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229화 (229/634)

229.

밤이 깊었다.

마당에서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가운데, 나는 기분 좋은 피로감을 느끼며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내 팔을 베고서 잠이 든 티파니는 많이 피곤했는지 작게 코를 골았다.

“Zzz…….”

침대는 어렸을 적에 쓰던 거라 생각보다 좁았고, 티파니의 호흡과 심장 소리가 내 것처럼 느껴졌다.

밝은 빛을 띤 금발.

새하얀 피부.

단정한 미모.

활발한 성격.

하지만 그건 너무 단적이었다.

그녀를 반도 표현하지 못했다.

노력하는 면모.

가지고 있는 신념.

외로웠던 과거.

내가 그렇듯, 티파니 역시 남들이 모르는 내 모습을 알고 있었다.

서로 가장 무방비한 상태로 가까이 있어도 전혀 불편한 게 없는 사이, 그게 이런 거구나 싶어졌다.

그래서 벌써 신경이 쓰였다.

크리스마스 연휴 기간 동안에는 일 생각 안 하고 지내기로 했는데.

대체 브리 로건과 무슨 문제가 있어서 티파니는 휴식도 제대로 취하지 못하고 지금껏 일을 한 걸까.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나는 팔베개를 해주던 걸 빼고 나왔다.

이불을 덮어주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겨주었지만 티파니는 세상모른 채 계속해서 잠이 들었다.

그걸 잠시 바라보고 있던 나는 이내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S&T의 연예인 관리 팀장.

회사에 소속된 연예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받는 그라면 이 상황을 설명해줄 수 있겠지.

신호음이 이어졌다.

잠이 든 티파니를 배려해 테라스로 나오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아, 예. 사장님.]

“오랜만이네요. 마커스.”

마커스 조던.

사우스 힙합 씬에서 나름대로 자기 영역을 구축한 프로듀서 중 하나로, S&T를 설립하면서 영입해온 인재였다.

그야말로 밑바닥부터 아득바득 기어 올라온 사람으로서 연예인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 티파니가 많이 의지하는 상대라고 들었다.

짙은 갈색 피부에 아프로 헤어가 인상적이었던 그 얼굴을 기억하며 나는 살갑게 말을 이었다.

“미안해요. 쉬는데.”

[아닙니다. 무슨 일이세요?]

“오늘 보니까 대표님 안색이 많이 안 좋던데 무슨 일 있나 해서요.”

[아, 요새 계속 일하셨죠.]

그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브리 로건 때문에요. 통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아서 말이죠.]

그리고 이어지는 마커스의 설명.

나는 전생에 듣고 기억한 것들을 되새기며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브리 로건.

올해로 21세.

WWF의 아이콘이었던 캡틴 로건의 딸로 태어난 그녀의 인생은 2000년도를 기점으로 바뀌었다.

그때 찍었던 ‘캡틴 로건 노우즈 베스트(Captain Logan Knows Best)’라는 리얼리티 쇼 때문이었다.

당시 WWF를 나가고 한창 셀럽으로서 잘 나가고 있던 캡틴 로건의 인기는 바로 거기에서 절정을 찍었다.

동시에 가족들의 인기도 급상승했고, 특히나 예쁘장한 편이었던 브리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그때부터 브리는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여가수, 브리트니 스티어스처럼 되고 싶어 했고.

아버지의 지원을 받아 1집 데뷔를 한 뒤, 거하게 말아먹고 말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때 브리 로건은 가수 데뷔를 위해 가벼운 운동을 했고, 안타깝게도 성장기와 맞물려 아버지의 유전자가 발현되고 말았던 것이다.

키 198cm에 전성기 체중 130kg.

‘불멸자’ 캡틴 로건의 유전자가.

브리의 등 근육은 가만히만 있어도 악귀의 형상과 같이 보일 정도로 크게 발달했고, 키는 180이 훨씬 넘게 자랐다.

아, 참고로 남동생 닉 로건은 엄마를 닮아서 키가 170이라고 한다.

서로 반대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어쨌든, 그런 상황에서 브리트니 1집처럼 ‘밸리 걸’ 컨셉을 소화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브리 로건은 불도저처럼 그 컨셉을 밀고 나갔고.

대차게 말아먹었다.

밸리 걸.

미국 대중문화에서 언제나 자주 소비되었던 젊은 여성의 이미지다.

캘리포니아에서 행복하게 살 것만 같은 젊고 싱그러운 금발 미소녀.

부잣집 딸로 태어나서 아무런 걱정 없이 돈을 펑펑 써대고, 수많은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미식축구부의 쿼터백과는 달달하게 썸을 타는.

긍정적인 이미지와 부정적인 이미지가 동시에 공존하는 캐릭터였다.

긍정적으로는 패셔너블하고 젊으면서 동시에 쿨하다는 이미지였고.

부정적으로는 주로 어휘력이 딸리고 멍청하다는 이미지가 강했다.

매체에서 ‘Whatever~.’ ‘Totally!’ ‘OMG!’ 같은 말을 하는 금발 여성 캐릭터는 전부 밸리 걸 컨셉이다.

개인적으로는 사람을 너무 바보로 만드는 것 같아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컨셉이었지만 말이다.

티파니가 정확한 반례였다.

금발에 캘리포니아, 부잣집 딸.

하지만 그녀는 멍청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안정적으로 S&T를 굴려나가고 있는 유능한 사업가였다.

비록 그 앞에 브리 로건이라는 폭탄이 등장하면서 잠시 컨디션이 꼬였지만.

[뭐, 저희 쪽에서 제시한 이미지가 계속 싫다고 하더라고요.]

“어떤 컨셉인데요?”

[섹시한 느낌으로 가려고요. 지금 브리트니처럼 말이죠. 거기에 장르는 힙합으로 해서 랩 좀 섞고.]

“……어, 왜 힙합이죠?”

[힙합의 시대니까요. 거기다 우리 쪽 가수가 피처링으로 들어가면 관심도 바짝 끌 수 있을 테고.]

글쎄다.

현재 시점에서 가장 잘 나가는 장르를 선택한다는 것 자체는 그럭저럭 납득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실제로도 온갖 여가수들이 힙합과의 콜라보를 통해 그런 이미지에 편승하려고 하는 게 지금 시대였다.

하지만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브리 로건이 그런 식으로 남들이 가는 길을 똑같이 따라가서 성공을 할 수 있는 스타일이 아니란 걸.

어쨌거나.

마커스로부터 대충 이야기를 전해들은 나는 전화를 끊고 생각했다.

‘이 문제는 좀 개입을 해야겠군.’

어쨌든 내가 캡틴 로건과의 인맥을 얻기 위해서 시작한 일이니, 뒷수습을 해야 할 책임이 있다.

티파니에게 괜히 무거운 짐을 얹어주었다고 생각하며, 나는 곧바로 로건에게 문자를 보냈다.

시간 날 때 전화 달라고.

* * *

캡틴 로건으로부터 전화가 온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어, 신. 무슨 일인가?]

“해피 크리스마스, 로건.”

[하하하! 자네도 해피 크리스마스 되게! 고작 그런 걸 전하려고 그렇게 심각하게 문자를 남긴 건가?]

“물론 그건 아니죠.”

아침 안개가 낀 뒷마당.

어린 시절에 매트도 없이 나무 위에서 문 설트를 썼다가 3일 만에 깨어났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장소.

이후 아버지는 매트를 사주는 대신 그 나무를 잘라버리셨지.

지금은 그 밑동만 남아, 나는 그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브리의 기타 솜씨가 훌륭한 편이라고 알고 있는데 맞나요?”

[어? 그걸 어떻게…….]

“그야 당연히 캡틴 로건의 딸인 만큼 그럴 거라고 생각했죠.”

실제로 캡틴 로건은 거의 밴드의 기타리스트에 필적할 정도로 멋진 기타 솜씨를 가진 걸로 유명했다.

그래서 WWF에서 기타리스트 기믹으로 유명했던 펑키 통크맨에게 기타를 가르쳐주었다고 하지.

그리고 그 딸인 브리 역시도 기타를 잘 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 솜씨를 살리게 된 것이 적어도 15년은 지난 뒤의 일이라서 아쉽게도 크게 뜨지는 못했지만.

연예계 커리어 말년에 ‘컨트리 음악’을 하면서 마지막 도전장을 던진 브리는 생각보다 더 잘 풀렸다.

‘여자의 음악은 듣지 않는다.’는 편협한 생각을 지닌 남부 레드넥 꼴마초들이 브리의 음악에는 어느 정도 호응을 보내줬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잘만 프로듀싱한다면 지금 시점에서도 브리의 음악은 충분히 먹힐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을 마쳤다.

비록 노래 실력이나 기타 솜씨는 15년 뒤보다 뒤처지겠지만, 젊음이란 무기를 내세운다면 말이다.

[신, 혹시 브리에게 기타를 치게 할 생각인가?]

“그렇죠. 왜요?”

[그만두게나.]

“예?”

[자네가 위험해질 수 있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의아해 되묻자니 로건은 계속해서 그 이야기만을 반복했다.

그렇게 전화가 끊어졌다.

‘역시 문제가 있는 모양이군.’

하나의 성과를 얻은 나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브리 로건은 기타를 잘 치며 컨트리 음악으로 말년에 반짝 떴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녀가 수없이 거쳐 갔던 연예 기획사에서 브리의 기타 솜씨를 몰랐겠는가? 그럴 리는 전혀 없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브리가 스스로 기타는 절대 치고 싶지 않아 했다는 거겠지.’

캡틴 로건이라는 유명한 아버지를 둔 브리는 그 돈을 써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왔다.

그러므로 진짜 망하기 직전까지도 절대 기타는 안 치고 싶었단 거지.

그렇다면 일단은 기타를 치게 만드는 게 우선이었다.

“시인~.”

티파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나왔는지 그 얼굴에 활기가 돌아왔다.

푹 자서 나아진 모양이군.

슬쩍 웃음이 나오는 걸 느낀 나는 눈살을 찡그리며 얼굴을 가렸다.

티파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왜 그래요?”

“아니, 너무 예뻐서.”

“아, 아침부터 미쳤어요?”

“응?”

“……남들이 다 듣는다고요.”

눈을 가늘게 뜬 채 가까이 다가온 티파니가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있는 내 얼굴을 슬그머니 감싸 쥐었다.

가벼운 입맞춤.

“보는 건 신경 안 쓰여?”

“아니, 볼 리가 없잖아요? 이른 아침이고 여기엔 당신밖에 없는데.”

“나도 당신밖에 안 보여.”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뺨이 붉어지는 티파니.

그렇게 농담(?)을 좀 주고받은 뒤 우리는 나란히 나무 밑동에 앉아 아침의 느긋함을 즐기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연초까지는 푹 쉬자고.”

“……일이 밀린 게 많은데.”

“바보야. 그래도 쉴 때는 쉬어야지. 남들 다 쉬는 크리스마스 연휴에 혼자만 일해서 뭐할 거야?”

“그래서 아버지는 크리스마스 연휴에도 직원들을 출근시키셨죠.”

“…….”

“아니, 나는 안 그럴래요.”

티파니가 내 어깨에 기댔다.

“갈 곳이 생겼으니까.”

편안한 목소리.

그 후, 이어진 크리스마스 연휴 동안 우리는 실컷 휴식을 취했다.

하지만 중간에 잠시, 내가 보낸 2005년 한 해가 완벽했음을 알리는 기쁜 소식이 하나 도착했다.

* * *

그렇게 새해가 밝았다.

2006년.

회귀한 후로 4년.

그동안 나는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을 총동원해, 꿈을 이루기 위해서 정말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GCW 시절부터 시작해서 버닝콩을 거쳐 랙다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전설적인 선수들의 앞에서 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그 나름의 성과를 얻었다고 자부했다.

동시에 외부 활동도 병행하면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달려왔다.

그리고 그 결과가 나왔다.

2006년 1월 첫째 주 일요일, 미 전역에 동시 발매된 피플즈 매거진.

그 편집자들이 연휴조차 반납하고 마라톤 회의 끝에 선정한, ‘2005년 한 해 미국에서 가장 섹시한 남자’.

거기에서 나는.

놀랍게도.

‘1위’를 차지했다.

바로 잡지를 사본 나와 티파니는 그게 사실임을 확인하고는 길거리에서 서로 끌어안으며 자축했다.

미리 연휴 때 결과를 전해 듣기는 했지만, 실제 커버를 장식한 내 얼굴을 확인하니 진짜로 환상적인 기분이 되었다.

엄청난 이변이었다.

‘원래는 5위권 내에만 들어가더라도 엄청나다고 생각을 했는데.’

전생의 1위였던 영화배우, 매튜 맥켄웨이를 2등으로 밀어내고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미 전역이 발칵 뒤집힐 결과에 순간 나도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였다.

그에 대해서 피플즈 매거진에서 내놓은 코멘터리는 다음과 같았다.

[프로레슬링. 야만적인 가짜 스포츠라고 무시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 드라마에 빠져든다면 팬이 될 수밖에 없는 매력이 있다.]

[지금 1위로 선정된 신(본명 : 준호 김) 또한 압도적인 독자 투표를 받으며 자신이 기존의 미국 사회를 무너뜨리고 있음을 과시했다.]

[미국은 강한 남자가 존중받는 곳이다. 하지만 이 남자는 강함과 동시에 여성들에게 배려심이 넘치며 또한 섹시함까지 갖추고 있다.]

[작년 초, 한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더 팍과 대립을 하며 미 전역에 혜성과도 같이 등장한 섹시남.]

[헬-쏘우와 각종 잡지 촬영, 토크쇼에서의 유머러스함과 젠틀함. 그리고 경기장에서의 연기력까지.]

[상대를 짓밟고 포효하는 야성적인 모습과 잘 단련된 근육질의 몸매. 날카로운 매 같은 눈매. 그는 동양인에 대한 편견을 깨부쉈다.]

[그 혁신성에 주목하여 피플즈 매거진 편집부 일동은 만장일치로 신이 2005년 한 해, 최고로 섹시한 남자였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와, 이거 정말 칭찬일색인데.”

티파니는 내내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결과는 내 작년 한 해가 그만큼 완벽했음을 반증하는 결과였으니 말이다.

이것은 내 이름값을 크게 올려주는 한편, WWF의 시청률에도 또한 큰 영향을 끼칠 터였다.

프로레슬링에 관심이 없더라도 누군가는 한 번쯤 내 얼굴을 보기 위해서 텔레비전을 틀 테니까.

그리고 내 티셔츠를 사고.

경기장에 오고.

나와 악수를 나누고 평생 그것을 기억하고.

분명 그렇게 되겠지.

‘해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축하 문자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전 바티스타에게 말했듯이.

내 노력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과 프로듀싱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결과였다.

나는 축하 문자를 보낸 이들에게 일일이 전화로 감사를 전했다.

그 일을 마치고 돌아오자 날 가장 많이 도와준 사람이 보물 상자를 발견한 소년처럼 씨익 웃으며 서있는 게 보였다.

“역시 내 남자!”

“고마워. 내 여자.”

몸이 떨릴 정도로 기뻤다.

우리는 다시 서로를 와락 끌어안고는 그렇게 행복한 결과를 즐겼다.

그리고 동시에.

이걸 잘만 이용한다면, 브리 로건을 잘 구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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