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
체인 레슬링을 시작하기 전.
‘살살해.’
눈썹을 찡그린 채 내 앞에 선 오튼이 최대한 조용히 이야기했다.
물론, 그럴 마음은 없었다.
오튼이 자신보다 더 잘하는 모습을 보였을 때, 바티스타는 완전히 자존심이 구겨질 테니 말이다.
반대로 오튼은 나와 제대로 붙었을 때의 실력을 선배들이 보고 ‘왜 지금까지 대충 했느냐’며 갈구진 않을까 싶어 저러는 거겠지.
하지만 뭐.
언젠가는 드러날 문제다.
“해보자고.”
그렇게 말한 나는 곧바로 허리를 낮춘 채 오튼을 향해 접근했다.
일단 그대로 태클을 걸려고 했으나, 오튼은 곧바로 뒤로 빠졌다.
마치 MMA에서나 나올 법한 동작에 링 아래에서 지켜보던 선수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어서 위로 올라가며 락 업.
서로 팔과 상반신이 뒤엉키며 오튼과 나는 힘을 겨루기 시작했다.
쿵!
바닥에 발을 구르며 박력을 더하고, 옆으로 연달아 회전하면서 치열하다는 인상을 전달했다.
슬쩍 돌아보자 링 아래의 선수들이 다들 놀라워하는 게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좋은 레슬러는 몸짓만으로 감정이나 상황을 표현할 줄 알았다.
하지만 링 위에서 실시간으로 힘을 주고받으며 계속해서 그런 표현을 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걸 자신만의 무브를 통해서 잘 표현해내는 선수가 경기력에 있어서 고평가를 받는 것이다.
오튼과 나는 아무런 대화도 없이 체인 레슬링을 만들어나갔다.
락 업을 풀어내면서 뒤로 돌아 들어온 오튼이 내 팔을 꺾으며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움직였다.
“크윽……!”
순간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인 나는 그대로 반격을 시도했다.
꺾인 팔을 풀고 아래로 파고들어 오튼의 뒤에서 롤 업을 시도했다.
오튼은 뒤쪽에 누운 내가 다리 사이로 손을 넣자 자연스럽게 뒤로 넘어지며 롤 업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내 위로 넘어져 어깨가 바닥에 닿자마자 곧바로 허리를 튕겨내면서 빠져나오는 오튼.
우리는 다시 맞붙었다.
나는 오튼을 믿고 내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의 속도로 놈에게 체인 레슬링을 걸었다.
체인 레슬링은 서로가 합이 맞아야 어색하지 않게 ‘레슬’이 가능한 만큼 실력이 가장 중요했다.
그리고 오튼은 러셀과 거의 비슷한 속도로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거기다 공방의 다양함으로 따지자면 오히려 러셀보다 더 나았다.
선수들은 ‘대체 그 찌질하던 오튼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당황한 채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던 녀석이 내 뒤로 들어와 허리를 잡고 힘껏 들어올렸다.
“후읍……!”
한 번은 버텨냈으나.
“흐압!”
두 번째는 번쩍 들렸다.
허리를 잡힌 채 내동댕이쳐진 나는 그대로 한 바퀴를 굴러 일어선 뒤 반동을 이용해 뛰어올랐다.
거의 내 키 높이만큼 날아오른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접었다 펴며 오튼의 안면에 양발을 날렸다.
드롭 킥.
파앙-!
호쾌한 파열음.
공중에서 몸을 쭉 편 채로 킥한 나는 곧장 낙법을 치며 떨어졌다.
오튼 역시 곧장 뒤로 굴러 충격을 흡수하고는 그대로 일어났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쯤은 해줘야지.”
싱긋 웃은 나는 그대로 오튼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불만이었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녀석이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하이파이브에 응했다.
약~간 지쳤다.
거의 10분 가까이 체인 레슬링만 반복한 오튼과 나는 티셔츠가 땀으로 범벅이 되고 말았다.
링 아래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테이커가 물병을 휙 던졌다.
“정말 대단한 실력이군.”
“그렇죠? 이 녀석…….”
“아니, 너 말이다. 신.”
이건 예상과는 좀 다른데.
“오튼을 언제 이렇게 좋은 기본기를 가진 선수로 만든 거지?”
“테이커, 원래 저 녀석 기본기는 탄탄히 다져진 놈이었다니까요.”
“아니, 레이. 내 말은 2년 전의 오튼과 비교했을 때 말이다.”
“2년 전?”
“어느 순간 오튼의 실력이 갑자기 좋아져서 누가 가르쳤나 싶었는데, 플레어가 아닌 너였군.”
“…….”
내가 가만히 물만 마시고 있자니 테이커가 추론을 이어나갔다.
“그러고 보니 너희 둘은 버닝콩에 있을 때부터 캠핑 버스를 타고 함께 여행을 다녔다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바로 거기였군.”
“귀신같으시네요.”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 말이 맞았다.
나는 러셀, 오튼과 함께 여행을 다닐 때부터 줄곧 놈들과 레슬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는 했다.
그러다 불이 붙으면 뒤쪽의 널찍한 침대 방으로 가서 실제로 서로에게 기술을 걸어보기도 하고.
여행은 길었다.
게임을 하고, 쉬고, 운동도 하면서 자연히 레슬링까지도 하게 되었고 오튼은 기본기를 터득했다.
이번에 오튼과 월드 타이틀을 두고 대립하게 될 부커는 그런 모습을 보고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겠지.’
나는 웃으며 다 일러바쳤다.
“부커, 이 녀석이 제대로 마음만 먹으면 월드 타이틀에 걸맞은 경기를 뽑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래, 참고하지.”
고개를 끄덕이는 부커.
“그러니까 잘해봐. 오튼.”
“너 이 자식…….”
“야, 잘 생각해봐. 중요한 경기에서는 확실하게 뛰어줘야 연봉 협상 때 유리해지는 법이라고.”
“그, 그런가?”
귀가 얇은 오튼은 내가 적당히 한 이야기에 또 홀라당 속아 넘어갔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바티스타는 상당히 불편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내가 ‘이 정도는 해줘야죠.’라고 한 말을 신경 쓰는 거겠지.
뭐, 예상한 대로였다.
* * *
그날 밤.
적당히 식사를 마치고 선수들과 헤어진 나는 오튼과 함께 오늘 묵게 될 호텔로 걸어가고 있었다.
늦은 밤.
치안이 좋은 동네여서 우리는 몇 블록 떨어진 호텔까지 그냥 걸어서 이동하기로 했다.
오튼은 나와 함께 있을 때면 의외로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왔다.
“이번에 주식 투자해보려고.”
“어디에?”
“물론 블루베리지!”
“…….”
블루베리는 곧 망한다.
“액플이 낫지 않을까?”
“푸하하! 너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그놈들은 똥이야! 옛날에 액플 컴퓨터 만들 때나 흥했지!”
“그, 그래.”
나중에 좀 조용할 때 액플이 새 핸드폰을 개발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는 게 좋겠다.
물론 그건 철저한 극비 사항이라서 티파니가 어떻게 알아왔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해줘야겠지. 절대 어디 가서 말하지 말라고도.
‘그것도 이제 1년쯤 남았군.’
지금은 2005년 12월.
액플이 핸드폰을 발표해 새 지평을 열어젖히는 건 2007년 1월.
그때쯤해서 지금 묵묵히 심어놓고 있는 S&T의 가수들도 터지고 안정적으로 시장에 안착하겠지.
‘그때까지는 이 랙다운에서 최대치의 커리어를 쌓아가는 것을 목표로.’
밝은 미래를 생각하며 혼자 웃고 있자니 오튼이 말을 걸어왔다.
“야. 무슨 생각하냐.”
“아무것도.”
“뭐 또 더러운 꿍꿍이라도 생각하고 있는 얼굴인데.”
“부커하고 대립이나 잘 해.”
“안 그래도 너 때문에 그 양반이 날 보는 눈빛이 완전 변했어.”
“연봉을 생각하라니까.”
“그러려고.”
고개를 끄덕이는 오튼.
이로서 바티스타 역시도 오튼을 보면서 좀 자극을 받겠지.
물론 그게 끝은 아니었다.
나는 대립 초반, 확실하게 바티스타를 짓밟아 놓으면서 그 자존심을 떨어뜨릴 생각이었다.
그러자니 오튼이 그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녀석이 말했다.
“너무 심하게 하진 마. 차라리 나 때처럼 주먹으로 패던가.”
“뭐?”
“그래도 내가 선배들한테 갈굼 당한 날이면 꼭 불러서 맥주 한 잔 마시자고 한 게 바티스타거든.”
오튼의 표정은 진지했다.
계속해서 바티스타를 걱정해주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나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걱정 마. 인마.”
나는 오튼의 어깨를 툭 때렸다.
“나도 그 양반 짓밟으려고 하는 게 아니야. 내가 그렇게 보이냐?”
“응.”
“…….”
“아, 아니 농담이야.”
“나는 바티스타가 랙다운을 자기 가족처럼 여기게 만들 거야.”
나는 확실히 선을 그었다.
기미는 보일지언정 녀석은 아직까지 니키 제임스에게 쓰레기 같은 짓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나는 좀 더 녀석을 전생보다 나은 인간으로 만들고 싶었다.
오지랖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해도 된다.
전생의 역사를 알고, 그 비극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는지를 알고 있으니까.
* * *
이에는 이.
그리고 눈에는 눈.
오랜 격언이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이 상황에 따라서 굉장히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자면 상대가 예의를 갖출 마음이 없는 인간일 때라거나.
그때는 예의를 보이면 오히려 호구 취급을 당하기 마련이었다.
똑같이 목에 핏대를 세우고 고래고래 욕설을 박아줘야만 상대가 예의를 갖추는 법이었다.
그리고 나는 바티스타가 그 말이 딱 통하는 상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리 바티스타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는 양해를 구해두고 일부러 좀 개새끼처럼 굴었다.
“이거 보셨어요?”
나는 우리 작가들이 열심히 작성해온 각본 뭉치를 테이블 위에 툭 내던졌다.
랙다운 촬영일.
관객들이 입장하기까지 약 한 시간 정도 남은 아슬아슬한 상태에서 나는 그런 식으로 시비를 틀었다.
“뭐야?”
바티스타가 곧바로 날을 세웠다.
그 순간에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역시 훈련 때 겪은 일로 인해 내게 짜증이 난 상태인 모양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누구와 비교를 하더라도 짜증이 날 텐데, 그 대상이 자신보다 아래라고 생각했던 오튼이라니.
하지만 사실이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사실에 기반해 바티스타를 두들겨 팰 생각이었다.
“이딴 거지같은 각본으로 진행하자고요? 지금 제정신입니까?”
“뭐가 어때서 그래?”
“당신이 링 서바이벌 이후 제게 덤비는 각본인데. 뭐 대사를 이딴 식으로 개 거지같이 짜놨어요?”
“뭐가 어때서. 그냥 난 네가 아니꼬워서 널 때린 거고, 나쁠 거 없잖아?”
“이게 좋다고요? 내 대사가 애들 보는 인형극인 새시미 스트리트에 출연할 거 같은 느낌인데?”
“아니, 그걸 왜 나한테 그래? 그걸 쓴 건 내가 아니라 작가들이라고! 그쪽한테 가서 따지던가!”
“이미 하고 왔는데,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래요. 그쪽이 먼저 알아보고 수정 요구했어야 정상 아닙니까?”
“내가 왜?”
“허, 평소에 선배 행세하더니.”
“이 새끼가…….”
바티스타가 벌떡 일어섰다.
일부러 협조를 구해 비워둔 락커룸 안. 일촉즉발의 공기가 흘렀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이런 건 선배가 먼저 읽어보고 수정 요청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내가 네 선배라고?”
“명목상으로는요.”
나는 낄낄 비웃었다.
바티스타의 얼굴이 순간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는 곧바로 망설임 없이 내 멱살을 붙잡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이거 놓으시죠.”
“네가 며칠 전 훈련할 때 말한 거. 그냥 멍청한 놈이 눈치 없이 헛소리하는 건가 싶었는데.”
“뭐요. 체인 레슬링을 하려면 오튼처럼 해야 한다고 말한 거?”
“그래, 참 생각 없이 말하더군.”
“아뇨, 그거 오히려 생각을 깊게 하고 말한 건데. 정말로 당신 체인 레슬링 실력 최악이에요.”
“지금 시비 거는 거냐?”
“시비는 이게 시비죠.”
나는 멱살을 쥐고 있는 바티스타의 손을 툭툭 건드렸다.
주먹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저번에 그랬던 것처럼 바티스타의 손목을 꺾으며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동시에 꺾었다.
GCW 시절부터 경기력을 상승시키기 위해서 계속 여러 격투기를 익혀둔 게 무척 도움이 되었다.
“크헉?!”
나는 가볍게 바티스타를 제압하고는 그대로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쇼가 있는 날에 주먹을 휘두르다니 제정신입니까? 프로 선수로서 자각이 전혀 없잖아요?”
“이, 이 새끼가……!”
“화를 낼 거면 링에서 하던가요. 오늘 각본 같은 거 무시하고 올라가서 주먹다짐이라도 해볼까요?”
“너야말로, 오늘 같이 일할 상대한테 이게 대체 무슨 태도냐?!”
이게 내로남불을 하네.
자기도 니키나 다른 동료들에게 막 대했으면서 내가 팔 좀 꺾었다고 이딴 식으로 나와?
“놓으면 주먹질 안 할 거죠?”
“크윽…….”
우두득.
“아, 알았어! 알았다고!!”
손을 놓아주자 바티스타는 숨을 몰아쉬며 사납게 날 노려보았다.
하지만 눈빛으로 이야기했다.
내가 부커처럼 실전으로 다져진 놈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 덤벼오면 너 역시 무사하진 못할 거다.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마라.
왜냐면 난 미친놈이고 네가 그렇게 굴면 똑같이 되받아치니까.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냐?”
“이런 개 같은 각본으로 뭘 어쩌겠어요. 다시 쓰라고 해야지.”
“지금 와서 다시? 관객들 입장하려면 1시간밖에 안 남았는데?”
“그럼 뭐 어쩔까요. 각본 무시하고 제대로 한번 붙어볼까요?”
“뭐?”
“기본 상황만 놓고 대사 치는 건 전부 애드립으로 가자는 거죠.”
나는 그렇게 본론을 꺼내고 도발을 한 숟갈 끼얹었다.
“아, 그렇게 되면 반응은 내가 독식할 테니 해선 안 되겠는데?”
걸려들어라.
아니, 분명히 걸려들 것이다.
내가 완전히 정신이 나간 놈처럼 바티스타를 도발했으니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바라보자 바티스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신. 네가 나에게서 반응을 모조리 빼앗아갈 수 있다고?”
“불가능해 보여요?”
“당연하지! 나는 이 회사가 고른 차기 메인 이벤터야! 그렇게 자신 있으면 어디 한번 해보자고!”
씩씩거리며 다가오는 바티스타.
그렇게 한동안 녀석과 서로 노려보며 서있던 나는 곧바로 뒤로 돌아 락커룸을 빠져나왔다.
웃음이 터질 뻔했다.
실제로 락커룸을 나온 나는 씨익 웃어버리고 말았다.
‘계획대로군.’
그 무엇보다도 오늘 링 위에서 벌어질 세그먼트가 모두 즉흥적이라고 인식시키는 게 중요했다.
또한, 세그먼트를 실제 대결 구도로 몰고 가는 것까지도 말이다.
그렇게 해야만 바티스타가 나에게 반응을 빼앗기고 난 뒤 실제로 패배감을 느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