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234화 (234/634)

234.

킹스 럼블을 일주일 앞둔 순간.

랙다운 현장팀에서는 페이퍼뷰를 대비해서 마지막 회의가 열렸다.

30명 넘는 인원들이 참가해 경기장의 회의실이 순식간에 가득 찼다.

참가 인원들은 다음과 같았다.

일단 각 주요 팀장들.

럼블 매치에 참가할 14명의 선수들까지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케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물론 나도 함께였다.

“좋아. 회의를 시작하지.”

럼블 매치는 이 14명에 버닝콩의 16명까지, 총 30명의 선수들이 일정 시간마다 링에 올라가서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치러지는 경기였다.

탑 로프 위로 넘겨져 땅바닥에 양 발이 닿으면 탈락하게 되는 규칙.

각자 번호를 부여받은 가운데, 버닝콩 측과 협의를 마치고 돌아온 케인이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우승자는 다들 알다시피 레이고, 2번으로 나와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예정이야. 동시에 리드 보이 역할도 함께 수행할 예정이지.”

케인이 레이를 돌아보았다.

“할 수 있겠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여유롭게 웃는 158센티미터의 가면 루차도르, 레이 미스테리우스.

작은 키였지만 그는 거인이었다.

그를 신용해 고개를 끄덕인 케인이 선수들에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링 프로듀서들이 버닝콩 쪽과 협업해서 각본 짜뒀으니까 다들 확인해보고 문제 있으면 말해줘.”

작년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2005년 킹스 럼블에서 나는 출전한 선수들과 하나하나 이야기를 나눠보면서 각본을 짜나갔지만.

물론 이쪽이 더 효율적이겠지.

그만큼 럼블 매치의 퀄리티는 작년에 비해 떨어지겠지만 말이다.

뭐, 이번엔 리드 보이도 아닌 내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겠지 싶었다.

일단 나만 잘하자.

그렇게 생각하고 자리에 앉아있자니, 뒤에서 누군가 어깨를 잡았다.

바티스타였다.

“이거 마셔라.”

“아, 고맙슴다.”

나는 싱긋 웃으며 그가 건네는 비타민 음료를 받아 뚜껑을 열었다.

한 모금 마시며 지켜보자니 그는 원래 있던 벽으로 가 묵묵히 자기 차례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렸다.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부커가 낄낄 웃으며 나를 놀려댔다.

“꼬붕 하나 생겼는데?”

“그러지 마세요.”

“사람 만들었네.”

그가 인정했다.

나와 대립한 뒤, 바티스타는 옛날 스타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신인 시절, 헌터의 밑에서 군기가 바싹 들어있던 때처럼 말이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그래도 핀레이의 말에 의하면 요새 다시 기초를 파기 시작했단다.

그건 참 다행이었다.

바로 그때, 앞선 선수들을 거쳐서 다가온 핀레이가 럼블 매치에서 내 행동이 적혀진 각본을 내밀었다.

“신.”

“아, 감사합니다.”

“또 멋진 것만 하는구나.”

“제가 좀 그렇죠?”

씨익 웃어 보였다.

이번 럼블 매치에서 나는 반드시 우승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해왔다.

그런 만큼 여기에서 사람들은 내 우승을 반드시 기대하고 있을 터.

그리고 그걸 지금까지 그 존재에 대한 복선을 깔아온 적대자가 등장해 나를 럼블에서 탈락시킨다.

그게 바로 케인 맥센.

분명히 멋진 그림일 터였다.

케인은 지금껏 랙다운 위클리 쇼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케인의 복귀 무대로 만드는 것과 동시에 레슬 임페리움까지 초대형 대립을 이어나갈…….

“어라?”

“뭐냐?”

“종이가 한 장일 때부터 뭔가 불안하더라니.”

나는 옆에서 물어오는 부커에게 주어진 각본을 살짝 보여주었다.

내용은 세 줄이었다.

꼴랑.

1. 신은 12번으로 등장한다.

2. 25번째에 갑자기 링에 난입한 케인 맥센에 의해 탈락한다.

3. 타이밍은 심판들이 지정한다.

……이었다.

‘이게 뭐야?’

황당해 종이를 들고 있던 나는 슬그머니 일어나 회의실의 상석에 앉아있는 케인에게 다가갔다.

“저기, 케인.”

“어, 신. 각본은 좀 어때?”

“……이건, 음.”

각본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세 줄 요약이 아닌가 싶어질 정도였다.

“왜 그래?”

“너무 간단한데요.”

“너에게 괜한 ‘터치’가 들어오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야. 아버지가 손을 쓰지 못하도록 해둔 셈이지.”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지난 링 서바이벌 이후로 나를 아예 신뢰……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배려하고 있는 듯했다.

회사 내에서 내 존재감이 어떤 정도인지 감을 잡았기 때문이겠지.

“글쎄요. 너무 러프한데.”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일단 당신 옆에서 계속 보조할 두 사람이 럼블에서도 활약해야겠죠.”

하이든리히와 마크 진랙.

현재 두 사람은 랙다운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중이었다.

그 두 사람을 띄우는 겸 최종적으로 나를 랙다운의 메인 이벤터로서 겟 오버 시키기 위한 각본이 바로 이 케인 맥센과의 대립이었다.

케인이 흥미로운 듯 물었다.

“더 말해봐.”

“일단 당사자들도 부르죠. 그리고 좀 조용한 곳으로 이동도 하고.”

그렇게 말한 나는 구석진 곳에서 막 각본을 받은 하이든리히와 마크 진랙을 불러 자리를 이동했다.

일단 우리와 일할 두 선수에 대해 짧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하이든리히.

백인, 키 2m, 근육질, 금발.

기믹은 락커룸에 다른 선수를 가둬두고 시를 읽어주는 정신병자.

오래 못 가고 방출 당했다.

마크 진랙.

백인, 2m가 조금 안 되는 키, 근육질, 금발. 하이든리히와는 달리 태닝을 해서 피부가 좀 더 짙다.

기믹은 힘 센 남자.

오래 못 가고 방출 당했다.

특이사항으로, 원래 바티스타를 대신해 레볼루션에 투입되기로 했던 게 바로 이 남자, 마크였다.

운명의 장난인지 최종적으로 스타가 된 것은 바티스타였지만 말이다.

그래서인지 현재도 묘하게 바티스타에게 경쟁심을 느끼는 듯했다.

두 사람은 스타가 될 수도 있는 멋진 외모를 지녔지만 아직까지 실력이 부족해 많이 배워야 했다.

그렇기에 나도 그 잠재력을 흥미롭게 느껴서 함께 일을 해보자고 제안을 했던 거고.

어쨌거나.

조용한 방에 들어온 나는 우리를 따라온 두 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일단 각본 좀 볼 수 있을까요?”

“그래, 여기.”

“나도.”

티셔츠 차림의 두 사람이(다시 말하지만 한겨울이다) 내게 종이 한 장씩을 건넸다.

그걸 확인한 나는 어이가 없어 그만 웃고 말았다.

둘 다 비슷한 내용이다.

언제 출전하고.

언제 탈락하는지.

나머지는 그냥 럼블 매치 중이나 직전에 적당히 정하라는 거겠지.

일반적인 방식이었다.

중심이 되는 파이널 포, 포함되는 우승자나 리드 보이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선수들은 경기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전혀 받지 못했다.

그래서 그네들끼리 나름대로 링에 올라가 멋진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 각본 상에 정해져 있는 스팟을 방해하지 않고서 말이다.

어쨌든 링은 적어도 두 명 이상으로 계속해서 붐빌 예정이었으니까.

나머지는 그냥 적당히 머릿수만 채워주면 되는 용도란 거겠지.

물론, 나는 이와 같은 각본을 쉽사리 받아들일 인간이 아니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채 내 앞에 서있던 두 사람에게 각각 이야기했다.

“마크가 10번이고 하이든이 13번이군요. 제가 12번이고 말이죠.”

“뭐 문제라도 있나?”

“흥미로운 구성이네요.”

“어디가?”

“마치 두 사람 다 누군가의 명령을 받고 투입된 것 같잖아요.”

나는 싱긋 웃어 보였다.

여기서 확실히 해두자.

나는 이번 킹스 럼블에서 또 다시 우승하지 못하고 탈락할 예정이다.

하지만 그런 고난 뒤에는 가장 큰 무대에서 멋진 드라마에 의한 짜릿한 승리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가장 세련된 방식으로 럼블에서 탈락하고 싶었다.

“그게, 중요한가?”

“당연하죠. 의문이 있고, 그게 해결되는 걸 보여주면서 왜 그랬는지를 알게 해주는 건 기본적인 드라마의 구성 방식이라고요.”

“…….”

“…….”

“푸하하! 너무 어려운 소리잖아!”

두 사람이 침묵하는 가운데, 케인이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이런 쪽으로는 영 감이 없는 회장님의 첫째다운 행동이었다.

나는 설명을 시작했다.

“자, 일단 먼저 나오는 마크가 뭔가 비장한 얼굴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12번으로 나올 때까지 최대한 다른 선수들을 피하고 쓰러져 있는 놈들만을 공격하는 거예요.”

“왜지?”

“당신은 케인의 부하죠?”

“그럴 예정이지.”

“그렇다면 럼블 매치에 내보내면서 케인이 무슨 말을 하겠어요?”

“……그야 당연히 너를 탈락시키라고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거기에 맞게 행동해야죠. 우악스럽게 근육을 자랑하며 나와서, 설원 속에 몸을 숨긴 하얀 늑대처럼 가만히 기다리면서!”

나는 과장해서 설명했다.

그제야 두 사람은 내가 한 말을 조금씩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구성이 정말 멋진데. 너를 앞뒤로 포위하는 거니까.”

“그렇죠. 물론 마크는 저보다 위상이 명백히 밑이니까 제가 압도하는 움직임을 보일 겁니다.”

“그러다 내가 먼저 탈락하면?”

“그러므로 이 드라마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 더 필요하죠.”

마크에서 하이든리히가 나올 때까지의 간격.

그사이에 마크를 도와서 신을 탈락 직전까지 몰아붙일 사내의 이름.

“러셀 하트입니다.”

킹스 럼블에 7번으로 출전해 우승을 노리고 있는 절대적인 개자식.

지긋지긋한 악연이었다.

* * *

러셀 하트.

GCW 시절부터 함께해온 내 영혼의 파트너이자 숙명의 라이벌.

내가 선역일 때도, 놈이 선역일 때도 있었고, 그럴 때마다 서로가 항상 반대 포지션에 서있었던 아치 에너미.

그렇기에 우리 둘은 어쩌면 링에서 가장 협력할 수 있는 상대였다.

거기까지 말하자 이야기를 듣고 있던 러셀이 잠깐 내 말을 멈췄다.

[미안, 기다려봐.]

“뭔데?”

[옆에서 시나가 계속 시끄럽게 굴어서.]

“뭐라고?”

[자긴 뭐냐는데.]

“……확 받아버리고 싶으니까 그런 것 좀 물어보지 말라고 해.”

“야, 나는?!”

버스가 달리는 와중 방금까지 실컷 자고 있던 오튼이 소리쳤다.

“난 뭐야!”

“넌 식빵 귀퉁이야.”

“뭐?”

“원하지도 않는데 따라오는 거.”

“I Hate You.”

“어, 나도.”

가볍게 대답하고 이야기를 원론으로 되돌리고자 했다.

“어쨌든, 시나는 이번에 또 타이틀 방어가 예정되어 있잖아?”

[그렇지?]

“‘우리’ 오튼도 그렇거든. 그래서 럼블에 나가는 건 너와 나뿐이야.”

러셀은 현재 RVD에게 잠깐 인터컨티넨탈 타이틀을 뺏긴 상태였다.

RVD를 다시금 메인 전선으로 올리기 위한 일환으로, 레슬 임페리움에서 찾아올 예정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킹스 럼블에서 또 함께 일할 수 있을 듯했다.

녀석과는 상성이 좋아서 나도 나름대로 기대가 되는 순간이었다.

“너밖에 없어. 러셀.”

[그렇게 싸워놓고?]

“그렇게 싸웠으니까. 그러면서 동시에 ‘널 쓰러뜨리는 건 나밖에 없다.’는 포지션을 취하면 되는 거지.”

“재패니즈 망가 같은데.”

“시끄러워. 오튼.”

내가 일갈했다.

[괜찮을까?]

“어차피 같은 드라마야. 일본 스타일은 거기에 좀 감정을 과잉으로 주입해서 우리가 보기에는 별로라고 느껴지는 거지.”

사람 사는 곳은 다 같았다.

옛날이라면 몰라도 미디어가 발달한 현재, 사소한 차이는 있어도 좋아하는 드라마는 대부분 비슷했다.

그중 하나가 언더독이고.

“코믹북의 빌런들도 그러잖아? 나 이외의 빌런에게 히어로가 처단당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아 하는 거지.”

[내가 그 빌런인가.]

“거기다 히어로와 한때 협력한 적도 있다가 타락한 빌런이야. 이 정도로 멋진 녀석이 어디 있겠어.”

[자세히 말해봐.]

녀석의 목소리에 흥미가 서렸다.

그 앞에서 나는 며칠 전 케인과 마크, 하이든리히의 앞에서도 했던 이야기를 다시금 이어나갔다.

간단했다.

“네가 7번이잖아.”

[그렇지.]

“싸우고 있다 보면 10번으로 마크가 나올 거야. 그냥 내버려둬.”

[마크 진랙?]

“그래, 마크 진랙. 그리고 12번으로 내가 나올 거야. 거기에서 네가 나한테 덤비라고 손짓을 해.”

[관객들이 좋아하겠는데.]

“미치겠지. 엄밀히 말해 우리 두 사람의 대립은 아직 제대로 결말이 나지 않은 상태니까.”

[그래, 네가 버티다가 기절하면서 배드애스 한 면모를 가져갔지.]

“어쨌든, 그렇게 내가 링으로 올라가면 우리 둘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죽어라고 싸워댈 거야.”

[그 시점에서 마크가 끼어 들어서 둘이 함께 널 밀어붙인다는 건가?]

“그렇지. 아무래도 마크 혼자서 날 상대하는 건 좀 버거우니까.”

[그리고?]

“그러다가 바로 13번으로 하이든리히가 나올 거야. 그러면 넌…… 다른 선역 선수의 공격을 받고 잠깐 옆으로 빠져있으면 되는 거야.”

[거트가 좋겠군. 이번에 대립하면서 서로 원한을 쌓은 상태니까.]

“그래, 그래.”

[그사이 너는 마크와 하이든리히의 집중 공격에 너덜너덜해져서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건가?]

“……거기까지는 아니고요.”

[네 부탁이라니 기분 좋은데.]

“적당히 하시고요.”

쓰게 웃은 나는 확실히 느꼈다.

럼블 매치 안에 우리 넷, 아니, 다섯의 드라마가 펼쳐질 것 같았다.

러셀과 내가 잠시 협력해서 마크와 하이든리히를 탈락시킨 뒤,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우기 시작한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서로 옥신각신하면서 가다가…… 이건 네가 정해주면 되는 사항인데 말이야.”

[뭔데?]

“케인이 파이널 7쯤 됐을 때 나와서 날 탈락시킬 거야. 그때 너는 어떻게 할래?”

탈락을 도와도 되고.

아니면 여기서 이미지를 좀 챙기고 싶으면 날 도와줘도 되고.

[흠, 너와 나의 관계를 생각하니까 하나밖에 안 떠오르는데.]

“뭔데?”

내가 되묻자 러셀은 곧바로 멋진 답안을 내놓았다.

아, 제기랄.

이 녀석도 재수 없다니까.

자꾸 빨리 성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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