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235화 (235/634)

235.

2006년 1월 29일.

플로리다 주의 마이애미.

이번 해에도 15만을 넘기는 압도적인 수치의 관객들이 모인 가운데.

WWF의 주최로 이루어지는 세계에서 가장 큰 프로레슬링 이벤트.

킹스 럼블이 개최되었다.

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펑!

쇼의 시작을 알리는 폭죽이 터지자 아름다운 불꽃이 경기장을 밝히고 날아올라 하늘을 수놓았다.

물론 레슬 임페리움이 있긴 하지만, 킹스 럼블 역시 충분히 2등의 위치에 걸맞은 압도적인 쇼였다.

[Waaaaaaaaaaaaaaaagghhhh!]

관객들의 환성이 벽을 타고 넘어와 온몸을 짜릿하게 만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다른 대부분의 선수들과 함께 메인이벤트인 럼블 매치를 마냥 기다려야만 했다.

‘참기 힘들구만~.’

몸이 근질근질했다.

그 매치에서 우리가 저지를 드라마는 분명 오늘 페이퍼뷰의 한 축을 당당히 장식할 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얼른 하고 싶었다.

나가서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고 정해온 각본을 보여주면서 더 엄청난 반응을 이끌어 내보이고 싶었다.

다리를 덜덜 떨며 숨을 몰아쉬던 나는 그렇게 정해진 경기들을 지켜보며 차례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현재, 이 회사에서 나보다 위상이 높은 선수는 얼마든지 존재했다.

하지만 이건 확실했다.

그 누구도 나보다 잘하지 못했고.

그 누구도 나보다 더 크고 장대한 반응을 이끌어 내지는 못할 터였다.

그렇게 계속해서 되뇌며 나는 끝까지 마인드 컨트롤을 해나갔다.

이걸 해둬야만 링 위에 올라서 겁먹지 않고 해낼 수가 있었다.

우리는 링-퍼포머다.

동시에 스포츠 선수였다.

리듬 체조와 같이 관객들의 앞에서 퍼포먼스를 선보여 점수를 받고 회사에게서 기회를 받는 선수들.

그렇기에 사실, 그 부담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나는 거기에 짓눌리지 않고자 계속해서 마음을 잡았다.

다행히, 모니터링TV에서는 계속해서 날 자극하는 장면이 나와주었다.

숀 시나와 카인의 WWF 유니버스 챔피언 매치.

시나가 거구의 카인을 힘껏 들어 바닥에 메치자 엄청난 환호가 경기장을 뒤덮었다.

커버가 이어졌다.

[1, 2, 3!]

[Yeeeeeeeeeeaaaaaahhhhhh!!]

[시나가 유니버스 챔피언 자리를 계속해서 지킵니다!! 정말로 믿을 수 없는 기록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랜스 오튼 역시 마지막 순간에 월드 챔피언 자리를 방어해냈다.

그렇게 링 위에서 포효하는 두 사람을 지켜보며 나와 러셀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이야기했다.

호되게 되갚아주자고.

물론 우리 둘은 오늘 킹스 럼블에 참가하는 선수 중 하나일 뿐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만들어낼 드라마는 분명히 멋진 호응을 뽑아낼 터였다.

그리고 얼마 후였다.

세미 메인이벤트였던 숀 시나의 경기가 끝난 이후의 광고 타임.

락커룸의 문이 노크 후 벌컥 열리며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다.

막내 직원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럼블 매치 1번부터 5번까지! 고릴라 포지션 앞으로 집합해주세요!”

그 말에 일어나는 선수들.

개중에는 2번으로 출전해 우승할 레이 미스테리우스도 포함되었다.

“레이! 힘내요!”

“파이팅!”

랙다운 선수들이 소리쳤다.

그 말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고 락커룸 바깥으로 달려 나가는 레이.

실수 없이 잘 해내기를.

그것을 기원하고 있자니 옆에 앉아 있던 러셀이 싱긋 웃어 보였다.

“랙다운에 잘 적응한 모양인데.”

“다들 날 좋아해서 미치겠다.”

“참 대단하단 말이야. 난 선배들하고 잘 친해지지 못하겠던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러셀은 외골수니까.

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 선후배로서 확실히 선을 그어두니 아무래도 선배들이 다가가는 게 힘들겠지.

미국은 이러한 식의 관계 맺기가 희미한 국가였지만, 적어도 두 가지 분야에서만큼은 위아래가 아주 확실했다.

바로 스포츠와 군대였다.

프로레슬링 역시도 서로 극한 상황에서 협동을 중시하는 만큼 선후배 관계가 무척 중요했다.

하지만 러셀은 그런 선배들이 좋아할 만한 성격은 절대 아니었다.

시나처럼 순박한 것도, 오튼처럼 멍청한 성격도, 나처럼 영악하지도 않으니 그야 분명히 그렇겠지.

“좀 어설픈 시늉을 해봐.”

“……그래야 하나.”

가볍게 잡담을 나누는 사이 광고가 끝나고 럼블 매치가 시작되었다.

1번으로 등장한 선수는 버닝콩의 하이퍼 테크니션, 거트 엔젤이었다.

그 테마는 올림픽리스트임을 상징하듯 빠르고 신나는 나팔 소리가 박자에 맞춰 이어지는 게 특징이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자유형 레슬링 100kg급 금메달의 소유자.

아마추어 레슬링 그랜드슬래머.

향후 커리어를 거치며 WWF에서 은퇴할 때까지 월드 챔피언 7회의 대기록을 지내는 최고의 레전드 중 하나.

대머리에 근육질 몸매.

키는 180cm 정도로 작았지만, 성조기 문양을 본뜬 아마추어 레슬링 기어를 입은 거트는 그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을 것처럼 거대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그는 아마추어 레슬링과 프로레슬링 모두 정점에 오른 최고의 선수였으니까.

하지만 그 상대도 강력했다.

[Booyaka~! Booyaka~!]

멕시코의 전설.

루차도르.

그 이름의 뜻은 ‘이름 없는 왕’.

158cm임에도 거인 선수들과 나란히 경쟁해 우위를 쟁취했던 남자.

레이 미스테리우스.

그 두 사람을 시작으로 킹스 럼블의 메인 이벤트 경기가 시작되었다.

럼블 매치.

[Gurt! Gurt! Gurt! Gurt! Gurt! Gurt! Gurt! Gurt! Gurt! Gurt! Gurt!]

[Rey! Rey! Rey! Rey! Rey! Rey! Rey! Rey! Rey! Rey! Rey! Rey!]

관객들은 두 거물의 등장에 벌써부터 큰 챈트를 보내기 시작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싱긋 웃었다.

벌써부터 저렇게 힘을 뺐다가 이후 우리가 선보일 드라마에서는 대체 어떻게 하려고들 그러시나.

* * *

3번, 4번, 5번, 6번.

그리고 7번, 러셀 하트.

키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화끈한 기타 사운드와 함께 러셀 하트를 상징하는 진보라색의 조명이 경기장 안을 가득 수놓았다.

15만 명의 관객들이 가득 들어찬 경기장은 엄청난 크기였고 그에 걸맞은 장관이 화면에 펼쳐졌다.

그야말로 미국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관객 동원과 이벤트였다.

하지만 관객들은 기타 소리가 들려온 순간부터 하나가 된 것처럼 엄청난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Booooooooooooooooo-!]

그것을 들은 러셀은 가슴이 뜨겁게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반응이 자신을 러셀 ‘하트’가 아니라 ‘러셀’ 하트로 만들어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위대한 가문의 선수 중 하나가 아니라, 그 자체만으로도 압도적인 야유를 끌어내는 악당.

신에게 대적해, 되고 싶었던 자신이 되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기에 러셀은 자신에게 쏟아지고 있는 야유에 감사를 느꼈다.

심호흡을 한 그는 자신의 뒤에 서있든 든든한 조력자에게 말했다.

악역 전환 이후, 계속해서 각본 상 러셀의 매니저를 맡고 있는 닉 플레어.

“가죠. 플레어.”

“좋아, 멋지게 해보자고.”

고개를 끄덕이는 닉.

헌터 이후로 새로운 젊은 플레이어를 돕게 된 그는 악역으로서의 러셀을 크게 인정하고 있었다.

그는 확실히 그 누구와 맞붙어도 증오를 이끌어낼 수 있는 선수였다.

러셀이 커튼을 걷고 나갔다.

[Boooooooooooooooooo-!]

쏟아지는 야유를 듣자마자 러셀은 곧바로 욕설을 내뱉으며 응답했다.

“닥쳐! 머저리 같은 놈들아!”

플레어는 그런 러셀을 붙잡고 돌려세워 이마를 맞대 진정시켰다.

마치 지금 출전할 럼블 매치와 그 우승에 집중하라는 듯이 말이다.

물론, 실제로 말한 건 달랐다.

플레어는 행운을 빌어주었다.

“안전하게! 그리고 멋지게!”

오랜 옛날, 플레어보다 이전.

버지 로저스라는 위대했던 레슬러가 항상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다.

러셀 본인은 선배들과의 관계가 잘 풀리지 않는 것 같다고 했지만.

다들 모르지는 않았다.

러셀은 분명히 실력이 있고 노력하는 레슬러였다. 그렇기에 살갑게 굴지는 않아도 다들 인정했다.

프로레슬러, 러셀 하트를.

자신의 동기에 대해 가지고 있는 열등감을 인정하며, 계속해서 성장해나는 선수.

“네!”

고개를 끄덕인 러셀이 관객들의 야유를 무시하며 링으로 올라갔다.

럼블 매치는 한창 선수들이 등장하고 탈락하며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3번으로 등장한 로우 카더, 사이먼 진이 나타났다.

“러셀!”

그것이 신호였다.

힘차게 뛰어오른 러셀은 놀랄 만한 탄력을 선보이며 드롭킥을 날렸다.

뻐억!

체중을 실은 킥에 안면을 걷어차인 사이먼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걷어찬 힘으로 한 바퀴 돈 러셀이 전방 낙법을 써 바닥에 떨어졌다.

깔끔한 킥이었다.

질끈 묶은 금발이 흩날렸다.

[Boooooooooo-!]

관객들이 크게 야유를 보냈다.

링에 새로 등장한 선수는 어떤 식으로든 주목을 받기 마련이었다.

그 버프를 받아 거트와 레이의 존재감을 순간 지워낸 러셀은 사이먼을 단숨에 링 바깥으로 던졌다.

3단 로프를 넘어가 탈락하는 사이먼. 러셀은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관객들의 야유를 더 끌어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관객들은 러셀에게 야유를 보내기 위해 한 남자의 이름을 외쳤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모두가 그를 원하고 있었다.

러셀 하트의 아치 에너미.

바로 신이었다.

그가 랙다운으로 이적한 뒤, 러셀은 버닝콩에서 마치 제 세상이라도 온 것처럼 패악질을 부려댔다.

하지만 이 럼블 매치에는 신도 이미 출전하겠다고 공언한 상태였다.

그렇게 러셀은 비겁한 방식으로 선수들의 공격을 피하며 관객들의 야유를 차근차근 쌓아나갔다.

8번, 9번.

그리고 10번.

마크 진랙이 나왔다.

링으로 올라온 그와 시선을 주고받은 러셀은 선수들의 공격을 피해 그대로 링 아래로 빠져나갔다.

럼블 매치는 어디까지나 ‘3단 로프 위’를 넘어간 뒤 바닥에 양발이 닿아야만 탈락이 성립되었다.

그러므로 1단 로프 밑으로 빠져나온 러셀은 탈락하지 않고 계속해서 버틸 수가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11번.

링 위로 올라가는 푸에트리코 출신의 선수, 칼리투를 여유롭게 배웅한 러셀은 계속해서 사람들의 어그로를 끌며 12번을 기다렸다.

[Booooooooooooooooo-!]

야유가 쌓였다.

기대감이 쌓였다.

해설자들이 말을 얹었다.

[아, 러셀 하트! 전도가 유망했던 선수가 어쩜 저리 타락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지금 프로레슬링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습니다!]

[저렇게 쉬다가 링으로 올라갈 생각인 걸까요? 규정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행동이지만, 이건 참!]

[그런 우승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팬들이 지지하지 않을 겁니다!]

[그걸 러셀 하트에게 바라면 안 돼죠! 러셀 하트는 지금 욕망에 빠져 있습니다! 부와 명예를 거머쥐기 위해 무엇이든 할 남자입니다!]

[하하! 웃기군요! 제가 아는 남자 하나도 무엇이든 하는 남자인데요!]

그 말과 함께.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10!!]

카운트가 시작되었다.

러셀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링 위에서 계속 경기를 이어가는 선수들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9! 8! 7!]

사람들의 야유와 환호, 숫자를 세는 소리가 마구잡이로 뒤섞였다.

[6! 5! 4!]

상황은 혼란에 빠진 채, 그들 모두가 지금 이 순간을 시원하게 뚫어줄 사내의 존재를 원하고 있었다.

[3! 2! 1!]

BAAAAAAAAAAAAAAMMMM!!

카운트가 끝난 직후, 다음 선수의 등장을 알리는 버저가 경기장 내에 크게 울려 퍼졌다.

이어지는 건 장엄한 북소리.

그리고 나팔의 불길한 노래.

쿵-쿵-쿵-쿵-쿵-쿵-쿵……!

빠밤-빠밤-빠밤-빠밤……!

[Yeeeeeeeeeeeaaaaahhhhh!!]

관객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십만이 그렇게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바글바글한 개미떼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 방송을 실시간으로 시청하고 있을 미국 내의 수천만, 전 세계의 수억 명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마지막으로.

이 모든 상황을 유도하고 사람들의 기대감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렸던 사내, 러셀 하트가.

깜짝 놀라 입장로를 돌아보았다.

그 위로 설치된 거대한 스크린에서 장엄하게 세 글자가 새겨졌다.

S I 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모두가 그 이름을 노래했다.

입장로 주변에서 드라이아이스가 분사되며 희뿌연 연기가 가득 차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혼란이 연출되었다.

그리고 가죽 재킷에 선글라스를 쓴 신이 그 사이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설정 상, 192cm에 120kg.

그런 뻥튀기가 말이 되겠다 싶을 정도의 압도적인 존재감. 지금 이 순간 링 위의 시간은 멈춰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활짝 웃어 보인 신은 중지 하나를 들어 선글라스의 코등이 부분을 잡아 밑으로 내렸다.

카메라는 그런 그와 당황해 일어서고 있는 러셀을 번갈아 비췄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특수 제작된 긴 입장로를 순식간에 내달려온 신이 그대로 일어서려던 러셀의 무릎을 밟고 뛰었다.

동시에 반대편의 무릎으로 그의 관자놀이 부분을 힘차게 밀어 찼다.

일본의 전설, 무토 카이지가 개발해 사용했다고 하는 전설의 무브.

샤이닝 위자드.

일명, 섬광의 마술.

퍼억-!

어찌나 강하게 맞았는지 거기에 당한 러셀의 몸이 뒤로 반 바퀴 돌며 힘차게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Yeeeeeeeeeeeeaaaaaahhhhh!!]

통쾌한 광경에 관객들이 엄청난 환호를 보냈고, 그 앞에 선 신은 씨익 웃으며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서 러셀에게 뒈져버리라며 욕설을 내뱉고 있던 꼬마에게 선글라스를 씌워주었다.

그 모습이 전파를 타고 전 세계에 퍼져나간 순간. 백스테이지에서 그걸 지켜보던 시나가 중얼거렸다.

“……이거 이러면 완전히 나가린데.”

유니버스 챔피언십을 지켜가며 버닝콩에서 계속해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그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두 사람의 콤비에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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