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링 위가 가득 찬 느낌이었다.
제거 매치에 참가한 열 명의 선수들이 내는 아우라는 그야말로 이 회사의 역사를 상징하는 듯했다.
정확히 1990년도에 데뷔한 이레 지금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오고 있는 캐스켓-테이커부터 시작해.
나를 제외한 나머지 여덟 명의 선수들 역시도 제각기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올린 이들이었다.
개중 가장 신입이 나였다.
그리고 오늘 팬들에게서 가장 큰 기대를 받고 있는 것도 나였다.
링 중앙에서 서로를 노려보던 두 팀은 이내 심판의 지시에 따라 한 명씩만 남고 링 사이드로 나갔다.
나와 트리플H였다.
양 팀에서 가장 큰 존재감을 가지고 있는 두 선수가 나오자 관객들이 호응을 해주기 시작했다.
[Let’s Go! SIN!]
[Triple H!]
박자를 맞추며 번갈아 나오는 챈트. 피식 웃은 나는 사람들의 반응을 끌어오기 위해 움직였다.
주먹을 번쩍 들어올렸다.
[SIN! SIN! SIN! SIN……!]
나를 응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헌터의 것보다 좀 더 커졌다.
반대편에 서있던 트리플H 역시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는 팔을 펼치며 포효했다.
“우오오오-!”
어깨까지 기른 금발.
키 190cm에 체중 120kg, 몸 대부분이 근육으로 구성된 듯한 거구.
마치 신화 속의 전사와 같은 그 모습에 관객들이 환호를 보냈다.
다시금 양분된 반응.
역시 얕볼 수 없는 놈이다.
“신, 지지 마라!”
“박살 내고 와!”
선배들의 응원 속에 중앙으로 나아간 나는 헌터와 마주보았다.
다시금 양분되는 환호.
2년? 아니, 1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계속 성장했다.
유럽 투어 때의 내가 아니다.
그걸 알고 있는지 헌터 역시 다소 온건한 태도로 말을 걸어왔다.
표정은 험악했지만.
“……적당히 하자고, 응?”
굳이 이곳에서 나와 대결을 펼치고 싶은 마음은 없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저기, 죄송한데요. 헌터.”
“……?”
“그, 제가 지금까지 대충 두 달 넘게 경기를 못해서 미칠 듯이 쌓여있는 상태거든요?”
“그래서 뭐?”
“상대를 좀 해주셔야겠어요.”
씨익 웃은 나는 곧바로 풀 스로틀을 당기고 달리기 시작했다.
해머링과 찹.
쫘악-!
퍽!
쫘악-!
퍽!
쉴 틈 없이 쏟아지는 콤보 공격에 헌터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나는 통쾌함을 느꼈다.
근육으로 가득한 그의 몸은 타격할 때의 소리가 장난이 아니었다.
[Waaaaaaaaaaaaaaaaagghhh!]
초장부터 빠르게 밀어붙이는 나를 보고 환호를 보내는 사람들.
“야야, 좀 살살해!”
“저 좀 세게 때려줘요!”
“미친……!”
헌터의 반격이 이어질 타이밍에 나는 그런 식으로 주문을 넣었다.
황당해하던 헌터는 이윽고 기합이 바짝 들어간 채 날 공격했다.
로프 반동.
서로 반대로 갈라진 뒤 돌아오는 내 앞에서 허리를 숙이는 헌터.
뿔을 세우고 들이받는 소처럼 안으로 파고든 그가 날 넘겼다.
공중으로 높게 떠오른 나는 그대로 반 바퀴 돌며 떨어졌다.
투콰앙-!
백 바디 드롭.
시원한 통증에 씨익 웃고 있던 나는 가까이 다가오는 헌터를 발견하고는 눈을 반짝였다.
분명 이 다음은 니 리프트였다.
하지만 헌터는 우악스럽게 나를 일으켜 세우는 대신, 자기 코너로 돌아가 곧바로 태그를 쳤다.
각본과는 다르게도.
짝!
“태그!”
심판의 선언이 이어지자 의아한 기분을 느낀 나는 고개를 들었다.
천천히 걸어온 카인이 내 목을 붙잡고 그대로 일으켜 세웠다.
표정은 사람 죽일 것처럼 사나웠지만 이야기하는 건 달랐다.
“헌터가 쥐가 났다는군.”
“쥐……?”
“내가 좀 상대해주마.”
“세게 해주세요.”
그 말에 당황하는 카인.
하지만 그는 내가 주문한 것처럼 힘차게 반대편으로 던져주었다.
콰앙!
나가떨어져 몇 바퀴 구른 나는 아찔한 기분을 느끼며 생각했다.
원래 계획은 이랬다.
나와 헌터가 붙다가 헌터가 기세에서 밀리고, 카인이 나와서 날 밀어내고 다음 선수를 불러낸다.
교대와 교대, 그리고 교대.
그게 오늘 경기의 기본적인 전개 방식이었지만, 헌터가 다리에 쥐가 나면서 살짝 꼬이고 말았다.
‘진짜 그런지 의심은 되는데.’
아까 내가 세게 때려달라고 했을 때 당황한 걸 보면 단순히 들어가기 위해 댄 핑계인지도 모르지.
뭐, 괜찮았다.
심호흡을 하며 일어난 나는 천천히 다가오는 카인을 노려보았다.
[Waaaaaaaaaaaagggghhhh!!]
관객들의 환호는 더 커졌다.
나와 카인의 페이스 투 페이스.
그로 인해 전해지는 기대감.
이 또한 링 서바이벌의 묘미였고, 우리는 그런 심리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경기를 기획했다.
가면을 벗은 이후로 완전히 미쳐버리게 된 빅 레드 몬스터, 카인.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괴물에게 나는 겁 없이 달려들었다.
날 붙잡으려는 카인의 손을 미끄러지듯 빠져나가 반대편 로프에 그대로 몸을 실었다.
꾸욱.
나는 쇠심이 박힌 단단한 로프에 온몸을 그대로 푹 쑤셔 박았다.
그리고 발사.
튕겨져 날아가, 막 돌아서고 있는 카인을 향해 힘차게 도약했다.
루 테즈 프레스.
상대의 상반신에 올라타며 쓰러뜨려 펀치를 먹이는 호쾌한 무브.
전설적인 프로레슬러가 고안한 기술이 지금껏 이어졌고, 락콜드를 거쳐 현재 나까지 계승되었다.
나를 받아낸 카인의 몸이 그대로 기우뚱 뒤로 기울며 쓰러졌다.
거기에 루 테즈와는 다르게.
락콜드와도 다르게.
나는 양손을 모두 써서 카인의 안면을 마구잡이로 두들겨 팼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리고 마지막 일격은 깍지를 낀 뒤 그대로 이마를 내리찍었다.
콰직!
“크아아악-!”
괴로워하는 카인.
그런 그를 두고 일어선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돌아섰다.
그리고 코너로 가 태그를 했다.
캐스켓-테이커.
카인과 함께 과거에는 ‘파괴의 형제’라는 이름의 태그 팀으로 활동까지 했던 그가 링에 나왔다.
[Yeeeeeeeeeeaaaaaahhhh!!]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카인과 여유롭게 자세를 취하는 테이커.
두 사람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링 사이드로 나와 숨을 고르고 있자니 젠코가 내 어깨를 잡았다.
“이야, 멋지던데?”
“별거 아닙니다.”
나는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실제로 그랬다.
적당히 몸을 푼 것뿐.
아직 보여줄 건 많았다.
그리고 분명, 나는 오늘 관객들의 반응을 독식하게 될 것이다.
왜냐고?
그야 모든 선배들이 나와 함께 기술을 쓰고 싶어 했으니 말이다.
* * *
태그가 연이어지며 번갈아 나선 선수들이 각자 몸을 풀고 기술을 선보였다.
관객들의 반응이 차곡차곡 쌓여갔고 그렇게 한 바퀴 돈 뒤 경기는 어느덧 중반부로 접어들었다.
슬슬 선수들이 탈락할 차례.
그 첫 타자는 카인이었다.
테이커에게 내내 밀렸던 그는 결국 ‘라스트 라이드’를 맞게 되었다.
라스트 라이드.
카인의 머리를 다리 사이에 끼운 테이커는 그대로 허리를 붙잡고 힘차게 회전시키며 들어올렸다.
카인의 거구가 테이커의 어깨에 올라탔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파워 밤을 사용할 때의 자세였다.
하지만 테이커의 파워 밤에 라스트 라이드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바로 이 자세에서 한 번 더 위로 들어올리기 때문이었다.
어깨에 올라탄 카인을 번쩍 들어 올리며 타점을 더 높이는 테이커.
그와 동시에 소리쳤다.
“신!!”
나는 이미 그 뒤에 있었다.
탑 턴버클을 밟고 힘차게 뛰어오른 나는 곧장 팔꿈치를 내밀었다.
카인의 안면에 내 엘보우가 꽂히는 찰나의 순간, 테이커 역시도 그를 힘차게 내리꽂았다.
라스트 라이드에다가 탑 로프 엘보우 드롭까지 더해진 합체기.
순간 시야가 크게 가속하더니 거대한 충격이 몸을 강타했다.
투콰앙-!
바닥에 떨어진 카인의 거구가 한 차례 튕겨져 오를 정도의 충격.
그 옆에서 낙법을 친 나는 카인의 위에 엎드려 커버 동작을 취하는 테이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니 그러다, 이내 재미있겠다 싶어 그 등 위에 슬쩍 올라탔다.
경악하는 선수들.
하지만 팬들은 미쳐 날뛰었다.
이런 케미는 오직 링 서바이벌에서 밖에 볼 수 없는 묘미였다.
[1, 2, 3!!!]
그렇게 카인이 제거되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 주먹을 내밀자 툭, 하고 부딪힌 테이커가 이내 다음 선수를 불러들였다.
그렇게 해서 나온 건 빅 죠.
우리 쪽에서도 카인을 상대하느라 힘이 빠진 테이커를 대신해 한 선수가 링 위로 올라왔다.
바로 레이 미스테리우스였다.
158cm.
일반적인 남자의 신장에도 미치지 못하는 그가 당당히 링 위로 오르자 사람들이 경악 금치 못했다.
그 상대는 무려 213cm에 달하는 거구. 프로필 상의 체중으로도 2배 이상 차이가 나는 상대.
흔한 표현을 하나 사용해 말하자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레이는 노련했다.
그는 빠른 속도로 링 위를 오가며 거인 레슬러의 약점인 무릎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기 시작했다.
쫘악!
“크헉?!”
무릎 뒤를 걷어차일 때마다 크게 비틀거리는 빅 죠. 찰지게 맞아주는 솜씨가 무척 일품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 경기는 성경 구절이 아니었다.
민첩하게 오가며 공격을 피하던 레이는 결국 붙잡히고 말았다.
“우어어어-!”
빅 죠는 괴물 같은 소리를 내며 레이에게 파워 슬램을 선사했다.
콰앙-!
체중까지 실은 일격을 받아낸 레이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빅 죠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커버했다.
1, 2……!
어떻게든 빠져나오는 레이.
눈썹을 찡그리며 일어난 빅 죠는 그대로 자기 코너로 걸어갔다.
레이의 공격 역시도 그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알아챈 관객들이 크게 환호했다.
[Rey! Rey! Rey! Rey! Rey! Rey! Rey! Rey! Rey! Rey! Rey!]
레이 미스테리우스.
작은 키라는 약점을 극복하고 이 업계의 탑에 올라선 루차도르.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이를 악물고 빅 죠를 향해서 몸을 날렸다.
무릎에 이어지는 저공 드롭 킥.
“끄아아악!!”
비명과 함께 침몰하는 거체.
[Waaaaaaaaaaaaaaaggghhh!!]
링 바닥이 크게 떨렸고 관객들의 큰 함성이 경기장을 뒤덮었다.
‘핫 태그’ 타임이었다.
양쪽 다 선수들이 체력을 비축해둔 상태. 레이와 빅 죠는 바닥에 널브러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상태에서 우리 팀은 바티스타를 내보낼 생각이었다.
“레이!”
“레이! 이쪽으로!!”
모두가 손을 뻗었다.
레이가 혹시나 태그할 상대를 착각하게 하지 않기 위해 바티스타만 손바닥을 위로 해 내민 상태.
엉금엉금 기어온 레이가 훌쩍 뛰어오르며 바티스타와 태그를 했다.
그리고 반대쪽에서는 분노로 일어선 빅 죠가 절뚝대며 달려왔다.
함성과 함께 나가는 바티스타.
그는 여기에서 200kg이 넘어가는 빅 죠를 들어서 내동댕이치는 액션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끄하압-!”
그동안 모아두었던 힘을 방출하듯 빅 죠를 잡고 스파인 버스터 자세로 들어 올리는 바티스타……!
하지만 그 순간.
“윽?!”
사고가 터졌다.
갑자기 허리를 움켜쥔 그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을 본 우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 났군.”
한숨을 쉬는 테이커.
예정된 각본과는 다른 상황에 당황해하던 빅 죠가 일단 바티스타를 커버하면서 시간을 벌었다.
하지만 바티스타는 갑작스러운 커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 2, 3!!
심판이 쓰리 카운트를 셌다.
어안이 벙벙해져 서있던 나는 관객들의 반응 역시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을 알아차렸다.
등을 움켜쥐며 굴러서 링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바티스타.
실수Botch였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 사실을 알아차릴 정도로 확실하게.
‘이걸 어떻게 하지.’
잠시 당황해 서있던 내 등을 누군가 툭툭 두드렸다.
테이커였다.
“할 수 있겠나?”
“예?”
“기회를 주겠단 말이다.”
“…….”
그 말에 나는 씨익 웃었다.
‘제기랄.’
해야지 별수 있나.
그렇게 생각한 나는 곧바로 바티스타를 대신해 링으로 나갔다.
빅 죠는 이런 분위기 속에 퍼포먼스를 펼치면서 어떻게든 어색한 공기를 수습하려고 했다.
거기에서 나는 일단 최대한 여유롭게 빅 죠를 향해서 다가갔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원래 스팟은 바티스타가 빅 죠를 들어 올리면서 힘을 과시하는 것.
그와 동시에 관객들이 가진 ‘힘’에 대한 갈증을 풀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바티스타는 없다.
‘……이런 제기랄.’
할 수밖에 없나.
그렇게 생각한 나는 곧바로 빅 죠의 무릎을 힘차게 걷어찼다.
“끄악!”
무릎을 감싸 쥐며 쓰러지는 그를 붙잡는 척하며 바로 말을 걸었다.
“빅 죠, 들 거예요.”
“뭐……?”
“할 수밖에 없어요. 두 번 못하는 척하다가 들어 올릴 거예요.”
그 말을 들은 빅 죠는 황당하다는 듯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저기 L.A. 한인타운에 사시는 부친께서는 빅 죠보다 두 배는 무거운 멧돼지를 번쩍번쩍 들었다.
그러므로 그 피를 이은 내가 하지 못할 리가 없다!
……난 엄마를 닮았지만.
아니, 제기랄!
할 수밖에 없다고!
든다! 빅 죠!
200kg!!
슈퍼 멋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