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
미국은 거대한 나라였다.
때문에 그녀와 나는 필연적으로 장거리 연애를 할 수밖에 없었다.
티파니는 주로 뉴욕과 로스 엔젤레스를 오가며 업무를 수행했고.
나는 반대로 그 두 곳에는 잘 들리지 않고 미국 전역을 유람단처럼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그럼에도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서로에게 쏟고 있었다.
……조금 부끄러운 표현이었지만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은 나에게 있어서도 언제나 힐링이 되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촬영이 끝난 뒤, 우리는 늦은 밤이 되어서야 예약한 호텔로 돌아왔다.
대충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먼저 나가있던 나이트가운 차림의 티파니가 와인을 한 잔 건넸다.
뭔가 싶어 한 모금 마셔보자 그 풍미가 꽤나 인상 깊었다.
“이거 뭐야?”
“95년산 로마네 콩티에요.”
“비쌌겠는데.”
“이런 것도 한번 마셔보면 좋은 경험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자, 그리고 이거는 안……주.”
티파니는 테이블 위의 치즈를 입에 물고 날 지그시 바라보았다.
푸른 눈동자.
……그걸 대충 받아서 먹은 나는 도발적인 태도에 쓰게 웃었다.
“오늘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보고 싶었거든.”
새침하게 웃는다.
아, 이거 좀 알 것 같다.
좀 걱정을 하고 있군.
지난번에도 그렇고, 티파니는 날 이해하기에 내색하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크게 걱정하는 듯했다.
프로레슬러의 삶.
그것은 언제나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떠안고 산다는 것이었다.
만약 러셀과의 지난번 경기에서 내가 출혈이 좀만 더 심했다면.
그래서 5미터 아래로 낙하를 할 때 순간 의식을 잃었더라면.
‘분명 죽었겠지.’
하지만 그건 가정에 불과했다.
나는 항상 내 몸 상태를 완벽하게 확인하고 경기를 진행했다.
하지만 그걸 티파니가 알 수 있는 건 아니니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문제이리라.
남이 이해할 수 없는 세계였다.
우리는 1년에 300일 이상을 도로에서 보내며 자기 자신의 몸을 학대에 가깝게 대했으니까.
하지만 티파니는 그런 나를 최대한 이해해주려고 노력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 발을 맞춰서 나아갈 수 있는 거겠지.
그렇게 와인을 즐기며 일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와중, 티파니가 슬쩍 내 이마를 매만졌다.
“좀 흉이 졌네.”
“그래?”
“멀리서는 안 보이는데, 술을 마시고 가까이서 보니 확실히 조금 지기는 졌네요.”
“사진 같은 건 보정이 있으니 앞으로 활동할 땐 괜찮겠지?”
“가까이는 어쩌려고요?”
그 말에 싱긋 웃은 나는 티파니에게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
“내가 당신 말고 누구랑 이렇게 얼굴을 가까이 하겠어?”
“그, 그그, 그건 그러네요.”
뺨이 새빨개진 티파니가 뒤로 물러나려고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녀의 팔을 당겨 안았다.
온기가 마음을 채워주었다.
“……신?”
“고마워.”
그 존재감이 내 어깨의 짐을 덜어주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 * *
러셀과 신의 대립.
그 최종 국면을 눈앞에 둔 우리는 일단 결말을 정해둔 상태에서 디테일을 조정하기 시작했다.
물론 러셀이 이길 예정이기는 했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부분은 과연 ‘어떤 식’으로 이기는가였다.
악역도 다양한 방식이 있다.
나의 경우, 반칙은 쓰지만 몸으로 승리를 챙기는 스타일이었다.
헌터처럼 도구를 사용하지는 않아 신인임에도 그럭저럭 위상을 챙기면서 성장할 수가 있었고.
그게 이어져서 선역 전환을 한 뒤에도 꽤나 강자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시작하는 게 가능했다.
‘쿵-퓨리 기믹을 벗어나고 난 뒤 바로 대립을 시작한 게 플레어와 바티스타였으니까.’
그 당시 버닝콩에서 가장 핫했던 레볼루션의 멤버 두 사람. 이후 유럽 투어를 거쳐 헌터의 잡을 받으면서 오튼을 잡는 위치까지.
이후 그렉을 잡고.
강자의 입장에 서서 러셀을 띄워주기 위한 위치에 서있는 상태.
사실 굉장히 빠른 성장세로 자칫 역반응이 일어날 수도 있었지만 나는 실력으로 논란을 잠재웠다.
‘덕분에 버닝콩에 올라오고 2년 만에 다른 선수를 띄우는 위치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지.’
단순한 패배라면 받아들일 수 없었겠지만 러셀을 띄워주는 패배는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다.
이 업계 자체가 스타 선수를 꾸준히 키워내 결국 모두가 이기는 구조를 취해야 하기 때문이고.
그렇게 다른 선수를 띄워주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팬들과 회사가 그 정도 급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말짱 꽝이었다.
그 시나조차도 꾸준히 성장해 버닝콩으로 이적한 뒤에는 자신과 비슷한 다른 선수들을 띄워주었다.
오히려 그런 점에 있어서는 내가 시나를 앞서고 있는 셈이었다.
물론 그 이후에 내 위상이 떨어지면 도루묵이 되어버리지만, 그럴 일은 전혀 없을 테고 말이다.
랙다운에 가서도 나는 버닝콩에 있을 때만큼 잘할 수 있겠지.
……싶어서 러셀 선생에게 어떻게 하고 싶으냐고 물어봤더니.
녀석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내가 다음 주에 네 무릎을 박살내는 각본을 쓰는 건 어떨까?”
“뭐?”
“일단, 프로모에서 내가 험한 꼴 보기 싫으면 경기 계약서를 쓰라고 너에게 강요를 하는 거지.”
“그리고 링에서 계약식 세그먼트를 진행하게 된다는 건가?”
“그래, 링에서 네가 먼저 계약서에 사인한 직후 플레어가 널 습격하는 거야.”
그리고 러셀 하트는 경기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는 신의 무릎을 완전히 박살내버린다는 각본.
“난 악독한 악역으로 자리를 잡는 거고 넌 부상으로 별수 없이 패배했단 식으로 가는 거지.”
“글, 쎄.”
솔직히 좀 당혹스러웠다.
러셀이 말한 각본은 신의 위상을 유지할 수는 있지만 러셀이 강하다는 인식을 주기는 힘들 터였다.
사실, 나는 아주 깔끔하게 잡을 해주고 갈 생각이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좀 묻고 싶었다.
“어차피 난 랙다운에 갈 텐데. 평범하게 네가 경기에서 이기는 걸로 잡을 받는 게 낫지 않겠어?”
“너를 속인 것 자체가 내게는 굉장한 메리트인 셈이지. 지금까지는 줄곧 엿을 먹기만 했잖아?”
“……그것도 맞는 말이군.”
그렇게 보자면 서로가 윈윈할 수 있는 각본이라 괜찮을 듯했다.
러셀은 벨트를 가져가서 악역 하이 카더로서 위치를 굳혀나가고.
나는 위상 실추를 최소화한 상태에서 랙다운으로 이적해 캐릭터의 위치를 지킬 수 있게 되니까.
거기에 오히려 부상을 딛고 끝까지 싸운 남자다운 면모를 과시해 큰 인기를 얻을 수도 있을 테고.
“말만 그렇게 하는 너와는 달리 나는 정말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는 선수인 셈이지!”
러셀이 환하게 웃어보였다.
“야, 아무리 그래도 그건 불법의 영역이잖아. 난 그런 건 안 해.”
“뭐 어때. 프로레슬링은 일단 계약서를 쓰면 어떤 부상을 입어도 시합을 미룰 수 없는 세계라고.”
“……네가 그런 캐릭터로 킹 오브 하트가 되면 집안 어른들이 굉장히 곤란해 할 것 같은데.”
“만약 그게 싫다면 나보다 더 나은 ‘하트’를 보내면 되지.”
러셀은 씨익 웃어 보였다.
“결국 인간은 남들이 생각하는 자신이 아니라 자기가 되고 싶은 자신이 되어야 하지 않나 싶어.”
“……그렇지.”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대부분 사람은 타인을 어떤 틀에 맞춰서 생각하기 마련이었다.
나 역시 미국 사회에서 비주류에 불과한 동양인으로 시작했듯이.
러셀도 캐나다인이나 하트 패밀리의 일원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그걸 넘어서야만 하는 숙명이 있는 것이었다.
지금껏 하트 패밀리의 일원들에 대해 WWF와 팬들이 인지하고 있는 정체성은 다음과 같았다.
가족애.
충실함, 성실성.
테크니션 플레이어들.
그리고 캐나다인.
그렇기에 선역으로 부킹이 될 때는 보통 정의로움을 중시하는 올바른 캐릭터가 될 때가 많았고.
반대로 악역일 때는 미국을 욕하고 더럽히려는 캐나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내보일 때가 많았다.
그런 게 있기에 러셀은 선역으로 빠르게 정착할 수 있었던 거지만.
지금 시점에서 본인이 원하는 것은 달랐다.
녀석은 하트라는 이름을 더럽히고 나아가 프로레슬링 역사상 가장 지독한 남자가 될 생각이었다.
난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꼈다.
“너도 참 굳이 편한 길 놔두고 꼭 삐딱 선을 타려고 한다니까.”
“네가 그 선구자면서 뭘 그래?”
러셀은 피식 웃으며 받아쳤다.
놀랍게도 반박할 수가 없었다.
* * *
그 후. 상층부의 결재를 받은 우리는 곧바로 프로모를 촬영했다.
이야기했던 대로 러셀이 날 속여 계약서에 사인을 하도록 만든 뒤 무릎을 박살 냈다는 내용이었다.
영상은 꽤나 좋게 뽑혔고 우리는 기대하며 다음 방송을 준비했다.
그렇게 다시 일주일이 지났다.
텍사스 주의 샌안토니오.
레슬링의 성지.
메인 카메라가 경기장을 크게 한 바퀴 휘감으며 월요일 밤의 버닝콩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렸다.
[Waaaaaaaaaaaaghhhhh!!]
쇼를 기대하고 온 2만의 관객들이 하나 되어 환호성을 내질렀다.
오프닝 영상이 나갔다.
[- One Weeks Ago. -]
타이틀이 지나간 직후, 러셀과 내가 싸우는 소리가 이어졌다.
[윽……!]
[어딜 도망치려고!]
어둠이 걷히며 붉은 조명 아래.
쿠웅!
화면 바깥에서 나타난 내가 러셀을 벽으로 밀어붙였다. 녀석의 몸이 더러운 철조망에 부딪혔다.
속이 텅 빈 드럼통 안에서 불이 타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마약 거래라도 이루어질 것 같은 뒷골목의 풍경.
……물론 근처의 스튜디오를 빌려서 촬영한 것이었다.
음산한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영상 속의 내가 버럭 소리쳤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아무것도 안 했는데.]
[뭐?]
[하지만 이걸로 너를 초조하게 만드는 방법을 대강 알 것 같군.]
러셀이 내 팔을 뿌리쳤고 카메라의 앵글이 흔들리며 서로를 제압하려는 우리의 모습이 나왔다.
쿠당탕!
쓰러지는 드럼통.
불길이 번지고, 우리는 위험한 스턴트를 반복하며 서로에 대한 감정을 있는 힘껏 토해냈다.
[나에게 뭘 원하는 거야! 적당히 하고 졌으면 패배를 받아들여!]
[마지막 경기라고, 신! 마지막! 제발 나와 한 번만 더 싸워줘!]
영상이 계속 이어졌다.
꽤나 마음에 들었다.
분명 러셀이 아닌 다른 선수였다면 이렇게까지 감정적으로 대립하는 연출은 하지 못했겠지.
이런 리얼리티가 중요했다.
내가 러셀을 띄워주고, 그걸 녀석이 멋지게 받아 올라와줬기 때문에 이 정도의 연출이 가능했다.
락콜드가 지나가던 자버 하나와 이런 대립을 할 수는 없는 법.
녀석이 정말 끈질기게 달라붙어줬기 때문에 관객들 역시 스토리에 몰입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거기에 생각과는 달리 위상의 하락도 최소화할 수 있을 것 같고.
아니…… 오히려 올라가나?
무릎이 나간 상태로 경기에 참가해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싸우다 지게 된다면, 오히려 사람들은 나에게 더 큰 리스펙트를 보여주겠지.
러셀과 내가 대립을 통해 서로 지향하는 바가 완전히 달랐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결과였다.
러셀은 악독하고 비겁한 이미지를 쌓고 나는 무릎이 나가도 싸우는 터프한 이미지를 챙긴다.
‘이거 완전 최고로군.’
나는 가볍게 웃으며 다른 모니터로 관객들의 반응을 확인했다.
2만 명이 하늘을 날아가는 슈퍼 히어로라도 발견한 듯 고개를 꺾어져라 든 채 몰입하고 있었다.
입장로 위쪽의 초대형 스크린에서 나오는 영상에 다들 넋이 팔려 있는 것이었다.
나와 러셀은 계속 싸웠고 그 끝에 숨을 몰아쉬며 내가 말했다.
[네 입으로 마지막이라고 했지.]
[그래, 믿어달라고.]
[너라면 믿겠냐? 그러니까 네 입으로 직접 말하게 해주지.]
나는 이를 빠득 깨물었다.
[아이 큇. 네가 네 입으로 직접 졌다는 소릴 듣고야 말겠어.]
영상은 그렇게 끝났다.
[Yeeeeeeeeeeeaaaaaahhhh!]
크게 환호하는 관객들.
그렇게 경기가 확정되었고, 해설자 두 사람이 설명을 덧붙였다.
[아이 큇 매치! 상대방의 입에서 그만두겠다는 말을 들으면 승리하는 방식의 경기입니다!]
[라스트 맨 스탠딩도 최고로 살벌했는데 이번 경기는 과연 어떤 식으로 흘러갈까 궁금하군요!]
[아무리 그래도 신이 이길 겁니다! 러셀은 단지 막무가내로 악을 쓰고 있는 아이에 불과해요!]
[글쎄요. 저는 불안합니다. 러셀의 눈빛은 좀 위험해 보였어요.]
그런 암시와 함께 우리의 경기 계약식이 오늘 메인이벤트로 이어진다는 광고가 흘러나왔다.
[호오, 이거 기대되는데요!]
[신과 러셀, 각자 많은 걸 준비해왔을 것 같은 기분입니다.]
[아이 큇 매치! 상대방의 자존심을 완전히 뭉개버리는 경기죠!]
[신도 러셀도 물러설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만약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바로 오늘이겠죠.]
그건 정말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그렇게 해서 이 버닝콩에서는 생방송을 지켜보고 있을 시청자들을 텔레비전 앞에 묶어두려고 했고.
나중에 들은 사실인데, 그 멘트 이후로 메인이벤트까지 시청률이 거의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