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끔찍한 밤이었다.
이에 비하자면 고전 좀비 영화인 ‘살아있는 좀비들의 밤’은 해피 일상물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링으로 끌려간 나는, ‘언제나 링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니까 링에서 좀 망가져야 한다’는 환상적인 논리에 따라 링 위에 묶이게 되었다.
그리고 어디서 구해왔는지 깔때기가 억지로 입에 쑤셔졌고, 그 위로 위스키 병이 박히고 말았다.
꿀꺽, 꿀꺽, 꿀꺽.
마시는 동안 술에 취한 선수들이 모여서 SIN! SIN! SIN! 하고 외쳐대는 탓에 멈출 수도 없었다.
하지만 도수가 워낙 높은 술이라 버틸 수 없었고, 남은 술은 불행하게도 오튼에게 넘어갔다.
Oh! Oh! Oh!
챈트에 따라 흥청망청 술을 마시고. 어느 순간 신이 난 음향팀에서 음악을 틀고. 그렇게 다들 미쳐가고.
오튼이 만취해서 휘핑크림 댄스를 보여준다며 옷을 벗으려고 해서 내가 말리고.
그렇게 지옥의 순간이 지나가는 동안, 나는 그만 미친 듯이 웃고 말았다.
좀 미친 짓거리들이었지만.
이게 랙다운이었다.
테이커도 신이 나서 약간의 어깨춤을 선보이며 위스키를 다 마시고.
다들 그렇게 미쳐서 파이널 아마겟돈의 뒤풀이를 했다.
정말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괴로웠지만 줄곧 이런 걸 바란 느낌이었다.
랙다운 크루의 중심인물로서 선배들에게 잔뜩 귀여움을 받으며 노는 게 말이다.
멋진 날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새벽에 겨우 빠져나와 버스에서 잠이 든 나는.
……아침이 되어 일어나 오튼과 함께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우욱, 욱…….”
“그어어어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냐.”
“나도 몰라, 인마.”
“야, 누가 챔피언 벨트에 고추 그려놨는데. 이거 어떻게 지우냐.”
“침 뱉고 문질러봐.”
“…….”
단편적인 기억들만 남았다.
오튼이 결국 휘핑크림을 썼는지 아닌지는 영영 모르게 되었다.
일단 상황을 좀 파악하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든 나는 티파니로부터 메일 하나가 온 것을 발견했다.
[L.A.로 와줘요.]
“……엉?”
놀랍게도 내 고향인 L.A.라면 여기에서 세 시간 정도 거리였다.
“야, 해장이라도 해야지.”
“자, 잠깐만.”
“피자 먹자. 피자. 피자가 해장에는 그래도 나쁘지 않은 음식이다.”
“…….”
아니, 피자는 좀 아니다.
나는 BCD가 떠오르는 걸 느꼈다.
북창동 순두부.
그게 해장에는 직빵이다.
“야, 오튼.”
“빨리이.”
“너 조금 더 참을 수 있겠냐?”
“엉?”
“진짜 죽여주는 거 먹으러 가자.”
나는 씨익 웃어 보였다.
* * *
북창동 순두부.
미국인들이 말하길 BCD.
L.A.의 한인타운에서 시작해 지금은 그런대로 미국 내에서 한식을 알리고 있는 순두부 브랜드다.
그 부드럽고 화끈하고 뜨거운 맛은 실제로는 별 효능이 없었지만, 숙취에 어마어마한 효과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내가 먹고 싶었다.
티파니에게도 도착 시간에 맞춰 BCD로 와달라고 부탁한 나는 그냥 계속 피자를 먹자고 징징대는 오튼을 무시하고 버스 기사에게 L.A.로 가달라고 부탁했다.
오튼과 번갈아 가며 어제 먹은 술을 변기에다 게워냈던 나는 말라죽기 직전에야 겨우 도착했다.
L.A. 한인 타운.
BCD.
머나먼 미래에는 BTS라는 한국의 아이돌이 빌보드 차트를 휩쓸게 되지만, 그전에 BCD가 존재했다.
거의 20시간 가까이 위스키와 맥주만 마셨던 우리는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먼저 도착해있던 티파니와 합석해 콤보 메뉴를 주문했다.
나는 지옥의 매운맛에 돼지갈비, 오튼은 같은 메뉴에 보통 맛으로.
티파니는 매운 맛을 시켰다.
그리고 나온 BCD 순두부찌개.
처음에는 먹어본 적 없는 한식에 다소 불안해하던 오튼은 한입 먹어보더니 감탄사를 내뱉었다.
“크어~! Fu-k Yeah!”
나도 마찬가지였다.
“Fu-k Yeah!”
“……둘 다 어제 많이 마셨어요?”
“말도 마. 진짜 죽는 줄 알았어.”
“하, 그런 거 있죠. 그 해 마지막 페이퍼뷰 끝나는 날에는 다 같이 모여서 술 진탕 마시는 거예용.”
“응?”
“아, 아니. 잠을 못 잤더니.”
티파니의 발음이 꼬부라졌다.
“괜찮아?”
그러고 보니 눈 밑이 까맣다.
내가 걱정하며 묻자 반대로 티파니는 나를 걱정해주었다.
“그쪽 숙취는 어떤데요.”
“당신 잠은?”
“……먹고 해. 먹고.”
“……그래요.”
한입 떠먹더니 감탄하는 티파니.
“이거 괜찮은데?”
아니, 그러더니 얼굴이 빨개졌다.
“매워?”
“괘, 괜찮아요! 이쯤은!”
“난 딱 좋은데.”
오튼은 땀을 뻘뻘 흘리며 순두부찌개를 해치우고 있었다.
참으로 놀라운 광경이다.
토종 미국인인 녀석이 저렇게 한식으로 해장을 하는 게 말이다.
어쨌거나.
“너무 매우면 갈비 위주로 먹어.”
“천천히 먹어야겠네요.”
씁쓸하게 웃은 티파니는 그래도 갈비는 꽤나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신경이 좀 쓰여서 옛날에 엄마가 해줬던 것처럼 함께 나온 굴비의 살점을 떼다가 숟가락에 얹어줬다.
“헤헤.”
살짝 웃고는 그대로 맛있게 굴비를 먹는 티파니.
맞은편에서 그런 우리를 바라보던 오튼이 한마디를 건넸다.
“신, 나도.”
“네가 알아서 먹어.”
“쳇, 그게 뭐 어렵다고. 생선이 Goul-Bi가 뭐야. 제기랄.”
내 거절에 투덜대면서 순두부에 갈비를 마음껏 먹어치우는 오튼.
티파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구울?”
“아니, 굴이거든.”
“구울은 사람 살점을 뜯어먹는 좀비 같은 거 아니야? 그런 걸 먹다니. 티파니도 비위가 좋군.”
이 자식, 완전히 애다.
내가 못 먹으니 너도 먹지 말라는 괴상한 심보가 느껴지는 말이다.
어이가 없어 바라보자니 티파니가 나를 툭툭 건드리고 밥을 크게 한 숟갈 떠서 내밀었다.
“그냥 무시하고 먹어요.”
“당신부터 좀 먹어. 요새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뼈밖에 안 남았네.”
“저는 내 남자가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른걸요. 헤헤.”
“……둘 다 죽이고 싶다.”
오튼이 이를 빠드득 갈았다.
* * *
그렇게 환상적이었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식사가 끝난 뒤.
오튼은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가족과 보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상태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나는 티파니와 함께 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시는 집으로 향했다.
브리 로건 이야기도 해야 하고, 이것저것 신경이 많이 쓰였지만.
그보다 일단 비몽사몽하고 있는 이 여자를 어떻게든 좀 재우고 난 뒤 대화를 나눠야 할 것 같았다.
캠핑 버스는 일단 근처 주차장에 세워두고 필요한 짐만 챙긴 우리는 택시를 잡아서 가고 있었는데.
‘이거 무슨 명절 되서 부모님 댁에 돌아가는 부부 같은 느낌인데.’
딱 그런 느낌이다.
티파니도 우리 집으로 가자고 하니까 그때부터 좀 말수가 적어졌고.
아무리 그래도 혹시 불편한 게 아닐까 싶었던 내가 슬쩍 물어보니.
“아,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정말 괜찮겠어? 싫으면 호텔에서 묶고 있어. 나 혼자서 부모님한테 인사드리고 갈 테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어.”
티파니는 시선을 피했다.
“……사실, 크리스마스 파티를 가족하고 함께 보내는 게 처음이라서요.”
“응……?”
“항상 누군가 빠져 있었거든요. 대부분은 아버지였고, 그 후에는 어머니도 그랬고. 어렸을 때는 집안 사용인들하고 케인하고만 지내서.”
씁쓸하게 웃는 티파니.
“크리스마스 위켄드란 게 그렇잖아요? 사실 가족하고 보내는 건데. 그래서 음, 사실 모르겠어요.”
티파니는 택시 기사의 눈치를 보더니 슬그머니 내 손을 붙잡았다.
“우리, 가족이 될 수 있을까요?”
“…….”
어.
어떻게 하지.
귀엽다.
약간은 안쓰럽고 동시에 귀여워서, 미칠 것 같은 지경이었다.
“당연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백 퍼센트 확신은 못하는 상태였지만.
미래란 게 내가 예상하지 못하는 부분에서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그래도 괜찮다면.
만약 우리가 전생과 다르게 같은 목표를 향해서 계속 갈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도착한 본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엄마가 곧바로 달려와 우리를 반겨주었다.
“하이고, 준호야! 티파니야!”
“어머니!”
그렇게 달려 나온 엄마와 손을 잡고 웃는 티파니.
택시에서 큰 트렁크 가방 두 개를 꺼낸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국어 발음이 더 좋아졌다.
“이야, 이제 한국 말 하네?”
“어머니!”
“밥은 먹었어?”
“어머니!”
……저거밖에 못하는 거군.
“준호야, 밥 먹었니?”
“응, 먹고 왔어. 아버지는?”
“뒷마당에서 너랑 티파니랑 온다니까 만들어둔 거 확인하러 갔다.”
“뭔데?”
“그때 그 사우나 하던 거 기억나니? 그거 집에다 만들겠다고!”
“…….”
뭔가 불안한데.
“아무튼, 티파니가 요새 좀 잠을 못 자서요. 이따가 만약에 졸리다고 하면 먼저 침대에서 재울게요.”
“어머머, 니들도 참! 젊어서 좋겠다야!”
“…….”
왜 다들 이런 오해를 하는 걸까.
나는 어이가 없어 웃으며 일단 우리가 묵을 방에다 짐을 풀어놨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었다.
나는 청바지에서 추리닝, 티파니는 바지 정장에서 편한 원피스.
우리는 좀 편해진 상태로 계단을 내려왔다.
자연스럽게 손이 얽히고.
티파니는 음식 준비한다면서 부엌으로 간 엄마에 대해 말했다.
“역시 내가 한국어를 배운다면 대화하기 편하시겠죠?”
“안 배워도 좋아하시는데, 뭐.”
“그래도 뭔가 좀 더 소통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생각만으로도 고마운 말이었다.
사실, 아무리 그래도 티파니는 미국 백인이라 생활상도 다르니까 불편한 점이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나를 생각해선지 티파니는 부모님께 다가가려고 하는 모습이었다.
나 역시도 잘하고 싶었지만.
‘아니, 난 그쪽 아버지와.’
……미안, 티파니. 내가 쓰레기라.
그냥 너한테 더 잘해줄게.
돈도 네가 더 많이 버니까.
그렇게 부엌으로 향한 나는 바로 옆에 지하실로 내려가는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엄마가 아래에 있는 모양이다.
“신, 이건…….”
그때, 티파니의 의문이 섞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고개를 든 나는 그녀의 손에 유아용 영어 교재가 하나 들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테이블에 있던 물건인 모양이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A, B, C, D.
보지 않아도 누가 배우려고 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책 옆에 엄마가 쓰는 돋보기안경도 있고 말이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엄마도 노력하시나 봐.”
“후후, 둘이 한국어와 영어를 배워서 소통하면 재미있겠는데요?”
“아니, 그렇게 되면 굳이 네가 한국어를 배울 필요는 없지 않나.”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바로 그때, 지하실 안쪽에서 울리듯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호야아~.]
“응, 엄마!”
[네 아빠 좀 불러올래? 실수로 냉동고 반대편 문 열었는데 이거 어떻게 닫는지 모르겠다고 해!]
“알았어!”
그 말을 들은 나는 인사도 할 겸 티파니를 데리고 뒤뜰로 나갔다.
사실, 처음에 아버지가 뭘 만든다고 들었을 때는 또 다시 나무를 죽이고(?) 있나 생각했지만.
생각 외로 평범한 풍경이었다.
아니, 사실은 아버지가 만들었다고 하니 납득이 가는 수준이었지만.
두꺼운 나무를 잘라서 벽에 붙여 만든 사우나는 크기가 꽤 컸다.
저걸 사람 한 명이 만들었다고 보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버지~.”
내가 부르자 안쪽에서 아버지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나왔다.
“……준호냐.”
“아, 안녕하세요! 아버님!”
이번에도 한국어로 된 ‘아버님’ 발음만큼은 완벽했다.
그 말에 뺨이 좀 붉어져 고개를 끄덕이는 나의 아버지.
“사우나 지금 지펴놨으니 이따 저녁 때 사용하면 딱 맞을 거다.”
“예. 아, 엄마가 모시고 오래요.”
“네 엄마가?”
“냉동고 반대편 문을 실수로 열었다고…….”
내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뜬 아버지가 쏜살같이 집안으로 들어갔다.
“뭐, 뭐지?”
“글쎄요. 놀라시는 것 같았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티파니.
일단 뭔가 싶어 집으로 들어간 나는 티파니를 부엌에 놔둔 뒤 지하실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지하실의 오른쪽 문은 식료품 창고고 왼쪽 문은 몰라도 된다고 말했을 뿐, 안에 뭐가 있는지 절대 가르쳐주지 않으셨지.
벽에 있는 버튼 하나를 누르면 오른쪽 문이 열리지만, 왼쪽 문은 무슨 수를 써도 열리지 않아서 나도 포기했는데.
그 비밀을 발견했다.
아버지가 황급히 한 버튼 위에 엄지를 올리자 삐빅! 하며 지문 인식이 이루어지며 문이 닫혔다.
하지만 나는 그전에 보았다.
왼쪽 방 안에 가득한 총을.
폭탄을.
칼을.
“…….”
“어, 준호 언제 내려왔니?”
“저거, 뭐예요?”
황당해 묻자, 아무 말 없이 다가온 아버지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버지 부업이다.”
“……예?”
“깊게 알려고 하지 마라.”
……아니, 아버지. 아무리 봐도 세탁소가 부업처럼 느껴지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