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만신창이가 된 러셀 하트가 도착했을 때, 조지아는 새벽이었다.
그럼에도 바쿠는 연락을 받았던 만큼 사무실에서 기다리다 도착하는 러셀과 일행을 맞아주었다.
“으하암.”
“죄송합니다. 바쿠.”
“얼굴이 엉망이군. 러셀.”
멍에 상처에 엉망진창.
하지만 더 큰물을 겪어봤기 때문일까. 상처를 입은 것과 달리 눈빛은 예전보다 더 마음에 들었다.
GCW 시절의 러셀이 가지고 있던 어딘가 두루뭉술한 모습이 사라지고 확실한 의지가 느껴졌다.
러셀은 멘토로서 믿고 따랐던 바쿠와의 재회에 미소를 지었다.
“그대로시네요.”
거의 반년 만의 만남이었다.
하지만 폭탄에 맞은 듯한 아프로 펌 헤어며, 큼직한 근육까지. 바쿠는 이전과 전혀 변하지 않았다.
툴툴 대면서도 사람들 전혀 내치지 않는다는 점도 전과 같았다.
“그저께 했던 너와 신의 경기는 봤다. 아주 제대로 당하던데.”
“그렇습니까.”
“그래, 물론 경기 내용을 말하는 건 아니지만.”
전문가인 만큼 바쿠는 신이 받는 환호가 러셀의 급에 비해 더 높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었다.
“그 녀석을 누가 말리겠어요.”
“담배는 예정된 스팟이었냐?”
“그럴 리가요.”
쓰게 웃은 러셀은 사무실 한쪽에 있는 소파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를 따라온 카메라 팀의 멤버들은 바쿠와의 대화를 배려해주는 것인지 조금 멀찍이 앉아 가져온 장비를 각자 점검하고 있었다.
바쿠가 먼저 차를 내왔다.
“웬 차입니까?”
맥주가 아니라 좀 놀랐다.
“아가씨의 취미였지. 떠나기 전에 갑자기 코리아의 문화를 알고 싶다면서 이것저것 사놓더니. 처리하지 않고 그대로 가버렸어.”
“그, 그렇군요.”
“덕분에 선수들 먹이고 있다.”
“그래도 됩니까?”
“벌칙으로 먹이는 거야. 스쿼트 승부 같은 거를 해서 지는 사람.”
“…….”
마시기가 싫어졌다.
“참고로 말하자면 헤이건 그 양반이 최약체라 매일 마시지.”
“헤이건도 참가합니까?”
폴 헤이건.
체중 140kg에 육박하는 그 몬스터가 같이 운동을 하고 있다고?
“뭐라고 했더라. GCW를 보더니 자기가 경영했던 EZW의 향취를 느끼는지 다이어트를 시작했어. 여기서 평생 살겠다고 하던데.”
“바트 아래에서 스트레스가 심했을 텐데 잘된 일이네요.”
“그러게 말이다. 여기 선수들에게 신의 반만이라도 따라가라면서 잔소리를 늘어놔서 문제지만.”
“…….”
“반대로 나는 러셀 하트의 반만이라도 따라가라고 말하지.”
“예?”
“왜, 납득이 안 되나?”
“……솔직히, 그렇습니다.”
“사실 들으면 이해를 할 거야. 나는 그 어떤 선수도 신처럼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거든.”
“그렇, 습니까.”
“그 녀석은 특이한 유형이야. 시나처럼 천재도 아니고. 와이엇처럼 한 가지만 파지도 않았지.”
규정할 수 없었다.
신에게는 그 말이 딱 어울렸다.
“온갖 아이디어를 가지고 절대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해오지. 그것을 실행시키기 위한 능력도 있고 그 말처럼 모든 게 잘 돼.”
그런 선수가 누가 있겠는가?
“얼마 전 신에 관해서 머릿속으로 스스로 답을 내렸거든.”
“어떻습니까?”
“One Man Brand.”
“맞는 말이군요.”
러셀은 쓰게 웃었다.
원 맨 브랜드.
혼자서 하나의 브랜드를 이끌 정도의 파급력을 지녔다는 말이었다.
“만약에 신이 TMA 같은 회사에 있었으면 혼자 힘으로 WWF에 맞서서 시청률 전쟁을 벌였을걸?”
“그랬겠죠.”
“전성기의 할리나 플레어, 혹은 스팅에 버금가는 힘을, 젊은 그 녀석이 현재 가지고 있다는 거다.”
확실히 그 말이 맞았다.
신은 단순히 선수로서 유능할 뿐만 아니라 링 밖에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
설득하고 대립하고 이기는 힘.
“내 감히 말하지. 그런 놈은 어디에도 없어. 이 업계의 생리를 그렇게 빨리 파악하는 놈은 없다고.”
“확실히, 앞서 예시를 든 사람들도 커리어의 전성기에나 그랬죠.”
WWF라는 초거대 기업에 맞서 싸웠던 프로레슬러들이 있었다.
할리 레이시, 닉 플레어, 스팅.
그들은 NWA나 TMA 같은 단체의 경영진으로도 참여하며 투자를 받고 회사의 흥행을 이끌었다.
결국 모두가 참패했지만.
“그래도 뭐, 언젠가는 그런 놈들이 뭉쳐서 다시 WWF에 대항하려는 움직임을 보일 수도 있지.”
바쿠가 낄낄 웃었다.
하지만 러셀은 거기에 반응하는 대신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렇다면 왜 저입니까?”
“너는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싸우려고 들기 때문이다.”
바쿠가 단언했다.
“세상에 나보다 잘하는 놈은 많아. 사는 게 그렇지. 일반적인 사람은 그 녀석처럼 앞서 나가는 게 쉽지가 않아. 지독하게 깨지고 질질 짜면서 나아가야 하지.”
괴로운 일이다.
포기하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러셀은 그러지 않았다.
“그게 네 장점이다. 러셀. 넌 신을 넘어서기 위해서 기꺼이 추해지는 결과를 받아들였지.”
“바쿠…….”
심장이 먹먹해졌다.
“그래서 널 본받으라고 하는 거다. 넌 요령은 좀 없지만 배운 걸 기억하고 써먹으려 노력하거든.”
“가, 감사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러셀은 자신의 길에 확신이 서는 걸 느꼈다.
그래, 대부분은 이랬다.
스스로 자랑할 만한 결과를 얻기 위해, 러셀은 뭐든 할 생각이었다.
좀 기운을 되찾은 모습에 바쿠는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프로모를 찍겠다고?”
“예, 좀 도와주십시오.”
“어떤 내용이냐?”
“과거와의 결별입니다.”
“뭐?”
바쿠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할리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GCW 경기장도 필요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의아해 되물은 바쿠는 소재만으로도 흥미롭다는 생각을 했다.
GCW 시절의 영광을 버린다.
확실히 신에게 대항하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해야 자신을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을 터였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조지아에서 돌아온 러셀은 나와 작가진들을 모아두고 찍어온 프로모 영상을 하나 보여주었다.
경기장 한쪽의 사무실에 모인 우리는 빔 프로젝터가 쏘아 보내는 영상을 일단 확인했다.
어딘지 모를 공간.
바닥을 탁탁, 두드리고 있는 발을 보여주면서 시작되었다.
‘작가가 자신만만하더니.’
꽤나 영상미가 있다.
러셀의 아이디어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이어서 쉰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난 여기에서 시작했지.]
바로 러셀 하트였다.
천천히 위로 올라간 카메라가 격렬했던 경기로 인해 상처를 입은 녀석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어깨에 이르는 자랑스러운 금발을 하나로 묶은 녀석은 더 이상 이전의 화려한 모습이 아니었다.
푸른 눈동자는 탁하게 물들었다.
킹 오브 하트를 자청하던 녀석은 이제 비참하게 추락했다.
[아니, 우리가 그래.]
“여기에서 편집으로 신과 저의 데뷔 당시를 보여줄까 합니다.”
“대립도?”
“그건 시간을 봐야겠지.”
내 물음에 대답하는 러셀.
영상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카메라의 움직이며 링 아래가 드러났고 러셀이 천천히 일어났다.
자신이 앉아있던 철제 의자를 접은 그는 방황하는 사람처럼 링 위를 천천히 맴돌았다.
[어땠어요? 그쪽이 보기엔.]
누군가한테 말을 걸었다.
[저와 그 녀석. 누가 위였습니까? 아, 당연히 저겠죠.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반쯤 미친 인간처럼 보였다.
아니……. 확실히, 러셀은 자신이 미쳐버릴 거라고 이야기했지.
그것을 알고 있는데도 녀석의 기괴한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저는 하트 패밀리의 러셀 하트고. 그 녀석은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 모르는 양아치니까.]
바로 그때, 화면 바깥에서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웁, 우웁. 우우우웁.
누군가 입이 틀어 막힌 채 억지로 비명을 지르려고 하는 듯한 소리.
거기에 맞춰 화면이 살짝 돌아갔고. 러셀이 링 아래로 내려와 그대로 관객석으로 달려들었다.
[그렇다고 말해!!!]
“……!”
묶여있는 건 할리 레이시였다.
GCW의 수장. 방송에도 여러 번 출연한 그가 관객석 의자에 덕 테이프로 묶여 있는 상태였다.
공포에 떠는 할리.
한순간 악귀와 같이 소리쳤던 러셀은 이내 다시 돌변해 할리에게 상냥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아, 미안. 미안해요. 할리. 갑자기 이렇게 큰 소리를 질러버려서. 하지만 걱정하지 말아요. 경기장 주변에는 아무도 없으니까.]
러셀이 철제의자를 들었다.
[아무도 당신이 마음껏 비명을 질러도 아무도 듣지 못할 거야.]
그 뒤를 이어.
[내 비명 소리를 아무도 듣지 못했듯이 말이야.]
관객석으로 넘어간 러셀이 무자비하게 할리를 폭행하기 시작했다.
입을 틀어 막힌 노인의 비명 소리와 잔혹한 타격음이 화면 바깥으로 잔혹한 기운을 쏟아냈다.
바리게이트로 인해 그 모습은 가려졌지만, 그렇기에 할리가 실제로 맞고 있는 건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먹이 꽉 쥐어질 정도로 잔혹한 모습이었다.
한동안 광기에 물들어 의자를 내려치던 녀석이 동작을 멈췄다.
불편한 침묵이 할리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말하는 듯해 역겨웠다.
러셀이 씨익 웃어 보였다.
[물어볼 것도 없잖아. 난 아직 지지 않았어. ……단지, 확실하게 끊어낼 필요가 있었던 거야.]
녀석이 카메라로 다가왔다.
[보고 있나, 신?]
활짝 웃었다.
[진짜 미친 듯이 생각해봤는데, 난 아직 지지 않았어. 왜냐고? 전력으로 임한 게 아니었으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조지아에 있는 러셀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도 없었다.
[섬머 수플렉스. 라스트 매치.]
그리고 영상이 끝났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모든 걸 내려놓고 다시 한 번 경기를 요구하는 러셀은 정말 더럽게도 뻔뻔한 놈이었다.
하지만 호기심이 생겼다.
이렇게 제대로 미친놈이 이후로 무슨 짓을 할 것인가.
무척 기대가 됐다.
러셀은 확실히 더 나아갔다.
아마 이전 같았으면 이 정도의 프로모는 만들지 못했을 거다.
혼자 힘으로는 말이다.
나와 함께 영상을 본 작가들도 모두가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특히나 각본팀장의 마음에 들었는지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회장님께서도 좋아하시겠군.”
“음, 그런데 여기에서 이긴 이후에 러셀은 어떻게 되는 거죠?”
“계속 이렇게 가면 돼.”
각본팀장이 내 대신 말했다.
“뭔가에 집착하면서 이 정도로 뻔뻔한 놈은 반드시 먹힌다. 이 정도 레벨까지 표현해내다니.”
러셀을 돌아보자 뺨이 살짝 붉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야 기쁘겠지.
거의 혼자 이렇게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프로모를 짜온 거니까.
각본 팀장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경기 방식은 어떻게 하지? 다들 아이디어라도 있나?”
“하나밖에 없죠.”
내가 이야기했다.
“호오, 기대가 되는데. 뭔가?”
“‘아이 큇’입니다.”
“I Quit?”
“예, 그거면 되겠죠. 라스트 맨 스탠딩으로도 결말이 안 났으니.”
“흠, 어떻게 끝내려고?”
“그렇기에 다들 기대를 하고 보지 않겠습니까? 아이 큇인데, 절대로 그걸 말할 리가 없는 두 사람의 경기니 말이죠.”
나는 싱긋 웃어 보였다.
아이 큇 매치.
상대방의 입에서 ‘아이 큇’, 다시 말해 ‘그만두겠다’는 말을 나오게 하는 사람이 이기는 경기였다.
서브미션 매치와 비슷했지만 자기가 그만두겠다는 걸 입으로 말해야 하기 때문에 보다 굴욕적이고 모멘텀이 세게 깎이는 게 특징.
하지만 그런 세간의 인식과 달리 모멘텀을 유지하면서도 경기에서 패배하는 방법이 있기는 했다.
그보다 앞서 섬머 수플렉스까지 대립을 진행하는 게 먼저겠지만.
“일단, 대립이 계속된다는 걸 알리는 프로모로는 이보다 더 좋은 게 없을 것 같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문제는 이 대립을 이후 어떤 식으로 진행하는가에 달린 것 같은데.”
“러셀의 광기를 좀 더 드러내는 방향으로 가는 편이 맞겠죠.”
팀장의 물음에 내가 운을 뗐고.
우리는 이어 섬머 수플렉스까지의 각본을 짜나가기 시작했다.
* * *
[섬머 수플렉스. 라스트 매치.]
러셀의 음산한 목소리가 어둠에 휩싸인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쇼의 메인이벤트.
다음 대진 상대를 찾기 위해 링에 오른 나는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누구든 나오라고 말했고.
분위기가 한창 좋던 차에 경기장 전체가 암전되며 러셀이 촬영한 프로모가 흘러나왔다.
각종 효과음에 편집까지 더해진 프로모는 확실히 공포스러웠다.
머리가 희끗한 노인을 묶어놓고 두들겨 패는 러셀은 확실히 관객들에게 자신을 각인시켰다.
이제 그 충격을 바탕으로 매주 각본을 전개하면 되는 방향.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마이크를 쥔 채 굳어져 있던 나는 화면에서 음산하게 서있는 러셀을 마냥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분명히 조지아에서 실시간으로 전해지고 있는 영상이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을 무렵.
철컹-!
경기장에 다시 불이 들어왔고.
[Uoooooooooooooooohhh!!]
경악한 관객들의 탄성이 울려 퍼졌다. 잠시 충격에 굳어져 있던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셔츠를 입고 있는 러셀이 마치 지옥에서 돌아온 듯한 비주얼을 한 채로 서있었다.
손에는 접이식 철제 의자.
그것이 내 머리를 향해 힘차게 휘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