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
WWF의 선수들은 경력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품 가치를 통해서 연봉이 정해졌다.
상품 가치.
다시 말해 실력이었다.
자신이 관객들로부터 얼마나 반응을 얻고 있으며, 그를 통해 회사에 얼마나 이윤을 안겨주느냐.
각종 머천다이즈 판매량이나 외부 활동으로 인한 회사 홍보. 그리고 나왔을 때의 순간 시청률.
거기에 각종 설문 조사와 팬 반응 리서치 등을 거쳐서 나온 결과로 선수의 가치가 정해졌다.
물론 악역은 선역에 비해 일반적으로 상품 판매량이 낮을 수밖에 없어 그 점은 감안을 받았다.
그런 의미를 하나하나 따져봤을 때, 이번 재계약 연봉은 내가 회사에서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닌 선수가 되었는지를 반증했다.
무려 천만 달러.
물론 이 회사는 다른 리그가 없어 선수 연봉을 짜게 주는 편이라 절대적으로 높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첫 번째 재계약에서 연봉이 20배 올랐다는 건 그야말로 기네스북에 오를 기록이었다.
첫 번째 재계약에서 세상에 내가 가진 가치를 내보인 셈이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불만을 가지는 선수가 분명 있을 터였다.
이제 메인 쇼 3년차에 회사의 얼굴로 밀어주려는 시나도 칠백오십만 달러를 받는 상황에서.
그보다 1년 늦게 올라온 내가 천만 달러를 받는 건 솔직히 합리적으로 느껴지지는 않겠지.
아직 주변에 그 사실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락커룸 내에서 큰 파장을 몰고 올 터였다.
‘일단 그건 그거고.’
적당한 순간이 올 때까지는 느긋하게 상황을 관망할 예정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그들 역시도 자연히 케인 맥센의 랙다운에 부족한 점이 뭔지를 알게 될 터였다.
애프터 쇼로부터 한 주가 지나 WWF 드래프트 쇼가 시작되었다.
월요일 밤의 버닝콩.
멋진 마이크워크로 정평이 나있는 크리스 젠코가 링에 올라 드래프트 쇼의 시작을 알렸다.
[신사 숙녀 여러분! 소개합니다! 랙다운에서 버닝콩으로 이적해온 첫 번째 선수는 바로……!]
직후, WWF 유니버스 챔피언, 숀 시나의 음악이 울려 퍼졌다.
[Yeeeeeeeeeeaaaaaahhhh!!]
어마어마한 환호와 함께 시나가 경기장으로 나오고, 그렇게 드래프트 쇼가 시작되었다.
드래프트의 의도는 명백했다.
향후 WWF의 간판으로 밀어주려는 시나를 버닝콩으로 옮긴다.
그리고 나이가 좀 있지만 확 인기를 얻은 바티스타를 랙다운으로 옮겨 챔피언의 균형을 맞춘다.
랙다운 소속이었던 거트 엔젤과 빅 죠가 버닝콩으로 이동한다.
모두가 시나를 아직 상대한 적이 없는 레전드 급 선수들이었다.
그렇게 따지자면 바티스타를 상대한 적이 없는 버닝콩의 슈퍼스타들도 랙다운으로 가는 게 맞았다.
카인이나 크리스 젠코 같은 선수들. 하지만 여기에서는 캐스켓-테이커가 정치력을 좀 발휘했다.
괜히 헌터와 엮이고 싶지 않았던 그가 랙다운에 남기를 택했다.
그렇기에 자이언트 레슬러가 필요했던 버닝콩에서는 카인을 남겼다. 그리고 차선책을 모색했다.
바티스타의 상대가 되기 위해 부커-리가 랙다운으로 이동했다.
나와 러셀, 오튼.
하이 미드 카더이자 시나와 함께 회사의 미래를 책임질 라이징 스타로서 평가 되고 있는 세 사람.
러셀과 신은 떼어놓는다.
그리고 오튼과 내가 랙다운으로 가서 전설들의 빈자리를 채운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랙다운의 로스터는 바로 다음과 같았다.
일단 WWF 월드 챔피언.
게이브 바티스타.
그와 맞붙어 좀 더 월드 챔피언으로서 그를 띄워줄 선수들.
부커-리, 캐스켓-테이커, 레이 미스테리우스, JBL 이상 네 명.
그 아래로 U.S. 챔피언을 두고 싸울 선수.
랜스 오튼, 하이든리히, 무함마드, 올랜도 조슨, 마크 진랙 같은 미드 카더들.
그 아래는 생략하겠다.
어쨌든 프로레슬링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이라면 위의 목록을 보고는 하나를 떠올릴 터였다.
그렇게 말로 하면 복잡하지만 쇼로 보면 무척 간단한 버닝콩의 드래프트가 끝나고 며칠 뒤.
나는 뉴욕의 사무실에서 티파니와 랙다운 드래프트 쇼를 보았다.
그리고 왜 지금 랙다운이 문제가 있는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허리가 얇은데요.”
티파니는 날카롭게 지적했다.
TV 속에서는 랜스 오튼이 나와 그 멋진 몸매를 과시하며 악역으로서 어그로를 끌고 계셨다.
그것을 바라보며 나는 티파니의 깊은 통찰력에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말은 반대로 했다.
“그래?”
“예, 메인 라인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아요. 지금 좀 선역이 많은 것 같아서 한두 명쯤 악역으로 전환을 해야 할 것 같지만.”
맞는 말이었다.
그렇게 해서 얼마 뒤 악역으로 전환하는 것이 일단 부커-리.
그는 아내인 샤몰과 함께 ‘킹-부커’라는 왕 기믹으로 활동하며 그야말로 전설이 되었다.
그다음이 좀 놀라운데.
회사 내에서는 이후 레이 미스테리우스의 가면이 가진 상품성에 주목해 그를 챔피언에 올리고.
나이 때문에 체력이 달리고 힘이 떨어지기 시작한 바티스타를 악역으로 전환시키는 선택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
지금 로스터를 놓고 봤을 때 내가 빠지면 정말로 허리 쪽 라인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티파니는 각 선수들에 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렸다.
“하이든리히는 나이가 많아요.”
“그렇지.”
“무함마드는 기믹이 영.”
“거기다 위험하지.”
그는 예전의 아이언 시크처럼 중동에서 온 무슬림 악당이었다.
2001년의 9.11 테러라는 비극 이후로 이라크 전쟁이 진행 중인데 무척이나 위험한 캐릭터였다.
실제로 이후 무함마드는 테러리스트들을 데리고 쇼에서 악당 짓을 하는 세그먼트를 선보였다가 언론의 비난을 받고 방출 당했다.
실제로 그는 중동 출신이었지만 미국인이었고 그런 각본은 절대로 안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결국 모든 책임을 떠안았다.
“올랜도 조슨은 사실 받은 기회에 비해 살리지를 못했죠.”
“맞아.”
조슨은 JBL의 부하 역할로 꽤나 많은 기회를 받았지만 안타깝게도 반응이 잘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마크 진랙은 회사 내에서의 평가가 안 좋고요.”
그는 협조성이 안 좋아 일명 백스테이지의 양아치로 통했다.
허리 라인이 얇은 상태에서 랜스 오튼이 랙다운에서 처음 대립한 것이 레이 미스테리우스였다.
브랜드는 보통 메인 이벤터들이 하이 미드 카더와의 대립을 통해 위상을 주고받고 월드 챔피언과 대립을 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정작 메인 이벤터들에게 도전해야 할 미들 라인의 선수들이 저 지경이니 랙다운은 머지않아 분명 삐걱거릴 터였다.
“그리고 난 그때를 대비해서 느긋하게 기다리면 되는 거야.”
“그때라뇨?”
“선배들이 내가 너무 좋아서 제발 저놈이랑 대립을 진행하고 싶다고 불만이 쌓일 때를 말이지.”
“그걸 어떻게 보여주려고요?”
“하우스 쇼.”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슬쩍 내 연봉에 관한 정보를 흘리면? 선수들로서도 회사에 항의할 근거가 생기는 셈이지.”
인간은 불만이 생겨야 항의를 한다. 이렇게 하면 선수들이 회사 측에 말하기가 더 쉬워지리라.
거기다 이번 기회에 연봉 자체를 높여두고 싶기도 했고 말이다.
나 정도 되는 선수가 50만 달러만 받고 뛰면 너무 억울하잖아?
“정말 치밀하네요. ……나중에 정치 같은 거 해도 되지 않을까?”
그 말을 들은 티파니는 어이가 없다는 듯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까지는 절대 아니고.
거기에 난 팬들을 믿었다.
랜스 오튼의 세그먼트가 끝난 이후, 화면에 내 얼굴과 함께 랙다운으로 이적했다는 말이 나왔다.
[SIN Drafted To RackDown!]
[Yeeeeeeeeeeeeaaaahhhh!!]
앞선 다른 선수들에게 절대 뒤지지 않는 큰 환호가 나왔다. 해설자들도 잔뜩 신이 나 소리쳤다.
[신이 랙다운으로 이적합니다!]
[버닝콩을 뒤집어놓은 슈퍼스타의 이적이군요! 환영합니다! 신!]
해설자들이 신이 나 소리쳤다.
이들 모두가 날 기억하기 때문에 난 반드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 * *
그로부터 2주 뒤.
케인 맥센으로부터 원하는 만큼 유급 휴가를 쓰라고 제안 받은 나는 일단 좀 휴식을 취했다.
어차피 팬과 선수들도 내가 각본상의 부상으로 잠시 쉰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문제될 건 없었다.
그리하여 9월.
나는 제임스 관에게 미리 연락을 받았던 대로 헬 쏘우의 상영 종료 기념 파티에 참석했다.
뉴욕의 한 거대한 호텔 연회장.
영화를 함께 촬영한 팀원들 이외에도 외부인들이 꽤나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헬 쏘우의 주인공으로서 또 하나의 주연인 조댕, 감독인 관과 함께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내가 해온 일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신! 드디어 만나는군!”
그렇게 말하며 악수를 청한 것은 유명 영화감독인 샘 레이시였다.
데몬 데드의 감독으로 시작해 슈퍼 히어로 영화인 스파이더 보이 시리즈의 감독으로 유명했다.
현재 3편을 제작 중이라고.
관 감독에게서 나를 소개받은 그는 노골적으로 흥미를 보였다.
그 외에도 수많은 영화 관계자들이 내가 어떤지 보기 위해 이 자리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잠시 쉬던 중 관 감독과 조댕마저 그렇게 이야기할 정도였다.
“다들 파티보다는 신에게 더 관심이 많아 보이는데요.”
“그러게 말입니다. 덕분에 후속작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죠.”
“에이, 아닙니다. 다들 잘해주셔서 후속작이 관심을 받는 거죠.”
나는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실제로 그다지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다들 잘 대해줘서 나 역시도 배우는 자세로 촬영에 임했다.
“레이시 감독이 자네를 스파이더 보이 3의 악당으로 캐스팅하려는 모양인데. 조심하는 게 좋겠어.”
“왜요?”
“몸이 남아나질 않는다던데.”
“프로레슬링보다야 낫겠죠.”
“아, 하긴 그렇군. 자네, 배우가 아니라 프로레슬러였지.”
“왜요. 제가 너무 잘했나요?”
“하하하! 그래, 맞아!”
나는 웃으며 건배를 했다.
멋진 날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파티를 즐기며 수많은 관계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나중에 카메라 테스트 한번 받아볼 의향 있나?”
“여기 내 명함이네. 나중에 한 편 같이 했으면 좋겠어.”
“꼭 연락해줘요. 개인적으로.”
……심지어는 여자 배우들 몇몇이 자기 번호를 주고 가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커리어를 생각해봤을 때, 딱히 관심이 가진 않았다.
아, 영화 쪽 말이다.
내게 흥미를 느껴서 이 자리에 모인 대부분의 감독들은 액션이나 공포 영화를 주로 촬영했다.
하지만 나는 현재 그런 영화에는 딱히 관심이 없는 상태였다.
할리우드에서는 한 해에 수백 편의 액션 영화가 쏟아져 나온다.
배우의 화제성을 믿고 단순히 한 번 치고 빠지기 위한 영화. 그런 건 찍어도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샘 레이시 감독의 영화는 그래도 전 세계적으로 유명했으니 괜찮았지만.
그것보다는 좀 더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영화를 원했다.
더 팍이 그랬듯이.
그리고 이전의 루돌프 슈워제네거도 그랬듯, 나에게는 좀 ‘친근한 이미지’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두 사람은 근육질의 마초로 할리우드의 거물급 배우가 되었지만.
정작 그들의 커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이름값을 얻고 난 뒤 찍기 시작한 영화들이었다.
더 팍은 슈퍼 이빨 요정이라는 코미디 가족 영화를 촬영했고 슈워제네거도 비슷한 영화를 찍었다.
강하고 두려운 남자가 아닌, 강하면서 동시에 친근한 아군의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게 먹혔다.
나 역시도 그와 비슷한 식으로 갈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프로레슬러치고는 그렇게 큰 몸은 아니지만, 나는 배우로 따지자면 크게 느껴지는 편이었다.
188cm에 체중 100kg의 거구.
거친 이미지의 프로레슬러.
그것을 희석시킬 만한 작품 제안은 아쉽게도 오지 않았다.
‘좀 더 기다려야 하나.’
그렇게 생각할 무렵이었다.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
반사적으로 인사를 하며 돌아본 나는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금발을 턱선에 맞춰 자른 선이 강한 미인.
아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내가 언젠가는 꼭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배우 중 하나였다.
“첫 질문부터 이래서 죄송한데, 이런 곳에서 일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건 매너가 없는 걸까요?”
“글쎄요.”
일단 빙고를 잡은 듯했다.
눈앞에 있는 건 현재 할리우드에서 떠오르는 신성이자 미래에는 ‘블랙 위도우’라는 역할로 일약 전 세계적인 유명세를 얻는 배우.
바로 스칼렛 요한나였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오히려 좀 흥미가 생기는데요.”
나는 웃으며 이야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