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190화 (190/634)

190.

왜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앵-!

거대한 경기장 내부에 뜬금없이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관객들이 내 이름을 연호했다.

모두가 기대를 하고 있는 상황.

경기장에 다시 조명이 들어왔고, 자리에서 일어난 러셀이 나의 습격에 대비해 의자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녀석처럼 등 뒤를 노리거나 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단지, 구급차를 직접 몰고 경기장 안으로 들어섰을 뿐이었다.

입장로 옆으로 난 큰 길.

커튼을 걷어내며 구급차가 안으로 들어서자 그것을 본 사람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내가 병원에 좀 다녀오긴 했지! 하지만 구급차에 타게 되는 건 내가 아니라 바로 너야, 러셀!”

나는 손에 쥐고 있던 마이크를 들고 크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응급구조사인 제임스가 제발 그것만큼은 안 된다고 말했지만…… 어쩌겠나. 이렇게 된 것을.”

그런 식으로 농담을 건넨 나는 입장로 앞에서 차를 멈춰 세웠다.

물론, 실제로는 정당하게 공문을 보내서 협조를 얻어낸 것이었다.

[Waaaaaaaaaaaaaaaaghhh!!]

사람들의 환호가 계속 이어졌다.

거기에 맞춰 사이렌을 몇 번 더 세차게 틀어준 나는 마이크를 손에 쥔 채 구급차 문을 열었다.

“러세에에에에에엘!!”

[Yeeeeeeeeeeeaaahhh!!]

최대한 뜸을 들이며 관객들이 좀 더 큰 반응을 내도록 유도했다.

그리고는 문턱에 발을 걸치고 구급차의 꼭대기로 휙 올라갔다.

쿵!

수많은 관객들이 날 바라보았다.

2만 명의 모습이 그대로 보이는 위치. 뿐만 아니라 경기장 중심에 있는 러셀도 더없이 잘 보였다.

녀석은 침묵하고 있었다.

마이크를 쥔 손을 떨어뜨리고 가만히 날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페이퍼 뷰까지 갈 이유가 뭐 있겠어? 서로 죽이고 싶다면 바로 이 자리가 가장 좋을 텐데?”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네 영구차를 준비해왔으니까 어디 한 번 제대로 붙어보자고!”

[……또 무슨 꿍꿍이냐?]

하지만 러셀은 넘어가지 않았다.

[내가 네 방식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나? 분명히 그 구급차에 날 엿 먹일 뭔가를 준비해서 왔겠지.]

“그래서 겁을 먹었단 거군. 이해해. 내가 할리처럼 묶여있지 않으면 넌 덤빌 수 없을 테니까.”

[그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것도 섬머 수플렉스까지야. 신.]

“왜 경기가 결정된 것처럼 말하는 거지? 나는 이 벨트에 맹세코 겁쟁이와 싸울 생각은 없는데.”

[네가 그러지 않는다면 할리 레이시는 시작에 불과할 테니까.]

“뭐?”

[난 너와 경기를 가지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신.]

[Booooooooooooo……!]

역겨운 협박에 야유가 쏟아졌다.

할리가 시작에 불과하다니.

말인즉슨 러셀은 내가 경기를 가져주지 않는다면 더 많은 사람을 건드리겠다고 공언한 셈이었다.

표정을 싹 굳힌 나는 그대로 앰뷸런스 아래로 내려와 링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Yeeeeeaaahhhh!]

관객들이 잠시 환호했지만.

[그리고 이미 했어.]

이어진 러셀의 말을 듣고는 충격에 휩싸였다.

[하나 묻겠는데, 최근에 부모님께 연락을 드려본 적은 있나?]

“너 이 새끼……!”

링 위로 올라간 나는 그대로 흥분해 러셀의 멱살을 붙잡았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즐겁게 봤어. 어머님께서 미인이시더군.”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이성을 잃고 소리친 나는 그대로 러셀의 안면을 힘껏 움켜쥐었다.

하지만 녀석은 그런 상황에서도 나를 조롱하듯 웃을 뿐이었다.

분노를 참지 못한 내 주먹이 러셀의 안면을 향해 내리꽂혔다.

빠악-!

“말해!!”

“내가, 왜?”

“말하라고!! 대체 뭘 한 거야!”

나는 연달아 러셀을 공격하며 소리쳤다. 녀석은 입안이 찢어져 피를 흘리면서도 미소룰 지었다.

그런 상황을 보다 못한 백 스테이지에서 보안 요원들과 심판들이 날 말리기 위해서 달려 나왔다.

[Boooooooooooooo-!]

야유를 보내는 관객들.

“자, 잠깐. 신! 좀 진정해!”

“이러지 말라고!”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

팔과 허리를 붙잡혀 러셀과 떨어진 나는 눈이 완전히 뒤집혔다.

나는 상황을 말리려는 이들에게마저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혼란으로 치닫는 상황.

관객들이 환호를 보내는 가운데 나는 러셀의 멱살을 쥐고 그대로 링을 빠져나왔다.

보안 요원들이 더 나와 나를 둘러쌌지만 완전히 우리에서 풀린 맹수와 무력한 조련사들 같았다.

“어디를 가려고? 신……!”

“닥치고 따라와!”

나는 보안 요원들을 때려눕히는 한편 저항하는 러셀을 구급차로 질질 끌고 가 뒤쪽에 태웠다.

관객들의 반응은 환상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분노로 이성을 잃은 채 운전석에 올라타 시동을 켰다.

왜애애애애애애애애애앵-!

다시금 울리기 시작하는 사이렌.

악역이 선역의 약점을 틀어쥐었고 선역은 분노로 미쳐 악역을 납치해 경기장을 떠난다는 상황.

그렇게 또 다시 다음 주를 위한 떡밥을 살포한 채 쇼가 끝났다.

* * *

구급차에서 내린 러셀은 일단 입 속에 들어 있던 작은 비닐 주머니부터 먼저 버렸다.

아까 내가 녀석의 안면을 움켜쥐며 넣어준 ‘피 주머니’였다.

내가 안면을 후려쳐 녀석이 피를 흘린다는 연출을 위해 사용한 아이템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저걸 입에 문 채로 세그먼트를 진행하는 게 맞지만.

‘대사가 워낙 많았으니.’

이런 식으로 넘겨주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잘 먹혀서 다행이었다.

식용 색소를 물에 섞어 만드는 가짜 피는 진짜와 거의 구분이 힘들 정도라 꽤나 자주 쓰였다.

관객 반응이 아주 좋은 것을 느낀 나는 러셀을 툭 건드렸다.

“오늘 아주 좋았어.”

“역시 피를 쓴 게 느낌이 살았지?”

입가에 가짜 피를 잔뜩 묻힌 러셀이 날 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쇼가 끝난 직후, 직원들은 다크 매치를 위해 분주하게 백 스테이지 내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할 일은 다 끝마친 우리는 일단 락커룸으로 돌아와 몸을 씻고 다크 매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우리 둘 다 경기를 갖지 않아 경기장에 찾아준 팬들을 위해 다크 매치를 치러야만 했다.

특히나 현재 가장 핫한 반응을 얻고 있는 나의 경기는 모두가 보고 기대하는 콘텐츠였다.

그렇기에 잠시 락커룸에서 기다리자 직원 중 하나가 찾아왔다.

“신 선수, 오늘 경기 있습니다.”

평균적으로 서너 경기 정도가 진행되는 다크 매치는 각본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게 특징이었다.

선수에게 통제권이 주어졌고 상호합의 하에 자유롭게 평소와 다른 스타일을 시험할 수 있었다.

예를 들자면 숀 시나가 팬들 앞에서 처음으로 랩을 한 것도 다크 매치 때 기회를 받으면서였다.

하지만 우리는 시나처럼 완전한 신인이거나 기믹 변경을 시도하려는 상황도 아니었으므로.

그냥 적당히 관객들을 즐겁게 만들어주면 되는 거겠지.

오히려 방송에 나가지 않기 때문에 독특한 스타일의 경기가 많이 나와 다크 매치를 기대하고 오는 관객들도 많았다.

여기에서 10년쯤 지나면 핸드폰으로 다크 매치를 촬영해 인터넷에 업 로드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조금 제약이 생겼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어디 보자.’

그렇게 해서 확인한 오늘의 내 경기 상대는 바로 오튼이었다.

나쁘지는 않았다.

오튼은 현재 각본에서 져주는 역할을 맡고 있는 만큼 정말 자유롭게 가도 괜찮겠지.

경기 시간은 10분.

문제가 하나 있다면 바로 이것이 지난번의 사고 이후로 오튼이 뛰는 첫 번째 경기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구석에서 경기복을 입고 앉아 있던 녀석에게 다가갔다.

“오튼, 괜찮겠냐?”

“응, 뭐가?”

“접수 같은 거. 이번에는 실수하지 말고 잘 하자고.”

“물론이지. 나만 믿으라고.”

오튼이 자기를 믿으라고 말하다니 어쩐지 좀 불안한 상황이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경기 때까지 좀 쉬면서 기다리고자 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였다.

러셀과 오튼을 한 번씩 돌아본 나는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어, 엄마.”

[어, 준호야. 무슨 일 있니?]

“무슨 말이야?”

[아니, 앞집 뒷집 사는 애들이 엄마 괜찮으냐고 갑자기 찾아와서 러식인가? 걔가 나쁜 놈이라고 죽여야 한다고 그러던데?]

“……아, 지난번에 전화로 말한 거 있잖아. 쇼에서 잠깐 부모님 언급할 수도 있다고. 그거니까 별로 신경 안 쓰셔도 괜찮아요.”

[그 러식이란 애도 참 나쁘다.]

예, 예에. 나쁘죠. 예.

적당히 그렇게 엄마의 하소연을 들어준 나는 이내 통화를 끝냈다.

내가 한국말을 쓴 걸 본 러셀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어머니셔?”

“어, 그냥 안부 전화.”

아무래도 러셀에게는 이 이야기를 하지 않는 편이 낫겠지.

오늘 러셀이 부모님 운운하며 날 속인 각본은 모두 내가 경기 계약서에 사인을 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한 거짓말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프로레슬링에 관해 자세히 모르시는 부모님을 각본에 끌어들이기는 왠지 좀 뭣했던 것이다.

그래서 설명도 미리 해뒀는데.

한인 타운 꼬마들이 각본이 너무 충격적이라 엄마가 무사한지 확인하러 가본 모양이었다.

‘내 생각대로 잘 먹혔군.’

주변에서는 이것이 내 이미지를 깎아먹지 않을까 우려를 했는데.

선역으로서 악역을 띄워주기 위해서는 역시 그 사악한 음모에 당해주는 것이 가장 좋았다.

거기에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했으니까 아예 뜬금없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현실의 상황을 각본에 적용함으로써 몰입감이 상승했다.

그리고 확실히, 러셀은 그렇게 해서 띄울 가치가 있을 정도로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 * *

그리고 얼마 후, 나는 다크 매치를 위해 다시금 링으로 나섰다.

먼저 나선 오튼의 뒤를 이어 내 테마곡이 울려 퍼지자 관객들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도 그럴 법했다.

나는 각본상이었지만 러셀을 구급차로 납치해 경기장을 떠났으니까 나올 줄은 예상 못했겠지.

현실과 각본의 괴리였다.

신은 구급차로 러셀을 납치했지만 쇼가 끝나자 다크 매치를 치르기 위해 다시 나왔다.

그냥 당연한 일이고 적당히 넘기면 될 문제였지만 나는 링 위로 올라가 마이크를 손에 쥐었다.

“야, 뭐해?”

황당해하는 오튼.

하지만 나는 가볍게 웃어 녀석을 안심(?)시킨 뒤 말을 이었다.

“다들 좀 놀랐지? 이해해. 구급차를 몰고 경기장을 빠져나갔던 내가 다시 링으로 돌아왔으니까.”

관객들이 웅성거렸다.

다들 내가 적당히 무시하고 넘어갈 줄 알았던 스토리의 모순점을 짚어내자 놀란 것이겠지.

하지만 프로라면 응당 그런 사소한 부분 하나라도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분명 경기장을 나가서 조용한 공터나 공장으로 가려고 차를 모는데 까먹은 게 생각났지 뭐야.”

운전대를 빙글 돌리는 동작으로 의사를 좀 더 분명히 표현한 나는 이내 오튼을 척하고 가리켰다.

“그건 바로 플로리다 템파의 사람들에게 내가 어떤 개자식인지 제대로 보여주질 못했다는 거지!!”

[Yeeeeeeeeeeeeaaaaahhhhh!!]

사람들이 엄청난 환호를 보냈다.

주州와 도시에 대한 애향심이 강한 미국인들에게 이런 식의 마이크워크를 하면 일단 반은 먹고 들어간다.

“앞을 가로막는 놈의 엉덩이를 걷어차서 양탄자로 쓰는 게 바로 이 신의 스타일이라는 말이야!”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상황이 완전히 넘어왔다.

관객들은 각본을 무시하지 않고 그대로 돌파한 나에게 열화와 같은 반응을 보내주었다.

‘다크 매치는 이런 맛이 있지.’

짜릿하게 몸을 타고 오르는 쾌감에 나는 씨익 웃으며 계속해서 마이크워크를 이어나갔다.

“차를 경기장 앞의 도로에 대충 세워두고 왔으니 딱지 떼이기 전에 얼른 돌아가야겠군! 덤벼봐!”

문제는 거기에서 생겼다.

“푸핫!”

크게 웃음을 터뜨린 오튼이 순간 당혹감에 찬 눈으로 날 보았다.

이 자식, 또 사고 쳤다.

대체 뭐에 빵 터진 거야?

그렇게 생각한 나는 마이크를 손으로 감싸고는 오튼에게 다가가 시비를 걸듯 물었다.

“왜 그래?”

“아, 아니. 미안. 내가 양탄자가 된다니까 순간 너무 웃겨서. 이야, 진짜 너 말 재밌게 잘한다.”

“…….”

“……어쩌지?”

“뭐, 두들겨 맞아야지.”

“예?”

순간 놀라는 오튼.

나는 그런 녀석의 이마에 마이크를 쥔 주먹을 힘차게 휘둘렀다.

퍼억-!

[Yeeeeaaahhh!!]

“이 자식, 이를 드러낼 거면 웃는 게 아니라 으르렁거려야지!”

그런 식으로 넘어간 나는 마이크를 쥐고 다시 한 번 소리쳤다.

“벨 울려! 해보자고!”

땡땡땡!

“아, 아니! 신! 잠깐만!”

“……미안하다. 오덕아.”

“Oh-Duk?”

오덕이란, 러셀의 러식이처럼 나의 모친께서 랜스 오튼을 부르는 표현이었다.

어쨌든 매는 놈이 벌었다.

그렇기에 나는 오튼이 일어서자마자 그대로 스텝을 밟으며 그 안면에 힘차게 슈퍼 킥을 날렸다.

쩌억!

이번에는 실수 없이 들어갔다.

“크헉!!”

쓰러진 오튼의 위에 올라탄 나는 힘차게 주먹을 날려댔다.

쿠직! 쿵! 퍼억!

……이건 순전히 놈이 자초한 일이었으므로 조금 힘을 실었다.

갸아아아아악!

오튼이 그렇게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경기장 내에 울려 퍼졌다.

물론, 이날의 경기는 사람들에게 큰 웃음과 즐거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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