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
멋진 페이퍼뷰였다.
각각의 경기가 나름의 내러티브를 가지고 대립이 종결되었다.
나는 러셀에게 훌륭하게 타이틀을 넘겨주었고, 헌터 역시 바티스타를 메인 챔피언으로 키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JBL 역시도 시나를 다시 한 번 띄워주었다.
[정말 대단합니다! 숀 시나! 최대의 숙적이었던 JBL에게서 다시 타이틀을 방어합니다!]
[Cena! Cena! Cena! Cena! Cena! Cena! Cena! Cena!]
미들 로프를 밟고 올라간 시나가 오늘 지켜낸 WWF 월드 챔피언 타이틀 벨트를 번쩍 들어올렸다.
관객들이 시나의 이름을 연호하는 가운데 여름의 최대 이벤트, 섬머 수플렉스가 그렇게 끝났다.
그 광경을 백 스테이지에서 지켜보고 있던 나는 최대한 냉정하게 경기에 대한 판단을 내렸다.
‘영 별로였군.’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긴 했다.
유연성이 부족한 시나의 레슬링 솜씨는 아직 끔찍한 수준이었고, 상대인 JBL도 특별한 테크니션은 아니었다.
하지만 워낙 시나의 인기가 출중했고, 두 사람이 그동안 대립을 재미있게 쌓아서 반응은 매우 좋았다.
서민들의 영웅인 시나와 졸부 악당 JBL의 대립. 그 누구라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시나리오였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박수 소리에 나는 러셀과 오튼을 돌아보았다.
“가보자고.”
“그래, 축하해줘야지.”
“끝나고 뭐 마시러 가냐?”
“글쎄.”
“가자. 여자들도 꼬시고. 응?”
“………….”
“오튼, 전에 분명히 만나는 사람 있다고 하지 않았냐?”
“……헤어졌어.”
시무룩해지는 오튼.
아무래도 차인 모양이군.
그렇게 생각하며 바라보자 오튼이 그대로 러셀에게 엉겨 붙었다.
“그러니까 가자고! 저 녀석은 여자 친구 있으니 놔두고, 러셀. 응? 내 윙맨이 되어주라. 제발~!”
“미, 미안한데. 오튼.”
“응?”
“……?”
희미하게 뺨이 붉어진 러셀.
이 자식, 설마.
“너 게이…….”
“아니, 미친놈아.”
오튼의 헛소리를 일축한 나는 그대로 러셀의 어깨를 툭 쳤다.
“누구야?”
“이, 있어.”
“사내야?”
“사내면 그게 게이…….”
나는 오튼의 발등을 콱 밟았다.
러셀은 아직은 애매한 사이인 건지 대답하지 못했다. 말인즉슨 우리도 아는 사람이라는 말이겠지.
뭐, 선수일 수도 있고.
아니면 현장팀의 여자 직원들 중 하나일 수도 있겠다.
절대 오튼이 말한 것처럼 남자일 리는 없고.
만약 그렇다면 애초에 우리에게는 말 자체를 하지 않았을 테니까.
당장 우리가 아무리 친하다고 한들, 그런 중요한 사실을 밝히기에는 아직 가벼운 순간이었으니까.
그나저나. 러셀이 여자라.
내가 아는 녀석의 미래에 대한 기억은 헌터의 정치에 당해 오래 버티지 못하고 나갔다는 사실뿐이니까.
이후 누구랑 만나고 어떤 인생을 살아갔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아마 하트 던전으로 돌아가서 수련생들을 키워내지 않았을까 싶긴 하지만.
뭐, 어쨌든 지금의 녀석은 차근차근 스타가 되는 길을 밟아가고 있으니까.
앞으로도 문제될 건 없겠지.
그러고 보니 한 가지 그냥 넘어갈 뻔했던 사실이 떠올랐다.
“러셀.”
“응?”
“축하한다.”
내 말에 뒤를 돌아보는 녀석.
WWF의 2선 타이틀인 인터컨티넨탈 챔피언 벨트는 녀석의 가방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잠시 멍하니 있던 러셀은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실감이 안 나네.”
“챔피언이라는 게?”
“아니, 널 이겼다는 게.”
“비겁한 수를 썼으면서.”
“그게 악역이잖아. 콜라 뒤집어쓸 때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데.”
“난 웃음 참느라 혼났지.”
진짜 역대급 사고였다.
사람들이 너무 과몰입해서 경기장 위로 물건을 투척하는 건 90년대 초반까지나 있던 일인데.
아예 경기장 난입까지 벌어졌으면 정말로 위험했겠지만, 다행히 거기까지는 아니었다.
그로 인해 난 확신했다.
러셀은 자기가 원하던 대로 최대한 비겁한 이미지를 쌓아올렸고.
나는 녀석의 행동으로 무릎이 박살 났음에도 결코 항복하지 않은, 선수 이미지로서 큰 이득을 봤다.
서로에게 정말로 멋진 결말이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들과 견주어 봐도 자신이 있을 정도였다.
숀 시나와 게이브 바티스타.
고릴라 포지션 앞에 도착한 우리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축하를 받고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시나와 바티스타는 오늘부로 1군 챔피언이 되었고, 앞으로 각 브랜드를 이끌어갈 예정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축하에 일일이 대답을 해주던 시나가 이윽고 날 돌아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 * *
모두 원하던 결과를 얻었다.
아니, 그보다 더 나갔다.
‘내 이미지까지 챙겼으니까.’
하지만 이번 대립에서 가장 만족스러웠던 부분은 러셀이 선수로서 완전히 자립했다는 점이었다.
내가 랙다운에 이적하기 전까지 반드시 끝내놨어야 할 임무였다.
이렇게 해야 향후 나, 시나, 러셀, 오튼이 함께 스타가 된다는 계획에 차질이 생기지 않으니까.
회사가 계속해서 돈을 벌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미래를 책임질 스타 선수가 반드시 필요했다.
하지만 이 바닥은 힘들고 고되다. 그렇기에 스타가 탄생해도 오래 이어지는 것은 힘들었다.
락콜드 스티비 스틴. 96년에 메인 이벤터가 되어 00년도에 은퇴.
더 팍도 비슷한 시기에 떠올랐지만 버티지 못하고 영화계로 전향.
잭 하디는 약물 문제가 있고.
브룩 레스너도 그렇고, 앞으로 그런 선수들은 점점 더 많아진다.
이 업계를 단순히 어느 정도의 유명세를 얻기 위한 과정으로 사용하고 버리는 이들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앞서 말한 친구들은 끝까지 프로레슬링 업계에 헌신을 할 수 있는 친구들이었다.
시나는 말할 것도 없고.
러셀도 전생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내가 그 열정을 직접 눈으로 보고 픽을 판단한 선수였다.
마지막으로 오튼.
놀랍게도 얘는 좀 다른데.
열정이란 게 거의 없고 그냥 돈을 벌려고 하는 일이다 보니 선수 생명이 무지막지하게 길었다.
거기에 타고난 재능 하나만으로 어떻게든 스타 반열에 올랐지.
그래서 픽으로 선정한 거다.
멀지 않은 미래.
프로레슬링이라는 콘텐츠는 구세대의 유물로서 점점 잊혀져갔다.
하지만 지금은, 이번에는 아니다.
그리고 나에게는.
언제나 아니다.
나에게 있어 프로레슬링은 언제나 가장 심장을 뛰게 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그 일을 막고 싶었다.
이 업계의 몰락.
더 많은 스타를 키워야 했다. 오늘 러셀을 띄워주었듯이, 각 선수들과도 대립을 최대한 잘 진행하면서.
그리고 그걸 위해서 내가 솔선수범해서 과거의 선수들에게 위상을 받아오는 일을 해야 했다.
가령, 현재 랙다운에서 활약하고 있는 전설적인 위상의 선수들.
거트 엔젤.
레이 미스테리우스.
캐스켓-테이커.
그리고 마지막으로.
‘케인 맥센까지.’
미리 소식을 들어 다행이었다.
바트 맥센의 장자로서, 태도 불량 시대 내내 크게 활약했던 남자.
마지막으로 ‘침공 각본’을 수행하고는 회사를 떠났던 그가.
‘폴 헤이건의 후임으로 랙다운의 총괄 프로듀서에 임명되다니.’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향후 필요해질 것 같아 헤이건을 랙다운 쪽에서 빼냈더니 바트가 바로 거기에 손을 쓸 줄이야.
말할 것도 없이 케인이 날 견제하도록 판을 짜둔 거겠지.
‘회장인 자기가 직접 날 건드리면 영 체면이 안 서니까.’
그래서 지금까지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놔두었지만, 지금부터는 그렇게 두지 않겠다는 선언.
나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케인 맥센인가.’
태도 불량 시대에 악역으로서 가장 큰 활약을 보였던 바트 맥센.
그 옆에서 직접 선수로서도 활동하며 몸을 사리지 않았던 남자.
그가 돌아왔다.
‘나에게 먹히기 위해서.’
자기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어차피 그쪽에서 아무리 날고 기며 별의별 수단을 다 쓰더라도 내게는 당해내지 못할 테니까.
결론을 내린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캔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주차된 캠핑 버스 안.
“이익……! 익!!”
나는 말 그대로 ‘발만’ 써서 랜스 오튼을 상대하고 있었다.
텔레비전 안에서는 폴리곤 스타일의 프로레슬러 두 명이 계속해서 공격을 주고받고 있었다.
러셀은 피곤하다며 맥주 한 캔 마시더니 벌써 잠이 들었고.
옆에서 우리의 게임을 구경하던 시나가 입을 열었다.
“신. 무슨 생각 했어?”
“뭐?”
“뭔가 게임하면서도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아, 이번에 랙다운 이적하는 것 때문에 어떻게 될까 싶어서.”
“크하하! 신! 이 자식! R.K.O.를 먹어라! ……대미지가 왜 이래?!”
뿅뿅.
“이런 제기랄!”
게임에서 패배한 오튼이 실제 경기에서 패배할 때보다 더 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시나에게 패드를 넘겼다. 그걸 본 오튼이 흥분해 외쳤다.
“시나, 이거 해본 적 있어?!”
“아니, 없는데. ……어라. 내 캐릭터 능력치가 생각보다 높네.”
패드를 잡은 시나는 이어서 오튼을 개처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이게 반격? 이게 공격이고.”
“갸아아아악!!”
게임 속에서 학살이 이어지는 가운데, 나는 슬쩍 물어보았다.
“넌 어떠냐?”
“응?”
“버닝콩으로 오는 거나, 요새 좀 어떻게 지내나 싶어서 말이야.”
“재미있지. 죽을 만큼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수많은 사람들의 희망이 될 수 있는 일이잖아?”
“그런가.”
“넌 그렇게 생각 안 해?”
“부차적인 부분일 뿐이야.”
분명 사람들이 나를 보면서 희망을 가지면 기분이 좋기는 했다.
하지만 난 그걸 위해서 이 일을 하는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어디까지나 ‘부차적’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시나는 정반대.
돈을 위해 프로레슬링을 시작했던 녀석은 반응을 얻고 사람들을 기쁘게 만드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자신을 보며 병마를 이겨내는 소년을 보고는 자신이 대중을 위해 싸워야 함을 알게 되었다.
뼛속까지 선한 녀석이었다.
나와는 정반대로.
하지만 그럴 이유가 있었다.
녀석은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선하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오튼을 간단히 쓰러뜨린 시나가 활짝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버닝콩으로 오니 네가 렉다운으로 간다니. 엇갈리게 되어서 아쉽네.”
“나도 그래.”
“나중에 한 브랜드가 되면 너와는 제대로 ‘결판’을 내고 싶어.”
“결판?”
“그래, 바트 맥센 같은 건 무시하고. 누가 시대를 이끌어 나갈 재목의 선수인지 말이야.”
“…….”
“그때까지 기다릴게.”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는 시나.
하지만 왜일까.
시나 정도의 사내가 이야기하니, 그 말이 단순한 말로 느껴지진 않았다.
말하자면 프로레슬링만으로 정상에 오르려는 녀석은 정도正道.
반대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물고 늘어지는 나는 사도邪道.
“그래, 그러자고.”
앞으로 할 일도 많이 남아서 그게 대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숀 시나.
내가 탑에 오르기 위해서는 네가 만들어낼 시대를 끝장내야겠지.
레슬 임페리움.
WWF 월드 챔피언 숀 시나.
그 반대편의 도전자.
신.
나는 그런 그림을 상상해보았다.
지금 몇 개월 만에 마시고 있는 맥주보다 더 달콤하게 느껴졌다.
* * *
섬머 수플렉스가 끝나고 며칠 뒤.
캘리포니아 말리부 해변.
맥센 저택.
집안의 식탁은 마치 중세 귀족의 그것처럼 길었고, 이것저것 화려한 장식이 되어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거기에 주인의 개성은 없었다. 저택을 꾸밀 때 전문가에게 맡겼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바트 맥센은 그런 남자였다.
프로레슬링이라는 세계 이외에는 그다지 깊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막말로, 흥미를 가지지 못했다.
돈이 많아지면 여자나 사치, 약에 손을 대고 마는 일반적인 부자들하고는 달랐다.
정말로 이상한 사람이었다.
일을 하고, 운동을 하고, 스테로이드를 맞고. 그 스테로이드조차 60세가 넘어 합법 처방이었다.
이 저택을 산 것도 ‘세금을 내기 싫다’는 지극히 합리적인 이유.
그 정도로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일에 관해서만큼은 누구보다도 큰 욕망을 가지고 있는 사내였다.
자신의 대리자를 내세워 검투 경기에서 승리하는 걸 보며 쾌감을 느끼는 로마 황제와도 같았다.
그리고 그건 그 자식들도 각자 물려받고 있는 특성이었다.
그들은 제각기 프로레슬링이라는 일에 미쳐 있는 사람들이었다.
“호호, 도련님께서 돌아오셔서 처음으로 세 분이 모이셨으니 한번 크게 차려봤어요!”
따라서 20년 경력의 입주 가정부 경력을 지닌 후퍼 부인의 굉장한 요리들을 앞에 두고도 식사보다는 다른 이야기에 더 집중을 했다.
바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경기가 제일 좋았나?”
이번 섬머 수플렉스에 대한 이야기였다. 거기에 킥킥 웃은 장남, 케인 맥센이 대답했다.
“티파니는 물을 것도 없죠.”
“신과 러셀의 경기였겠지.”
“……두 분 다 적당히 하세요.”
한숨을 내쉰 티파니가 식어가는 수프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확실히 멋진 경기였다.
부상에도 끝까지 일어서는 신은 누가 보더라도 반할 수밖에 없을 만큼 남자다웠다.
그렇기에 다소 화기애애한 기색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티파니는 가족 관계에 금이 갔다고 느끼면서도 다시 만나면 어떻게든 좋게 끌어가보고자 노력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피와 살이 이어졌으니까.
“아버지는 어떠셨어요?”
“내가 그걸 어떻게 대답하냐.”
“저희만 있는 자리잖아요.”
“바티스타가 꽤 멋지더군.”
“아버지는 역시 그런 걸 좋아하신다니까. 헤라클레스 같은 거.”
케인이 가볍게 거들었다.
완벽히 바트의 취향을 표현한 말이라 살짝 웃음을 터뜨린 티파니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오라버니는 어때요?”
“……나?”
“예, 이번 섬머 수플렉스에서 어떤 경기가 가장 좋았어요?”
그리고 이어진 대답은 순간 티파니의 얼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신과 러셀의 경기.”
“……?”
“개중에서도 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