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월요일 밤의 버닝콩.
90년대 초부터 시작되어 2005년 현재까지 단 한 주도 쉬지 않고 주간 생방송을 이어온 TV쇼.
그 기록은 기네스북에 등재가 될 정도였다.
TV쇼 중 최고는 아니어도 프로레슬링은 언제나 수요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낡았다.
그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90년대 후반, 특유의 세기말적인 감성으로 프로레슬링은 분명 가장 핫한 콘텐츠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가장 빛났던 순간이 지나고 스타들이 하나둘씩 떠나며 아무래도 좀 기세를 잃지 않았나 하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었다.
‘하지만 이건 대체…….’
2층 관객석에 앉아있던 PD는 당혹스러운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프로레슬링을 시청한 적이 없지는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참고 자료로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방송계 선배나 주변인들은 분명 예전에 비하면 프로레슬링의 위세가 많이 약해졌다고 하는데.
‘이게 그 정도라고?’
분명 아니었다.
방송국 신참 시절, 죽어라고 봤던 게 당시 락콜드가 주인공으로 이끌어나가던 버닝콩이었다.
생방송이 진행되면서 어떤 식으로 카메라워크가 이어지는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를 연상케 했다.
쨍그랑! 하고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걸어 나오는 락콜드.
신의 모습에서 그게 느껴졌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다들 날 기다렸나?]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놀라운 광경이었다.
링 위에서 그가 마이크를 쥐자 사람들은 마치 종교지도자를 앞에 둔 것 같은 반응을 보냈다.
[미안, 미안. 내 의무를 잠시 망각했었군. 너희들이 싫어하는 멍청이를 대신 패주는 일 같은 거.]
[Russell Sucks! Russell Sucks! Russell Sucks! Russell Sucks!]
관객들과의 호흡이 완벽했다.
[러셀 하트나 랜스 오튼 같은 녀석들 말이지. 아쉽게도 닉 플레어는 조금 힘들겠군. 나는 노인을 패는 취미는 없어서.]
링 위에서 지팡이를 잡은 것처럼 자세를 취해 보이는 신. 그것을 본 사람들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 모습이 이 멋진 쇼를 통해서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아까 회의를 하면서 분명 오늘은 경기만 한다고 했었는데.’
갑자기 마이크를 잡다니.
하지만 그걸 모르는 사람들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으니 애드립으로 봐도 괜찮은 걸까.
자신이 여기 앉은 이후 갑작스럽게 각본이 바뀌었나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직후.
PD는 정말로 신이 대단한 인물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다.
그는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곧바로 각본에서 활용했다.
[하지만 이유가 있었어. 사실 이번에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찍게 되면서 여러모로 바빠졌거든.]
[Booooooooo……!]
[야유로군. 너희들이 날 너무 사랑하는 그 마음 잘 알겠어. 그러니 나도 확실하게 말을 해두지.]
신은 과장된 톤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PD는 그런 그의 모습을 상황에 몰입하며 지켜보기 시작했다.
[난 이 회사를 성공의 ‘과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달라. 내 성공은 바로 여기에 있거든.]
역동적인 핸드 제스처.
사람들이 박수를 보냈다.
이 회사, 다시 말해 프로레슬링을 이어질 성공의 발판으로 삼는 것.
더 팍이 그랬고 브룩 레스너가 그러했다.
WWF 팬들은 그런 상황을 겪으며 염증을 느껴왔다.
하지만 신은 자신이 그런 인간이 아니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그 말에 설득되어 환호를 보내주었다.
[말이 좀 길었군. 난 원래 행동으로 보여주는 남잔데 말이야. 그러니까 오늘 할 일을 해야지.]
씨익 웃은 신은 입장로 쪽으로 손짓하며 호쾌하게 소리쳤다.
[나와! 랜스 오튼!]
[Yeeeeeeeeeaaaaaaahhhhh!]
사람들의 열광적인 환호.
밀폐된 경기장 안이 진동했다.
PD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치 잘 만든 3D 영화를 보는 것처럼 의자가 크게 떨렸다. 돌아보니 자신을 제외한 사람들은 모조리 자리에서 일어선 상황이었다.
주춤거리며 그들과 함께 일어선 PD는 경기장 전체에 울려 퍼지는 ‘악당’의 음악을 듣게 되었다.
째깍, 째깍.
혁명의 시간.
현재 분쟁을 빚고 있는 바티스타를 제외한 레볼루션 멤버 세 사람이 천천히 링으로 입장했다.
“호오.”
그 연출 하나하나가 멋졌다.
거기다 관객들이 보내는 야유를 두고도 여유롭게 대응하는 게 정말 어딘가의 거물처럼 느껴졌다.
마치 영화 속의 마피아처럼.
그 중심에 선 오튼은 자신의 명품 몸매를 과시하며 링으로 올랐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험악한 얼굴로 말다툼을 주고받았다.
물론 보이기만 그랬을 뿐, 실제로는 환호에 숨겨 잘 해보자는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
그것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이들이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거기다 표정이 워낙 험악해서.
하지만 PD는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약간 그런 상황에 대해서 의문을 느꼈다.
상상했던 것 이상의 반응에 프로레슬링이 가진 ‘쇼’로서의 매력에 대해서 새삼 느끼게 되었으나.
과연 이 정도의 환호에 걸맞은 경기가 나올 수 있을까 싶었다.
어차피 프로레슬링의 동작은 과장된 것뿐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 생각은 경기가 시작된 직후 이어진 신의 공격 하나에 그대로 묻히고 말았다.
쩌억-!
“어?”
슈퍼 킥.
그것이 PD의 눈에는 상대의 안면을 제대로 친 것처럼 보였다.
거기다 저 흉악한 소리.
‘죽은 거 아니야?’
그는 경악해 생각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진짜로 안면에 꽂히게 찬 것은 아니겠지?
* * *
이런 제기랄.
망했다.
“야, 야. 오튼.”
“…….”
실수였다.
원래 계획은 랜스 오튼이 레볼루션 멤버들과 대화를 나누는 틈을 타서 내가 슈퍼 킥을 차는 건데.
오튼 이 똥 멍청이가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오면서 원래 계획과 달리 타점이 흔들려 턱을 제대로 맞았다.
덕분에 오튼은 완전히 뻗었고.
나는 쓰러진 녀석을 붙잡고 안면을 후려치며(?) 깨우려고 했다.
아니,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여기서 내가 막 케이페이브를 깨고 걱정해주면 쇼가 망가지는데.
“잠깐, 신!”
바로 그때, 심각함을 느낀 심판이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는 나를 몸으로 밀어내고 오튼의 상태를 체크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심판을 바로 밀어냈다.
나는 그대로 심판을 링 포스트에 밀어붙이고 화를 내는 것처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시, 신! 오튼 상태가……!”
“안 돼요. 경기 어떻게든 제가 끌어갈 테니까 시간 좀 주세요.”
“괜찮을까요?”
“맡겨둬.”
방법이야 많다.
일단 나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오튼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
녀석은 아직도 기절한 상태.
‘어쩔 수 없군.’
나는 녀석을 턴버클에 걸쳐두고 마구잡이로 후려패기 시작했다.
손바닥을 안쪽에서 바깥으로 휘두르며 녀석의 가슴을 후려쳤다.
쫘악-!
찹.
그리고 바깥으로 나온 손을 안쪽으로 휘두르며 얼굴을 긁어냈다.
그와 함께 세차게 발을 구르며 주먹질의 타격감을 더해주었다.
콰앙!
훅.
찹.
훅.
찹, 훅. 찹, 훅.
그걸 연이어 반복하며 늘어지려는 오튼을 어떻게든 다시 세웠다.
호쾌한 브롤러 파이팅을 본 관객들은 내 이름을 연달아 소리쳤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일어나라, 일어나.
쫘악-!
오튼의 가슴에 피멍이 맺혔다.
일어나라고!
바로 그때, 링 아래쪽에 서있던 플레어가 나에게 도움을 주었다.
“신.”
부르는 소리에 힐끔 돌아보자 플레어가 내 발을 잡고 당겼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며 그에게 이끌려 링 아래로 내려갔다.
[Booooooooooooo……!]
야유가 이어졌다.
돌아본 나는 링 위에 올라오려고 심판과 실랑이를 벌이는 러셀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했다.
이거 원.
믿음직한 동료들이다.
“고맙습니다. 플레어.”
“자자, 가지고 놀아.”
“옙.”
작게 대화를 주고받고 나는 그대로 플레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다시금 환호가 쏟아졌다.
플레어는 내가 주먹질을 할 때마다 과장된 동작으로 나가떨어지며 이쪽의 기세를 살려주었다.
관객의 시선이 집중된 사이, 링 위의 오튼은 심판이 맡아서 그 상태를 계속 체크하는 중이었다.
“잘한다!”
“살살해!”
역시 팬들의 큰 존경을 받는 플레어이기 때문일까.
반응은 환호만이 일었지만, 동시에 양분되었다.
플레어는 악역으로서 전설적인 경지에 이른 선수였다.
그렇기에 ‘얻어맞는’ 동작을 수행하는 것만으로 환호를 받았다.
‘못 말리겠군.’
그래도 내가 밀리지는 않았다.
나는 아예 링 아래에 있던 아나운서 테이블까지도 이용했다.
원래 이건 경기 후반부에 나올 예정이었지만 오튼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순서를 바꿨다.
완전히 엉망진창.
하지만 그것이 도리어 예상을 벗어난 전개로서 사람들에게 먹혔다.
그리고 놀라운 점은.
러셀과 플레어 역시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부분이었다.
“지금 러셀이 심판을 공격했네.”
“끌어오자는 거죠?”
“그래.”
나는 긍정한 플레어의 안면을 그대로 힘차게 후려갈겼다.
그리고 심판이 기절해있는 것을 돌아보며 그대로 철제 의자까지 들었다.
하지만 플레어에게 공격이 이어지려던 순간, 뒤로 다가온 러셀이 내게서 의자를 빼앗아갔다.
쩌억-!
머리에 꽂히는 철제 의자.
나는 머리의 충격을 최소화하고자 손을 교차시켜 막아냈다.
이어지는 공격.
찌릿하게 퍼지는 통증.
내가 바닥에 쓰러지자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야유가 뒤를 이었다.
[Boooooooooooooooooo-!!]
바리케이드 바로 뒤쪽에 있던 관객들은 아예 쌍욕까지도 날렸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7월 페이퍼뷰까지 대립을 이어가기 위한 최대의 범프를 실행할 예정이었다.
‘아, 제기랄.’
더럽게 아플 테지만.
이건 정말 멋진 장면이겠지.
* * *
대체 무슨 짓을 하나 싶었다.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PD는 그날 저녁 촬영팀 멤버들 사이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친 줄 알았지.”
의자를 맞은 신이 쓰러지는가 싶더니 플레어와 러셀이 링 옆에 있던 아나운서 테이블에 눕혔다.
그 안에 있던 각종 기계들을 꺼내 내던지고 해설자들을 쫓아내며 그들은 마구 행패를 부렸다.
그걸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슈퍼 히어로는 지금 빌런들의 손에 의해 위기에 처한 상태였다.
쓰러진 심판.
신의 공격에서 뒤늦게 회복한 오튼이 링 아래로 비틀거리며 내려왔다. PD는 그 디테일에 감탄했다.
“실제로는 최대한 안전하게 때린다면서? 근데 봤을 때 정말로 기절한 줄 알았다니까?”
“거기서부터는 제가 설명하도록 하죠. PD님.”
그렇게 말한 것은 올해 42세가 되는 카메라 감독, 잭 오웬이었다.
“사실 난 딱히 프로레슬링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야. 어렸을 적의 추억이 있긴 하지만 딱 그 정도.”
그리고 그 추억이 깨진 건 가난했던 집안 때문이었다.
비싼 WWF의 표 값을 감당할 수 없었던 그는 프로레슬링을 보지 않는 길을 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신과 동료들이 링 위에서 벌인 일을 보고는 예전과 같은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그래, 그러니까 정말로 턴 버클 위로 올라가더라니까?”
링 위로 다시 올라간 러셀이 로프와 로프를 연결하는 기둥, 다시 말해 포스트 위로 올라갔다.
“그게 TV로 봤을 때는 몰랐는데, 링 아래로는 3미터 이상이야. 그 위에서 몸을 던지는 거지.”
정말 저 위에서 몸을 던지나?
서로 정말로 증오하는 것도 아닌데,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그 생각은 바로 변했다.
“그 와중에도, 미쳤더군.”
러셀은 그냥 날아오르지 않았다.
크레센트.
“완벽한 초승달이었어.”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다.
“두 사람 다 말이야.”
프로레슬링을 봐왔던 만큼, 카메라 감독은 단언할 수 있었다.
링 포스트 위에서 아나운서 테이블까지의 거리는 대략 3미터.
그걸 ‘역’으로 돌면서 뛰어올라 피폭자를 덮치는 것도 그렇고.
“진짜 대단한 건 신이었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러셀을 믿었다.
“너희라면 가능하겠어? 3미터 위에서 100kg에 달하는 인간이 자신을 향해서 떨어져 내리는데.”
몸을 움찔하지도 않았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지금 상황, 다시 말해 철제 의자를 맞고 뻗은 연기를 소화해냈다.
투콰앙-!
그렇게 꽂힌 크레센트.
무너지는 테이블.
미쳐 날뛰는 사람들.
야유와 환호가 뒤섞여 귀가 먹먹한 가운데, 카메락 감독은 자신의 감정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경외? 아니, 경의. 서로 싸우면서도 협력한다는 게 느껴져서 정말로 멋진 순간이었어.”
그것을 느낀 건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TV로 지켜보던 시청자들.
전문가들.
링 뒤의 수많은 선수, 관계자들.
관객들.
심지어는 기술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플레어와 오튼까지도.
광기에 빠진 것처럼 동작을 수행한 두 사람을 보고는 경악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복수심으로 완전히 미친 러셀은 완전히 K.O. 당한 신을 링 위로 끌고 올라와 마구 두들겨 팼다.
오튼과의 경기는 신의 반칙승으로 끝났지만, 더 이상 그것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신의 이마에서는 피가 흘렀다.
그리고 러셀은 마지막 순간.
세상의 모든 증오를 다 받겠다는 듯이 이렇게 이야기했다.
[일어서지 마라.]
[…….]
[그대로 쓰러져 있어. 더한 꼴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