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하우스 쇼는 자유로웠다.
방송으로 나가지 않아 WWF 유니버스, 다시 말해 각본과의 연결이 희미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선수들은 보다 편한 마음으로 경기에 참여했고 여러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놓으며 반응을 살폈다.
하우스 쇼에서 새 기믹을 선보이는 일도 많았고 관객들도 다 알고 있어 그것을 평가해주었다.
이런 표현이 적절하겠다.
TV 쇼가 현재까지 15년간 이어져온 주간 드라마라면, 하우스 쇼는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들이 벌이는 일종의 콩트인 셈이었다.
그리고.
루차 레전드인 레이 미스테리우스와 경기를 가지게 된 나는 참았던 힘을 마음껏 폭발시켰다.
레이가 공중을 날았다.
헤드 시저스 휩.
목Head에 다리를 가위Scissor처럼 끼우고 몸을 채찍Whip처럼 튕기며 내던지는 기술이었다.
한 바퀴 앞으로 구르며 날아오른 나는 등부터 바닥에 떨어졌다.
콰앙-!
호쾌한 효과음
[Yeeeeeeeaaaaahhhhh!]
관객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사랑 받는 선역 대 사랑 받는 선역의 구도.
거기에서 착안해 나는 이런 경기를 구상했다.
존경하는 선배인 레이 미스테리우스를 띄워주기 위해 오버 셀링Over Selling을 하는 것이었다.
셀링은 기술을 맞아줄 때 취하는 일련의 동작을 일컫는 말이다.
경기를 보는 사람을 납득시키기 위해 아파하거나 공격을 맞고 나가떨어지는 것 등을 뜻했다.
오버 셀링은 말 그대로 그런 셀링을 오버해서 한다는 뜻이었다.
예를 들자면 슈퍼 킥을 한 대 맞은 뒤 그 반동으로 뒤로 한 바퀴 돌아서 떨어진다던가.
그렇게 하면 현실감은 떨어질지언정 그 공격이 엄청나게 강력하다는 걸 어필하는 수단이 된다.
말인즉슨, 보는 맛이 있었다.
내가 그렇게 오버 셀링을 하며 분위기를 달아오르게 만들자 레이도 그에 부응해 속도를 높였다.
콰앙!
내가 스냅 수플렉스로 내던지자 곧바로 일어선 레이가 고통에 몸을 떨며 바닥에 다시 쓰러졌다.
허리를 부여잡고 일어선 그가 달려들어 스쿱 파워 슬램으로 아래에서 떠올리듯 옆으로 넘겼다.
투콰앙!
이어서 나는 크게 포효했다.
거기에 호응하듯 열광적인 환호를 보내주는 관객들. 나는 숨을 삼키며 그대로 커버에 들어갔다.
1, 2……!
빠져나오는 레이.
그가 말을 속삭였다.
그 말을 접수한 나는 팔을 펼치고 서서 잠시 세리모니를 했다.
악역이었다면 재수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지금의 관객들은 이런 내게도 큰 호응을 보내주었다.
귀여운 짓이라는 거다.
그렇게 허세를 부리고 있자니 자리에서 일어선 레이가 내 등에 대고 힘차게 드롭킥을 먹였다.
“윽?!”
밀쳐져 앞으로 쓰러진 나는 2단 로프에 머리와 겨드랑이를 걸친 채 무릎을 꿇은 상태가 되었다.
관객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말할 것도 없었다.
이것은 레이 미스테리우스의 피니시 기술을 상징하는 자세였다.
가벼운 체중과 작은 키.
그럼에 거인들 사이에서 싸우기 위해 그가 개발한 하나의 기술.
바로 Six-One-Nine이었다.
등 뒤에서 달려온 레이가 탑 로프와 미들 로프를 잡고 옆으로 회전하며 내 안면을 걷어찼다.
거기에 얻어맞은 나는 그대로 나가떨어지며 뒤로 한 바퀴 구른 뒤, 이어서 링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건 확실히 오버의 오버다.
관객들이 당황한 가운데, 이어질 기술을 쓰지 않고 링 안으로 들어온 레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거기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격렬한 경기 속에 그런 익살로 관객들의 긴장을 풀어준 우리는 계속해서 경기를 이어나갔다.
* * *
그렇게 네 시간의 WWF 하우스 쇼는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좋은 쇼는 선수들도 관객들만큼이나 즐길 수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쇼에 점수를 매긴다면 10점 만점에 10점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정말 괜찮았다.
가면을 쓴 채 주차장으로 나온 레이 미스테리우스는 생각했다.
‘왜일까?’
오늘만 유독 그랬다.
저번 주의 쇼는 무난하단 느낌.
그보다 더 전의 쇼는 멍청한 랜스 오튼 때문에 완전히 망쳤다.
하지만 그 녀석조차 오늘 태그 팀 경기에서 제 역할을 해냈을 정도로 높은 퀄리티의 쇼였다.
‘그래서 조금은 다시 봤는데.’
일이 있다며 신이 급하게 가버리자 불쌍한 식빵 귀퉁이처럼 우울해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그와 같은 평가를 거두기는 했다.
어쨌든 그랬다.
오늘 쇼는 정말 멋졌다.
그 이유가 뭘까.
고민하던 차, 레이의 옆에서 걷고 있던 차보 비테레로가 물었다.
“왜 그래, 레이?”
“아니, 생각을 좀 했어.”
“무슨 생각?”
“오늘 쇼, 네 눈에는 어땠어?”
“어-썸 했지.”
“그 이유는?”
“어라, 글쎄.”
차보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이와 차보, 거기에 에디까지.
멕시코의 같은 단체 출신이었던 세 사람은 줄곧 함께해온, 사실상 형제와도 같은 사이였다.
지금은, 둘뿐이었지만.
“오늘 분명히, 어…… 좋았지.”
차보도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뭔가 이상했다.
확실히 뭔가 더 나아졌다는 느낌이 강했는데 그 이유를 모르다니.
조금 답답한 기분을 느끼고 있던 레이는 일단 도시를 빠져나가기 위해 대여한 차량에 탑승했다.
안전벨트를 매고 운전석의 차보가 막 시동을 건 시점이었다.
똑똑.
누군가 창문을 두드렸고, 돌아본 레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테이커?”
창문을 내리자 바이커 재킷 차림의 캐스켓-테이커가 입을 열었다.
“잠깐 시간 좀 되나?”
그 말에 차에서 내린 레이는 테이커의 캠핑 버스로 초대를 받아 잠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비밀스러운 이야기인지 차보는 부름을 받지 못했고, 버스 안에는 테이커와 다니는 선수들도 없었다.
테이커에게서 맥주 한 캔을 받은 레이는 일단 목을 적시는 것으로 피로를 씻어냈다.
그리고 대화를 시작했다.
“오늘 경기는 어땠나?”
“아주 좋았습니다.”
레이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신은 환상적인 선수였다.
“기술 하나하나가 완벽한데다가 경기를 끌어가는 것도 노련해서 무척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에디와 비교한다면?”
그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에디 비테레로.
테크니션 레슬러임과 동시에 엔터테이너로서의 능력도 출중한 그야말로 전설 중의 전설이었다.
그런 그와 신을?
“…….”
답은 생각보다 금방 나왔지만.
레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가면 아래에 감춰진 표정을 읽어낸 테이커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미안하네. 무례했군.”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선수에 비견될 수 있어서, 음…….”
신이? 아니면 에디가?
레이는 다시 침묵했다.
생각해보면 황당한 일이었다.
“이게 참, 저도 말하면서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데요.”
“말해보게.”
“사실 에디의 데뷔는 1987년이었습니다. 18살 때 마스크를 쓰고 멕시코의 링에 올랐죠. 햇수로 따지자면 테이커, 당신보다 깁니다.”
“그렇지.”
테이커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럼에도 에디는 WWF에서의 경력은 테이커가 길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언제나 깍듯하게 모셨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 저는 죽기 직전 기량이 무르익었을 때의 에디를 상상하고 있었습니다.”
“자네도 그런가.”
“그리고 링 위에서 보이는 능력만 따지자면 아마도…….”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더 낫다?”
“……솔직히 그렇습니다. 에디는 퍼포먼스와 기술 구사 두 가지 모두 완벽한 선수였지만 신은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이에요.”
“그게 네 의견이군.”
“말이나, 됩니까?”
레이가 의아해 되물었다.
아니 그는, 지금 이 상황 자체를 더없이 부조리하게 느끼고 있었다.
프로레슬링.
그 하나에 인생을 바친 남자가.
“이제 고작 20대 중반에 접어든 젊은 선수보다 못하다고요?”
“그런 것 같군.”
“제기랄.”
레이는 신음을 흘렸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고 있던 테이커는 손쉽게 결론을 내렸다.
“우리에겐 그 녀석이 필요하군.”
“예?”
“너만 알아둬라. 레이.”
테이커가 상황을 설명했다.
신이 랙다운이 출연하지 않고 있는 거 모두가 의도된 상황이다.
레이는 분통을 터뜨렸다.
“그걸 왜 말을 안 하고 있죠?”
“글쎄다. 녀석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는 방안이 있는 모양이지.”
그래서 테이커도 일단은 가만히 상황을 살펴보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걸로 확실히 알았다.
랙다운에는 신이 필요했다.
‘최근 들어서 버닝콩의 시청률이 우리를 꽤나 앞지른다 싶더라니.’
그런 이유가 있었군.
젊고 전도가 유망한 선수.
같은 브랜드가 아닐 때는 단지 그런 식으로 생각했었지만. 아무래도 그 이상이 있는 모양이었다.
테이커는 문득 은퇴한 뒤로 그렉에게서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그 녀석을 그냥 후배라고 생각하지 마라. 30년 경력의 슈퍼 베테랑이라고 생각하는 게 좋아. 그럼에도 이 업계에서 후배로서의 포지션을 잊지 않는 훌륭한 녀석이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그렉은 허투루 그런 이야기를 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결론이 나왔다.
“레이, 열 받지 않나?”
“예?”
“우리는 지금 어떻게 보면 완전히 ‘2군 쇼’ 취급을 당한 거다.”
“……그렇군요.”
“이대로 있으면 랙다운 이미지만 안 좋아지겠지. 그게 바로 바트가 바라는 바일 테고 말이야.”
하지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선수들에게 진실을 밝힌 뒤 신의 복귀를 회사에 탄원한다거나?
아니, 너무나도 노골적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테이커 자신이 앞으로 회사와의 신뢰를 잃어버리리라.
회사와 선수 사이까지 조율하는 락커룸의 우두머리로서 케인과의 관계를 함부로 깰 수 없었다.
그것을 버려가면서까지 일을 진행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지.’
고민에 빠져 있던 그때, 소파 위에 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JBL로부터의 전화였다.
눈썹을 찡그린 테이커는 레이에게 양해를 구한 뒤 전화를 받았다.
“……뭐냐, 브래드쇼.”
락커룸 내에서 군기반장으로 악명이 드높은 JBL이지만 테이커의 앞에서는 순한 양에 불과했다.
거기다 이제는 베테랑 급의 선수가 되었음에도 지금까지 어리광을 부려서 테이커는 계속 귀찮음을 느꼈다.
하지만 이어진 말을 들은 테이커는 드물게 JBL의 말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선배님, 저 기믹 관련해서 상담 좀 부탁 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슨 소리냐?”
[아니, 오늘 신 그 자식이 이상한 소리를 해서 말인데요…….]
“뭐?”
이번엔 또 뭐란 말인가?
* * *
계약서에 사인을 마치고 보냈다.
그리고 며칠 뒤, 뉴욕에 있는 사무실로 택배가 하나 도착했다.
엄중히 밀봉된 서류 봉투를 열고 내용을 확인하자 그 안에는 영화의 각본이 보물처럼 들어있었다.
나는 계약서에 사인을 함으로써 이 각본을 읽고 남자 주인공인 ‘피트’의 역할을 맡게 되었으며.
또한 각본을 포함해서 모든 내용을 유출하지 않겠다는 계약까지 모두 이루어졌다.
시간은 충분히 주어졌다.
한 달.
그동안 나는 대본을 분석하고 블로킹을 짜내며 이 영화에서 내 역할을 그려낼 생각이었다.
지난번에 헬 쏘우를 찍으며 많은 것을 배웠다.
링 위와 같았다.
아니, 아마 배우들은 다른 상상을 하겠지만, 내게는 그러했다.
일반적으로 표현하면 ‘무대’겠지.
하나의 씬, 하나의 장소.
거기에서 나의 역할을 연기한다.
그리고 그 안으로 다른 배우들이 들어오며 디테일을 수정하고 이내 앙상블로 변하는 것이었다.
촬영은 그렇게 시작된다.
그처럼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하나의 영화가 완성되고 결과가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었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의외로 랙다운의 시청률이 제자리걸음을 계속 하고 있다는군.]
렐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10월.
하우스 쇼와 영화 진행을 병행하고 있던 중 들려온 반가운 소식.
[바티스타가 영 힘을 못 쓰고 있나? 이번에 챔피언도 테이커에게 빼앗기고 좀 안 좋던데.]
[음, 갑작스레 메인 이벤터가 된 것치고는 잘해주는 편이지만 레볼루션 각본이 끝난 이후로 그때만큼의 포스를 보여주지 못했지.]
[결국 그게 원인인가? 바티스타가 생각만큼 상품성이 없어서?]
[아니, 그래도 바티스타로서는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주고 있지. 카리스마와 근육, 외모 같은 거.]
[그럼 괜찮은 게 아닐까? 시청률도 그대로 1,000만 정도를 마크하면 아주 좋은 편이잖아.]
[그건 그렇지만, 요새 랙다운을 보면 기대감이 안 생겨. 결국 이길 선수가 뻔히 보이니 말이야.]
[캐스켓-테이커?]
[그런 셈이지. 하지만 쇼에는 분명 이변이 있어야 해. 하지만 현재 랙다운의 미드 카더들은 그러기에는 영 수준이 별로지.]
[하긴, 나도 갑자기 오튼이 테이커를 이기면 욕부터 할 거야.]
[하지만 신은 아니지.]
[그러고 보니 그 친구, 요새 왜 쇼에 안 나오는 거야? 드래프트 때 분명히 랙다운으로 복귀한다고 나왔잖아.]
[글쎄, 러셀과 경기 때 정말 부상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있고.]
[그렇다면 정식 공지가 나왔겠지.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
두 기자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적당히 잘해주고 있군.’
바로 이게 신호탄이었다.
나는 렐처에게 내 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하면서 동시에 현재의 랙다운을 비판하도록 유도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다른 언론에까지 퍼져 그들 역시도 랙다운을 비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나는 오튼에게 선수들의 불만이 쌓이기 시작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슬슬 고향으로 돌아갈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