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
그렇게 약속한 시간이 되었다.
스칼렛과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선 나는 먼저 내부를 살펴보았다.
낡은 베이지색의 벽지가 정감 있는 분위기를 더해주는 작은 카페.
듣자 하니 감독이 수십 년간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며 커리어 초창기부터 드나들던 곳이라고 한다.
그다지 유명한 곳은 아닌지 손님은 거의 없는 가운데, 커피를 마시고 있던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깡마른 체구에 안경.
새하얀 머리와 니트는 감독이라기보다 학자 같은 분위기였다.
그가 조금 떨어져 서있는 우리를 낡은 눈동자로 잠시 바라보았다.
“감독님, 이쪽이…….”
스칼렛이 소개를 하려자니 자리에서 일어선 앨런이 내게 다가와 다짜고짜 질문을 던졌다.
“키가 어떻게 되나?”
그 눈동자에는 감출 수 없는 흥미가 깃든 채였다.
일이 쉽게 풀릴 것 같아 나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188cm입니다.”
“잠깐 저기에 앉아볼 수 있나?”
“원하시는 대로.”
벌써 시험이 시작되었다.
나는 앨런이 주문한 대로 바 테이블에 가 의자에 걸터앉았다.
바 테이블 앞에 놓이는 높은 의자였지만 엉덩이를 슬쩍 앞으로 빼자 바닥에 발이 닿았다.
가만히 턱을 괸 상태에서 햇볕이 내리쬐는 바깥을 돌아보고 있자니 앨런이 다가와 손을 들었다.
양손의 검지와 엄지가 맞닿으며 완성된 무디 앨런의 스크린 속에 내 모습이 담겼다.
잠시 한쪽 눈을 감은 채 날 확인하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스프레소는 마실 줄 아나?”
“물론이죠.”
“주인장!”
그가 큰 소리로 외치자 주방에서 심술궂은 인상의 사내가 나왔다.
“뭐야.”
“이 친구한테 에스프레소 한 잔만 내주게. 잔은 검정색으로.”
“오, 이 친구가 새 배우인가?”
“그야 모르지.”
“눈이 빛나는데. 거기 잘생긴 친구, 그 깐깐한 무디가 이렇게 적극적인 건 정말 오랜만이야.”
“멋진데요.”
나는 싱긋 웃었다.
주인장이 에스프레소를 한 잔 내왔고, 나는 그걸 한 모금 마시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튼 그 자식, 문자로 자꾸 캠핑 버스 좀 빌려달라는데. 차단을 해두는 게 현명한 선택이겠지.
그렇게 결론을 내린 순간, 짝! 하고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고개를 들자 다가온 앨런이 미소를 감추지 않고 날 바라보았다.
“프로레슬러라고?”
“네, WWF 소속입니다.”
“생각했던 것과 느낌이 다르군. ……나는 막연히 로건 같은 이미지를 상상했는데.”
“그때와는 시대가 변했죠.”
“그렇군. 요새는 자네와 같은 슬림한 스타일이 대세라는 건가.”
“그건, 또 아닙니다만.”
하긴 내가 이쪽 업계에 몸을 담근 인간치고는 마른 편이긴 하지.
“아, 실례했군. 요새 자네 이야기가 많이 들려와서 말이야.”
“업계 바깥에서 보는 것과 내부 사정은 미묘하게 다른 법이죠.”
“그건 우리와 같군.”
피식 웃은 무디 앨런이 옆에 있던 스칼렛을 잠시 돌아보았다.
“그래서 스칼렛, 이 친구가 자네의 선택인가?”
“……금방 알아차리셨군요.”
“이렇게 번듯하게 차려입고 왔는데 내가 그냥 평범한 식사 자리라고 생각했을 것 같나?”
앨런이 손을 뻗었다.
“무디 앨런이네.”
“신입니다.”
“내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주게.”
합격이었다.
* * *
사실 무디 앨런은 도덕적으로 심한 결점이 있는 인간이었다.
1994년과 2014년, 각각 두 번에 걸쳐 각종 추문을 일으키며 말년에는 사회적으로 거의 매장 당했다.
그럼에도 내가 그와 영화를 찍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스킬이 있는 인간이었고.
다른 하나는 바로 스칼렛 요한나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녀는 미래를 알고 있는 내게 있어 분명 얼굴을 익혀두고 친해질 가치가 있는 상대였다.
그리고 그녀의 꾸준한 커리어를 생각해봤을 때 촬영장에서 함께 일해도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렇게 앨런, 스칼렛과 식사를 하면서 영화, ‘스코프’를 촬영할 것에 대하여 못을 박았다.
그들은 내게 계약서를 만들어 보내줄 것을 약속했고. 나는 기분 좋게 계약을 따내고 귀환했다.
WWF의 링.
물론 말했던 대로 방송에 나가는 것은 아니었고 작은 도시에서 열리는 하우스 쇼에 참가했다.
그곳에 모인 관객은 오천여 명.
작은 경기장에 도착하자마자 선수들이 나를 반겨……주지 않았다.
“야, 인마!”
JBL이 나를 불러 세웠다.
거구에 카우보이모자. 삼각팬티 경기복이 오늘도 인상적이다.
나는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아, 선배님.”
“선배님은 개뿔, 이리로 와!”
“옙, 선배님.”
잭 브래드쇼 레이필드.
줄여서 JBL.
APA라는 해결사 기믹의 미드 카더로 활동하던 중 주식 투자로 갑자기 부자가 된 인물이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게 현재의 졸부 기믹. 그로서 그는 시나를 스타로 만든 일등 공신이 되었다.
지금은 시나에게 패배하고 내려온 뒤 약간 기믹이 풀리지 않아 난항을 겪고 있는 상태였다.
프로 의식은 뛰어나지만 락커룸에서는 꼰대 짓과 더러운 성격으로 유명해 모두가 기피했다.
하지만 물론, 지금의 나는 그 정도는 쉽게 구워삶을 수 있었다.
“너 인마, 드래프트 되고 나서 휴가를 얼마나 갔다 온 거야?!”
“죄송합니다.”
“너 이 자식, 버닝콩에서 랙다운으로 왔다고 의욕 잃었냐? 그렇게 개판으로 하면 어쩌자는 거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응?”
일단 JBL은 상대방이 세게 나오면 쪼는 전형적인 겁쟁이였다.
짬도 있고 거구로 남들에게 날을 세우지만 정작 싸움을 붙을 용기는 없는 인간이란 말이었다.
거기다 아부에 약했다.
“선배님, 제가 선배님하고 대립하길 얼마나 기대한 줄 아십니까?”
“그, 그러냐? 응?”
“예! 선배님은 지금 랙다운 최고의 악역 아닙니까! 제가 러셀과 경기하고 정말로 다쳐서, 크윽…….”
“아, 그, 그러냐? 미안. 내가 몰랐다. 트위즐러라도 먹을래?”
“그나저나 선배님! 요새 전보다 훨씬 멋져지신 거 아닙니까?”
“으, 으응?”
“와, 깔끔한 헤어스타일에 큰 키와 이 위압감! 선배님이야말로 진정한 ‘아메리칸 히어로’십니다.”
“커흠, 크흠. 마! 그래봤자 아무것도 안 나와!”
“와, 관객들 앞에서 그렇게 외치시면 바로 다들 제대로 받아들이겠는데요?”
“그, 그럴 것 같냐?”
바로 넘어온다.
나는 그렇게 JBL을 구워삶으며 그의 뇌리에 뭔가를 심어두었다.
아메리칸 히어로.
말 그대로 자신이 미국의 영웅이라며 어그로를 끄는 기믹이었다.
전생의 JBL은 메인 전선에서 내려온 이후로 이 기믹을 사용하면서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다.
현실의 정치인을 풍자하는 듯한 캐릭터가 인기를 끈 것이었다.
현재 JBL은 시나에게 패배한 뒤 애매해진 자신의 캐릭터에 대해 크게 걱정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므로 내가 한 말에 대해서 분명 진지하게 고민을 해보겠지.
그와 대화를 끝낸 뒤, 나는 모퉁이 뒤쪽에 서서 생각에 잠겨 있는 JBL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흐음…….”
고민에 빠져 있던 그가 이내 자신의 앞을 지나가던 각본가를 발견하고는 성큼성큼 다가갔다.
‘일단 여기는 됐고.’
그처럼 만족스럽게 하나의 일을 마치고 나온 나는 때마침 경기장에 도착한 부커-리를 만났다.
참으로 놀랍게도, 그는 무뚝뚝한 성격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짙게 내 걱정을 해주었다.
“신. 너 괜찮은 거냐?”
“뭐가요?”
“정말 단순한 휴가인 거 맞지?”
“그럼요, 부커.”
나는 미소를 지었다.
부커와는 그래도 꽤 친밀한 편이었지만, 굳이 지금 상황에 대해 전부 이야기해줄 필요는 없겠지.
부커는 단언하는 내 말을 듣고 좀 안심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오래 쉬지는 마라. ……너와는 꼭 대립해보고 싶으니까.”
“재미있겠는데요.”
“그래, 이미지를 생각하면 네가 선역이고 내가 악역이 맞겠지.”
“어라, 턴 힐 하시게요?”
“생각만 하는 중이다.”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나는 솔직히 말해서 조금 놀라고 말았다.
바로 내년에 부커는 실제로 악역으로 돌아서며 자기 커리어에 당당히 장식될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이름하야 킹-부커.
‘기믹 전환에 대한 생각을 이 시점부터 하고 있었군.’
어쩐지 좀 신기했다.
하지만 WWF에서 왕(?) 기믹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한 토너먼트 경기의 우승자가 되어야만 했다.
바로 ‘킹 오브 링’.
그 개최는 내년이었으므로 나는 딱히 부커에게는 기믹에 대한 조언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단지 이 정도면 충분했다.
“그러면 부커, 나중에 봐요.”
“준비 잘해라.”
부커와 잠시 대화를 나누고 헤어진 나는 다시금 한창 준비로 바쁜 경기장 내부를 돌아다녔다.
일단 이 정도면 충분했다.
앞으로 당분간 하우스 쇼를 해나가며 나는 점점 선수들이 한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우리에게는 신이 필요하다.’
락커룸의 동료이자 상대로서 내가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를 깨닫게 만드는 게 먼저였다.
그리고 선수들이 충분히 그런 생각을 가졌을 때 그 앞에 내가 재계약 때 받은 연봉을 제시한다면.
무려 천만 달러를 받는 내가 정작 쇼에는 나가지 않는다면 선수들은 분명히 박탈감을 느끼겠지.
실력도 좋은 놈이 위클리 쇼에도 나오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화살은 내가 아니라 쇼의 총괄자인 케인에게 향할 터였다.
‘뭐, 케인이 모든 선수들의 연봉을 올려줄 수도 있긴 하지만.’
그건 그거대로 좋았다.
여기는 회사의 크기에 비해 선수들의 연봉이 너무 적었다. 대체될 단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선수단 전체의 연봉이 상승하는 것은 미래를 위해서라도 분명히 필요한 결정이었다.
그렇게 해야 재능을 가진 친구들이 우리 업계를 선택할 테니까.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게 있다.
단순히 연봉 상승만으로는 선수들이 갖기 시작한 불만을 잠재울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어쨌든 연봉을 천만 달러나 챙겨가는 놈이 왜 쇼에 나오지 않느냐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므로 나는 실력을 보여주며 얌전히 기다리면 그만이었다.
또 누가 있을까.
먹잇감(?)을 찾아 복도를 돌아다니던 나는 한 남자와 마주쳤다.
바로 케인 맥센이었다.
쇼를 준비하고 있는지 그는 무척 바빠 보였지만, 나를 발견하고는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이야 신.”
환한 미소가 인상적이었다.
”잘 지냈어?”
“예, 케인. 오랜만이군요.”
“그래, 휴가는 좀 어땠지?”
“이번에 재계약 연봉을 짭짤하게 잡아주신 덕분에 잘 놀다왔죠.”
“나중에 시간되면 같이 골프라도 치러 가자고. 시간 많은 부자들이 놀기에 좋은 스포츠니까.”
“그럴까요.”
“그래, 적당히 타협하니까 얼마나 좋아. 얼굴 붉힐 일도 없고.”
“그러게요. 사실 저로서는 딱히 다른 선택권이 없었던 거지만.”
“걱정 마. 아버지가 안심할 때쯤 랙다운에서 다시 일해보자고. 전처럼 나서지 않는 선에서 말이야.”
케인이 빙긋 웃어보였다.
그건 위로 아닌 위로였다.
거짓말일 가능성이 컸고,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나를 정상에 설 선수로는 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열 받네.’
오늘 내가 누군지 보여줘야겠군.
* * *
하우스 쇼는 쉽게 말해서 TV 쇼로 나가지 않는 흥행을 뜻했다.
버닝콩이나 랙다운 같은 TV 쇼는 확실한 수익이 보장되는 대형 도시에서 개최되었다.
하지만 작은 지방 도시에도 프로레슬링 팬은 분명히 있는 법, 따라서 WWF의 스케줄은 가혹했다.
일주일에 서너 경기는 기본이었고 인근 도시의 상황에 따라 그조차 달라졌다.
하지만 분명 지방 도시의 팬들을 만족시키고 새로운 팬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필요했다.
그 준비가 모두 끝난 상황.
“오늘도 멋지게 해봅시다.”
버닝콩에서 아버지인 바트가 그랬던 것처럼 고릴라 포지션의 상석에 앉은 채, 케인은 쇼의 전체를 말 그대로 ‘총괄’할 수 있도록 면밀하게 체크를 했다.
마치 거대한 우주 함선의 캡틴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음향, 조명, 영상, 보안, 시설.
각 팀장이 상황을 전달하면 그는 모든 결정을 내리는 존재였다.
“오프닝 영상 나갑니다!”
중간 사이즈의 스크린에서 랙다운의 오프닝이 흘러나오자 오천여 명의 관객들이 환호를 보냈다.
케인은 그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지켜보며 진행을 시작했다.
오프닝 매치는 바로 신과 레이 미스테리우스의 싱글 경기였다.
신은 분명 자신의 힘으로 스타성을 입증한 선수였다. 그러므로 티켓 판매에 꽤나 도움이 되었다.
‘딱 여기까지지만.’
그렇기에 아버지가 묻어버리려는 이유도 어렵지 않게 이해됐다.
저런 남자가 한 시대의 아이콘이 된다면 분명히 문제가 되겠지.
애초에 아이콘이라는 게 탄생하지 않는 상황이 가장 좋겠지만.
그걸 억제하려는 아버지와 달리 케인은 잘만 이용하면 회사를 크게 성장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믿을 수 있는…… 아니, 사람에게 신뢰라는 수식어가 붙는 건 모순적인 일이지만.
어떻게든 회사를 배신할 수 없게 목줄을 걸어둔 선수라면 분명히.
‘흐음.’
아니면 이건 어떨까.
그런 선수를, 케인 자신이 이 회사를 확실히 장악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면 말이다.
예를 들면 신 같은 선수.
바로 그때였다.
“신 선수, 음악 나갑니다!”
음향 팀장이 소리치자 고릴라 포지션 안에 있던 신이 오늘 경기를 가질 레이 미스테리우스와 넉살 좋게 브로 피스트를 주고받았다.
‘그새 친해졌다고?’
거기에 좀 의아해하고 있자니 신의 음악이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Eyeeeeeeeeeeaaaaahhhhh!!]
자리에서 일어서는 관객들.
근 한 달만에 복귀한 그는 엄청난 환호 속에 링으로 입장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돌연 전화가 걸려왔다.
‘아버지?’
신의 뒤를 이어 레이 미스테리우스가 막 입장을 시작한 상황.
[Booyaka! Booyaka!]
그 음악이 막 시작된 가운데, 케인은 천천히 전화를 받았다.
“예, 아버지.”
[너 지금 뭘 하는 거냐?!]
“예?”
[하우스 쇼에 그놈을 내보내면 어쩌자는 거냐! 경기장에는 발도 붙이지 못하게 하라니까!]
“아니, 아버지.”
케인은 피식 웃었다.
나름대로 상황을 판단하고 최적의 선택을 했는데 다짜고짜 소리를 지르는 건 너무하다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극단적이었다. 적당히 조율을 해야지.
‘이제 늙으셨나?’
그런 생각을 한 케인은 자신이 꽤나 일을 잘 처리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단지 아버지가 늙어서 판단력이 흐려졌을 뿐, 어쩌면 신은 이런 식으로 통제할 수 있는…….
[그 개자식은 바늘 하나로 황금을 바꿔먹을 놈이야! 조금의 기회도 줘서는 안 된다고!]
그 순간 이어진 일갈.
어처구니가 없는 소리에 웃은 케인은 저도 모르게 경기장을 비추고 있는 모니터를 돌아보았다.
“어?”
그 눈이 경악에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