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200화 (200/634)

200.

캐스켓-테이커.

1990년, 장의사 기믹으로 쇼에 데뷔한 그는 지금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는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그는 선수생활 내내 타 단체나 다른 활동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이 회사에 충성을 다해왔다.

꾸준함과 성실성, 그리고 실력.

프로레슬러라는 단어를 정의하며 계속해서 표현하고 있는 사나이.

동시에 테이커는 수많은 후배들의 존경을 받으며 랙다운의 락커룸 리더로서도 자리하고 있었다.

락커룸 리더.

선수들 사이의 일을 중재하고 통제하며 그와 동시에 회사에 선수들의 의견을 전달하는 우두머리.

노조위원장(?)과 비슷했다.

그런 그는 최근 들어 굉장히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자신이 애정을 가지고 활동하는 이 랙다운에, 어딘가 불안한 기류가 스쳤기 때문이었다.

드래프트 이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시나가 메인 벨트를 따내며 선수단 전체가 균형을 갖췄다.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그때도 신 같은 선수는 꽤나 탐났지만 그래도 시나가 워낙 잘해줘서 어떻게든 헤쳐나갈 수 있을 듯했다.

시청률도 계속 상승했고.

바로 그게 중요했다.

하나의 쇼가 브랜드 파워를 상승시키기 위해서는 신인들이 계속해서 겟 오버를 해줘야만 했다.

그래서 섬머 수플렉스를 본 테이커는 신이 랙다운으로 온다고 했을 때 그 누구보다 크게 기뻐했다.

그는 젊은 선수인데도 확실하게 한 사람 이상의 몫을 해내줬다.

쇼에는 그런 선수가 필요한 법이다. 아니, 오히려 그는 어디에 두든 그 역할을 잘 해낼 터였다.

그래서 시나를 내준 건 뼈아팠지만, 오히려 쇼 자체의 매력은 좀 더 상승했다는 생각을 했다.

메인 전선에 바티스타.

그리고 하이 카더인 신.

그 아래에 오튼.

그런 뉴 페이스들과 레전드 선수들의 격돌.

못해도 2년은 쇼를 뽑아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여러 문제가 생겼다.

신은 휴가로 쇼에 출연하지 않았고, 바티스타는 월드 챔피언에 등극한 직후 태도가 변해버렸다.

좀 많이 거만해졌다.

하지만 월드 챔피언에게는 그만한 대우를 해줘야 해서 다들 그저 눈치만 보고 있는 찰나였다.

더 이상 안 되겠다고 판단한 테이커는 케인과의 면담을 신청했다.

고요한 사무실.

“신을 좀 교육해야겠어.”

“네?”

그런 테이커의 말을 들은 케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드래프트 직후 시청률을 안정화시켜야 할 타이밍에 휴가를 가는 녀석이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아, 그게…….”

“그 자식, 오냐오냐 했더니 안 되겠어. 옆에서 좀 지켜보면서 정신 교육을 단단히 시켜야지.”

그 말을 들은 케인은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침묵했다.

테이커는 옛날 사람이었다.

군대 문화에 가까웠던 그 시절의 락커룸 규율을 선호했다. 하지만 무뚝뚝한 성격 탓인지 그동안은 딱히 티를 내거나 하는 않았는데.

지금은 이렇게 감정을 드러냈다.

말인즉슨 지금 락커룸의 의견이 그렇다는 이야기였고, 테이커가 가장 크게 느낀다는 말이었다.

신의 빈자리를.

아직 한 달도 안 된 시점에서.

피식 웃은 케인이 입을 열었다.

“버닝콩에서 선수를 좀 더 데려오는 걸로 협의를 볼까요?”

“뭐?”

“아버지께서 그러시더군요. 딱히 지금까지의 방식을 크게 수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무슨 말이지. 케인.”

“그 친구를 위한 각본은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는 이야기죠.”

“…….”

“이해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회사 차원에서 굳이 위험 부담을 감수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 친구가 계속해서 활동하며 위로 올라가는 게 말인가?”

“예, 그리고 뭐.”

케인은 말을 아꼈다.

테이커는 생각을 정리했다.

케인의 갑작스러운 복귀.

외부로 나간 티파니 맥센.

긴밀하게 연결된 정치적 고리.

15년 경력의 데드 맨은 어렵지 않게 모든 이유를 알아차렸다.

‘어려운 길을 가고 있군.’

하지만 그 정도 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길이겠다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바트는 절대 타이틀을 내줄 인물이 아니었다.

아니, 타이틀뿐이랴.

그 외의 다른 상징성.

예를 들자면, ‘시대’.

그런 생각을 거듭하던 그는 어렵지 않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크리스 젠코를 데려오지.”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케인.

일단 받을 수 있는 이득은 챙겨둔다. 그게 지금 시점에서 테이커가 생각한 최고의 방안이었다.

어차피 신의 싸움은 자신이 어떻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가 돌아왔을 때 멋지게 대립할 만한 상대를 하나 랙다운에 추가해두는 것이 낫겠지.

“아, 하우스 쇼에서는 신도 경기를 뛰게 될 겁니다. 락커룸 분위기 좀 잘 잡아주세요.”

“흠.”

“왜 그러세요?”

“아니, 하우스 쇼에서 그 녀석과 경기를 뛰어놓고 방송에서는 그러지 못한다면 다들 참 즐거워하겠구나 싶어서 말이야.”

“……그 점에 관해서는 조율을 부탁드립니다. 테이커.”

“노력해보지.”

과연 자신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말이다.

분명한 목표가 있는 프로레슬러는 자기 커리어를 생각하며 좋은 선수와 대립을 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신은 현재 WWF에서 소속된 거의 대부분의 선수가 대립을 하고 싶은 상대일 것이다.

그와의 대립은 어떤 식으로든 자기 커리어에 족적을 남길 테니까.

자신이 하는 모든 대립에 그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남자였다.

그렇기에 테이커도 신과의 대립을 기대하고 있던 상황이었지만.

테이커는 케인이 질투할까봐 아쉬운 표정을 감추며 일어났다.

선수로서 봤을 때는 흐르는 물을 애써 막으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바트는 항상 그래왔다.

이 업계를 자신의 뜻대로 만들기 위해서 갖은 수를 다 사용했다.

그것이 통할 때도 있었고 통하지 않을 때도 물론 존재했다.

‘이번에는 어떻게 될까.’

테이커는 순수한 호기심을 느끼며 천천히 사무실을 나섰다.

* * *

스칼렛의 제안은 간단했다.

그녀는 자신이 주연으로 나올 영화, ‘스코프’의 남자 주인공 역할에 내가 캐스팅되었으면 했다.

그리고 계획도 세워두었다.

이번 주말에 감독과 식사를 할 예정인데, 거기에 내가 참석해 좋은 이미지를 심어달란 것이었다.

현재 감독이 생각하고 있는 남자 배우 후보는 딱히 없다고 하지만.

전생의 일을 알고 있는 나는 누가 주인공이 될지 알고 있었다.

영화의 내용도.

스코프.

……여기서 정말 운이 좋은 게, 내가 전생에 봤던 몇 안 되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 중 하나였다.

그때 회사의 한 여자 직원에게 매달리다시피 해서 잡았던 데이트에서 본 영화가 바로 그거거든.

데이트 이후로 어떻게 되었느냐는 딱히 생각하고 싶진 않지만, 영화 내용은 딱 기억에 남았다.

여자 주인공 스칼렛 요한나.

남자 주인공 휴이 잭맨.

그래, 슈퍼 히어로 울버렌 역할로 일약 전 세계적인 무비 스타로 떠오른 바로 그 휴이 잭맨.

키 189cm에 98kg의 체구.

신체 조건은 나와 거의 비슷했다.

여기에서 휴이 잭맨은 슈퍼 히어로 영화를 촬영할 때는 몸을 더 크게 불린다지만.

스코프는 로맨스 영화였으니 아마 지금 나와 비슷하겠지 싶었다.

스코프는 400만 달러의 촬영비로 10배 이상의 수익을 벌어들인 나름대로 웰 메이드 영화였다.

한 기자가 귀신을 만나, 한 재벌 남자가 연쇄살인범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시작되는 영화.

일반적인 내용과 궤를 달리 하는 만큼 영화는 로맨스와 코미디, 미스터리가 얽히며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게 특징이었다.

하지만 메인 플롯은 어디까지나 비밀스러운 남자 주인공에게 빠져드는 스칼렛을 중심에 두었다.

어쨌든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이 영화가 내 커리어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될 거라는 부분이었다.

정석적인 스타일의 로맨스 영화는 아니었지만 그렇기에 다양한 관객층을 확보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스칼렛과 할리우드에서 보기로 약속을 정한 나는 곧장 티파니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했다.

[로맨스 영화요?]

“그래, 재벌 주인공이라는데.”

[푸하하! 재벌?!]

“……안 어울릴까?”

[아뇨, 아뇨. 음~. 잠시만.]

티파니는 활기찬 목소리로 말하더니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래, 멋지겠어.]

“뭘 상상한 거야?”

[당신이 사업을 마치고 돌아와 전용기에서 비서와 함께 내리는 모습을 잠시 상상해봤죠.]

“그게, 멋졌다고?”

[예, 저도 미팅 하나 끝내고 둘이 집에서 와인을 기울이는데……. 갑자기 비서한테 전화가 오고.]

“뭐?”

[둘이 무슨 관계야!]

“……이야기가 왜 그렇게 돼?”

[농담, 농담.]

티파니가 장난스레 웃었다.

[그래서 지금 어디에요?]

“아직 뉴욕이지.”

[잘됐네. 나도 뉴욕인데.]

“왜?”

[MTV 때문에요. 이번에 우리 쪽 가수들 반응이 나쁘지 않아서.]

“호오…….”

아무래도 사업은 순차적으로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전문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책임은 자신이 져라.

티파니는 내가 했던 조언을 잘 따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튼, 아르마니 정장이랑 시계 정도만 있으면 되겠지?]

“……시계는 전에 받은 게 있지 않나?”

[그 오래된 거 누가 차요.]

아니, 사실 그 뒤로 기스라도 날까 무서워서 한 번도 안 찼는데.

하지만 그걸 말했다간 티파니는 그 비싼 파텍 뭐시기를 한 열 개쯤 사줄 것 같아 말하지는 않았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재계약 전의 몸값에 필적할 정도로 비싼 슈트를 맞춰 입은 나는 약속 장소인 할리우드로 향했다.

계획은 간단했다.

두 사람의 점심 식사 자리에 내가 스칼렛의 초대를 받아 참석함으로써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것을 위해 입은 정장이었다.

배역이 재벌 캐릭터니까.

딱히 연기까지 할 생각은 없었지만 이런 모습으로 내가 나타나면 감독도 대충 이해는 하리라.

그리고 생각하겠지.

자신이 만들 영화에 동양인 재벌 캐릭터가 나타나면 어떨까.

그 해답은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스칼렛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주었다.

“역시, 내 안목이 맞았어.”

“어떤 안목이요?”

“당신이 딱이에요. 딱.”

활짝 웃은 그녀가 내게 다가와 한 바퀴 돌아보며 평가를 했다.

“영화 속의 그 캐릭터가 좀 위험한 이미지가 있어야 한단 말이죠.”

이유는 알고 있다.

내가 맡을 캐릭터에게 이야기 초반부터 연쇄살인범이라는 딱지가 붙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과감하고 섹시한, 동시에 위험한 모습을 처음에 보여준다.

그와 함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부드러운 모습을 보여주며 사람들을 안심시킨 뒤에 뒤통수.

“그런 의미에서 딱이에요.”

“몸이 좋아서요?”

“예, 키도 크고. 눈빛도 강렬하고. 어딘가 정말 있을 법……하지는 않지만 매력적이에요.”

현실감은 없지만 판타지의 등장인물로서는 적절하다는 말인가.

어쨌든 칭찬이었다.

“사실 좀 걱정을 했는데 이거라면 분명히 먹히겠어요.”

“무슨 걱정이요?”

“아, 그게…….”

“솔직하게 대답해줘요.”

“음, 일단 실례하겠습니다.”

스칼렛이 미리 이야기했다.

나도 일로서 분석을 하고 의견을 내는 것이라 개의치 않았다.

내가 버닝콩에서 플레이보이 기믹을 추가해서 활동했을 때랑 굉장히 비슷한 맥락이었다.

동양인 남성은 미국 여성의 섹슈얼 판타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편견이 은연중에 깔려 있었다.

막말로, 성적인 능력이 부족하다는 편견이 존재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충분히 매력적이고, 저도 알아요. 오히려 다른 매력이 있죠.”

“제가요?”

“음, 일단 향기롭네요.”

“가, 감사합니다.”

그런 칭찬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외모도 훌륭하죠. 하지만 편견이란 건 당신에게 집중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거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편견이란 어디까지나 사람을 개인이 아닌 인종의 일부로서 생각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감독도 그 생각을 할 거예요. 아무리 화보도 찍고 잘 나가고 있어도 과연 당신을 배우로 써서 돈이 될까, 하고 말이죠.”

그렇게 말한 스칼렛은 나를 보며 다시금 씨익 웃어 보였다.

“하지만 기우였네요.”

“방금 하신 말씀을 줄여서 하면 제가 결국 잘생겼다는 말이네요.”

“그렇게 되겠죠.”

“하지만 그거 아세요?”

“뭐가요?”

“감독에게 식사에 관해 이야기를 했을 때 알겠다고 했다면서요.”

“그랬죠.”

“바보가 아닌 이상 당신 의도를 눈치챌 텐데, 그럼에도 보자고 했단 건 감독도 저에 대해서 흥미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 그럴 수도 있겠네요.”

고개를 끄덕이는 스칼렛.

거기에 미소를 지은 나는 자신만만하게 식당 쪽을 돌아보았다.

그래, 자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