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나는 왼쪽 무릎에 휘감은 보조기의 상태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임시방편으로 감아둔 검은색의 무릎 보조기는 흰색의 경기복과 대비되어 확실하게 눈에 띄었다.
물론, 실제로 무릎이 박살 났으면 이런 기구는 쓸모가 없었겠지만.
어디까지나 연출을 위해 감아뒀을 뿐이라서 문제는 전혀 없었다.
남은 건 링 위에서의 연기뿐.
나는 관절 부분에 스프링이 들어간 보조기의 상태를 확인하며 링 위에서의 움직임을 상상했다.
이런 걸 달고 싸우는 건 처음이라 혹시나 실수가 나오지 않도록 감각을 익혀두려는 것이었다.
그사이, 섬머 수플렉스는 14만의 관객들과 함께 시작되었다.
레이 미스테리우스와 차보 비테레로의 오프닝 매치를 시작으로 선수들이 각자의 실력을 뽐냈다.
총 열두 개의 경기 중, 러셀과 나의 경기는 바로 열 번째였다.
트리플H와 바티스타가 맞붙는 월드 챔피언십과 숀 시나가 나서는 유니버스 챔피언십의 바로 앞.
하지만 대립의 강도는 가장 커서 오늘 경기 중에서 최고로 긴 30분이라는 시간을 배정 받았다.
모두들 프로로서 최선을 다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기믹에 맞춰 관객들에게 어필을 했고, 그로써 좋은 반응을 얻어냈다.
그렇기에 기대가 됐다.
지금도 이렇게 멋진 쇼가 이어지고 있는데, 과연 우리가 준비한 연출은 얼마나 큰 반응을 얻을까.
몸이 근질거렸다.
모두가 나와 러셀의 경기를 미쳤다고 말할 순간이 기대가 됐다.
* * *
“미겔, 미겔. 일어나. 미겔.”
아버지가 툭툭 뺨을 건드리자 잠들어 있던 꼬마가 눈을 떴다.
미겔 로페즈.
올해 7세의 멕시코 출신 소년이 아버지의 품안에서 놀라 소리쳤다.
“페카도!”
“이제 곧 시작해. 걱정 마라.”
밤새 잠을 설쳤던 소년은 레이 미스테리우스의 경기가 끝난 뒤 아버지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항만 노동자로 일하는 아버지, 호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불안한 게 있었다.
부자父子는 그나마 가격이 쌌던 1층 가장 뒷자리를 골랐지만 관객들이 자리에서 계속 일어나는 탓에 링이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아들만큼은 어떻게든 목마를 태워 경기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뜻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경기장의 열기로 인해 호세는 현기증이 나는 것을 느꼈다.
이럴 때 뭔가 마신다면 딱 좋겠지만 표를 산 것만으로도 돈이 부족해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미겔은 자꾸만 불안한 듯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페카도, 볼 수 있겠죠?”
“그럼 분명히 잘 보일 거다.”
페카도.
스페인어로 SIN이라는 뜻이었다. 부자는 신을 그런 식으로 부르며 유대감을 다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배드애스한 신의 캐릭터에 호감을 느꼈고.
아들은 아들대로 항상 최선을 다하는 신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아들의 방에는 레이 미스테리우스와 신이 태그 팀 챔피언 벨트를 들고 있는 그림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다쳤는데 오늘 경기에 안 나오면 어떻게 하죠?”
“그건…….”
호세는 쓰게 웃었다.
아직 어린 미겔은 프로레슬링이 각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산타클로스의 비밀과 같이, 호세는 그런 프로레슬링의 즐거움을 최대한 지켜줄 생각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키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Booooooooooooooo!!]
역겨운 테마 인트로에 수많은 관객들이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14만 명이 운집한 경기장에는 태양을 형상화한 섬머 수플렉스의 대형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위의 스크린으로 러셀 하트의 이름과 영상이 흘러나왔다.
조명이 번쩍거리며 입장로 위에 플레어와 함께 나타난 그 모습이 부자에게는 콩알만 하게 보였다.
“아……!”
탄식하는 미겔.
플레어와 함께 링 위로 올라간 러셀이 돌연 마이크를 쥐었다.
[아, 정말 멋진 날이 되겠군.]
[Booooooooooooooo……!!]
[다들 왜 그래? 오늘 경기를 보지 못하게 되어서 아쉬운 건가?]
“저 나쁜 놈!”
“미겔.”
“죄, 죄송해요. 파피(아버지).”
아버지의 어깨 위에 앉아있던 미겔이 당황해 중얼거렸다.
순수한 소년조차 순간 욱해서 욕을 하게 만들 정도로 러셀의 악역 연기는 탁월했다.
[하지만 어쩌겠어. 신은 사인을 했고, 조심하지 않았지. 그러므로 경기에 나오지 않으면 자연히 몰수패로 이어지는 거야.]
[You Suck! You Suck! You Suck! You Suck! You Suck!]
[얼마든지 떠들어봐! 그 자식이 나오더라도 박살 난 무릎으로 나에게 맞서는 건 불가능하니까!]
점점 심해지는 야유.
하지만 러셀과 플레어는 무시하고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했다.
바로 그 순간.
아-아아아-아아아아아-!
성가의 합창과 함께 날카로운 비트가 경기장 내에 울려 퍼졌다.
깜짝 놀라 돌아보는 러셀.
[Yeeeeeeeeeeeeahhhhhhh!!]
관객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페카도!!”
아버지의 위에 올라가있던 미겔도 잔뜩 흥분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너무도 뒷자리에 있어 입장로 위로 나온 것이 신인지 무엇인지 전혀 구분이 가질 않았다.
“페카도! 페카도!”
미겔이 그렇게 부르는 소리가 닿을 리는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페카도는 단지 부자가 자신들끼리 부르는 별명일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들이 꼭 보고 싶어 하던 쇼였다. 호세는 성모께 기도했다.
제대로 행복하게 해주지도 못하는 아들이, 여기에서만큼은 제발 소망을 이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들이 영웅으로 생각하는 페카도가 꼭 반응을 보여주었으면.
그리고 그 소원은, 호세가 기도하던 성모가 아닌 경기장 전체를 둘러보며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던 일류 프로레슬러에 의해 이루어졌다.
* * *
무려 14만 명의 관객들이 내 이름을 큰 소리로 연호하고 있었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그런 가운데, 나는 최대한 괜찮은 척을 하며 링 위로 움직였다.
사실 멀쩡한 상태였지만.
각본 상 무릎이 박살 난 상태다.
그걸 최대한 숨기고 있다.
그런 복잡한 감정을 관객과 시청자들에게 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일부러 관객들의 반응에 일일이 호응하며 길게 시간을 끌었다.
“신! 사랑해요!”
“오늘 지지 말아요!!”
바리케이드 앞으로 다가가자 관객들이 내게 한마디씩을 건넸다.
적당히 하이파이브를 해주고 다시 올라온 나는 이어 뭔가가 툭 튀어나와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린 소년이었다.
라티노 계열로 보이는 소년이 아버지의 어깨 위에 서서 나를 향해 크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저건 좀 위험한데.’
잠시 고민하던 나는 선글라스를 벗어 입장로 바로 옆에 서있는 보안 요원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이야기했다.
“저기 저 꼬마한테 전해주고, 위험하니까 아버지 어깨에 잘 앉아서 관람하라고 말해주세요.”
“옙.”
갑작스러운 내 행동을 보고는 약간 의아해하는 관객들.
사실 내가 직접 가는 게 베스트겠지만, 그랬다가는 큰 혼란이 빚어질 수도 있어서 참았다.
그 대신, 나는 링 위로 올라갔다. 러셀과 플레어가 눈치를 채곤 자연스럽게 밑으로 내려갔다.
나는 소년이 있는 방향의 탑 턴 버클로 올라가 털썩 걸터앉았다.
그때쯤 관객들 사이를 헤치고 소년에게 다가간 보안 요원이 선글라스를 전해주었다.
[Yeeeeeeeaaaahhhhh!!]
그 표정은 거리가 너무 멀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관객들의 반응으로 인해 알 수 있었다.
그 옆의 수많은 사람들이 소년을 축하해주며 아버지에게 맥주와 소시지를 권하는 것까진 보였다.
‘좋군.’
선역으로서 소년의 꿈이 되어줄 수 있다는 게 영광으로 느껴졌다.
물론, 단순히 소년을 기쁘게 하기 위해 이런 연출을 갑작스럽게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음악이 멈췄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관객들이 나를 믿고 계속해서 환호를 보내주었다. 나는 거기에 팔을 좌우로 펼치며 응답해주었다.
모두들 이렇게 생각할 터다.
신은 괜찮다.
러셀의 공격은 터프한 신에게는 사실 별것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와중.
나는 탑 턴 버클에서 내려오며 자연스럽게 바닥에 넘어졌다.
[……………….]
경기장 안에 맴도는 침묵.
와, 이건 좀 놀랍다.
그렇게 내 이름을 수없이 부르던 14만 명이 내가 쓰러지자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충격에 빠졌다.
그 타이밍에 맞춰 러셀이 자신만만한 태도로 링에 올라왔다.
녀석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굉장한데.”
“그렇지?”
사악한 표정과는 달리 진심으로 내 퍼포먼스를 칭찬한 것이었다.
나도 즉석에서 짜낸 것이지만 꽤나 마음에 들어 웃음이 나왔다.
그걸 여유를 부리는 척 가장하고 일어선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링 아나운서가 우리를 소개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이이어질 경기는 WWF 인터컨티넨탈 챔피언십이 걸린 아이 큇 매치입니다!”
[Yeeeeahhh……!]
환호는 전보다 훨씬 작아졌다.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내 무릎의 상태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뒤이어 키와 체중을 적당히 부풀린 소개가 시작되었다.
“먼저, 도전자를 소개하겠습니다! 캐나다 캘거리 출신! 188cm에 120kg……! 러셀 하트!!”
[Boooooooooooooooooo!!]
야유 속에서 러셀은 가볍게 손을 들었다 내리며 자신을 어필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녀석은 단지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상대, 캘리포니아 로스 엔젤레스 출신! 190cm에 125kg! 현 WWF 인터컨티넨탈 챔피언!”
릴리가 나를 돌아보았다.
“시이이이이이이이이인!!”
[Yeeeeeeeeeeeeeaaahhhhh!!]
소개와 함께 쏟아지는 환호에 맞춰 나는 벨트를 번쩍 들어올렸다.
하지만 움직이지는 못했다.
자리에 가만히 서서, 마치 덫에 발목이 묶인 투견처럼 필사적으로 으르렁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걸 안 러셀은 날 어떻게 요리할까를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내가 다가온 심판에게 벨트를 건네고, 이내 경기가 시작되었다.
땡땡땡!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내 이름을 연호하며 응원을 보내는 14만 명의 관객들.
하지만 난 움직이지 못했다.
다리가 진짜로 무겁게 느껴졌다.
러셀에게 박살이 났다는 설정의 왼쪽 무릎에 납이 매달린 듯했다.
그런 반면.
[Booooooooooooooooooo!]
러셀은 깡총깡총 링 위를 뛰어다니며 나를 도발하기 시작했다.
녀석을 향해 쏟아지는 야유.
드로어즈 형태의 경기복. 니 패드에 손목에는 테이핑까지. 어깨에 이르는 금발은 하나로 묶었다.
“왜 그래?”
다가온 녀석이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거기에서 분노한 내가 녀석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렇지만 하반신이라는 출발점을 잃은 주먹은 너무나도 느렸다.
회피.
중심을 잃고만 나는 그대로 볼썽사납게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Uooooohhh……!!]
탄식하는 관객들.
그 후로, 나는 러셀의 공격에 일방적으로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몸이 등 뒤에서 번쩍 들렸다.
저먼 수플렉스.
투콰앙!
경기 초반이었지만 나는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쓰러져 있었다.
그런 내게 다가온 러셀이 무자비하게 무릎을 짓밟았다.
“끄흑……!”
[Boooooooooo-!]
역겹고 더러운 행동을 본 관객들이 계속해서 야유를 보냈다.
경기 바로 전주.
계약식이 끝난 직후 이어진 습격에서 상대의 무릎을 박살 내 자신이 이길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바로 그것이 러셀이 경기 직전에 노린 바였고 훌륭하게 통했다.
내 주변 인물을 노리겠다는 협박으로 객관적인 시야를 잃은 상태였던 나는 훌륭하게 당했다.
공격이 계속 이어졌다.
[SIN! SIN! SIN……!]
사람들이 나를 응원하는 소리는 안타깝게도 조금씩 작아졌다.
‘이건 정말 어쩔 수 없다.’
‘무릎이 박살 난 상태에서 이 경기는 원 사이드로 끝날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러셀의 악독한 행각에 야유는 점차적으로 더 심해졌고 모든 반응은 녀석을 향해서 집중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모두가 답답해 미칠 것 같다고 느낀 바로 그 찰나의 순간.
쩌억!
슈퍼 킥이 터졌다.
[Yeeeeeeeeaaaaaaaahhhh!]
상반신을 옆으로 내림과 동시에 순간적으로 터지는 옆차기. 그것을 본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청난 환호성.
장내가 들끓고 사람들은 그동안 참았던 응원을 보내기 시작했다.
무릎을 절며 물러난 나는 숨을 몰아쉬며 러셀을 바라보았다.
충격에 쓰러져 있던 녀석이 이윽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표정에 당혹감이 서렸다.
로프에 팔을 걸치고 억지로 일어서있던 나는 씨익 웃어 보였다.
“뭐해, 안 덤비고.”
말했듯, 이 경기는 내가 진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확실히 챙겨갈 수 있는 이미지가 있었다.
무릎이 박살 난 상태에서도 상대에게 맞설 정도로 터프하며.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알량한 방식으로 쓰러뜨릴 수 없다.
바로 그것이 내가 오늘 경기에서 챙겨갈 가장 큰 이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