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라스트 맨 스탠딩.
마지막에 서있는 건 둘 중 하나.
그 경기는 링과 백 스테이지를 오가며 진행되는 것이 특징이었다.
반칙패와 링 아웃 같은 규정이 없는 만큼 경기 양상은 프로레슬링보다는 길거리 싸움에 가까웠다.
물론 연출을 그런 식으로 한다는 것이지 실제로는 최대한 서로의 안전을 생각하며 경기에 임했지만.
그럼에 다소의 상처는 분명 각오해야 할 정도로 위험한 경기였다.
하지만 대립의 강도를 생각하면 서로를 원 없이 박살 낼 수 있는 이런 경기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라스트 맨 스탠딩 매치.
그것은 이 마이티 아메리칸 배시의 메인이벤트로 배정되었다.
어차피 회사를 나갈 실버백을 굳이 메인이벤트에 세울 필요가 없다는 회사의 판단 때문이었다.
그렇게 세미 메인이벤트로 배정된 WWF 월드 챔피언십 매치가 트리플H의 승리로 끝났다.
[트리플H가 다시 한 번 월드 챔피언에 등극합니다! 바티스타에게 확실히 메시지를 보냅니다!]
[자기 자신을 꺾는 건 월드 챔피언을 쓰러뜨리는 거다! 확실히 그렇게 어필을 하고 있군요!]
이제 나와 러셀의 경기가 남았다. 나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올게.”
“……괜찮은 거지?”
“아마도.”
뒤쪽에 있는 오튼과 적당히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바로 나왔다.
재킷을 걸치고, 선글라스를 쓰고. 바지 고무줄도 다시 묶었다.
복도를 걸어가면서 인기척이 느껴져 돌아보니 러셀이 서있었다.
비웃듯 웃으며 물었다.
“긴장은 풀었냐?”
“…….”
대답을 않는 녀석.
좋은 상태라는 걸 느꼈다.
그렉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분명 멋진 경기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기에 관해서 이야기를 할 때도 녀석은 전보다 훨씬 과격한 아이디어를 많이 내놨으니까.
그렇게 고릴라 포지션으로 돌아가자 실버백과 트리플H가 흉흉한 분위기 속에 돌아온 게 보였다.
“고생했어요.”
그런 내 말에 실버백은 코웃음을 치며 곧장 락커룸으로 돌아갔다.
그는 환상적인 재능을 지닌 선수였으나 너무 빨리 스타가 되었기 때문인지 프로 정신이 부족했다.
이후로도 돈은 충분히 벌었겠다, 운동 관련 사업을 전개하면서 업계에서 오랫동안 떠나있지.
아마 나와는 이후로도 관련되지 않을 인간이라 나는 적당히 무시하고 트리플H를 돌아보았다.
숨을 몰아쉬며 잠시 침묵하던 그가 이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뒤를 맡기마.”
“그렇게 하죠.”
싱긋 웃으며 받아친 나는 그대로 경기에 나설 준비를 끝마쳤다.
러셀도 나와 약간 떨어져 선 채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광고가 이어졌다.
[이안 맥그리거와 스칼렛 요한나 주연! 아이슬란드! 지금 극장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맥주가 먹고 싶으면 바로 이거지! 크하! 맛 좋다!]
[기억하세요. 최고에게는 최고의 기기가 필요한 법입니다.]
영화, 맥주, 핸드폰 등등.
수많은 기업이 이 쇼에 관심을 가지고 광고를 넣어주었다.
그게 이어지는 동안 고릴라 포지션에서는 나와 러셀을 배려해 침묵만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광고가 끝난 뒤, 화면이 다시금 이 경기장을 비추기 시작했다.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보고 있을 7월의 페이퍼뷰, 마이티 아메리칸 배쉬.
그 메인 이벤트.
[신과 러셀 하트가 격돌합니다!]
[라스트 맨 스탠딩!]
[승자는 서있고 패자는 영원히 일어서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이 링에서 승자로 남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새겨 지워지지 않는 기록이 되도록!]
[과연 누가 승자가 될 것인가! 지금부터 확인해보겠습니다!]
“러셀!”
음향 감독이 소리쳤고, 팔짱을 기고 있던 러셀이 먼저 나섰다.
키이이이이이이잉-!
날카로운 기타 소리와 함께 그가 커튼을 걷고 입장을 시작했다.
[Booooooooooooooo-!]
자칭, 킹 오브 하트를 향해 쏟아지는 수많은 팬들의 야유.
하지만 러셀은 그런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우리는 서로 행운을 빈다는 응원 한마디조차 주고받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어차피 남아있는 감정은 나가서 몸으로 표현할 생각이었으니까.
지금 상황은 간단했다.
탑 독 선역과 언더 독 악역.
선역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악역.
처음에는 좋았다.
하지만 러셀은 가면 갈수록 그것을 좋았던 아이디어만큼은 표현하지 못했다. 뭔가 기계적이랄까.
정확히 정해진 선 안에서만 날 미워하는 감정에 몰입했고 그 덕분에 관객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
따라서 나는 녀석이 날 정말로 미워하도록 각본을 살짝 비틀었다.
그리고 그게 잘 통해, 녀석은 더 이상 감정을 숨기지 않게 되었다.
자기가 누구인지.
왜 분노를 느끼는지.
그 모든 것을 링 위에서 표현할 각오로 나와 경기를 구성했다.
뭐, 누군가는 여기에서 ‘정말로 감정이 들어가면 위험할 수도 있지 않나요?’라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또 간단히 해결된다.
이 무대 위에서 감정을 드러내며 서로를 대한다는 건, 반대로 말하자면 그만큼 서로를 신뢰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나도 러셀을 믿었다.
야유 속에서 링 위로 올라가는 녀석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다음은 내 차례.
아-아아아-아아아아아-!
성가의 합창과 함께 자극적인 비트가 경기장 내에 울려 퍼졌다.
[Yeeeeeeeeeaaaaaahhhhh!!]
그에 맞춰 커튼을 걷고 나가자 5만의 관객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사람들은 큰 소리로 연주되는 테마를 따라 부르며 날 환영해주었다.
나는 관객들의 노래에 고개를 까딱거리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내가 가만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미친 듯이 환호를 보냈다.
웃기라도 하면 더 커졌다.
뻗어져 오는 손을 터치라도 해주면 오늘 밤 잠을 못 이루리라.
이것이 슈퍼스타다.
나는 그것을 과시하듯 입장로 위에 서서 러셀을 바라보았다.
침묵한 채 날 바라보는 녀석.
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내가 벨트를 번쩍 들어보이자 등 뒤로 힘차게 폭죽이 터져 올랐다.
지금껏 수없이 나 자신을 증명해온 끝에 팬들의 인정을 받았다.
악역을 마음껏 조롱하고 팬들이 원하는 대로 엉덩이를 걷어차 주는, 그야말로 타고난 선역 탑 독.
그것이 바로 지금의 나였다.
* * *
땡땡땡!
그렇게 경기가 시작되었다.
메인이벤트.
라스트 맨 스탠딩.
모두가 기대하는 최고의 매치.
그 첫 번째 공격은 바로 앞으로 나선 러셀의 힘찬 ‘싸다구’였다.
쫘악!
봐주지도 않았다.
[Uoooooooohhhhh!]
깜짝 놀라는 사람들.
제대로 먹인 한 방에 턱이 돌아가 있던 나는 이내 씨익 웃어 보였다.
입술이 찢어져 피가 흘렀다.
하지만 무시하고 러셀의 안면에 그대로 힘차게 박치기를 먹였다.
짜아악-!
이마와 이마 사이에 손바닥을 대고 발을 구르며 힘차게. 동시에 허벅지를 차서 타격감을 더했다.
[Yeeeeahhhh!]
호쾌한 받아치기에 이어지는 환호.
그렇게 러셀과의 클래스 차이를 보인 나는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전매특허……까지는 아니고 위대한 브롤러 선배들이 써오신 찹 앤 훅으로 녀석을 코너까지 몰아붙였다.
“크윽……!”
전형적인 브롤러 파이팅.
나는 원래 그다지 슬램이나 수플렉스 기술을 사용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건 (설정 상) 러셀 하트를 만나기 전까지의 일이었다.
나와 반대편 어깨를 맞대고 붙잡힌 러셀의 몸이 채찍처럼 휘면서 떠올라 반대편으로 힘차게 떨어졌다.
스냅 수플렉스.
나는 러셀에게서 브롤러 스타일이 사용해도 이상하지 않을 재빠른 메치기 기술을 몇 가지 가져왔다.
물론 그건 캐릭터 설정이 그런 거고, 실제로는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은 기술을 소화할 줄 알았지만.
어쨌거나 그런 이야기로 인해 우리의 드라마는 훨씬 더 깊어졌다.
“이 새끼……!”
러셀도 그랬다.
심판을 등진 상태에서 내 무릎을 찍은 녀석이 곧바로 다리를 잡았다.
집요하게 무릎을 노리며 피니시 기술인 하트 슈터에 대한 개연성을 쌓아나간다. 그건 분명 러셀이 나에게 영향을 받은 경기 방식이었다.
하지만 다른 녀석도 아니고.
내게는 쉽게 통하지 않았다.
다리를 붙잡힌 상태에서 몸이 들렸다. 나는 그대로 앞으로 굴러 피하며 달려드는 러셀을 맞이했다.
등진 상태에서 내 허리를 붙잡고 저먼 수플렉스를 시도하는 러셀.
손가락을 꺾어 풀어내며 나는 그대로 공격을 이어나갔다.
체인 레슬링.
미친 속도의 공방.
팔과 팔이 얽히며 꺾이고 우리는 심지어 다리까지 사용해 체인 레슬링을 더 재밌는 것으로 바꿨다.
러셀이 무릎을 들어 내 뒤통수를 뱀처럼 감았다. 그리고 나는 녀석의 무게에 붙잡혀 바닥에 쓰러졌다.
러셀은 허벅지에 힘을 줘 내 머리를 조르기 시작했다. 관객들은 답답함을 느끼는지 반응이 줄었다.
하지만 그건 모두 이후의 멋진 스팟으로 이어나가기 위함이었다.
괴로워하던 나는 바닥에 손을 짚고 그대로 물구나무를 서듯 몸을 힘차게 위로 들어올렸다.
놀라 고개를 드는 러셀.
그 위로 확 누우며 동시에 팔꿈치로 러셀의 복부를 찍어버렸다.
“커흑?!”
녀석의 허벅지가 풀렸고 나는 그대로 자세를 바꾸며 얼른 마운트 포지션으로 상황을 끌고 갔다.
러셀도 저항을 하려고 했으나 박치기를 한 방 먹이니 조용해졌다.
그렇게 잡은 마운트 포지션.
나는 러셀의 안면에 적당히 뻗지 않을 정도로 펀치를 후려갈겼다.
빠악-!
빠각!
퍼억!
펀치 한 방 한 방에 풀리는 러셀의 눈동자. 내게 환호가 쏟아졌다.
뭣도 아닌, 내 상대조차 아닌.
그런 악역을 박살 낼 때 사람들은 내게 몰입해 크게 환호를 보낸다.
“고작 이 정도냐?”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러셀이 몸을 움찔 떨었다.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치는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나는 무시하고 계속 주먹을 휘둘렀다.
점점 수세에 몰리는 러셀.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텐 카운트라는 긴 시간을 빼앗아야만 하는 경기. 그런 만큼 큰 기술로 뇌를 흔들어 놓아야만 했다.
러셀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링 아래에서 철제 의자를 가지고 다시 위로 올라왔다.
“죽여버려!”
“신! 힘내요!”
“지지 말아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이 내게 응원을 보내주었다.
러셀은 비틀거리며 이제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던 참이었다.
나는 그런 녀석의 머리를 노리고 힘차게 철제 의자를 휘둘렀다.
하지만 그 순간.
허공으로 힘차게 도약한 러셀이 철제 의자에 대고 드롭킥을 찼다.
빠악!
의자를 힘껏 위로 들어 올리고 있던 내 안면이 거기에 곧장 충돌했다.
완벽한 반격.
그로 인해 러셀의 턴이 되었다.
녀석은 참았던 분노를 터뜨리듯이 곧바로 나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의자 드롭킥이 터지는 순간 탄식을 내뱉었던 사람들이 이어서 러셀에게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Boooooooooooooo-!]
하지만 녀석은 개의치 않았다.
나 역시도 이 야유가 그다지 길게 이어지지 않을 것임을 예상했다.
내 뒤에서 허리를 단단히 움켜쥔 뒤로 풀썩 넘어지며 날 내던졌다.
저먼 수플렉스.
투쾅!
어깨부터 땅에 떨어진 나는 그대로 뒤로 한 바퀴 돌아 쓰러졌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반대편 어깨를 맞댄 상태에서 나는 힘차게 하늘 위로 들려졌다.
내 긴 다리가 허공으로 뻗으며 관객들이 러셀의 힘에 크게 주목했다.
위로 들어 올려 버티다 쓰러지는, 그 이름하야 버티컬 수플렉스.
짜릿한 통증에 입술을 질끈 깨문 나는 러셀의 공격을 피해 링 밖으로 데굴데굴 굴러서 나갔다.
하지만 녀석은 날 따라왔다.
심판도 우리를 따라왔다.
카운트아웃이 없는 경기.
링 밖에서 10초가 지나도 경기가 끝나지 않는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사실 무척이나 간단했다.
우리는 이제부터 로드 트립을 떠나는 보니 앤 클라이드처럼 신나게 링 밖으로 나다닐 예정이었다.
검은 가죽으로 된 바리케이드 앞.
경기장과 관객석을 가로막는 허리 높이의 구조물. 거기에 붙어 서있는 내게 러셀이 힘차게 달려들었다.
이미 이야기를 전해들은 보안 요원들이 사람들을 뒤로 물린 상황.
“으헉?!”
우리는 함께 넘어갔다.
쿵! 하고 아스팔트 바닥에 몸이 떨어졌다. 여기는 정말로 위험했다.
떨어질 때 낙법을 친다고 해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장소였다.
거기에서 함께 일어선 우리는 관객들 사이로 움직이며 계속해서 주먹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환호와 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뇌가 타버릴 것만 같았다.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었다.
5만 명의 관객들이 보내는 반응은 정말로 죽여줬다. 그만큼 이 경기에 기대를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정확히 해두자.
사람들의 이런 반응은 모두 날 향해서 쏟아지는 것이었다. 미묘한 차이였지만 그게 결정적이었다.
러셀은 아직 쌓지 못했다.
이 메인 쇼에서는 나를 이길 수 있을 정도의 레벨이 되지 못했다.
그 이유가 뭘까.
‘뭐라고 생각하냐. 러셀.’
생각한 답을 보여줘라.
나는 그것이 터지길 기대하며 러셀과 계속해서 주먹을 주고받았다.
여기가 가장 적절한 장소였다.
수많은 팬들.
다시 말해 우리가 이 쇼를 벌일 수 있는 이유들이 가득한 이곳.
바로 이곳이 선수로서 각오를 다지기에는 더없이 적절한 장소였다.
보안 요원들의 사이를 뚫고 사람들이 어떻게든 우리를 한 번 만져보고자 손을 뻗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나에게 있는 힘껏 펀치를 먹인 러셀이 주변을 돌아보며 버럭 소리쳤다.
“주둥아리 닥쳐!!”
[Boooooooooooooo-!!]
당연한 듯 쏟아지는 야유.
제대로 맞은 턱을 부여잡고 서있던 나는 이어 싱긋 웃어 보였다.
그래, 녀석에게는 이런 게 필요했다.
정해진 선을 넘는 과감한 패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