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227화 (227/634)

227.

입에서 단맛이 느껴졌다.

체력이 한계라는 증거였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곧 끝이다.

경기의 마지막 순간.

바티스타는 경기장 안의 관객들이 하나가 된 것처럼 외쳐대는 SIN 챈트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정말로 대단한 놈이다.

피니시 무브를 맞아주기 위해 천천히 일어서던 바티스타는, 그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신은 정말 굉장한 놈이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자기 자신이 지금까지 한심한 짓거리를 해왔음을 깨달았다.

대충대충 하고. 아무나 괴롭히고. 누가 잘하면 인정하려 하지 않고.

그래선 안 됐다.

자신 역시도 신처럼 압도적인 반응을 얻었던 순간이 있었는데.

바로 얼마 전, 버닝콩에서 트리플H와 마지막 대립을 할 때였다.

하지만 왜.

지금은 이렇게 된 걸까.

아쉬움이 사무쳤다.

그리고 깨달았다.

현재의 자신은, 지금껏 이끌어주고 마지막에는 뒤에서 밀어주었던 트리플H에 대한 모욕이었다.

그의 잡을 받은 걸 생각해서라도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안 됐다.

눈앞에서 거친 심호흡을 하고 있는 남자가, 그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러므로, 경기의 마지막 순간.

바티스타는 신을 ‘존중’하게 되었고, 동시에 큰 책임감을 느꼈다.

멋지게 져준다.

그리고 다시 시작한다.

신과 트리플H.

두 사람을 위해서라도.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작가와 핀레이, 각 팀의 팀장들.

자신이라는 상품을 띄워주고, 큰돈을 벌 수 있게 도와주는 수많은 이들을 위해서.

거기에 오튼까지.

‘고맙다. 신.’

갑자기 메인 이벤터가 된 여파로 오만함의 굴레에 빠져 지냈던 자신을 신이 도와주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바티스타는 주먹을 쥐고 온힘을 다해 외쳤다.

“덤벼……!”

하지만 그 상태는 엉망이었다.

체력적으로는 이미 한계를 넘어서서 비틀거리며 겨우 서있을 뿐.

그 턱을 노리고 한 발자국 내딛은 신의 슈퍼 킥이 꽂혔다.

쫘악-!

무릎을 꿇는 바티스타.

뒤로 물러난 신은 선명히 빛나며 마지막 일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에게 환호가 쏟아졌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신이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 * *

바티스타와의 경기는 더없이 깔끔한 나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관객들의 분위기를 확 달아오르게 만드는 멋진 오프닝 경기였다.

그 후로도 이어진 페이퍼뷰는 각 경기가 문제없이 목표를 완수하면서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승자와 패자가 갈렸고.

그로 인해 각 선수의 위상이 각본으로 정했던 대로 변했으며, 스토리도 멋지게 마무리되었다.

랙다운은 하나의 프로레슬링 단체로서 멋지게 흥행을 완수해냈다.

그렇게 페이퍼뷰가 끝난 뒤.

평소와는 다르게 시설팀에서 해체 작업에 들어가지 않고 관계자들이 잠시 링 주변에 모였다.

2005년의 마지막 페이퍼뷰가 끝난 만큼, 나름대로 그 의식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선수는 바리게이트 안. 직원들은 관객석.

나와 오튼도 적당히 아래에 서서 케인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들 회사에서 넉넉하게 돌린 캔맥주를 하나씩 든 채로 말이다.

“모두 고마워. 한없이 부족한 내 역량을 채워주느라 고생이 많았어.”

케인은 일단 자기 자신이 부족했음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솔직히 말하지. 중국에 오래 있어서 감이 많이 떨어졌어. 때문에 올바른 방향을 보지 못했지.”

괜찮아요! 케인!

누군가의 외침에 어색하게 웃은 케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아냐. 이런 건 제대로 말해야지. 솔직히 나는 선수 하나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생각했거든.”

굳이 이 시점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팔지는 않을 생각인 듯했다.

그게 맞겠지.

괜히 바트 맥센이 날 견제한다는 이야기를 꺼내봤자 랙다운 분위기만 안 좋아질 테니 말이다.

“하지만 아니었어. 신. 랙다운을 기사회생시켜줘서 정말 고맙다!”

“…….”

다들 날 경외하면서 돌아보는 것이 약간 부담스럽게 느껴져, 나는 적당히 맥주를 위로 들었다.

케인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내년에는 버닝콩을 박살 낸다는 기세로 한번 제대로 해보자고!”

[Yeeeeaaahhh!]

모두가 환호를 보냈다.

그렇게 대장의 격려사(?)가 끝난 뒤, 우리는 제각기 맥주를 마시며 조촐한 파티를 시작했다.

테이커와 같은 선배들은 먹고 죽으라는 듯이 싸구려 위스키를 들고 다니면서 보이는 사람마다 캔맥주 안에 콸콸 쏟아 넣어주었다.

오튼과 나는 그들을 피해 바리게이트 안쪽에 나란히 기대앉았다.

녀석은 오늘 부커-리로부터 월드 챔피언 타이틀을 가지고 왔다.

경기도 괜찮았고 녀석 나름대로 노력해서 치열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칭찬을 좀 해줬다.

“오늘 멋졌다.”

“아, 죽는 줄 알았는데.”

오튼이 한숨을 내쉬었다.

“순서대로 따지자면 월드 타이틀은 네가 따야 되는데, 왜 나냐?”

“지난번에 설명 안 했나?”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는 바트 맥센이 직접 타이틀 샷을 부여하기 전까지는 1선 챔피언에 오를 생각이 없다니까.”

벨트는 열망의 상징이었다.

선수라면 모두가 원하는 최종 목표. 하지만 내가 그걸 이루는 순간에는 그만한 상징성이 필요했다.

그냥 벨트를 따는 건 안 된다.

나는 지금까지도 날 인정하지 않고 있는 그 남자를 쓰러뜨린 뒤에야 벨트를 가져갈 생각이었다.

뭐, 그때까지는 그 벨트 말고 다른 모든 걸 쟁취할 생각이지만.

“제기랄, 그 꼰대 영감쟁이. 덕분에 나만 속 얹히게 생겼잖아.”

녀석이 혀를 찼다.

“네가 월드 챔피언에 오른다면 다들 미쳐 날뛸 텐데 말이야.”

“타이틀이 전부는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만…….”

“너나 잘해. 인마.”

나는 오튼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러다 나한테 페이퍼뷰 메인이벤트 자리 빼앗기지 말고.”

“어, 할래?”

“응?”

“아니, 네가 그거 대신 해주면 나야 좋지. 빨리 끝내고 들어가서 쉴 수 있으니까.”

“…….”

오덕아.

너 처음으로 월드 챔피언 된 건데 제발 자각 좀 가져주면 안 되겠니.

목구멍 끝까지 치솟은 그 말을 꿀꺽 삼킨 나는 이내 아무 말 없이 빙긋 웃어 보였다.

‘그래도 된다면 그렇게 하지.’

사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이후의 대립은 월드 타이틀은 ‘따위’로 만들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아마 내 커리어 전체를 통틀어서 최고의 대립이 될 것 같았으니까.

그러자니 오튼이 약간 취했는지 남들 앞에서 버럭 소리쳤다.

“아~! 빨리 퇴사하고 싶다!”

큰 소리로 말하지 마. 등신아.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하고 싶어지는 한마디였다.

거기에 반응해서 누군가 바리게이트 위로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바티스타였다.

“오, 바티스타.”

“신, 맥주 하나 더 필요하냐?”

“부탁해요.”

오늘은 좀 마시고 싶었다.

맥주를 가져와 건네준 바티스타는 바리게이트 반대편에 기대서는 나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고맙다. 네 덕에 지금까지의 내가 얼마나 한심한지 알아차렸다.”

“한심한 건 아니고, 사람이라면 충분히 자만할 수 있는 법이죠.”

“하지만 넌 아니잖아?”

그가 껄껄 웃었다.

“다음엔 쉽게 안 질 거다.”

“기대하고 있죠.”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니 어딘가를 힐끔 돌아본 바티스타가 곧장 말을 이었다.

“테이커가 온다.”

“예?”

“아까 너한테 위스키 한 병 통째로 먹일 거라고 이야기하던데.”

나는 당황해 옆을 돌아보았다.

반쯤 취한 오튼이 아까부터 퇴사, 퇴사,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놈을 남겨두자.

“……저 봤다고 하지 마세요.”

“그, 그래.”

나는 꿈틀꿈틀 기어 관객석 사이로 자리를 피하는데 성공했다.

바깥 복도와 이어지는 문 앞에 도착하자 불길한 비명이 들려왔다.

갸아아아아아아아악!

그리고 ‘마셔, 마셔!’ 하는 소리와 ‘월드 타이틀 무게만큼 먹어라!’ 하는 잔혹한 악마들의 소리가.

오튼의 명복을 빌어야겠다.

다 네가 자초한 거다.

* * *

그렇게 오튼을 악마(?)들에게 팔아넘긴 나는 복도로 빠져나왔다.

녹색 비상등만 켜져 있는 복도는 아무도 없이 조용한 상태였다.

여기서 잠깐 숨었다 들어가자.

그렇게 생각하고 잠시 맥주를 홀짝이고 있던 나는 할 일도 없어 잠시 메일이 온 걸 확인했다.

“……이런.”

그리고 좀 당황했다.

성탄절이 코앞이라서 그런지 다들 메일을 하나씩 보냈다.

스눕-덕과 더 팍부터 시작해서.

제임스 관, 헬-쏘우 크루의 배우들과 스칼렛 요한나, 심지어는 감독인 무디 앨런까지.

‘영화 촬영장에서는 그렇게 갈구시더니 인사는 확실하구먼.’

일단 외부 사람들만 이 정도고.

‘안쪽’의 사람들은 더 많았다.

일단 GCW의 형제들.

버닝콩의 시몬스, 러셀, 시나, 카인, RVD, 빅 죠, 나머지 기타 등등, 나와 함께 일을 했던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부모님으로부터 메일.

[준호야엄마다밥은먹고다니냐벌서크리스마스네집에서기다린다이거보면빨리전화줄것이상.]

[전화ㄱ.]

“…….”

두 분 다 한글을 사용하셔서 읽는데 아주 약간 시간이 걸렸다.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미국의 최대 명절, 크리스마스는 이제 이틀 뒤였다. 그동안 계속 전화와 문자만 하게 생겼군.

“이를 어쩐다.”

“뭐가?”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뭔가 싶어 고개를 들자 반대편 벽에 기대어 서 있는 케인이 보였다.

취했는지 뺨이 붉어졌다.

“아, 크리스마스 메일 때문이죠.”

“이틀 뒤로군.”

“바로 내일은 이브죠.”

“어떻게 보낼 생각이야?”

“글쎄요. 일단 집에 돌아가서 가족들하고 보내려고 생각했는데.”

“그게 보통 가정이겠지.”

케인이 쓰게 웃었다.

“우리는 아무 일정도 없어.”

“…….”

“아버지도 계속 일할 거라고 하시고. 티파니도 그렇게 말해서.”

“글쎄요.”

나는 핸드폰을 꾹꾹 눌러 전화를 걸 준비를 하고는 그렇게 말했다.

“일단 티파니에게는 크리스마스에 다른 일정이 생길 것 같은데요.”

“고마워.”

싱긋 웃는 케인.

그러고 보니 메일이 없었던 걸 기억한 나는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뭐, 그녀만 승낙한다면.

부모님도 좋아하시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신호음을 기다리던 나는 이내 뭔가 하나를 떠올리고는 케인에게 물었다.

“지금 뉴욕이 몇 시죠?”

“새벽 다섯 시일 걸.”

“안 받겠네.”

하면서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신?]

“어, 티파니.”

[어, 응. 안녀엉~. 오랜만에 목소리 들으니까 좋네. 헤헤. 미안, 미안. 파이널 아마겟돈 못 봤어.]

“뭐?”

나는 순간 눈썹을 찡그렸다.

언제나 프로레슬링과 나의 슈퍼 팬이던 그녀가 파이널 아마겟돈 페이퍼뷰를 놓쳤다고?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아, 미안. 요새 일 때문에 잠을 못 잤더니. 통 정신이 안 들어서 말이에요.]

“통화 나중에 할까?”

[아뇨, 아직 못 자고 있어서.]

“무슨 일인데?”

[그, 브리 로건 기억나요?]

“당연히 나지.”

[문제가, 심해서.]

“……?”

[저는, 컨트롤 안 돼요.]

이 아가씨, 상태가 심각하다.

“일단 여기 일 끝나면 바로 그쪽으로 갈 테니까 주소 좀 찍어줘.”

[네엥~.]

전화가 끊어졌다.

“왜 그래?”

“아니, 목소리가 좀.”

“걔 원래 잠 못 자고 계속 깨어있으면 그렇게 돼. 혼이 나가있지.”

“아, 네. 알고 있죠.”

“뭐?”

“예?”

“●●, 네가 내 여동생 잠 못 자면 그렇게 되는 걸 어떻게 알아?”

“예?”

“안 재웠다는 말이잖아!”

“왜 그렇게 되죠?”

나는 황당함을 느끼면서 외쳤다.

그러고 보면 케인 맥센이 어렸을 때부터 돌봐온 여동생 티파니 맥센을 끔찍하게 생각한다는 건 세상 모두가 다 아는 그런 진실이었다.

“테이커어어어어어어!!”

케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직후, 경기장과 이어진 문이 벌컥 열리며 테이커와 JBL, 부커를 위시로 하는 꼰대…… 아니, 선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황당해 소리쳤다.

“아니, 이건 솔직히 물리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링 주위에서 여기까지 바로 알고 달려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란 말인가!

“프로레슬러한테 불가능이란 말은 통용되지 않아! 이 멍청아!”

“후후, 얌전히 위스키를 마셔라.”

“너 같이 귀염성 하나 없이 잘난 후배 놈은 이런 걸로 좀 장난을 쳐줘야 선배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아니, 저 말 잘 듣잖아요!”

“닥쳐! 각본이니까!”

“쇼는 끝났다고!!”

나는 어이가 없어 소리쳤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세 명의 거한(다 나보다 큼)들이 씨익 웃으며 나를 포위했다.

뒤를 돌아보자 자기 여동생을 건든(?) 나를 증오의 얼굴로 바라보는 케인 맥센이 서있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테이커가 한마디 내뱉었다.

“잡아라.”

누가 좀 살려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