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
2005년 시점에서 코믹북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다음과 같았다.
너드Nerd나 긱Geek들이 즐기며,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해서 본다면 좀 이상한 취급을 받는 문화.
큰 시장을 형성하고 있지만 주류 문화로서는 대접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프로레슬링과 비슷했다.
다양한 장르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주류는 슈퍼 히어로물이었다.
강력한 힘으로 악당을 무찌르고 평화를 가져오는 영웅을 보며 사람들은 대리만족을 느꼈다.
역시 프로레슬링과 굉장히 비슷했다.
때로는 싸울 때 쫄쫄이를 입기도 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점차 몰락해갈 예정인 프로레슬링과 달리, 슈퍼 히어로물은 매체의 확장을 통해 완벽하게 주류 문화에 편승하는 데 성공했다.
바로 영화였다.
마벨 시네마틱 유니버스.
D.C. 확장 유니버스.
개중에서도 D.C.는 내가 전생에 죽기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구리다는 평가를 많이 받았지만.
어쨌거나 슈퍼 히어로 무비는 미국에서조차 비주류였던 코믹북을 세계적인 문화로 성장시켰다.
그래서 내가 지금 마벨 코믹스의 주식을 사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현재에도 간간히 슈퍼 히어로 무비가 제작되고 있기는 했다.
앞서 만났던 샘 레이시 감독의 스파이더 보이 시리즈 같은 거.
하지만 마멜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그런 영화는 ‘따위’로 만들 정도로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그렇기에 나는 회귀한 뒤로 줄곧 그쪽 프랜차이즈를 영화 커리어의 한 페이지에 넣고 싶었다.
물론, 캡틴이나 아이언 머신 같은 역할을 맡을 생각은 없었다.
그들은 원작에서도 백인이니까.
동양인인 내가 역할을 맡으면 분명 그 괴리감이 심하겠지.
물론 영화화된 설정들은 코믹북과 다른 세계관이라 인종이 바뀌어서 나오는 경우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영화에서 내가 나와도 코믹북에서는 줄곧 백인일 테니까.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아직은 그냥 막연히 생각만 하는 정도였으나, 나는 영화에 출연한다면 새로운 인물을 맡고 싶었다.
나와 같은 인종도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서 사실, 영화계 커리어를 쌓아가며 이후 그쪽으로 연이 닿는 인물을 좀 알아두고 싶었는데.
놀랍게도 스칼렛 요한나가 내게 흥미를 느끼고 먼저 다가왔다.
향후 MCU에서 블랙 위도우라는 역할을 맡게 될 그녀가 말이다.
심지어 내가 지금 원하는 영화를 정확하게 가져왔다.
파티장 바깥의 로비.
남들 몰래 자리를 빠져나온 나는 스칼렛의 제안을 듣기 시작했다.
“로맨스 영화에요.”
“로맨스…….”
“예, 한 재벌의 은밀한 비밀을 파헤치려다 사랑에 빠지고 마는 기자가 주인공이죠. 바로 저고요.”
“그렇다면 제가 재벌 역할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말에 나는 눈썹을 치켜떴다.
보통, 영화의 제안은 역할을 확실히 정하고 알려주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스칼렛은 그러지 않고 살짝 나를 떠보듯이 질문을 해왔다.
‘왜지?’
한순간 생각을 거듭했다.
나는 배우로서만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 스칼렛 요한나가 어떤 사람인지는 자세하게 알지 못했다.
전생을 포함해 대면한 상태로 이야기하는 게 지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스칼렛 요한나에게서는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다른 아우라가 느껴졌다.
외모 때문일지도 모른다.
선이 강한 서구형 미인. 도톰한 입술과 오똑한 코가 인상적이다.
하지만 그건 일부에 불과했다.
눈빛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향후 세계적인 배우가 될 그릇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끝없이 노력한 끝에 나온 결과일까?
어쨌든 하나는 확실했다.
‘날 시험하려는 모양이군.’
하지만 나도 링 위의 연기자로서 쉽게 거기에 끌려가지는 않았다.
“뭐가 어울릴 것 같으세요?”
지지 않고 받아쳤다.
“글쎄요.”
“굳이 배우님께서 절 제안을 하러 오신 거면 내부에서 뭔가 이야기가 나왔다는 말이겠죠?”
“네, 뭐.”
스칼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을 하는군.’
만약 내부에서 내 캐스팅에 대한 말이 나왔다면 스칼렛이 아니라 감독이 직접 오는 것이 맞았다.
이조차 시험인가?
어쨌든 조금 자극을 하면서 어떤지 확인을 해보는 것이 좋겠군.
“그렇다면 문제는 없겠네요.”
일단 나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척 미묘하게 허점을 흘렸다.
그로 인해 스칼렛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흐음.”
그리고 살짝 맥이 빠졌다는 듯한 신음을 듣고 느낄 수 있었다.
역시 스칼렛 본인이 개인적으로 내게 흥미를 느끼고 접근한 거다.
말인즉슨 다른 사람의 지지를 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겠지.
어디 한번 그걸 이야기해볼까.
* * *
스칼렛 요한나는 아역 배우 시절부터 연기를 해온 베테랑이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숱한 고생을 해온 만큼 나름대로 안목에 대한 자부심도 갖췄다.
하지만 지금 최초로, 그녀는 자신이 잘못 판단을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디테일한 부분을 놓치고 말을 돌리려는 신의 언행 때문이었다.
처음 그에 대해 알게 된 계기는 스포츠 스타들이 모이는 파티장에서 일어난 일 때문이었다.
친구였던 배우, 에밀리 그웬트가 촬영했던 조잡한 핸드폰 동영상.
거기에서 신은 수많은 사교계 인사들이 가득한 가운데 겁먹지 않고 하나의 멋진 쇼를 선보였다.
거기에서 눈길이 갔다.
수많은 사람들의 앞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그것은 영화배우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재능이었다.
그걸 못해서 기술이 있는데도 스러져간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래, 까놓고 말해서 연기력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훈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기술을 연마하다 보면 기예가 되고, 그게 명배우와 아닌 쪽을 가르는 척도가 되긴 하지만.
그건 ‘말론 브론드’ 같은 전설이나 할 수 있지, 지금의 자신들이 넘볼 수 있는 영역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웃기게도 바로 무대 위에서 뻔뻔하게 연기를 할 수 있는가였다.
신에게서 그걸 느꼈다.
그리고 다른 것도 괜찮았다.
일단 외모.
타인의 외모를 함부로 평가하는 건 실례되는 행위지만, 배우의 외모는 분명히 그런 도마에 올라야만 했다.
그는 분명 현재까지의 미국에 없던 남자였다. 그렇기에 이처럼 유명세를 얻고 있는 거겠지.
섹시한 화보도 괜찮았고, 뮤직 비디오에 나온 장난스러운 모습도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하나하나를 떼놓고 봤을 때는 누군가와 비슷했지만, 전부를 합치니 신이라는 존재가 만들어졌다.
거기에 프로레슬링 쪽에서 연기를 할 때가 꽤나 흥미로웠다.
링 위에서의 신은 자유로웠다.
과장된 어투와 일반적인 어투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수만 명 앞에서 자기 자신을 보여주었다.
그건 절대로 자신만의 개성이 없이는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확신을 느끼고 이렇게 대면해 이야기를 나눠본 것이었는데.
‘……뭔가 영 그렇단 말이지.’
어딘가 묘하게 눈치만 살피고 있는 게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다.
자신이 잘못 본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만약 그렇다면 선수로서 얻고 있는 그 어마어마한 반응은 말이 안 됐다.
대체 뭘까.
그런 고민을 하면서도 스칼렛은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나갔다.
“아직까지 남자 배우가 정해지지 않아서 촬영이 미뤄지고 있어요.”
“그렇군요. 페이는 어떻죠?”
“…….”
일부러 이러는 건가?
너무 태도가 뻔뻔해서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건, 저보다는 감독님과 상의를 해보시는 편이 어떨까요.”
“아, 작품 감독은 누군가요.”
“무디 앨런입니다.”
“재미있는데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듣자하니 영화가 그렇게 큰 규모는 아닐 것 같아서요.”
“뭐 문제라도 있나요?”
“그건 아니고.”
“……무례하시군요.”
순간 그렇게 대답해버렸다.
시간 낭비를 했다는 생각에 순간 머리에 피가 몰렸다. 스칼렛은 불쾌한 얼굴로 신을 노려보았다.
그것을 들은 신이 슬쩍 웃었다.
“그건 그쪽이 그렇죠.”
“예?”
스칼렛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제게 거짓말을 하셨군요.”
“무슨 말씀이시죠?”
“만약 저에게 흥미가 있었다면 배우님이 아니라 영화를 찍는 감독님이 오시는 게 맞았겠죠.”
그 말을 들은 스칼렛은 순간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상대의 눈빛이 갑자기 변했다.
날카롭고 깊은 눈동자.
그제야 스칼렛은 자신이 신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지금까지의 말은 모두 자신의 거짓말을 밝히기 위한 도발.
감정이 치솟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그는 확실하게 파고들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모종의 이유로 남자 배우 선발이 늦어지고 있고……. 감독과 배우님의 의견 차이 때문일까요?”
바로 맞췄다.
“그런 와중, 절 보고 흥미를 느낀 배우님이 접근하셨단 거죠.”
“……미리 다 알고 계셨으면 떠보지 말고 바로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죄송합니다. 배우님이…….”
“스칼렛으로 괜찮아요.”
“그럼, 스칼렛.”
신이 빙긋 웃어 보였다.
묘한 색기가 있는 미소였다.
날카로운 눈동자가 그리는 호를 보며, 이건 분명히 먹히겠다 싶었다.
파트너 배우로서의 역할에.
확실히 유니크하고 신선했다.
“일단, 죄송합니다. 초면에 다소 무례한 방식으로 절 소개했군요.”
거기에 확실하게 사과를 하는 부분에서는 젠틀함마저 느껴졌다.
피식 웃은 스칼렛은 그대로 손을 내밀어 신에게 악수를 청했다.
“저야말로 무례를 사과드리죠.”
그리고 그녀는 신에게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남김없이 모조리 털어놓기 시작했다.
* * *
한편.
신이 없는 생활이 벌써 몇 주째인 랜스 오튼은 죽어가고 있었다.
랙다운으로 이적한 뒤로 한 번도 웃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쇼의 촬영이 끝난 뒤, 그는 오늘도 마찬가지로 꾸중을 들었다.
“야, 오튼. 이쪽으로 와봐라.”
“예, 선배님…….”
가면을 쓴 프로레슬러. 레이 미스테리우스가 그를 부르자 락커룸의 레슬러들이 낄낄대며 웃었다.
“오튼, 오늘도 좀 혼나겠네!”
“야, 고생 좀 해라.”
“너 오늘 뭐하자는 거야? 기술을 그딴 식으로 넣으면 나보고 죽으라는 것밖에 더 돼?”
“죄송함다…….”
오튼은 자신보다 훨씬 더 작은 선배 앞에서 주눅이 들었다.
외부에는 170cm라고 홍보가 되었지만, 실제로 레이 미스테리우스의 키는 158cm였다.
프로레슬러로서는 당연히, 그리고 일반인으로서도 작은 키였다.
그럼에도 화려한 공중기와 카리스마로 인기를 끌고 있는 그는 명실상부한 루차도르의 전설이었다.
WWF에 입사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전부터 경력이 길어 오튼에게는 까마득한 선배였다.
그리고 지금의 대립 상대였다.
쇼에서는 주로 악마 같은 오튼이 순진한 레이를 엿 먹이고 조롱하는 식으로 진행이 되었지만.
현실에서는 달랐다.
“정신 못 차려!”
퍼억!
배를 얻어맞았다.
인상을 찡그리며 물러난 오튼은 이어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죄송함다.”
“정신 차리고 해! 알겠어?!”
“넵…….”
객관적으로 봤을 때, 오늘 오튼의 DDT가 많이 어설프기는 했다.
자칫 잘못했다간 레이의 목이 부러질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주먹 한 방이면 약과였다.
하지만 그건 주변에서 보고 있는 다른 선수들의 의견일 뿐이고.
매주 이렇게 혼나고 있는 오튼은 홀로 외롭게 짐을 챙겼다.
처음에는 레볼루션 멤버들, 이후로는 신하고 러셀과 함께 다니며 매주 평화로운 일상을 영위했었는데.
여기는 달랐다.
랙다운은 쇼의 드라마적인 재미 못지않게 경기 자체를 중요시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제 막 초짜 티를 벗은 정도에다 딱히 노력도 하지 않아온 오튼은 자연스럽게 엄청 혼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더 억울한 건, 혼나고 난 뒤면 선배들이 항상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었다.
“신 그 녀석은 언제 돌아와?”
“제기랄, 요새 신인 놈들 빠져 가지고 정신을 못 차리네.”
“기강을 잡죠? 테이커.”
“저번에도 그렇게 해서 와이엇 그놈 정신 차리게 해줬잖아요.”
“지금은 부상으로 빠졌지만.”
“그래도 신을 받아왔으니 뭐 어떻게든 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JBL과 레이, 테이커까지.
락커룸 리더인 테이커를 중심으로 선배들이 짜증을 쏟아냈다.
“야, 오튼!”
“네, 넵!”
“신 그 자식 연락해봐! 그 자식도 뭔 휴가를 그렇게 오래 가?!”
“일 끝났으면 와서, 어? 선배들한테 인사도 하고 같이 맥주도 한 잔 하고 그러는 거지!”
“연락해보겠슴다…….”
신에게 노골적인 흥미를 드러내는 선배들을 뒤로한 채, 오튼은 락커룸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오튼은 복도 구석에 우울한 식빵 귀퉁이처럼 쪼그려 앉았다.
오늘도 끝나면 구린 렌터카를 타고 또 구겨져서 이동해야겠지.
캠핑 버스는 정말로 좋았는데.
신이랑 레슬링 게임 하고 싶다.
우울해져 추억을 떠올린 오튼은 그대로 신에게 전화를 걸었다.
또르르, 또르르.
신호음이 간 뒤.
[어, 오튼이냐?]
“신!! 빨리 돌아와아아아!!”
그 목소리를 들은 오튼은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쳤다.
[무슨 일 있냐?]
“선배들이 뭐 그렇게 휴가를 오래 가냐면서 나한테 뭐라고 하잖아! 안 그래도 지금 레이 선배가 나한테 매번……!”
[……네?]
[아, 미안. 전화 중이었어요?]
“누구? 여자?”
오튼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신이 그렇게 말한 것과 동시에 뒤쪽에서 티파니가 아닌 다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아니, 잠깐만…….]
“왜 너만 여자랑 노냐고!!!”
오해에 의한 절규.
오튼의 분노는 깊어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