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180화 (180/634)

180.

백스테이지로 돌아온 우리는 일단 오튼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제대로 슈퍼 킥을 맞았던 녀석은 이후로도 서있기만 할 뿐, 제대로 의식을 가지고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자니 좀 걱정이 됐다.

프로레슬러가 겪을 수 있는 최악의 부상 중 하나.

뇌진탕이 아닐까.

“어으, 어어.”

오튼이 괴상한 소리를 냈다.

그 상태를 살펴보던 팀 닥터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조금 증상이 있군.”

“심각한가요?”

“그건 아니고. 그래도 당분간 경기는 뛰지 않는 편이 낫겠어.”

“기억이 없는데요. 한 2년 정도는 쉬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유급으로.”

오튼이 엄살을 부렸다.

“점심으로 뭘 먹었지?”

“타코.”

“저녁은?”

“더블 타코.”

“어제 데이트한 여자 이름은?”

“캐시 존슨.”

“그렇다면 괜찮아.”

닥터가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최악은 아닌 모양이었다.

오튼의 실수였으나 그래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나는 땀으로 범벅인 녀석을 부축해주었다.

“이열, 웬일이래?”

“기운 좀 도냐?”

“가면서 피자 먹자.”

“근손실 와.”

풀이 죽는 오튼.

녀석과 러셀을 일단 버스로 데려다놓은 후, 나는 다시 경기장으로 돌아와 프로그램 PD와 만났다.

“신, 오늘 굉장했습니다.”

“감사합니다. PD님.”

“다들 좋았어요. 오튼의 기절한 연기도 정말 훌륭했고.”

“……그, 그렇군요.”

오튼은 깨있을 때보다 기절해있을 때 오히려 더 낫다는 건가.

어쨌든, 다소 주먹구구식이었으나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었다.

다들 믿음직해졌다.

……오튼은 기절해서 믿음직한 게 어딘가 조금 슬픈 일이었지만.

놀라운 건 러셀이었다.

플레어는 당연했다.

그는 오래도록 이 일을 해왔고 실력 자체도 전설적이었으니까.

빠르게 돌발상황에 맞춰줘서 어색하지 않게 경기를 풀어갈 수가 있었지.

하지만 러셀은.

‘성장했어.’

분명히 그랬다.

이 자식.

악역으로서 자신이 느끼는 나에 대한 증오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도 그랬었다.

세상에 대해 내가 느끼는 감정.

지옥 같던 삶에서 벗어나 한 번의 기회를 더 받은 뒤, 내가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승화시켰다.

타인에 대한 분노.

나 자신에 대한 실망.

다시 후회하지 않겠다는 감정.

그렇게 만들어진 게 SIN이었다.

‘이거 정신분석학적으로 생각했을 때 굉장히 좋지 않을까.’

남들 앞에서 쉽게 드러내기 힘든 부정적인 감정도 연기의 형태로 토해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러셀은 지금 자신이 내게 느끼는 열등감을 솔직하게 풀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걸 확장시켰다.

열등감은 분노로, 그리고 분노는 증오로 휙휙 뒤바뀌기 마련이다.

그 복합적인 감정을 각본과 함께 내게 풀어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기술을 쓸 때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조심스러워지는 것이 녀석의 프로의식을 증명했다.

어디까지나 각본은 각본일 뿐.

그렇게 PD와 다음 스케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나는 곧바로 이동을 위해 버스로 돌아갔다.

다음 스케줄은 뉴욕으로 향해서 티파니와 시간을 보내는 것.

그것을 되새기며 주차장으로 나가자 러셀이 버스 앞에 서있었다.

“신.”

“어, 러셀. 오튼은 좀 어때?”

“바로 잠들었어.”

“그래, 출발해야지.”

“……오늘 나 어땠냐?”

“잘했어.”

“그래?”

러셀이 날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직 부족해.”

그러더니 슥 버스로 돌아갔다.

“…….”

그러고 보니 문제가 하나 있다.

녀석은 이렇게 나에게 감정을 쏟아낸 그날에 한해서는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

훈련생 시절의 대립했을 때도 그렇고, 자기는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케이페이브를 지킨다.

‘감정과잉이야, 감정과잉.’

그게 또 귀엽게 느껴져 낄낄 웃으며 나는 곧장 버스에 올라탔다.

* * *

뉴욕 맨하탄의 한 레스토랑.

예약에만 1년 이상을 잡아야 한다는 유명한 가게였지만, 오늘 이곳은 완전히 텅 빈 상태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협찬.

이번에 체인점 사업을 시작하면서 레스토랑에서 좀 더 홍보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완전히 최상급 레스토랑은 아니고, 그 어중간한 선에 걸쳐있는 상태라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에요.”

티파니는 내 나비넥타이 모양을 한 시간째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말하기를 첫 TV프로그램인 만큼 예쁘게 보여야 한다고 했던가.

덕분에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석상처럼 가만히 있어야 했다.

“인기는 점점 늘어나고 있는 상태에서 선택지는 두 가지였죠.”

“……고급화를 시도하던가, 아니면 지금처럼 체인점 사업을 하던가?”

“네. 그중에 후자를 택한 거죠. 아무래도 최고급 레스토랑과 비교하면 맛이 엄청 좋진 않거든.”

짓궂게 웃는 그녀.

그 표정이 귀엽게 느껴졌던 나는 일단 시선을 바깥쪽으로 돌렸다.

‘일하는 중이니까.’

귀여워하는 건 나중에 하자.

그런 생각을 하며 레스토랑을 돌아보자 인테리어가 휘황찬란한 게 꽤나 공을 들였다는 느낌이었다.

오늘을 위해 고용한 연기자들이 PD에게 설명을 듣고 있었고,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가 눈에 띄었다.

“그래도 평소에 못 먹던 음식이라서 나름대로 기대가 되는데.”

“이제 많이 먹을 거예요. 이건 온전히 당신의 공이니까.”

“내 공?”

“그래요. 여기 이 협찬은 놀랍게도 당신 때문에 들어온 거라.”

티파니는 내 뺨을 꼬집었다.

“축하해요. 타이거. 이제야 슬슬 사람들이 당신의 진가가 어떤지 알아보기 시작하는 것 같네.”

“프로레슬링 팬인 거 아니야?”

“물어봤더니 헬 쏘우를 보고선 팬이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팬이 될 만한 영화인가.”

“살인마를 좋아하는 게?”

“아무래도 그렇지.”

“하지만 그만큼 멋지니까.”

그렇게 말한 티파니는 그제야 만족한 듯 손을 떼고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역시 잘생겼어.”

“당신도 멋져.”

“오늘 잘 ‘싸워’봐요. 우리.”

검은색의 무릎까지 오는 드레스.

처음 파티에 참여했을 때와 비슷하게 젊은 느낌이었으나 그것보다 조금 더 캐주얼한 느낌이었다.

실제로 꽤나 나이가 어린 그녀에게는 굉장히 잘 어울렸다.

사장이나 후계자라는 직함을 다 뗐을 때의 티파니 맥센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준비를 끝마친 우리는 곧바로 PD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바흐의 클래식이 흘러나오고 있는 레스토랑. 돌아본 PD는 내 모습을 보고는 씨익 웃어 보였다.

“확실히 ‘거창’하군요.”

“거기다 눈에 띄고.”

티파니가 나를 툭툭 건드렸다.

나는 수많은 인종이 모인 자리에서 가장 거대한 남자였다. 그러니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잘 부탁드립니다. 자리에 앉으면 요리를 시작할 테니까 천천히 연기에 들어가 주세요.”

내 솜씨를 믿는 것인지 PD는 굳이 거창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가 레스토랑 중심의 테이블에 앉자 그 주변에 있는 연기자들에게 세세한 지시를 내렸다.

“각본 다 보셨죠? 식사는 조용히 부탁드리고요. 대화는 캐릭터에 맞춰서 자유롭게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20개가 넘는 테이블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주문을 했다.

연기자의 대부분도 연인 행세를 하고 있는 게 특징이었다.

젊은 층도, 나이가 많은 층도 있다. 로맨틱한 레스토랑으로 인식시키고자 하는 클라이언트 측의 요구였다.

그런 상황에서 티파니와 나는 오늘 꽤나 심하게 다툴 예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응?”

“우리 다툰 적은 없지 않아?”

“그러게요. 잘 맞아서?”

“당신 이해심이 좋아서.”

“하하! 매일 밤 미친 짓을 하는 프로레슬러에게 맞춰주는 게 사실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죠!”

환하게 웃는 티파니.

이렇게 순수한 반응을 보일 때면 번듯한 사업가라기보다도 그냥 평범하게 발랄한 여대생 같았다.

가정 문제가 좀(많이) 있고 내가 그것을 부추겼다. 그리고 그쪽에서 먼저 호감을 보여 진지하게 만나는 상태.

확실히, 우린 싸운 적이 없었다.

서로가 워낙 잘 맞았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티파니가 내 성격에 어느 정도는 맞춰주는 편이었고.

예를 들자면 이러했다.

프로레슬러의 부인들은 그들이 하는 일을 거의 보지 않는다.

하드코어의 전설이라고 불렸던 선수, 믹 졸리 같은 경우에는 자신의 시합에 부인과 아이들을 초대했다가 트라우마를 남겨주었지.

그렇기 때문에 보통 부인들은 프로레슬러란 직업을 싫어했다.

당연하지. 이렇게 몸 축내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일을 하는 남편을 누가 좋아하겠나.

하지만 티파니는 내가 위험한 범프를 해도 믿고 계속 경기를 봐주고 굳이 나무라지는 않았다.

‘괜찮아요?’

내가 심한 경기를 한 다음 날 그리 물어보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 여자 쉽게 만날 수 없다. 꽉 잡고 절대 놔주지 마라.]

문득, 5번의 이혼과 6번의 결혼을 하신 닉 플레어 선생의 조언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하긴, 거의 없기는 하지.

남자의 꿈을 믿어주고, 험난한 길이라도 함께 걸어 나갈 수 있는 파트너가 말이다.

‘부모님한테도 잘 하고.’

그것은 자기 가족들 사이에 문제가 있는 만큼 화목한 우리 집안에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겠지.

정말 이런 여자가 또 없다.

……전생의 관계를 생각해서 좀 거리를 뒀던 그녀에게 이처럼 마음을 빼앗기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따라서 나 역시도 될 수 있는 한 티파니를 배려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안 싸우는 거다.

‘애초에 이렇게 만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싸움은.

프로레슬링 스타일로 설명하자면, 티파니를 악역으로 부킹하는 식으로 시작되었다.

* * *

이 레스토랑이 앞으로 밀고자 하는 컨셉은 ‘격식을 많이 차리지 않아도 되는 기품 있는 장소’였다.

특별한 드레스코드를 따지지 않고 셔츠에 재킷 정도면 충분한 곳.

하지만 일의 피로를 버티고 온 내가 악의 없이 턱시도 차림으로 나타나버리고 만 것이다.

최고급 레스토랑에서조차 과도하다고 지적받을 정도의 차림.

하지만 나는 변명거리가 있었다.

방송에서는 거기에 대해 날 만나고 노골적으로 눈썹을 찡그리는 티파니를 보여주며 설명하겠지.

[아니, 진짜로.]

평범한 셔츠 차림의 인터뷰.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그런 식으로 당시 상황에 대한 심리 묘사를 인터뷰로 채우는 게 보통이다.

[옷이 그것밖에 없었다고요. 턱시도. 연말에 WWF 시상식에 사용했던 턱시도인데, 마침 버스에 운동복 말고는 그것만 있지 뭡니까.]

그리고 이제 티파니와 내가 언쟁을 벌이는 모습이 나오겠지.

[아니, 신. 왜 그렇게…….]

[왜 그래?]

[여기는 가볍게 재킷 정도만 입고 오면 괜찮다고 했잖아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보세요.]

그리고 PPL의 일환으로 고급스럽게 꾸민 연기자들을 보여준다.

이렇게 멋진 사람들이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레스토랑.

곧 전국에 체인점이 생길 예정이니 많이들 방문해주세요.

그들 또한 이곳을 멋지게 홍보하기 위한 각본의 일부였다.

[혼자서 웬 턱시도. 웃겨.]

[적당히 합시다. 밥이나 먹고 가면 됐지. 무슨 허영심을 부려.]

[허영심? 당신 생각해서 여기까지 데려온 건 바로 저예요.]

그리고 티파니의 인터뷰.

[정말 웃기지 않아요? 저는 뭐 일 안 하냐고요! 안 그래도 격무에 시달리다가 겨우 시간 낸 건데!]

다시 나의 인터뷰.

[아니, 솔직히 말해서 미국인의 소울 푸드는 피자죠. 우리가 영국 놈들도 아니고 고기를 왜 썰어.]

적당히 거친 대사를 내뱉어서 지금 시대에 통하는 마초적인 이미지를 구축하려고자 시도한다.

[그래도 전 최선을 다한 겁니다. 왜냐면 그것이 제가 여자를 만날 때 지키는 신조거든요.]

[그 바람둥이! 분명히 스테이시하고 릴리하고 뭐 있다니까!]

[아니, 그 이야기를 대체 왜 합니까? 두 사람하고는 단지 비즈니스 관계일 뿐이라고요.]

한숨을 내쉬는 나.

일촉즉발의 상황을 알리며 잠시 몇 개의 광고가 지나간 뒤.

화면은 이렇게 레스토랑에서 마주보고 앉아있는 우리를 비춘다.

단 한 번도 서로에게 언성을 높여본 일이 없는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가짜 싸움’이었다.

하지만 역시 티파니는 능숙하게 자신의 역할을 소화해냈다.

“갑니다!”

따악-!

방송용 슬레이트 소리와 함께 녹화가 시작되었다.

자리를 안내한 웨이터가 우리에게 각각 메뉴판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티파니는 메뉴판은 보지도 않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의 와인은?”

“……프랑스산인 샤토 라필드-로쉴드가 준비되어있습니다.”

“가져와요.”

그렇게 해서 자신이 느끼는 짜증이 어떤지 표현하는 티파니.

속으로 가볍게 웃은 나는 반대로 겉으로는 눈썹을 찡그렸다.

“또 마시려고?”

“……무슨 상관이에요?”

“아니, 기왕 데이트인데 식사와 함께 곁들이는 게 맞지 않겠어?”

“남이사.”

아, 제기랄.

분명 화가 나야 할 상황인데 왜 이렇게 귀엽게 느껴지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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