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
레드넥.
뙤약볕에서 고개를 숙이고 일하다 보니 목 뒤가 붉게 그을렸다는 뜻으로, 솔직히 말해 차별 용어였다.
N-word나 칭챙총 같은 급의 단어는 아니지만, 어쨌든 간에 본인들 앞에서 함부로 지칭할 순 없는 말이었다.
주로 미국 남부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저학력, 저소득 백인들을 뜻했고, 정치적으로는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이미지로도 유명했다.
어쨌든 이 남부 레드넥들은 80년대 90년대는 프로레슬링의 주된 시청자층으로도 꽤나 유명했는데.
국뽕을 자극하며 미국이 최고라는 각본을 주로 전개했던 황금시대.
그리고 부자 회장님과 대립하며 텍사스 레드넥 기믹을 밀었던 락콜드에게 푹 빠져들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분명히 자신들의 우상이었던 캡틴 로건의 딸, 브리 로건의 잠재적인 팬들이었다.
잘만 부킹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전생의 브리는 안타깝게도 그런 자기 강점을 모른 채 원하던 대로 계속 밸리 걸을 시도했고.
……그렇게 키 180cm의 성인 여성이 반쯤 헐벗은 교복을 입고 MTV에 처음 데뷔를 했고, 폭망했다.
순식간에, 손쓸 새도 없이.
브리 로건의 스쿨 유니폼 차림만큼은 인터넷 등지에서 ‘혐짤’로 소비될 정도로 유명해졌지만 말이다.
역시 그렇게 둘 순 없었다.
S&T의 이름을 달고 나가는 만큼 브리 로건의 새로운 시도는 제대로 된 성공으로 이어져야만 했다.
이전에 한 번 큰 실패를 겪은 중고 신인의 재도전. 성과를 낸다면 분명히 큰 이득을 보게 될 터였다.
그럼에도 역시 문제는 본인이 그런 방송을 하기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예? 농사를 지으라고요?”
“그런 예능에 나갈 겁니다.”
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비행기 안.
또 다시 엄청 비싸고 화려한 차림의 브리는 내 설명을 듣더니 곧바로 표정이 확 굳어져버렸다.
일단 그 설득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운이 좋았다.
원래 정확히 이번 주에 촬영하기로 했던 배우가 독감에 걸리면서 촬영이 펑크 날 위기였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브리의 의도는 묻지도 않고 그쪽 제작진과 타협해 촬영을 따내는데 성공했다.
브리에게는 ‘촬영하러 간다’고만 말하고 일단 비행기에 태운 상황.
전용기는 아니었고 브리가 고집을 부려서 비즈니스석에 타게 되었다.
시간 관계상 가는 동안에 설득을 해야겠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난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는.
“신.”
날 부르는 브리.
……순간 가드를 올릴 뻔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가드를 올린 적이 없었던 내가 그러려고 했다.
그 정도의 살기.
“왜 하필 농사에요? 제가 촌스러운 시골 여자애처럼 보여요?”
“어렸을 적에는 조부모님이 하시는 농사를 거들었다고 들었는데요.”
“그걸 어디서 들었죠?”
“로건이요.”
“그 영감…….”
미안합니다. 로건.
죽지 말고 살아서 보죠.
“그런 거 싫어요! 촬영 취소해줘요! 그리고 텍사스 가자마자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도 알아봐줘요!”
브리가 분노에 차 소리쳤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상황에서 일단 차분한 척 브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좀 거칠게 말했다.
“너 지금 장난하냐?”
“예……?”
“그 방송을 얼마나 많은 시청자들이 보는지 알아? 애초에 AA 이상급 스타가 아니면 출연도 어렵다고.”
“아니, 그래도……!”
“그런데 넌 뭐지? 앨범 하나 쫄딱 망하고 어렸을 적에 리얼리티 쇼 촬영한 거 빼고 뭐 볼 게 있나?”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잖아요!”
“내가 안타까워서 그런다.”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프로라면 하기 싫은 일도 자기 이득을 위해서라면 해야 하거든.”
“거기 가서 농사 짓는다고 저한테 무슨 이득이 있을 거라는 말이죠?”
고개를 갸웃거리는 브리.
조금 호기심이 생긴 듯했다.
거기에서 나는 방금까지 생각했던 사실들을 대부분 말해주었다.
남부 레드넥들을 일단 팬으로 만들어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는 것.
그리고 이후 컨트리 뮤직 가수로 데뷔한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그건 브리가 이번 촬영에서 기타를 친 이후 설명하면 될 테니까.
“이번 방송을 보고 네 팬들이 생긴다면 이후에 앨범이 나왔을 때 판매량에 큰 일조를 해줄 거야.”
“하, 하지만 이미지가…….”
“그런 건 나중에 포장하면 그만이야. 나도 데뷔했을 때는 쿵푸 하는 동양인 캐릭터를 소화했었다고.”
“으음.”
“잘 들어. 브리. 너에게는 재능이, 화제성이 있어. 그렇다면 그걸 무기로 삼아서 네 팬들을 먼저 확보하는 거야.”
“그, 그렇군요.”
곧바로 흥미를 갖는 브리.
걸려들었다.
* * *
더 파머스는 10만 평에 달하는 거대한 ‘촬영장’에서 찍을 예정이었다.
10만 평이라니.
처음 들었을 때는 어마어마한 크기라고 생각해 입이 떡 벌어졌지만.
공항에 마중을 나온 PD가 말하기를, 농장이라 생각하고 보자면 지극히 작은 크기에 불과하단다.
방송국 차량을 타고 농장으로 향하며 나와 브리는 PD에게서 대략적인 개요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이 근방 농장들은 죄다 100만 평은 기본으로 깔고 가거든요. 그에 비하면 딱 촬영장 수준인 셈이죠.”
그 말을 들은 나는 확신했다.
‘시청률은 보장된 셈이군.’
히스토리아 채널이 자선 단체도 아니고 10만 평에 달하는 농장을 촬영용으로 사용할 정도라면 그만큼 프로그램이 인기가 있다는 뜻이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PD를 슬쩍 떠보기 위해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무리 방송용이라고 해도 운영하는데 꽤 애를 먹을 것 같은데요.”
“저희 촬영하시는 분들 있잖아요? 닉과 존, 케이지에 브라이언까지.”
“파머스의 고정 출연자들요.”
“사실 근처에서 100만 평짜리 농장 경영하고 있는 가족이에요. 할아버지, 아버지, 삼촌, 조카, 이렇게.”
“아 뭐, 그걸로 옛날에 문제도 됐었죠? ‘흙수저로 연출되었던 출연자들의 정체가 사실은…….’ 하고요.”
“그랬었죠. 금방 묻혔지만.”
PD는 쓰게 웃었다.
“어쨌든 이번 촬영도 다들 시간 내서 제대로 준비를 해주셨죠.”
“방송 보니까 다들 울고 난리도 아니던데 각오를 좀 해둬야겠네요.”
“에헤이~. 아니에요! 방송에서 출연자들 고생하는 건 다 어디까지나 연출이고 실제로 그렇진 않습니다.”
PD가 달래듯 이야기했다.
“그냥 저희 출연자들이 시키는 대로 해주시면 됩니다. 하다가 불편한 점 있으시면 말씀해주시고요.”
“대부분은 힘들어하죠?”
“대부분이 아니라 게스트 출연자들 모두가 그렇죠. 아무래도 농사일이란 게 고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럼 만약에 저희가 생각보다 일을 잘하더라도 문제는 없겠죠?”
“하하하! 독특하고 멋지겠네요!”
웃음을 터뜨리는 PD.
추호도 우리, 특히나 브리가 농사일에 잘 적응하리라는 상상은 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싱긋 웃은 나는 여유가 생기는 걸 느끼며 눈이 내리고 있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있을 건 다 있단다.
옥수수와 밀을 주력으로 밀면서 각종 과일과 야채를 함께 재배하고.
거기에 소, 돼지, 양, 닭.
말과 양봉업까지도.
아무래도 ‘농사’를 방송 아이템으로 사용하는 만큼 이것저것 해야 시즌이 돌아갈 수 있다는 듯했다.
하긴, 한겨울에 옥수수나 밀농사를 지을 수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처럼 우리는 이번 방송에서 농장의 축사 작업을 도울 예정이었다.
* * *
PD는 분명히 작다고 말했지만.
농장 입구에서부터 촬영의 대부분이 진행될 관리 초소까지는 차를 타고 대략 10분 정도가 걸렸다.
촬영팀이 추위 속에서 준비를 끝마친 가운데, 우리는 일단 통나무로 지어진 초소 안으로 들어섰다.
불이 피워진 벽난로 앞.
몸을 녹이고 있던 네 명의 출연자들이 우리를 알아보고는 다가왔다.
“이런, 이런, 이럴 수가.”
과장된 화법.
네 사람의 얼굴은 가장 먼저 나를 알아보고는 상기된 모습이었다.
“신!”
“팬입니다!”
나이층이 무척 다양했다.
소년, 청년, 중년, 노년.
아무래도 각각의 고정 출연자들을 시청자들이 쉽게 기억하도록 만들기 위한 선택인 것 같았다.
그래도 남부인들이라고 해서 동양인에 대한 편견이 있지는 않을까, 잠깐 그렇게 생각했던 것도 사실인데.
“하하, 여기 있는 네 분 다 열렬한 프로레슬링 팬이셔서요.”
“그렇다면 이분을 더 반가워하실 것 같은데요.”
나는 옆에 입을 다물고 서있던 브리에게 자연스럽게 주목을 넘겼다.
“브리 로건.”
“……설마.”
“예, 캡틴 로건의 딸이죠.”
그 말에 소년을 제외한 세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고 이내 다가와 흥분한 채 브리에게 말을 걸었다.
아마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순간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던 거겠지.
그렇게 잠깐 소란이 지나갔다.
프로레슬링의 인기가 확실한 미국 남부다운 모습이었다. 다들 우리 둘에게 큰 호응을 보내주었다.
나는 현역이니 그렇다 쳐도 본인도 아닌 딸에게 이 정도 주목을 해주는 건 여기밖에 없겠지.
그래서 나는 이후의 일 역시 잘 풀릴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뜻밖에도 브리는 그런 반응에 오히려 당황한 듯 시선을 피했다.
그래서 나는 촬영이 시작하기 직전, 약간의 조언을 해주었다.
촬영팀이 다들 바쁘게 마지막 준비를 하고 있는 가운데였다.
“걱정 말고 최선을 다해.”
“정말로 괜찮을까요? 사람들이 영 깬다고 생각할 것 같은데.”
“걱정 마. 굳이 저들에게 여자로서 어필하라는 게 아니야. 너에게는 너만의 장점이 있잖아?”
현역 최강 프로레슬러가 자연스럽게 가드를 들도록 하는 그 파워.
그건 확실한 매력이었다.
강인하고 매력적인.
키가 크고 근육질의.
태양과도 같은 여성.
나는 그게 브리의 매력이고, 분명 거기에도 수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널 믿어. 브리. 굳이 네 장점을 감추면서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가려고 하는 게 아니라 네 장점을 더해서 따라가려고 하란 말이야.”
“신…….”
잠깐 눈을 휘둥그레 뜬 브리가 이윽고 내 어깨를 힘차게 후려쳤다.
뻐억-!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한번 신이 하는 말을 믿고 해볼게요!”
“…….”
“신?”
“……아, 아, 그래요.”
순간적으로 정신이 나갔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자신감을 불어 넣어준 뒤, 촬영장으로 돌아가자 PD가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자~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일단 첫 촬영은 나와 브리가 고정 출연자들과 만나는 것이었다.
* * *
그렇게 촬영이 시작되었다.
간단하게 고정 출연자들과 인사를 마친 브리와 나는 곧바로 각자 다른 작업에 투입되어 일을 시작했다.
브리는 축사 쪽으로 갔고 나는 초소 뒤쪽으로 나와 도끼를 받았다.
나에게 일을 시킨 것은 10대 중반쯤 되는 소년 출연자인 닉이었다.
“오늘은 겨울 동안 사용할 땔감을 최대한 많이 패둘 생각이에요!”
나에게 딱 맞는 일이로군.
함께 출연한 브리에게 나름대로 스포트라이트를 양보할 생각이긴 했지만 나도 대충 할 생각은 없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목재.
다행히도 작년 겨울의 방송을 모니터링 해뒀기 때문에 이 일의 목적이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내가 장작을 패면서 힘들어하는 모습을 담아내고 싶은 거겠지. 작년 방송에서도 그랬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촬영팀의 의도대로는 절대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고?
내가 선수 중에서도 특출 나게 체력이 좋은 편인데다, 어렸을 적부터 장작을 패면서 체력을 단련했으니까.
그마저도 회귀하기 전 선수 생활을 할 때 보드카와 맥주로 다 날려 먹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철저하게 절주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디 해볼까.”
“장갑 필요하세요?”
“아니, 괜찮아.”
일부러 거절했다.
이건 특이하게도 미국에 있는 마초 문화를 의식해 거절한 것이었다.
2006년 현 시점에서 미국은 ‘남자다움’을 무척 강조하는 나라였다.
그리고 내가 회귀하기 직전까지도 시골은 그런 문화가 변하지 않았다.
남자는 우산을 쓰면 안 되느니, 여자 노래를 들으면 안 되느니 하는 여러 가지가 있고, 지금처럼 도끼질을 할 때 장갑을 쓰는 것도 금물이었다.
전문적으로 그쪽 일을 하는 거라면 몰라도, 이렇게 ‘겨우 앞마당에서 장작 좀 패는데’ 장갑을 쓰는 건 게이 같다고 여겨지기 십상이었다.
뭐, 바보 같은 문화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이들에게 어필하려고 지금 이 자리에 서있었다.
GCW에서는 실제로 러셀의 경기복을 보고 게이 코스튬 같다고 놀리기도 했고 말이다.
도끼를 한 손으로 든 나는 등 뒤에서 양손으로 고쳐 쥐고는 상반신의 힘을 이용해 그대로 찍었다.
쩌억-!
힘차게 갈라지는 장작.
한 방.
“후우.”
숨을 내뱉은 내가 돌아보자 눕혀진 통나무 위에 앉아있던 소년, 닉이 가볍게 박수를 쳤다.
“잘 하시네요.”
“어렸을 적부터 해왔거든.”
그런 식으로 친근한 이미지를 어필하는 걸 카메라 세 대가 찍었다.
기본 구성이었다.
나, 소년, 그리고 전경 하나씩.
“오랜만에 하니 재미있는데.”
“금방 지칠걸요.”
“글쎄.”
싱긋 웃어 보인 나는 그대로 하나하나 장작을 쪼개나가기 시작했다.
쩌억-! 쩍! 쩌억!
호쾌한 소리와 함께 쪼개지는 장작들. 무조건 한 방 컷이었다.
아버지처럼 손도끼만 써서 장작을 죽이는(?) 건 절대로 못하지만.
그래도 젊어서 체력이 있기 때문인지 몸에 힘이 계속 붙어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장작을 패나갔다.
오늘의 운동은 이걸로 대체해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집중했다.
쩌억-!
장작 패기는 전신의 근육을 골고루 사용하는 멋진 운동이었다.
말인즉슨, 전신의 근육을 골고루 사용하도록 학습된 프로레슬러들에게는 최적의 운동이란 뜻이었다.
그렇게.
처음에는 약간 웃고 있던 소년의 표정이 점차 굳어져가기 시작했다.
카메라맨들도 마찬가지였다.
옆에 장작의 산을 쌓아가던 나는 슬슬 몸에 열기가 돌기 시작하자 곧바로 웃통을 모두 벗어 던졌다.
니트와 목도리, 패딩까지 모두.
“아, 안 추우세요?”
“뭘 이 정도야.”
사실 춥다.
하지만 좋은 그림일 것이다.
온통 눈으로 뒤덮인 농장 앞마당에서 장작을 패는 내 모습은 분명.
웃통을 벗은 뒤, 또 한창 땀을 흘리던 나는 좀 방송 분량을 뽑아내고자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넌 안 해?”
“예?”
“같이 하자. 그러면 빠르잖아.”
“어…….”
“정 싫으면 장작이라도 던져줘.”
“아니, 원래는 게스트가 장작 패다가 지치면 제가 척척 패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도와주는 거였는데.”
“그런 각본이 있어?”
“일단은요.”
짓궂은 얼굴로 카메라맨들을 돌아본 닉이 이내 씨익 웃어 보였다.
“그래도 이게 더 멋지네요.”
속이 후련하다는 듯한 얼굴을 한 녀석이 품안에서 따끈따끈하게 몸을 덥히고 있던 수건을 던져주었다.
그걸로 땀을 닦은 나는 다시금 여유롭게 장작을 패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축사 쪽에서도 일이 벌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