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
2006년 럼블 매치의 우승자는 레이 미스테리우스로 결정되었다.
마지막 선수를 탈락시켜 그 우승이 확정된 순간, 팬들은 열화와 같은 환호를 보냈다.
총 1시간 7분의 경기.
레이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세리모니를 펼치기 시작했다.
[Rey! Rey! Rey! Rey! Rey! Rey! Rey! Rey! Rey! Rey! Rey! Rey!]
그가 손목에 차고 있는 아대에는 EB라는 글자가 적힌 채였다.
Eddie Buitererro.
하늘을 가리키는 레이.
럼블 매치의 우승자가 된 그는 4월 초에 개최될 레슬 임페리움에서 월드 타이틀에 도전하게 되었다.
아마 전생과 같은 흐름으로 가게 된다면 랜스 오튼을 상대하겠지.
좋은 매치 업이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결국 이번 킹스 럼블은 4월에 있을 레슬 임페리움에 대한 떡밥을 다수 던지면서 마무리가 되었다.
이후 각 브랜드에서 2월과 3월에 페이퍼뷰를 하나씩 개최하고 4월 초에 레슬 임페리움을 맞이하는 식.
거기에 대해 뉴스레터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며 오늘 나온 떡밥들에 대해 정리를 해주었다.
처음에는 레이의 우승과 그 상대인 오튼의 이야기를 분석했지만.
사실, 진짜로 떠들고 싶었던 것은 우리 둘의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나와 케인 맥센.
그 방송에 흥미가 생겨 녹음본을 떴고, 며칠 뒤 경기장에서 케인과 만나 한 번 더 그 내용을 들었다.
[케인 맥센이 돌아왔더군.]
[아니, 사실 돌아온 건 9월이었지. 섬머 슬램 이후에 랙다운 총괄 프로듀서로 취임을 했으니까.]
[음, 내가 말한 건 현실의 케인 맥센이 아니라 각본의 그를 말하는 거야. 맥센 가문의 도련님.]
[아, 그거라면 뭐……. 사실, 전혀 예상 못했던 상황은 아니잖아?]
[그래?]
[일단. 지금 신의 존재가 랙다운 브랜드를 신선하게 만들고 있지. 인정해?]
[당연히 인정하지. 바티스타와의 대립도 좋았고. 이제야 좀 드래프트의 효과가 나오는 느낌이야.]
[그랬던 친구가 링 서바이벌 이전 2개월 동안 결장을 했단 말이지.]
[어? 그거 그냥 러셀에게 당한 부상으로 넘어가는 거 아니었어?]
[아냐. 안 그랬어. 그게 유일한 흠결이었지. 다시 말해서 아직 설명되지 않은 설정이었단 말이야.]
[아하.]
[그런데 이번 킹스 럼블에서 케인이 난입하면서 그 이야기를 지금부터 풀어나가겠다 싶더라고.]
[권력자의 개입이었다는 건가.]
[맞아. 실제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각본 설정 상으로는 ‘그래서 나오지 못했다’는 식으로 가지 않을까 싶어.]
[너무 디테일한데. 그냥 안 나오면 ‘좀 쉬었다’로 퉁 치고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더니 말이야.]
[그게 신의 장점이지. 그러니까 다들 좋아할 수밖에 없는 거야.]
녹화해온 부분은 거기까지였다.
나는 케인과 대화를 시작했다.
“정확한 판단이죠?”
“그래,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게 어딘가 좀 묘하기도 하고.”
그 말이 맞았다.
섬머 슬램 이후 링 서바이벌 직전까지. 나는 바트의 명령을 받은 케인에 의해 쇼에서 제외되었다.
“그걸 이번 대립의 코어로 삼자는 거죠. 현실에서 따온 각본. 그럴싸한 이야기가 될 것 같지 않아요?”
“그렇다면 내가 널 회사에서 배재시킨 이유는 뭐로 하면 좋을까?”
“글쎄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인종적인 건 너무 나갔나?”
“……아무래도 그렇겠죠?”
거기다 케인은 그런 문제로 인해 날 배재한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바트의 명령을 받고 회사의 후계자가 되기 위함이었다.
“솔직히 말해도 될까?”
“예, 부디.”
나는 싱긋 웃어 보였다.
같이 일하게 된 입장에서 케인의 의견을 솔직하게 듣고 싶었다.
“사실, 널 보기 전까지는 이렇게 생각했어. 무슨 동양인 하나를 가지고 그런 복잡하고 불편한 대응을 하냐고 말이야.”
하지만 그런 생각은 섬머 슬램에서 나와 러셀이 한 경기를 보고는 순식간에 뒤바뀌었다고 한다.
“그 순간, 아버지의 말이 이해가 갔어. 확실히 넌 그냥 두기에는 너무 위험한 사내처럼 느껴지더군.”
“그렇죠. 거기다 바트는 아이콘의 탄생을 막을 생각이라고 했으니까 제가 더 아니꼽게 느껴졌겠죠.”
“한 선수의 영향력이 너무 커져서 회사를 위협할 정도가 되면 자기 자리까지 위협할 수도 있으니까.”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사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 권력자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지.”
거기다 바트는 그런 일들을 충분할 정도로 겪어온 상태였다.
황금시대의 아이콘이었던 캡틴 로건은 스테로이드 파동 때 회사를 거의 박살 낼 수준의 진술을 했고.
그렉 하트도 존 마이클스와의 대립에서 자신이 가진 각본 통제권을 이용해 회사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락콜드 역시 차세대 스타였던 브룩 레스너에게 잡을 하라는 지시를 거부하고 무단 탈단이라는 최악의 선택을 했다.
“로건 때문에 이후 아버지는 그렉과 락콜드에게 져줄 수밖에 없었던 거야. 무척 기분이 나빴겠지.”
“하지만 뭐, 그때 바트의 선택이 타당한 건 절대 아니었잖아요?”
“아버지는 타당한 선택보다 자신의 선택을 더 중시하는 분이라서.”
케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도 널 보면서 매일 밤 잠을 못 이룰 정도로 열 받아 할 거야.”
“맥센 가문에서 저 때문에 잠을 못 자는 사람이 하나 더 늘었군요.”
“……지금 뭐라고 했냐?”
“아, 아니. 아닙니다.”
순간 말실수를 했다.
케인은 다른 건 몰라도 아직까지 티파니와 내가 만나는 건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황급히 이야기를 돌렸다.
“그런 당신이 지금 신기하게도 저와 대립을 해주려고 하시는군요.”
“난 그 권력자가 아니니까.”
케인이 씁쓸하게 웃었다.
“널 막는 데 실패했으니까. 될 대로 되라는 심경으로 말이야. 머저리로 기억되고 싶지도 않고.”
“그것뿐인가요?”
“뭐?”
“제가 말한 거, 기억하시죠?”
나는 빙긋 웃으며 물었다.
케인은 침묵했다.
하지만 분명 기억할 것이다.
나는 이번 대립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꿈’을 이루어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결국 거기에 대해서 말할 겁니다. 굳이 처음부터 밝히고 대립을 시작할 필요는 없겠지만요.”
“……내 꿈?”
“그래요. 당신이 태어나 살면서 이루고 싶었던 단 하나의 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는 케인은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어졌다.
당연했다.
2001년도에 회사를 도망치듯 떠나면서 버렸던 꿈을, 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내가 언급했으니까.
하지만 그건 그만의 생각이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머나먼 미래의 WWF 팬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케인 맥센의 꿈.
그것은.
* * *
“프로레슬러가 되는 거였지.”
그런 내 말을 들은 티파니 역시도 마찬가지로 표정이 좋지 못했다.
……아마도 그럴 터였다.
전화를 하고 있는 상황이라서 보지는 못했지만 지금 티파니는 분명 복잡한 심경을 느끼고 있으리라.
그 이유는 간단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그녀 역시 케인 맥센이 가지고 있는 ‘꿈’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프로레슬러가 되는 것.
그는 프로레슬러로서 세상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큰 별을 만드는 회사의 수장이기에.
무엇을 해도 그게 걸리고 만다.
그가 어떤 기회를 받아 멋진 성과를 보이고 값진 승리를 쟁취하더라도 관객들은 결코 공감하지 못한다.
케인 맥센은 어디까지나 회사의 도련님이기 때문에.
이 ‘가상의 승리’에 혹시나 회장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진 않았나.
다들 그것부터 의심할 것이다.
그러므로 케인에게는 애초에 기회가 주어질 수 없었다.
그는 가상의 선수가 될 수 없었다. 케인의 그림자에는 언제나 맥센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녔다.
그렇기에 케인이 할 수 있는 역할은 결국 도련님일 수밖에 없었다.
선수가 아닌, 그 앞을 가로막는 권력자의 아들만이 그에게 주어질 수 있는 유일한 배역이었다.
그걸 알기 때문에 티파니 역시도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가능하겠어요?]
“지금이라면 가능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했듯, 나는 선수의 현실과 가상을 적절하게 융합한 각본이 결국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그리고 지금껏 케인이 쌓아온 드라마라면 분명 나와 대립했을 때 좋은 퓨드를 보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정반대거든.”
[어떤 의미에서요?]
“케인처럼 도련님으로 태어나지 않았고, 윗선에서의 방해 공작을 견뎌내며 거기에 맞서서 갖은 수를 다 써가면서 이 자리까지 올라왔지.”
[그건 그렇죠.]
“그런 날 바라보는 케인의 심경이 어떻겠어? 현실이든 가상이든.”
[열이 받겠죠. ……아.]
뭔가를 깨달은 티파니.
[케인은 그런 당신을 질투해서 이와 같은 일을 벌였다는 거군요.]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어.”
[안 될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난 그걸 케인이 대립을 하면서 자연히 깨닫는 걸 바라고 있거든.”
[그건, 잘 모르겠네요.]
“왜?”
[당신 이야기를 통해서 확신하게 됐는데요. 2001년에 오라버니가 회사를 떠난 이유는 역시…….]
“프로레슬링이 싫어서겠지.”
분명 그럴 터였다.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누군가하고 연애하고 있는 꼴을 옆에서 지켜보는 기분이겠죠.]
“……멋진 비윤데.”
그나저나, 또 오라버니인가.
나는 쓰게 웃었다.
티파니는 역시 바트와는 다르다.
진심으로 가족과 척을 질 수는 없는 성격이었다. 물론 그게 일반적이겠지만.
어쨌든.
특히나 자신을 어릴 적부터 돌봐준 케인에 대해서는 각별한 감정을 느끼는 듯했다.
그런 상황에서 대립이라.
“저기, 티파니.”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나 이 문제가 그녀의 감정을 건드린다면 사과하자고 생각하며.
[네?]
“혹시 도와줄 수 있겠어?”
[……대립을요?]
“그래, 당신이 우리의 대립을 말리기 위해서 쇼에 출연하는 거지.”
[음, 그것도 참 그거네요.]
“뭐가?”
[현실과 가상이 절묘하게 융합이 되는 지점이라고 해야 할까. 솔직히 좀 말리고 싶은 심정이라서.]
“걱정되는 거라도?”
[너무 위험할 것 같아서죠.]
티파니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뒤에 덧붙인 말은 역시나 날 믿어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분명 멋질 거예요.]
역시.
* * *
킹스 럼블 애프터 랙다운.
별다른 떡밥 없이 끝난 버닝콩과는 다르게 사람들은 랙다운 쪽에 훨씬 더 강한 흥미를 보였다.
덕분에 모인 관객은 평소보다 또 다시 조금 더 늘어난 상태였다.
WWF가 워낙 공룡 기업이라 그 수치는 미미했지만, 조금씩 팬들이 유입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런 상황에서 다함께 힘을 모은 랙다운 크루는 쇼를 진행했다.
쇼의 오프닝.
가장 먼저 킹스 럼블의 우승자로 나선 레이의 세리모니가 펼쳐졌다.
거기에 맞서 나온 건 랜스 오튼.
두 사람의 페이스 투 페이스는 팬들로부터 굉장한 호응을 얻었다.
과거는 과거.
오튼은 예전에 에디에 관해 저질렀던 말실수를 분명히 사과했지만.
그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렇기에 이 대립을 통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에디를 떠올릴 터.
많은 게 걸린 경기였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진행할 대립 역시도 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신 vs 케인 맥센.
언더독 vs 지배자.
아직 제대로 대립이 시작된 것도 아닌데 온갖 수식어가 다 붙었다.
그 정도로 알기 쉽고 흥미로운 대립. 거기에 점차 살을 붙여나간다면 분명 팬들은 여기에 열광하겠지.
고릴라 포지션.
광고가 나가는 동안 마음의 준비를 끝마친 케인이 입을 열었다.
“좋아, 가자고.”
정장 차림의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 뒤에 셔츠와 바지 차림의 부하들이 자리를 잡고 섰다.
하이든리히와 마크 진랙이었다.
음향 팀장의 신호와 함께 경기장에 케인의 테마곡이 울려 퍼졌다.
[Here Comes The Money~!]
여성의 상쾌한 보컬.
[Money Talks!]
그 뒤를 잇는 묵직한 남성 보컬.
돈, 돈, 돈, 돈, 돈.
금수저 도련님의 캐릭터를 그대로 드러내는 듯한 테마가 나가자 관객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엄청난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Booooooooooooooooooooo-!]
그런 상황이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인 케인이 커튼을 걷고 나갔다.
그리고 이어진 상황은, 정말로 죽여줬다.
나가기 전에 좀 긴장하는 듯해서 혹시 문제가 있을까 싶었는데.
‘괜한 걱정이었군.’
선수들처럼 정식으로 배운 것도 아닐 텐데, 꽤나 멋진 퍼포먼스였다.
엄청난 야유가 나왔다.
그런 관객들의 앞에서 떡대 두 명을 대동한 케인은 온갖 요란한 춤을 춰대면서 잔뜩 어그로를 끌었다.
그렇게 링 위.
연잇는 야유의 한가운데에서 케인은 마이크를 들고 싱긋 웃어 보였다.
[I’m Back.]
내가 돌아왔다.
[Booooooooooooooooooooo-!]
관객들은 럼블 매치에서 날 탈락시킨 케인을 용서하지 못했다.
사실, 좀 웃기는 상황이었다.
케인은 분명 선악의 유무를 떠나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을 정도의 위상을 가진 존재였다.
그런 그가 무려 5년 만에 복귀하는 건데도 압도적인 야유만 나왔다.
그 이유는 하나였다.
팬들이 그만큼 나의 탈락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는 말이었다.
‘멋진 대립이 될 것 같군.’
나는 씨익 웃으며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