸우는 이들은 있어도 결국 정말로 나쁜 인간은 없다.

그 사생활과는 별개로 이 과정 자체가 프로레슬링의 일부였다.

락 밴드로 따지자면.

그들의 공연과는 별개로, 팬이 무대 아래에서 멤버들끼리 즐겁게 노는 것을 찾아보듯이.

그들이 만들어낸 쇼의 이면을 보는 게 이처럼 즐거울 줄이야.

‘굉장히 매력적인 콘텐츠야.’

아마 일반 대중들도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가짜라는 선입견을 깨고 즐길 수 있지 않을까.

거기다 한 가지 더 재밌는 점은 그들이 링 위가 아닌, 그 아래에서 경쟁심을 비춘다는 점이었다.

한창 오늘 함께 일을 할 러셀, 오튼과 이야기를 나누던 신이 가벼운 도발을 건넸다.

“러셀, 내 앞이라고 해서 쫄지 말고 잘해봐.”

“오늘 반응은 내가 다 가져갈 거니까 걱정 말고 보조만 맞춰.”

그게 또 마음에 들었다.

찝찝함이 없었으니까.

물론 신의 사람 다루는 능력이 출중할 뿐이고, 그가 주변인들을 그렇게 만들 뿐이었지만.

그걸 모르는 PD는 마냥 프로레슬링에 대한 호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호감은 쇼가 시작되면서 동시에 크게 폭발했다.

프로레슬링 쇼.

그것은 하나의 예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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