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187화 (187/634)

187.

이튿날 새벽.

병원 밥을 먹기 싫어 일찍 퇴원 수속을 밟고 나온 나는 병원 로비에서 잠시 발을 붙잡혔다.

“시, 신 선수 맞으시죠?”

“어제 경기 엄청 인상 깊게 봤어요! 사인 좀 해주세요!”

안타깝게도, 이제는 선글라스만으로는 커버가 안 되는 듯했다.

거기에 나는 동양인이다.

정확히 말해 동아시아인.

3억 명의 인구가 함께 살고 있는 미국 사회에서 1.5% 정도가 될까 말까 한 소수의 사람들.

거기다 나는 키도 크고 몸도 다부져서 얼굴을 가려도 사람들이 한 번씩은 돌아볼 비주얼이었다.

그러므로 모두들 ‘어?’ 하고, 곧바로 ‘어!’ 하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신 맞아요?!”

“우와, 신기하다!”

남녀노소.

인종을 가리지 않고 다들 내게 모여들었다. 나는 당혹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예전에 비슷한 상황을 겪어봤다.

병원 로비에서 시끄럽게 뭐 하냐면서 핀잔을 준 간호사가 있었지.

“…….”

희미해진 기억에 쓴웃음을 지은 나는 일단 그때 배웠던 대로 조용한 장소로 이동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간호사 무리가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또 혼나려나. 싶었는데.

“저희도 부탁드려요!”

아니었다.

덕분에 퇴원을 하고도 한동안 로비에 붙들려 있던 나는 팔에 감각이 사라질 즈음 겨우 빠져나왔다.

문 바깥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오튼이 낄낄거리며 입을 열었다.

“야~ 인기 좋으신데?”

“배고파. 밥 먹자.”

“와, 프로레슬러가 이렇게 인기가 좋아도 되는 거야? 무슨 틴 에이지 팝 스타도 아니고 여자애들이 너 보고 비명 장난 아니던데?”

“근데 넌 못 알아보더라.”

“……응.”

오튼이 시무룩해졌다.

내심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봐주었으면 하고 바란 모양이었다.

그렇게 좀 조용해진 녀석을 데리고 캠핑 버스로 돌아간 나는 기다리고 있던 러셀과 만났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의아해 눈썹을 치켜뜨자 자리에서 일어선 러셀이 말을 건넸다.

“몸 상태는 좀 어때?”

“죽지는 않을 정도. 넌 어떤데.”

“나도 그 정도야.”

쓰게 웃은 녀석이 발밑에 놓아두었던 스포츠 백을 어깨에 걸쳤다.

바로 이게 의아한 점이었다.

“어디를 다녀오려고?”

“프로모 촬영.”

“호오, 대단한데.”

벌써부터 일인가.

물론, 나도 오늘 저녁에 있을 버닝콩 촬영에는 참가해야겠지만 그 열정을 느끼자 새삼 놀랐다.

“아침이라도 먹고 가지?”

“미안, 회장님 출근하실 때 맞춰서 바로 허락을 좀 맡고 싶어서.”

“하긴 출근한 직후가 아니면 그 양반 미팅 스케줄이 꽉 차서 만나려면 엄청 기다려야 하니까.”

“좋은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라서 빨리 촬영하고 싶어졌거든.”

“그래? 어떤 내용인데.”

“비밀이야.”

러셀은 새침하게 웃었다.

귀찮은 자식.

하지만 신뢰가 갔다.

분명 멋진 걸 가져오겠지.

* * *

그렇게 러셀을 보낸 오튼과 나는 근처 식당에서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버스에서 좀 휴식을 취한 뒤 점심쯤 경기장으로 향했다.

일요일의 페이퍼 뷰 이후로 바로 이어지는 월요일의 위클리 쇼.

‘이럴 때면 랙다운이 부러워.’

그쪽은 목요일이 주간 쇼 방영일이라서 준비 기간이 넉넉했다.

반면 우리는 페이퍼 뷰 바로 다음 날에 쇼를 방영해야만 했고.

따라서 이동할 시간도 없이 바로 같은 도시에서 촬영을 진행했다.

어쨌든 페이퍼 뷰에서 경기를 소화한 선수들은 쇼에서 링 세그먼트 정도만 소화할 예정이었다.

체력이 빠진 상태에서 경기를 무리해서 뛰었다간 부상을 입을 가능성이 확 뛰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실, 오늘은 적당히 할 일만 하고 빠질 생각이었는데.

……경기장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시끄러운 일이 발생했다.

“시이이이이이인!!”

복도에 서있던 플레어가 날 발견하고는 큰 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아, 플레어.”

“몸은 좀 괜찮나?”

“예, 설마 걱정해주신 겁니까?”

“그래, 내 실수 같아서.”

“운이 좀 안 좋았을 뿐이죠.”

오히려 그 후 경기에서 빈 시간을 벌어준 건 바로 플레어였다.

미소를 지은 나는 그렇게 미안해하는 플레어를 위로해주었고.

아까 그가 말했던 시이이인- 하는 소리를 들은 선수들이 하나둘씩 락커룸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어, 왔냐?”

“미친놈이 왔구먼.”

부커-리와 시몬스.

낄낄 웃으며 다가온 시몬스는 이마의 부상에도 아랑곳 않고 내게 곧바로 헤드록을 걸어왔다.

“시, 시몬스. 아픕니다.”

“너 인마, 어? 이마 부상도 연출이지? 뭐 그렇게 멋진 짓을 해?”

“……경기하다가 담배 피우는 선수는 너밖에 없을 거다. 정말로.”

한숨을 내쉬는 부커.

하지만 이내 피식 웃은 그가 내 머리를 툭툭 쓰다듬어주었다.

“멋졌어.”

“어, 신 왔냐?”

“버, 버바 렉…….”

더즐리 보이즈.

“신 왔어요?!”

스테이시.

“몸은 좀 괜찮아?”

릴리 가르시아 누님.

그 외에도 락커룸에 있던 선수들 대부분이 나와서 날 둘러쌌다.

아까 병원과 같은 상황이다.

……이게 슈퍼스타의 숙명인가.

그렇게 한동안 선배들에게서 잔뜩 귀여움(?)을 받은 나는 이후로도 좋은 소식을 계속 들었다.

시몬스가 가장 먼저 말했다.

“너 폭스 뉴스에 나오더라?”

“아, 그래요?”

“얀마, 이 형님이 너 궁금해 할 줄 알고 이 최신 가로 본능 핸드폰에 인코딩해서 담아왔지.”

“가, 감사합니다.”

최신 가로 본능 핸드폰이라.

시대적 감수성이 느껴졌다.

“이거 봐. 샹숑인가에서 만든 건데 코리아의 기업이더라고. 화면이 이렇게 옆으로 착! 돈단 말씀!”

그렇게 시몬스가 어제 방송되었다던 뉴스 영상을 보여주었다.

정규 뉴스가 끝난 뒤 이어지는 스포츠 뉴스 섹션이었다.

[요새 프로레슬링이 시들하다고 느끼셨죠? 전문가들도 락콜드와 더 팍이 사라진 프로레슬링은 쉽게 저물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새로운 시대가 탄생하려고 합니다. 역사의 주인공 후보로 선정된 네 명의 선수들을 한 번 만나보겠습니다.]

그렇게 하며 프로레슬링 영상과 함께 선수들의 설명이 나왔다.

[현재 WWF 유니버스 챔피언인 숀 시나입니다. 화려한 입담과 압도적인 힘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잭 하디입니다. 몸을 가리지 않는 화려한 무브와 퇴폐적인 미로 큰 명성을 얻고 있죠.]

[게이브 바티스타. 맹수 같은 모습과 선이 굵은 카리스마가 장점이죠.]

[그리고 신…….]

뭐야.

그냥 다른 선수들 설명하는데 함께 후보로 끼워 넣은 거잖아?

순간 아쉬웠던 생각은 이어진 기자의 설명을 듣자 확 바뀌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누가 모르겠습니까? 모른다면 배우십시오. 여러분이 가진 모든 편견을 깨부숴줄 핫한 남자!]

그와 함께 촬영한 모델 화보.

어젯밤에 했던 미친 범프.

각종 영상들이 멋들어진 편집과 함께 흘러나왔다.

[바로 신입니다. 모든 부분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이고 있으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죠.]

“어떠냐?”

“……이 사람, 제 팬 같네요.”

“그런 것 같더라. 아무리 그래도 너만 이렇게 크게 조명하다니.”

“실력 빨이죠.”

“건방진 개자식.”

시몬스가 낄낄 웃었다.

정말로 기분 좋은 소식이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뉴스레터의 전문가들까지도 어제 나와 러셀의 경기에 대해 호평을 했었다.

정말로 멋진 경기였다는 식으로 시작되는 극찬에 플레어는 살짝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 능구렁이 놈들이라면 어제 중간 스팟을 가지고 분명히 사고라면서 뭐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래요?”

“네 연기가 완벽했다고 해도, 거기에서 갑자기 내가 조명될 순간은 절대 아니었지 않냐. 분명히 알아챌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그들은 그 담배 스팟에 관해서도 플레어의 예상과 달리 극찬을 내놓았다.

[이전까지의 프로레슬링에서 없던 순간이지. 난 여기에 대해서 혁신적이라고 말하고 싶어.]

[그래? 그런 스팟이 들어가면 이게 프로레슬링인지 영화 격투 씬인지 헷갈리지 않아?]

[시대는 변해. 파격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도태될 뿐이야.]

“특히 이 데이브 렐처. 이 양반은 절대 고운 소리 안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웃기는 일이다.”

“…….”

“뭐 아는 거 있냐?”

“아뇨, 저도 신기하네요.”

나는 그냥 웃기만 했다.

어쨌든 렐처 이 양반과 안면을 터두었더니 생각도 못한 케이크가 굴러 들어왔다는 느낌이었다.

덕분에 오늘 밤에도 또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 * *

바로 이어진 버닝콩.

링 위에 오른 나는 이마에 붕대를 칭칭 감고는 마이크를 잡았다.

몸 상태는 빈말로도 딱히 좋다고는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링 위에 올라서 폼을 잡으며 이야기할 정도는 됐다.

이게 승자의 특권이자 의무였다.

페이퍼뷰의 다음 날, 곧바로 그 도시에서 이어지는 애프터 쇼.

분명히 전날 경기장에서 나를 본 사람들도 있었을 터였기에 쏟아지는 환호는 정말 역대급이었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이름 챈트는 기본에.

[You Deserve It!]

짝! 짝! 짝짝짝!

나에게는 챔피언의 자격이 있다며 계속해서 소리치는 관객들.

나는 로프에 팔을 걸치고 여유를 부리며 한껏 그 반응을 즐겼다.

인터컨티넨탈 타이틀.

사실 벨트 자체로는 특별할 게 없다. 물론 전설적인 선배들이 이 벨트를 모두 들어보았고, 그 역사가 나에게 이어지고 있긴 했지만.

나는 증명해냈다.

이 벨트에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격하게 싸웠는지.

이 벨트를 걸고 러셀과 서로에게 느끼는 증오를 더해 만들어냈다.

“이제 좀 알겠어? 역대 최고의 인터컨티넨탈 챔피언이 누군지.”

나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워워, 아직 아니야. 아직 내 이름이 나오기에는 이르다고.”

나는 관객들을 진정시켰다.

어제의 어썸한 경기 때문에 사실 다들 좀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나는 선배들의 이름을 하나하나씩 말하며 반응을 살펴보았다.

“홍키 통크 가이!”

환호가 터져 나왔다.

“패트 패터슨! 레이저 라곤! 제프 제리엇! 크리스 젠코!”

관객들은 모두에게 환호를 보내주었다. 선악을 떠나 그들은 업계에 한 획을 그은 선배들이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몸을 던져댄 그들에게는 크나큰 존중만이 뒤따랐다.

내가 그들의 뒤 발꿈치를 쫓아갈 수 있을 정도로 벨트를 빛냈을까.

“어때?”

[Yeeeeeeeeeaaaaaahhhhh!!]

쏟아지는 환호.

“모두가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곳에 모인 2만 명은 그렇게 느끼는 모양이로군.”

이제 내 적수는 없다.

그렇게 이야기를 이끌어갈 무렵, 트리플H의 음악이 이어졌다.

놀라 환호하는 사람들.

바로 어젯밤 월드 챔피언에 등극한 그가 벨트를 가지고 나왔다.

링 위로 올라온 헌터는 마이크를 쥐고 거만을 떨며 이야기했다.

“어제는 아주 멋진 밤이었군.”

“그래, 당신도 어깨에 걸린 황금 반짝이를 보자니 어제 아주 멋진 밤을 보낸 것 같던데.”

“하, 그래.”

“누구의 벨트가 위일까?”

“그야 당연히…….”

“내가 말하는 게 있잖아?”

나는 말을 끊어냈다.

“그걸 정하는 건 당신이 아니라. 여기 모여 있는 사람들이라고.”

[Yeeeeeeeeeaaaaaahhhh!!]

박수가 쏟아졌다.

환호는 동등했다.

마주보고 선 헌터와 나는 차례차례 벨트를 들어 올리며 쏟아지는 환호의 크기를 비교해보았다.

헌터가 눈썹을 찡그렸다.

“엇비슷하군.”

“그래? 나는…….”

“하지만 애송이, 알아둬라.”

헌터가 씨익 웃었다.

“그 벨트가 너에게서 떨어져도 과연 같은 환호를 받을까?”

“그건, 그렇군.”

한 방 먹었다.

“그런 의미에서 난 제대로 된 무대를 준비해둔 셈이지.”

“섬머 수플렉스?”

“가장 뜨거운 여름 밤.”

그 순간, 바티스타의 입장 테마가 경기장 안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이 자리에 일어났다.

입장로를 통해 그가 링 위로 오르자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기랄, 이제야 성사되었다.

트리플H vs 바티스타.

전생과는 다른 양상이 되었지만 오히려 나은 점도 존재했다.

환호를 받는 선역과 선역의 대립이었음에도 확실히 흥미가 있었다.

WWF의 강자로 군림하면서 바티스타를 발굴해 키워낸 트리플H.

레볼루션의 비호 아래에 성장해 자신을 증명하고자 하는 바티스타.

둘 중 누구에 더 공감하는가?

이제부터 8월까지 두 사람의 대립은 그런 식으로 전개될 터였다.

그리고 이제 시작하겠지.

두 사람이 마주보고 섰고, 나는 곧바로 링 아래로 내려갔다.

근처의 관객들이 환호하며 손을 뻗어왔다. 나는 적당히 터치를 해주며 그대로 링에서 퇴장했다.

러셀과 나의 대립은 일단 다음 주부터 전개가 될 예정이었다.

바트 맥센의 허락을 받은 녀석은 곧바로 ‘고향’으로 떠난 상태였다.

캐나다가 아니었다.

우리 두 사람의 고향.

조지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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