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189화 (189/634)

189.

러셀이 재도전에 대한 의지를 표명한 세그먼트는 그날 버닝콩에서 가장 큰 반응을 이끌어냈다.

임팩트 있는 프로모의 뒤를 이은 잔혹한 습격을 본 사람들은 러셀에게 아낌없는 야유를 보내주었다.

아주 미묘한 차이였지만 확실히 전보다 훨씬 나아진 모습이었다.

다들 그것을 느꼈는지 백스테이지로 돌아왔을 때 현장팀의 직원들은 큰 박수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세그먼트의 중심이었던 러셀을 칭찬했다.

“러셀, 멋졌어요!”

“최고의 프로모였습니다!”

“습격 씬도 완벽했어요!”

“아, 감사합니다.”

녀석은 그런 반응에 어안이 벙벙해져 일일이 한 명 한 명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게 좀 답답하게 느껴졌던 나는 러셀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함께 고릴라 포지션을 빠져나왔다.

“자, 잠깐. 신.”

“저 양반들도 감사하다는 인사 받으려고 칭찬한 거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다크 매치 진행해야 하는데 네가 앞에서 얼쩡거리면서 고맙다고 하면 퍽이나 즐거워하겠다.”

“그, 것도 그러네.”

“오늘은 멋졌어.”

“……정말로?”

“그래, 인마. 솔직히 이 정도로 미친 프로모를 짤 줄은 몰랐어.”

그런 내 말을 들은 러셀의 뺨이 기분 나쁠 정도로 붉어졌다.

내심 걱정하더니 다들 좋은 반응을 보여서 안심한 모양이었다.

그래, 확실히 러셀은 이번 세그먼트에서 이전까지와는 달리 훌륭한 악역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임팩트로 흥미만 이끈 정도고 향후의 각본이 흘러가는 방향이 중요할 테지만.

녀석이 오늘 링 위에서 나보다 관심을 받았다는 게 중요했다.

다음 주까지 관객들은 내내 러셀의 행동에 관해서 떠들어대겠지.

극소수겠지만 그런 미치광이 악역에게서 카리스마를 느끼는 팬들도 있을 테고.

결국 그게 중요했다.

녀석의 행동이 내가 가진 위상을 넘어설 정도로 임팩트가 있는가.

시나가 악역이었던 시절 테이커에게 도전했을 때도 그랬었다.

녀석은 테이커에 비해 한없이 초라한 자기 위상을 눈살이 찌푸려지는 사악한 도발로 채워보였다.

테이커의 묘비에 오줌을 싸갈기는 장면은 미래의 아이콘이라기에는 좀 과하다 싶을 정도였지.

러셀 역시도 그에 절대 뒤지지 않을 정도의 프로모를 선보였다.

전까지는 묘하게 말만 앞선다는 느낌이었는데 오늘은 확실하게 행동으로써 뭔가를 보여주었다.

자신의 과거.

다시 말해 선역으로 사랑 받았던 기억을 완전히 부수는 프로모.

마치 코믹북 속에서 악당이 완성되는 과정처럼 느껴져 무척 좋았다.

하지만 그 멋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친구가 한 명 있었다.

바로 오튼이었다.

“뭐가 멋졌다는 거야?”

시간은 흘러 쇼가 끝난 뒤.

셋이서 함께 캠핑 버스를 타고 다음 도시로 이동하던 찰나였다.

우리는 마침 TV에서 재방송을 하고 있던 내 리얼리티 프로그램, ‘프로페셔널’을 보고 있었는데.

오튼의 이야기에 나는 일단 약간의 난처함을 느끼며 돌아보았다.

“뭐?”

“러셀이 오늘 보여준 프로모. 대체 어디가 멋졌던 건가 싶어서.”

“……어떻게 봤는데?”

“응? 아니, 러셀이 모르는 장소에서 이상한 노인네를 두들겨 패면서 폼 잡은 거 아니었어?”

“………….”

이 자식.

지적할 부분은 많지만, 일단은 놀랍게도. 우리의 GCW 시절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GCW 영상 안 봤니?”

“난 레슬링 안 보는데.”

“선수는 대체 왜 하는 거냐.”

“돈 많이 주잖아. 유명해져서 여자들이 좋아하고. 결혼이 문제라고 하는데 난 할 생각도 없고.”

놀랍게도 랜스 오튼은 2007년에 결혼한 뒤 2013년에 이혼했다.

지금 말하는 것과 내가 기억하는 인생이 너무나도 달라서 매번 나쁜 의미로 놀라게 하는 녀석이다.

이런데도 잘생긴 외모와 조각 같은 몸매, R.K.O.라는 희대의 피니시 무브와 운으로 스타가 되지.

빌어먹을.

인생은 오튼처럼.

웃기 힘든 농담을 생각하고 있자니 러셀이 경악하며 소리쳤다.

“너, 설마. 전설의 프로레슬러인 할리 레이시를 모르는 거냐?”

“이름은 들어봤는데. 아~ 프로모에 나왔던 영감이 할리였어?”

“영감이라고 하지 마!”

러셀이 다시 경악했다.

“할리 레이시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는데! 네 할아버지인 바비 오튼 시니어만큼 대단했다고!”

“우리 영감보다 대단한 거면 별거 아닐 것 같은데. 영감 지금 요실금 때문에 기저귀 차거든.”

“………….”

와.

“어쨌든, 전설적인 선수를 패서 나쁜 놈이 되니 좋았단 거야? 전의 러셀과 뭐가 다른가 싶어서.”

“그 프로모에 러셀 하트가 어떤 선수였는지가 담겨져 있으니까.”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걸로 우리가 행여나 놓칠 뻔했던 각본의 디테일을 되새길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일까?

“그래?”

“러셀, 오튼과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다음 주에는 네가 좀 스토리를 되짚어주는 게 좋겠어.”

“……그래야겠네.”

러셀이 고개를 끄덕이자 오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니, 신. 너 얼마 전에 러셀한테 나와의 대립이 없으면 넌 악역으로서 뭐냐고 물어봤었잖아?”

“내가 너한테 그 말을 했던가?”

“러셀이 말해주던데. 너한테 그 이야기 들어서 충격 먹었다고.”

“…….”

“오, 오튼. 그 이야기는 그만.”

러셀이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근데 뭐야. 지금도 결국 너를 보면서 열받아하는 건 같잖아?”

“그렇지.”

“그럼 왜 그때 러셀한테 그렇게 말한 거야? 이 녀석 옆에서 우울해하는데 피곤해 죽는 줄 알았다.”

“오튼, 그만해줘. 제발.”

러셀이 반쯤 빌었다.

나는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오늘 세그먼트에서는 러셀이 가진 개성이 드러났지. 그걸 나를 통해서 표현했을 뿐이고.”

“뭔가 좀 복잡한데.”

“그 차이를 인지하고 구분해서 사용할 수 있어야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스타가 될 수 있는 거야.”

이전까지의 러셀은 자신의 감정을 사람들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애초에 처음에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쉬운 감정이긴 했다.

“질투였으니까. 쉽고 좋은 감정이지. 찌질하게 가기도 쉽고.”

하지만 대립이 길게 이어지면서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지게 됐다.

러셀이 정말로 좋은 악역이 되고 싶다면 그 이상을 보여줘야 했다.

그런데도 러셀은 굳이 자신의 감정에 선을 그어서 표현을 삼갔고.

그게 좀 답답했던 나는 녀석이 좀 더 자기 안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왔던 것이다.

“그로서 몰락한 영웅이 되어버린 러셀 하트가 만들어진 거지.”

“흐음.”

“어때, 좀 알겠어?”

“아니.”

오튼이 해맑게 말했다.

그래서 나도 해맑게 웃으며 그냥 녀석을 잠시 두들겨 패주었다.

* * *

오튼이 그렇게 반응한 것과는 달리, 사람들은 확실히 러셀 하트라는 선수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프로모가 나간 뒤 일주일 간, 각종 매체에서는 입을 모아 러셀과 나의 각본에 관해서 떠들어댔다.

신문과 잡지에서는 나와 러셀이 GCW 시절부터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했고.

TV에서는 영상을 편집해서 내보내며 우리의 대립이 얼마나 흥미로운 것인지 방영해주었다.

완전히 손 안 대고 코푸는 상황이었다. 그러면서 자연히 나와 러셀의 관계가 설명되었으니까.

우리는 그냥 있었는데도 다음 쇼에 대한 기대감은 계속 높아졌다.

러셀이 과연 다음 주에 어떻게 나올 것인가. 그리고 신은 그에 대항해 어떤 식으로 맞설 것인가.

더욱이 가장 저명한 프로레슬링 매체인 뉴스레터의 기자들은 세밀하게도 내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또 빼놓지 않았다.

[신이 아닌 다른 선수였더라면 러셀 하트의 악역 전환이 이처럼 성공적이었을까 싶군.]

[맞아. 신이 판을 잘 깔아줬으니까 러셀이 날뛸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느낌이지.]

[뭔가 운명적이라고 해야 할까? 이야기가 딱 되잖아. 신은 저 러셀을 이미 두 번이나 이겼다는 대단한 위상을 가진 선수가 되었고.]

[그렉 하트를 은퇴시키면서 러셀이 받았어야 할 스포트라이트를 빼앗기도 했지. 현실에 근거한 무척 멋진 드라마야.]

[그래, 신은 자존심이 상할 정도로 무결점 선수지. 솔직히 오래도록 이쪽 일을 해오면서 어떤 선수라도 비판했던 우리인데.]

[청자 여러분은 저희가 계속 신을 칭찬해줘서 ‘이런 놈들이 아닌데.’ 싶으실 수도 있겠지만.]

[저희가 실제로 신에게 로비를 받고 있는 건 아닙니다. 한 번쯤 저희 방송에 출연해줬으면 하는 바람 정도는 있지만 말이죠.]

렐처의 이야기를 들은 난 쓰게 웃었다.

저쪽 방송에 출연하는 것도 서로 합이 잘 맞으면 재미있겠지.

물론 충분히 내게 이득이 있어줘야겠지만 말이다.

[어찌 보면 러셀은 굉장한 행운아인 셈이야. 신이라는 선수와 함께 커리어를 시작해 지금까지 계속해서 도움을 받고 있으니까.]

러셀 본인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 테지만.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야. GCW 시절만 해도 러셀이 악역에 신이 선역인 그림은 도저히 상상하지 못했는데 말이야.]

[난 상상했는데.]

[……정말로? GCW 역사상 최고의 악역이었던 신이 선역으로 이 정도의 반응을 얻을 걸 예상했다고?]

[왜, 락콜드도 악역으로 잔뜩 어그로를 끌고서 시작했잖아.]

[나는 신이 악역이었을 때 좀 더 빛나는 선수라고 생각하는데.]

[시나 같은 선수와 대적할 상대라면 악역이 낫겠고, 러셀이 만약 악역으로서 잘 큰다면 선역이 더 낫겠지. 트위너 같은 느낌으로?]

꽤나 흥미로운 의견이었다.

나는 사실, 어느 쪽이냐고 물어본다면 악역으로 활동하는 걸 조금 더 선호하는 편이기는 했다.

그편이 좀 더 자유로우니까.

하지만 하고 난 뒤의 만족감은 선역이 더 큰 것 같기도 했다.

전 세계에서 각양각색의 인간들이 모인 이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나 같은 비주류에게 어마어마한 환호를 보내줄 때.

그 순간은 세상 그 무엇도 부럽지 않을 정도로 기뻤으니까.

시나가 선역.

러셀이 악역에.

내가 트위너라.

‘나쁘지 않은 그림인데.’

멀지 않은 미래를 상상하며 나는 입가에 옅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 * *

다시금 링 위.

전 세계의 수많은 팬들이 기대하며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러셀 하트는 버닝콩의 링 위에 올랐다.

경기장의 조명이 모두 꺼지고 링 위를 비추는 불빛 하나만이 남았다. 모두 녀석의 요구대로였다.

그 가운데, 러셀은 검은 락커로 색을 칠한 철제 의자를 펼치고는 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야유가 나온 건 키이이이이잉- 하고 음악이 이어졌던 순간뿐.

모두가 러셀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고 내용을 듣고 싶어 했다.

러셀이 그걸 느꼈는지는 모르겠다. 일견 보기에는 사람들이 아무 반응도 안 한 것 같으니까.

하지만 절대로 아니었다.

사람들은 녀석이 내뿜는 카리스마에 압도되고 있는 것이었다.

러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신은 지금 병원에 있어.]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그리고 나는 놈에게 할 이야기가 있지. 너희가 듣건 말건 그따위는 아무 상관도 없고 말이야.]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녀석이 무언가 해보려고 할 때는 야유를 보내 입을 막던 팬들이, 이제는 반대 입장이 되어 대놓고 무시하는데도 가만히 경청하고 있다니.

디테일 하나가 모든 걸 바꿔놓았다. 아주 멋진 일이었다.

[우리는 GCW 시절부터 함께 해왔지. 대립하기도 했고. 너는 항상 날 자기 아래로 취급했었지.]

러셀은 그런 식으로 간단히 우리 두 사람의 드라마를 설명하며 거기에 대한 감정을 이야기했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 생각했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뒷골목에서 선수 생활 좀 하다 왔다고 더럽게 유세 떨어대네, 라고 말이야.]

약간의 야유가 나왔다.

WWF에서는 표현에 제한이 걸려 뒷골목이라는 이야기를 썼지만.

녀석은 지금 분명히 내 인디 시절의 경력을 비웃은 것이었다.

[그때마다 역겨웠지만 참아냈지. 그 이유가 뭔지 알아, 신?]

러셀이 비릿하게 웃었다.

[안타깝게도, 그때의 난 정말로 좋은 사람이었거든. 하지만 그런 온건한 태도는 내가 살아가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더라고.]

세상은 러셀 하트가 좋은 사람으로 있게 가만 놔두지 않았다.

[우매한 대중들은 너 같은 놈에게 속아서 환호를 보냈고. 그럴 때마다 난 속을 게워내고 싶었어.]

[Boooooooo……!!]

신은 러셀 하트가 응당 가졌어야할 스포트라이트와 그렉 하트의 은퇴 전 경기를 가지고 가버렸다.

[바로 그때, 너와 난 결국 공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그렇게 시작된 대립.

좋은 사람을 그만두기로 한 러셀은 자신의 배경이 되어줄 수 있는 레볼루션과의 결탁을 선택했다.

킹 오브 하트를 선언하며 이제 자신의 시대가 왔음을 선포했다.

하지만 앞선 두 번의 경기에서 두 번 다 처참하게 지고 말았다.

[왜일까?]

러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녀석은 마치 셰익스피어 연극의 주인공처럼 감정을 더 드러냈다.

[왜 내가 너 같은 놈에게 이기지 못한 걸까. 내내 고민하다가 결국 그 이유를 깨닫게 된 거지.]

러셀은 카메라를 노려보면서 똑똑히 나에게 이야기를 전했다.

[너처럼 역겹고 더러운 쓰레기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나 역시도 그만한 각오가 필요했던 거야.]

거기까지 들은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마이크를 쥐고 대답했다.

“그래서 할리를 박살낸 거냐?”

내 목소리가 경기장에 울려 퍼졌고, 갑작스러운 순간을 맞이한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Yeeeeeeeeeeeeaaahhhh!!]

병원에 있다고 들었던 신이 갑작스레 러셀의 세그먼트에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러셀 본인도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와중, 나는 씨익 웃었다.

오늘의 러셀은 정말 멋졌다.

하지만 나 역시도 그런 녀석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괜찮은 세그먼트를 짜온 상태였다.

왜애애애애애애애애애앵-!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경기장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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