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
3시간짜리 주간 쇼의 피날레를 장식하게 되는 메인이벤트.
거기에 나설 수 있는 것은 쇼의 중심이 되는 각본들뿐이었다.
현재 버닝콩에서는 헌터와 바티스타의 대립, 그리고 러셀과 나의 대립을 메인으로 밀고 있었다.
하지만 헌터와 바티스타의 대립은 지난주에 마무리가 된 상태.
쇼가 시작하고 광고 타임까지 합쳐 총 2시간 37분이 지난 상황.
분명 지쳤을 텐데도 불구하고 내가 링으로 나서자 관객들은 한 몸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Uh-Oh~! Oh~!! Oooh~~!]
그들이 내 테마를 노래했다.
하지만 러셀과의 대립으로 크게 화가 나있던 나는 이렇다 할 액션을 취하지 않고 링으로 올라갔다.
계약식인 만큼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있는 가운데, 나는 반대편에 있는 러셀을 잠시 노려보았다.
진행을 위해 나온 아나운서, 릴리 가르시아가 마이크를 들었다.
“두 분 모두 계약에 앞서서 그 내용을 설명해드리고자 합니다.”
계약식이라고는 하지만 그건 일종의 연출이었고, 일반적인 세그먼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즉, 대립을 심화시키는 데 그 의의가 있다는 말이었다.
때문에 나는 곧바로 테이블 위에 있던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벌써 세 번째인 거 알아?”
숨을 죽이는 관객들.
“널 얼마나 두들겨 패야 인정을 할지 모르겠군. 특히나 난 온갖 매치에서 온갖 방법으로 널 꺾었지. 하지만 넌 인정하지 않았어.”
“알고 있어.”
[Boooooooooooooo……!]
곧바로 야유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러셀이 다시 마이크를 입에 대자 신기하게도 뚝 멎었다.
사람들은 녀석이 왜 3차전을 제안한 것인지, 나를 상대로 어떻게 싸울 것인지 궁금증을 느꼈다.
“하지만 난……. 그렇게 느꼈어. 널 쓰러뜨리지 않으면 절대 앞으로 나갈 수 없다고 말이야.”
“아, 그래? 봐줄까?”
“네가 그럴 놈이 아니라는 건 알아. 여기까지 온 이상 너나 나나 별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지.”
녀석이 씨익 웃었다.
“사람들은 우리가 최고의 파트너였다고 하지. 하지만 아냐. 난 네가 정말로 혐오스러워.”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고 섰다.
앞으로 나선 카메라맨이 그런 우리의 모습을 찍기 시작했다.
아마 그 페이스 투 페이스는 당황하고 있는 릴리 가르시아와 함께 전 세계에 방영이 될 테고.
지금, 그리고 미래에 이 장면은 전설로 기억이 될 테지.
“너도 그렇잖아?”
“……그랬다고 생각하냐?”
“그랬겠지. 그러니 과거에 나를 배신했던 것 아니었어?”
갑작스러운 이야기.
이 시점에서 과거를 언급하는 러셀의 모습에 사람들이 감탄했다.
사람들은 우리의 이야기가 단순한 각본이 아니라, 마치 실제로 계속 이어져온 현실의 연장이라고 느꼈다.
“확실히 그랬지. 나는 널 배신했어. 그리고 확실히 해두자면, 그건 전혀 부끄러운 과거가 아니야.”
“또 역겨운 선동으로 사람들을 현혹해 넘어갈 생각인가? 그게 네 특기잖아? 어디 말해보라고.”
“너 역시 그러고 있으니까. 넌 내 뒤통수를 쳤고 내가 가진 모든 걸 가져가고 싶어 하지.”
거기까지 말한 나는 조금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변론을 더했다.
“물론, 네가 날 배신하지 않았더라도 후회는 안 했을 거야. 넌 좀 많이 피곤한 성격이었으니까.”
관객들이 피식 웃는 게 느껴졌다. 확실히 러셀의 캐릭터는 요즘 시대에서는 먹히지 않았다.
“아니지. 아니야. 신.”
러셀이 고개를 내저었다.
“네가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바로 지금의 네가 내 자리를 주제넘게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야.”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러셀.
녀석을 노려보던 나는 이내 테이블 위의 펜을 들어 사인을 했다.
“어디 해보자고.”
“아이 큇 매치. 맞지?”
“그래, 이번에는 네 그 알량한 자존심마저 빼앗아…….”
바로 그 순간.
[Uoooooooooohhh!!]
관객들이 소리를 질렀다.
그 이유는 딱히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바로 난입이었다.
링이 살짝 울렸고 그와 함께 나는 등에서 강한 통증을 느꼈다.
쩌억-!
등 뒤에서의 체어 샷.
나는 천천히 바닥에 무릎을 꿇은 뒤,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 * *
“저런 육시럴 새끼!!”
“아버지, 러셀이에요.”
자기 손주를 저렇게 욕하는 모습에 그렉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스티비 하트는 아직도 프로레슬링이라면 사족을 쓰지 못하는 슈퍼 팬이었다.
“저 새끼, 호적에서 파!”
“…….”
때문에 과몰입해서 방송을 볼 때만큼은 자기 손주라고 하더라도 거침없이 욕설을 내뱉고는 했다.
그렇게 악역을 신나게 욕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게 프로레슬링의 좋은 부분이라면서 말이다.
캘거리의 하트 던전.
러셀이 데뷔한 이후로 버닝콩을 시청하는 건 하트 패밀리와 소속된 선수들에게는 일과가 되었다.
약 스무 명 가까운 인원이 조그마한 브라운관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아 시청하는 버닝콩.
……하지만 러셀의 턴 힐 이후로 뭔가 분위기가 묘해지고 있었다.
[안 됩니다! 안 돼요!]
해설자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충격적인 장면이 연이었다.
플레어를 동원해 신을 공격한 러셀은 릴리 가르시아를 링에서 쫓아내고 아주 잔혹한 짓을 했다.
철제 의자의 접히는 사이에 신의 무릎이 끼워졌다. 그리고 러셀은 2단 로프 위로 올라갔다.
설마, 설마.
[Booooooooooooooo-!]
[러셀! 안 돼!!]
콰직-!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신이 비명을 질러댔다.
그는 무릎을 움켜쥐고 링 위를 구르며 연이어 비명을 내질렀다.
그 환상적인 연기와 연출, 소리에 사람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머리를 움켜쥐고 충격에 빠진 관객들의 얼굴이 화면을 스쳤다.
그 가운데를 비명이 관통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무릎이 박살 났다.
그런 신의 머리에 러셀이 발을 올려 억지로 멈춰 서게 만들었다.
[Booooooooooooooooo-!!]
가장 큰 야유가 뒤따랐다.
하지만 그런 야유조차 러셀을 막지는 못했다.
그는 그대로 계약서를 들어 사인을 끝마쳤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악마로 만드는 것 같은 마이크워크까지.
[그럼, 그때 보자고.]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파급력은 엄청났다.
[Fu-k you Russell! Fu-k you Russell! Fu-k you Russell!]
사람들은 저주를 퍼부었다.
하지만 러셀은 플레어와 성공을 자축하며 그대로 링에서 퇴장했다.
남은 건 링 위의 신.
“허, 참.”
그렉은 기가 막혀 웃었다.
그 눈이 죽지 않았다.
무릎을 움켜쥔 녀석은 증오에 물든 눈으로 러셀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이어 응급요원들이 달려 나와 그 상태를 확인하고는 들것에 실어 바깥으로 옮겼다.
그런 그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는 관객들의 모습이 비췄다.
그렉은 입을 다물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연출을 저렇게 해놓고 뭐 어떤 식으로 경기를 하겠다는 거야?”
몇몇 연습생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제각기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렉은 그 섬세한 연출에서 모든 걸 이해하고 있었지만 딱히 거기에 대답을 해주지는 않았다.
이 멋진 연출을 받아들인 직후였던 터라 잠시 음미하고 싶었다.
마이클스와 자신이 떠올랐다.
그때의 그 대립에 비견이 되겠다 싶을 정도로 멋진 연출이었다.
신은 섬머 수플렉스에서 모든 이들의 만류를 무시하고 링에 오르겠지. 그리고 러셀은 그걸 철저하게 이용하면서 그를 짓밟을 터.
질릴 지경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협력해 위로 올라가는 방법을 영리하게 구성했다.
저거라면 이제 러셀은 그 누구와 대립을 하더라도 압도적인 야유를 받는 악역이 될 것이고.
신은 무릎이 박살 난 상태에서도 끝까지 싸운 남자로 사람들의 뇌리에 깊숙이 각인이 될 터였다.
‘이미 지금도 그렇지만.’
성장했구나.
그렉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울해하고 있던 조카의 모습을 떠올렸다.
정말 장족의 발전이었다.
신이라는 최고의 목표를 두고 있는 만큼 러셀 역시도 엄청난 속도로 실력이 상승하고 있었다.
그렉은 두 가지 생각을 했다.
하나는 섬머 수플렉스의 경기가 기대돼서 당분간은 잠도 이루지 못할 것 같다는 것이고.
‘부러워 죽겠군.’
다른 하나는 왜 자신이 현역이었을 때 신 같은 선수와 함께할 수 없었느냐는 것이었다.
저런 라이벌 하나만 커리어 내내 함께해주었어도 자신은 분명 더 높은 경지에 이르렀을 텐데.
러셀이 너무나도 부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 * *
섬머 수플렉스.
WWF의 4대 페이퍼뷰 중 하나로 전 세계를 통틀어 여름의 가장 큰 프로레슬링 이벤트였다.
그 관객 수는 14만 명.
다소 적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조차 전년도에 비하면 엄청나게 많은 관객 동원이었다.
프로레슬링계의 가장 큰 이벤트는 누가 뭐라고 해도 20만 명이라는 압도적인 관객을 동원하는 4월의 레슬 임페리움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럼블 매치라는 인기 좋은 특수 기믹 매치가 있는 킹스 럼블이 15만 명 정도.
두 브랜드가 격돌하는 링 서바이벌이 비슷하게 15만 가량이었고.
섬머 수플렉스는 더운 때기도 하고 상징성이 크지도 않아 10만에서 12만 선을 마킹하는 게 평균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14만이었다.
그것은 이 업계가 한 남자의 성장으로 인해 차근차근 성장해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바로 나다.
‘14만이라.’
거대한 경기장 뒤편의 락커룸.
잠시 혼자 남게 된 나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길게 심호흡을 했다.
물론, 나 혼자는 아니었다.
확실히 말해두자.
이 업계에서 월드 챔피언에 오르는 게 전부는 아니다. 내가 존경하는 존 마이클스도 복귀 후에는 한 번밖에 타이틀을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그 시대를 이끌어가는 선수로서 인정을 받았다.
내가 그 경우였다.
그리고 반대편.
이제 회사에서 본격적으로 밀어주려고 하는 숀 시나는 반대로 왕도적인 행보를 걷고 있었다.
착실하게 타이틀을 방어해나갔고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말하자면 랙다운의 아이콘.
그리고 지금까지 나는 버닝콩의 아이콘으로서 나름대로 그 역할을 잘 수행해왔다고 생각했다.
타이틀 전선에 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나를 사랑했다.
외부 활동으로 어떻게든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모았고 그들을 감동하고 열광하게 만들었다.
멋진 커리어였다.
그리고 그 커리어로 러셀을 희대의 개새끼로 만들어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도움을 받았지만.’
나는 무릎 쪽에 감아둔 가죽 끈을 보고는 씁쓸하게 웃어보였다.
이것으로 인해 나는 오늘 도리어 커리어의 한 페이지를 ‘패배’가 아닌, ‘분투’로 장식하게 되었다.
무릎이 박살 난 상태에서도 러셀 하트의 도전을 받아들여 끝까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기절한다.
그게 내가 오늘 시행할 위상을 해치지 않는 최고의 각본이었다.
‘사실 러셀을 너무 이겨서 이번에는 좀 깔끔하게 져주고 떠나는 것이 맞지 않나 싶었었지만.’
이것도 좋군.
사실 이런 식의 패배는 락콜드가 수행해서 관객들에게 압도적인 반응을 얻었던 각본이었다.
그 상대는 그렉 하트.
레슬 임페리움 13이었다.
당시 배드애스한 악역으로 호응을 받던 락콜드는 그렉 하트의 샤프 슈터에도 기절할 때까지 탭을 치지 않는 근성을 선보였다.
그로서 관객들에게 제대로 눈도장을 찍었고 아이콘으로 가는 길목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나도 그와 비슷한,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세련된 각본이었다.
나는 러셀의 비겁한 행각으로 무릎이 박살난 상태에서 링에 올랐으니까 락콜드보다 심한 상황이지.
얼른 사람들의 앞에서 그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속이 근질거렸다.
경기 각본은 링 프로듀서까지 함께해서 미리 다 짜둔 상태였고.
러셀은 긴장을 해서 속이 좀 안 좋은지 바깥 공기라도 쐬고 오겠다며 바깥으로 나간 상황.
오늘 딱히 경기는 없이 승리 후 바티스타를 축하해주다 얻어맞는 역할을 맡을 예정인 오튼은.
‘어디 간 거지?’
이상하게도 보이지 않았다.
마냥 기다리기에도 답답했던 나는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나가자 랙다운을 상징하는 파란색 셔츠를 입은 직원들이 서있는 것이 보였다.
“아, 신!”
링 서바이벌 때 함께 일했기 때문일까. 그들은 나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다가왔다.
“대립 잘 봤어요.”
“멋진 경기 부탁해요.”
“감사합니다. ……저기, 죄송한데. 혹시 오튼 못 보셨나요?”
“오튼, 은 모르겠는데.”
“시나라면 알지 않을까요? 아까부터 계속 경기장 안을 돌아다니고 있던데.”
“그럼 시나는?”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바로 저기 지나가고 있네요.”
그 말에 뒤를 돌아보자 복도 끝에서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시나의 모습이 보였다.
녀석과는 무척 오랜만이었다.
7월 페이퍼뷰 때 메시지를 한 차례 주고받은 것을 빼면 말이다.
“…….”
“…….”
하지만 나를 본 시나는 아무 말도 않고 잠시 자리에 서있었다.
“응?”
“왜 저러지?”
주변의 직원들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나는 알 것 같았다.
나 역시도 그랬으니까.
‘몸이 더 좋아졌네.’
녀석의 오늘 상대는 역사의 변화로 인해 다시금 JBL이었다.
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
녀석 역시 나에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당연히 우리가 더 좋은 대립을 해왔고 좋은 경기를 뽑을 예정이었다.
내 상대는 JBL처럼 한풀 꺾인 선수가 아니라 버닝콩 최고의 쓰레기인 러셀 하트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