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211화 (211/634)

211.

링 서바이벌 직전의 마지막 버닝콩은 무려 3만 명이 넘는 관람객을 확보한 채로 시작되었다.

말인즉슨 링이 잘 보이지 않아 그냥 내놓기만 하는 2층 좌석까지도 전부 매진이라는 소리였다.

거의 페이퍼뷰 급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막상 쇼에 출연 중인 버닝콩 선수들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이 많은 관객들이 무엇을 보기 위해 왔는지가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신의 복귀였다.

그렇게 시작된 위클리 쇼는 관객들의 열렬한 반응 속에서 각본에 계획한 대로 방송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뭔가가 부족했다.

3만이라는 숫자의 사람들이 보내기에는 영 성원이 미적지근했다.

거기에 대해서, 오늘의 일을 마치고 돌아온 두 명의 챔피언은 동시에 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다들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그러게.”

숀 시나와 러셀 하트.

쇼의 초반부에 나서 각자 압도적인 환호와 야유를 받았던 두 사람은 제각기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한 명의 선수로서 완벽하게 제 몫을 해냈지만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뭔가 부족했다.

다들 힘을 아끼는 느낌이었다.

참으로 불편한 상황이었다.

버닝콩을 보기 위해 이곳에 온 관객들이 가장 바라고 있는 장면이 바로 랙다운 선수의 등장이라니.

비록 이게 링 서바이벌 직전의 위클리 쇼고 지난주 랙다운 방송에서 떡밥을 뿌려두기는 했다지만.

현재, 신과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두 선수에게는 영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경기복도 벗지 않은 채 락커룸에 자리를 잡았다.

메인이벤트.

링 위에 오른 트리플H가 다른 네 명의 선수들을 대동한 채 장황한 연설을 이어나갔다.

[이번 주 일요일! 드디어 제 주제도 모르는 랙다운 놈들을 다시 한 번 짓밟아주는 날이 왔군.]

[Booooooo……!]

약한 야유.

그 외의 반응은 없었다.

트리플H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게 승리를 다짐하는 마이크워크를 이어나갔지만, 당연히 그 위상에 걸맞은 반응은 나와주지 않았다.

관객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당연했다.

랙다운…… 아니, 신은 상황 자체를 자신들이 선역으로 보일 수밖에 없도록 지금껏 구성해왔다.

한차례 위기를 겪었지만, 캡틴 로건을 통해 극복하고 협력하는 팀 업 드라마를 멋지게 만들어냈다.

반면 위기감 없이 평범하게 각본을 준비했던 버닝콩은 상대적으로 강자의 입장에 서게 되었고.

그로서 전형적인 탑 독과 언더 독의 포지션이 갖춰지게 되었다.

그래서 차라리 악역식으로 마이크워크를 하는 게 더 빛났을 텐데.

헌터는 그걸 알았음에도 고집을 부려 선역의 마이크워크를 해나갔고 끝내 역반응을 낳고 말았다.

“보는 이쪽에서 다 창피하군.”

“저 고집만 버리면 선수로서 더할 나위가 없을 텐데 말이야. 하하.”

러셀의 독설에 딱히 동의하지 않은 채 시나는 가볍게 웃어 보였다.

보기에 좀 안쓰러울 정도였다.

[보고 있나?! 랙다운!! 여기 있는 다섯 명은 버닝콩에서 선발된 최강자들이다! 너희 겁쟁이들이 과연 맞서 싸우기나 할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은 어서 베이비 페이스(선역)가 등장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문득 두 사람은 생각했다.

예전에 누군가 말해줬지.

악역은 인간이 만들어내지만, 선역은 신神이 점지해주는 것이라고.

그만큼 압도적인 환호를 받는 선역은 만드는 것이 정말 어려웠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지금 이 순간, 하늘에서 손이 뻗어져 내려와 신SIN을 선역으로 완성시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악역으로 커리어를 시작했던 녀석이 이제는 그렇게 되었군.”

러셀이 피식 웃었다.

트리플H는 어떻게든 관객들의 반응을 모으기 위해서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악역으로 여겨지고 있는 상황에서 선역 스타일의 마이크워크는 정말 최악의 선택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관객들이, 그리고 방송을 시청하고 있는 수천만 명의 팬들이 모두 똑같은 생각을 했다.

누군가 이 흐름을 바꿔줬으면.

헌터에게서 마이크를 뺏고 속 시원하게 한마디를 쏘아붙이거나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패주었으면.

그런 하나의 기대감.

그 화살이 향하는 것은 물론.

‘신’이었다.

그리고 연주가 시작되었다.

“……?”

러셀이 눈을 동그랗게 떴고.

“하하.”

시나는 빙긋 웃어보았다.

“묵시록이군.”

그리고 금방 알아차렸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빠밤-빠밤-빠밤-빠밤-빠밤-!

북과 나팔이 그 시작을 알렸다.

이제 곧 온다.

뭔가 위험한 게 온다.

그런 기류가 경기장 전체에 흘렀다. 그것을 들은 관객들이 순간적으로 살짝 놀란 것이 느껴졌다.

카메라가 크게 경기장을 비췄고 검은색과 흰색의 조명이 번갈아 쏟아지며 경기장을 물들였다.

[대체 누구의 음악인 거죠?!]

[뭔진 몰라도 정말 죽여주는데요? 헌터의 얼굴을 보라고요!]

방송 카메라가 불길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헌터를 비춰주었다.

작정하고 신을 제대로 띄워주는 구성. 그것을 알아챈 두 사람은 온몸에 전율이 이는 걸 느꼈다.

그리고 기존의 음악에서 사용되던 성가의 울림이 대합창이 되어 경기장 전체에 울린 순간이었다.

[Yeeeeeeeeeeeeaaaaaahhhh!!]

그 정체를 알아차린 관객들이 환호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모두가 하나가 된 것처럼 신의 테마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Uh-Oh-Oh-Oh-Oh-Oh!!]

환상적이었다.

새롭게 어레인지된 테마곡에서는 신이 가진 혁명가이자 선구자로서의 면모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가 이 업계에서부터 시작해 미국 사회의 인식과 싸우고 있었다.

이 인종의 용광로에서 비주류 중의 비주류에 불과한 동양인 남성.

지금껏 누구도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런 위험 부담을 감수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이 경직된 업계의 최고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일어난 한 남자가 있었다.

그가 입장로 위에 나타났다.

관객들이 그 이름을 소리쳤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그는 실력으로 논란을 잠재웠다.

자신이 그들이 인식하는 것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렸다.

그 결과.

이제는 모두가 신의 이름을 외치고 그 노래를 부르며 시대의 기수가 되는 것을 열렬히 지지했다.

“…….”

“와, 정말 멋진데.”

러셀과 시나는 그 환상적인 광경을 어느덧 한 명의 팬으로서 즐기고 있었다.

* * *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관객들의 함성이 이리저리 뒤엉키며 대체 내게 어떤 반응을 보이는 건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무슨 챈트를 하는 걸까.

노래를 따라 부르는 걸까.

아니면 단순히 환호하는 걸까.

그조차 알 수 없을 만큼 모두가 나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쏟아냈다.

싱긋 웃은 나는 T자 모양의 입장로 위에 서서 좌우로 움직였다.

일부러 그런 식으로 여유를 부리며 내 귀환을 축하하고 있는 사람들의 반응을 마음껏 즐겼다.

내가 좌우로 움직일 때마다 그쪽 방향의 관객석에 서있던 관객들이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왔다.

[Yeeeeeeeeeeeeaaaahhhhh!!]

환성에 묻혀 그들이 뭐라고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모두가 나를 원한다는 사실은 느껴졌다.

이제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나는 대체 불가능한 남자였다.

그리고.

링으로 돌아와서 기뻤다.

영화 쪽 일도 그 나름대로 성취감이 있기는 했지만, 역시 나는 여기 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

이렇게 많은 관객들이 내 행동 하나하나에 반응할 때의 쾌감은 그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었다.

나는 마이크를 들었다.

보컬 파트가 이어지고 있던 테마 음악이 끝났다. 하지만 나는 쉽사리 말을 시작할 수가 없었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Uh-Oh-Oh-Oh-Oh-Oh!!]

[Welcome Back! Welcome Back! Welcome Back! Welcome Back! Welcome Back!]

미치겠구만.

관객들의 이 미친 듯한 호응에 좀처럼 말을 시작할 수가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나는 마이크를 힘차게 위로 들어올렸다.

[Yeeeeeeeeeeeeeeaaaaahhh!!]

경기장이 떠나갈 듯했다.

몇 번이고 호응을 유도한 나는 링 위에 서있는 버닝콩 선수들의 표정이 썩기 직전이 되어서야 겨우 마이크를 잡고 입을 열었다.

첫 말을 무엇으로 할까.

두말할 것도 없었다.

“내가 좀 늦었군.”

[Yeeeeeeeeeeeeaaaaaahhhh!!]

“이런 제기랄, 다들 날 너무 기다려서 환호 때문에 마이크워크를 이어나갈 수가 없을 정도잖아?”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알아, 알아. 날 사랑해줘서 고맙다고. 예쁜이들. 하지만 내가 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니 아주 조금만 기다려주면 안 될까?”

[No! No! No! No! No! No! No! No! No! No! No! No! No! No!]

끝내 No! 챈트마저 나왔다.

“좋아,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해봐.”

[Eyeeeeeeeeeeeeeeaaaahhh!!]

다시금 환호가 터져 나왔다.

나는 팔을 벌리고 서서 보란 듯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지금 이곳에서 나의 존재감을 확인시켰다.

물론, 그 순간에도 한정된 시간은 계속해서 째깍째깍 흘러갔다.

상황을 보다 못한 헌터가 마이크를 들고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지금 나와서 뭐하자는 거지?]

[Booooooooooooooooooo-!]

쏟아지는 야유.

녀석이 받고 싶었던 환호를 도둑질하게 된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이빨을 털어대기 시작했다.

“버닝콩을 훔친 거지.”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지난주 금요일에 너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하지만 나는 등장만으로도 쇼를 훔쳐버렸군.”

링 위의 선수들은 순식간에 표정이 굳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관객들은 내게 박수를 보냈다.

거기에서 나는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내는 말을 했다.

“이제 좀 느껴지나? 내가 랙다운 팀에 합류한 이상 너희가 이길 확률은 제로가 되었다는 걸!”

[그런 것치고는 입장로 위에 엉덩이를 빼고 서있군. 사실 우리가 두려운 것 아니냐?]

“아니지, 아니야. 헌터. 그런 말로 날 도발하려고 해도 일단 아무 소용없다는 사실만 알아둬.”

쯧쯧, 혀를 찬 나는 이내 씨익 웃으며 관객석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건 사실 포위망이야.”

[뭐?]

“너희가 내 죽여주는 모습에 취해있는 사이, 이미 올스타들이 여기 모였다는 거야. ……테이커!”

버럭 소리친 나는 그대로 관객석을 가리켰다. 3만의 시선이 내 손가락 끝을 따라서 움직였다.

청바지와 가족 조끼, 머리에는 붉은색 두건을 질끈 동여매고 선글라스를 쓴 2미터의 폭주족 거한.

그는 관객들이 드나드는 출입구를 막아선 채 가만히 서있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바티스타!”

붉은 경기복만을 입고 자신의 근육질 몸매를 드러내는 바티스타.

“레이!”

화려한 가면을 쓴 멕시코 출신의 루차도르. 랙다운의 작은 거인.

“젠코!”

금발 머리를 땋아 묶은 쾌남. 캐나다 출신의 테크니션이자 쇼맨.

“그리고…… 나도?”

[Yeeeeeeeeeeeeaaaaahhhh!!]

너스레를 떨듯 말하자 관객들이 어마어마한 환호를 보내주었다.

“도망칠 곳은 없다고!”

그렇게 외친 나는 힘껏 마이크를 내던지며 링을 향해 걸어갔다.

쿵! 하는 소리에 맞춰 각자 입구를 막고 있던 다른 선수들도 입장로를 따라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당황해하던 버닝콩 선수들이 이내 등을 맞대고 스크럼을 짰다.

나머지 네 명의 선수들이 바리게이트를 넘어왔고, 우리는 로프를 잡고 올라가 링을 포위했다.

[Waaaaaaaaaaaaaaaghhhh!!]

미칠 듯한 환호가 쏟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자리에 있는 열 명의 선수들은 버닝콩과 랙다운을 통틀어 최고들뿐이었다.

거기에서도 선과 악이 갈리고 반응의 정도가 나뉘었다.

그리고 나는 백 퍼센트 확신하고 있었다.

이중에서 현재 가장 반응이 나오고 있는 선수는 바로 나라는 걸.

그것을 알기 때문에 지금 선수들도 자연스럽게 주인공의 자리를 내게 양보해준 것이었다.

나는 호쾌하게 소리쳤다.

“전부 쓸어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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