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205화 (205/634)

205.

긴 침묵이 이어졌다.

케인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하긴 분명 그럴 터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궁지에 몰려있는 상황에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없었다.

거기에 조금 전 바트와 통화를 하면서 그조차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란 걸 느낀 게 아닐까.

사실 좀 동정의 여지가 있는 상황이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다지 위로를 해주고 싶진 않았다.

녀석은 선을 넘었거든.

그렇다면 그게 해서는 안 될 짓이란 걸 가르쳐주어야만 했다.

조금 강하게 나가서.

그러자니 긴 고민이 끝난 듯 케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조건이 있어.”

“말해봐.”

“위클리 쇼에 네가 출연하지 않는 건 그대로 지켜줬으면 해.”

“이거 뭐 자존심도 없군. 당신이 지금 그런 소리를 할 입장이야?”

나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케인이 수치심을 느끼는지 입술을 질끈 깨물었고 나는 등 뒤에 서있는 남자를 힐끔 돌아보았다.

캡틴 로건.

내가 우위에 서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데려온 남자였다.

“미안합니다. 로건. 이야기가 쓸데없이 길어지고 있네요.”

“괜찮네. 둘이서 긴밀하게 할 얘기라면 잠깐 밖에 있을까?”

“그러셔도 되고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싱긋 웃은 로건이 문을 닫고 나갔다.

방이 좀 더 조용해졌다.

그제야 케인이 입을 열었다.

“저 남자는 왜 데려온 거지?”

“그야 지난주 쇼에서 네가 개판 친 걸 만회하기 위해서지.”

케인 맥센은 완전히 랙다운을 쓰레기 같은 쇼로 만들고 말았다.

시나를 중심으로 잘 나가고 있는 버닝콩과는 달리, 브랜드 이미지를 완전히 나락으로 처박았다.

“내가, 그랬다고?”

“안 그랬다고 생각해? 그렇다면 뉴스 좀 듣고 사는 게 어때?”

“다 들었어.”

그가 눈썹을 찡그렸다.

“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난 시청률을 확보하기 위해 자극적인 각본을 선택했을 뿐이야.”

“그 선을 넘었잖아.”

나는 간단히 대답했다.

“태도 불량 시대의 레슬링만 기억하고 있는 네가 보기에는 그 정도는 되어야 자극적이겠지.”

“그걸 어떻게…….”

“해결책이랍시고 내놓은 걸 보면 네가 이쪽 트렌드와는 완전히 담을 쌓고 살아온 게 느껴졌거든.”

하지만 시대는 변했다.

“더 이상 그런 게 먹히는 시대가 아니야. 감성이 많이 변했거든.”

“……그런가.”

케인이 허탈하게 웃었다.

“우리는 이제 구식이라는 거군.”

“이제부터라도 변화하지 않으면 분명 그렇게 여겨지며 망하겠지.”

“그럼, 하나만 더 묻겠는데.”

“뭐야?”

“……그렇다면, 대체 무슨 수를 써서 데려올 수 있었던 거지?”

합당한 의문이었다.

캡틴 로건.

80년대, 작은 서커스에 불과했던 프로레슬링을 미국 사회 전역으로 퍼뜨린 아이콘 중의 아이콘.

하지만 전성기가 지난 이후 90년대 초, 그는 일명 ‘스테로이드 파동’이라고 불리는 큰 사건을 일으키고 회사를 나갔다.

그는 연방 의회에 출두해 다음과 같이 증언해 스테로이드 파동의 재판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회사가 선수들에게 불법 약물인 스테로이드의 사용을 강요했다.’

그 증언으로 회사는 공중 분해될 위기에 처했으며 바트 맥센은 꼼짝 없이 감옥에 갈 처지에 놓였다.

그때가 아마 바트 맥센의 인생에서 가장 고달픈 시기였을 터다.

바트는 WWF의 확장 정책으로 위기감을 느낀 다른 프로모터들의 사주로 자신이 감옥에서 암살을 당할 것이라고 이야기했으며.

각종 로비로 어떻게든 감옥에는 가지 않고 끝났지만, 이후로 WWF는 멸망의 기로에 놓이게 됐다.

프로레슬링이 약쟁이들의 프릭 쇼Freak Show라는 인식이 박히며 인기가 곤두박질치게 된 것이다.

그때쯤 회사 정책이 바뀌며 탄생한 슈퍼스타가 바로 그렉 하트.

작은 선수들이 경기력으로 승부를 보는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어쨌든, 회사를 나간 로건은 이후로도 셀럽으로 꽤 잘 나갔다.

프로레슬링계의 영웅이라는 마초적인 이미지가 잘 먹힌 것이다.

하지만 회사 쪽에서는 그런 로건의 행동 하나하나에 전전긍긍했다.

그는 아이콘이었다.

다시 말해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프랜차이즈와 브랜드를 이끌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말이었다.

만약 그를 중심으로 라이벌 회사라도 생긴다면 회사에는 크나큰 위기가 찾아오는 것이 자명했다.

뭐, 그렇게 되기는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그래서 데려온 것이었다.

하지만 역시, 케인은 그런 사실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했다.

“로건은 스테로이드 파동 이후 회사를 나갔어. 그런 양반을 도대체 어떻게 데리고 온 거야?”

“져준 거지.”

“뭐?”

“거래를 하나 제안했어. 당신이 알 내용은 아니고. 어쨌든 중요한 건 그가 이 랙다운을 다시금 살릴 수 있는 인재라는 거지.”

“그건…….”

“나보고 위클리 쇼에 출연하지 말라고? 좋아, 받아들이겠어.”

“정말, 이냐?”

황당하다는 듯 대답하는 케인.

물론 다른 속내를 가지고 있던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이후 링 서바이벌까지 총괄 각본을 내게 맡겨줬으면 해.”

“……그렇게 하지.”

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래가 성사되었다.

* * *

케인은 랙다운에 닥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나와 손을 잡았다.

나를 막겠다는 아버지와의 거래는 계속해서 유지하면서 말이다.

녀석으로서는 반쯤 떼를 쓴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나는 그런 조건을 일단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각본에 대한 걸 나한테 넘겨줬다는 것 자체가 큰 실수거든.’

케인은 지금쯤 성공적으로 거래를 이끌어냈다고 좋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녀석은 이제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깨닫게 될 거다.

내가 복귀하지 않는 이상 지금의 랙다운에는 답이 없다고.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도록 나는 이후의 각본을 짜나갈 생각이었다.

사무실을 나오자 벽에 기대어 서있던 로건이 나를 돌아보았다.

검은 티셔츠에 청바지.

화려한 색깔의 두건과 선글라스를 쓴 근육질의 중년 남성.

백금발의 옆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수염을 기른 그 사내는 바로 프로레슬링의 아이콘이었다.

“거래는 잘 끝냈나. 형제여.”

특유의 ‘Brother!’라는 말투를 쓰며 나를 바라보는 로건. 거기에 피식 웃은 내가 대답했다.

“링 밖에서까지 그래요?”

“안타깝게도 입에 붙었어. ……이상한가?”

“아뇨, 잘 어울리긴 하네요.”

“그러면 다행이군.”

“어쨌든, 와주신 덕분에 잘 끝냈어요. 이걸로 케인도 고집을 꺾고 제 계획에 동참해주겠죠.”

“신기하군. 아무것도 남지 않는 이 업계에 그토록 헌신적이라니.”

“뭐, 남은 건 많잖아요?”

“가령?”

“눈앞의 당신이라던가.”

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캡틴 로건.

그는 이후 스미소니언에서 선정한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에 기록되기도 했다.

그런 그를 만들어낸 이 업계가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을 리는 만무했다. 오히려 많이 남겼지.

그런 내 말에 잠시 굳어져 있던 로건이 이윽고 말을 이었다.

“……거래는 잘 부탁하네.”

“물론이죠.”

지금 나는 그가 혹할 수밖에 없는 조건으로 데려온 상태였다.

“거기다 당신 정도면 돈도 많이 받을 수 있을 테고, 여러모로 좋은 상황 아닌가요?”

“돈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해. 차라리 없이 사는 게 더 낫지.”

“하지만 한 번 돈이 있어본 사람은 그걸 쉽게 잊을 수 없죠.”

“그건 그래. 제기랄.”

피식 웃은 그가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딸을 잘 부탁하겠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게 거래의 조건이었다.

나는 캡틴 로건의 딸인 브리 로건(물론 로건은 예명이다)을 S&T에서 키워주겠다고 약속했다.

로건은 딸이 한차례 가수로서 실패한 경험이 있어 불안한 듯했지만, 내 생각은 그와는 달랐다.

‘맞지 않는 옷’을 입었을 뿐, 브리 로건은 나름대로 스타로서 대성하기에 충분한 재목이었다.

“대신 로건, 당신 역시도 절 적극적으로 도와주셔야 합니다.”

“그래, 그래. 우리 서로 파트너로서 잘 해보자고. ……그런데, 어떻게 할 생각인가?”

“각본이요?”

“그래, 자네 말대로 지난주 쇼를 봤는데 이건 좀 분위기가 많이 안 좋겠다 싶어서 말이야.”

“그야 당연하죠.”

그나마 무난했던 쇼가 한순간에 자극적인 방향으로 선회했다.

갑작스러운 순간에 나오는 PPL처럼 그 의도가 노골적으로 느껴져 팬들은 더 불쾌해했으리라.

“그럼 어떻게…….”

“그전에 일단, 선수들과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좋겠네요.”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일단 멸망하기 직전에 있는 락커룸의 사기를 다시 올려야만 했다.

* * *

10월 3주차.

랙다운의 현장 팀 멤버들이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 시에 위치한 경기장에 하나둘씩 도착했다.

선수에 직원들까지 더해 총 백여 명 정도 되는 인원. 그 모두가 하나같이 표정이 좋지 못했다.

지난주 방송 이후 여론의 뭇매를 맞은 영향으로 인해 다들 사기가 크게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케인이 모든 직원들에게 소집 명령을 내렸다.

리허설 직전에 벌어진 일에 직원들은 불만을 느끼며 집합했다.

링 위에 서있는 케인을 중심으로 링 사이드에는 선수들이, 그 뒤쪽의 관객석에는 직원들이 모였다.

그런 상황에서 마이크를 잡은 케인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곧바로 본론부터 말하지. 지난주 각본은 명백히 내 실수였어.”

순순히 실수를 인정하는 케인을 본 레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잘못 먹었나.”

“그런 셈이지.”

그 말에 피식 웃는 테이커.

“아주 귀찮은 걸 삼켰어. 자신은 아직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테이커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분명 무언가 있을 터였다.

“그래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두 사람을 브랜드에 초빙했지.”

입장로 쪽을 가리키는 케인.

의아해 돌아본 사람들의 눈동자가 이윽고 큰 경악에 물들었다.

신과 캡틴 로건.

전혀 예상치 못한 두 사람의 등장에 다들 어안이 벙벙해졌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선수들의 뒤쪽에 서있던 랜스 오튼이었다.

“신!!”

그는 마치 전쟁에서 돌아온 전우를 반기듯 신을 향해서 달려갔다.

그러더니 와락, 몸을 던져서 안기려고 했지만, 신이 휙 피해 그만 입장로에 코를 박고 넘어졌다.

그 앞에 있던 로건이 오튼의 손을 붙잡고 일으켜 세워주었다.

“고, 고맙습니다.”

“조심하게나! 형제여!”

“근데 아저씨는 누구세요?”

“…….”

그 모습을 황당해 바라보던 신은 이내 어깨를 으쓱이고 로건과 함께 링에 올랐다.

그리고 마이크를 손에 쥐었다.

“오랜만입니다. 여러분. 저기 제가 랙다운을 위해서…….”

바로 그때, 야유가 이어졌다.

신이 입을 다물자 선수들이 링 위로 하나둘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야, 이 미친놈아!”

“그동안 안 나오다가 지금 돌아오면 우리가 좋아할 것 같냐?!”

“이 건방진 자식!”

난리도 아니었다.

부커에 젠코, 레이와 같은 고참들부터 시작해서 모두가 자신들 나름대로 신의 복귀를 환영(?)했다.

그런 상황에는 아무리 신이라고 해도 당해낼 수가 없는 법이었다.

“자, 잠시만요?! 저 ”

수십 개의 손이 머리를 쓰다듬고 뺨을 꼬집는 가운데, 마이크를 놓친 신이 당황해 소리쳤다.

멀찌감치 링 코너로 떨어져 있던 캡틴 로건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리 그래도 WWF의 아이콘이었던 자신이 돌아왔는데 이런 반응을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로건을 환영하는 것은 뒤늦게 링 위로 올라온 테이커뿐이었다.

“로건, 오랜만입니다.”

“오, 어, 그래. 테이커.”

황당해 대답하는 로건.

수십 명의 선수들이 그렇게 신의 귀환을 축하(?)하고 있는 와중, 두 전설이 재회하게 되었다.

한 차례 악수가 오갔고, 로건이 궁금했던 사실을 물어보았다.

“저 친구, 대체 뭔가?”

“아, 신이요.”

“그래.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내가 돌아왔는데 저 친구에게 더 관심이 집중될 수가 있나?”

“뭐, 다들 놈이 돌아온 게 너무 반가워서 정신이 없는 거겠죠.”

“……대체 뭐하는 놈이야?”

“말하자면 복잡한데요.”

쓰게 웃은 테이커는 선수들 사이에서 압박을 당해 죽어가고 있는 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 격한 환영(?)은 분명 신이 그만한 책임을 가지고 있기에 오는 것이기도 했다.

즉, 다들 연봉 문제에 더해 그가 진짜 쇼에 안 나오자 열이 받은 것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미 신을 ‘신뢰’하고 있던 테이커는 별다른 불만 없이 그의 연봉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왜냐면 그는.

“선수에 프로듀서에 사업가까지 혼자서 다해먹는 괴물입니다.”

정말 여러 가지 의미에서 하나의 브랜드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스타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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