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
4월 초순의 레슬 임페리움 전까지 남아 있는 페이퍼뷰는 단 두 개.
2월 말에 개최될 버닝콩의 네버 이스케이프와 3월 초에 개최될 랙다운의 원 데이 스탠드가 그러했다.
1월의 킹스 럼블과 4월의 레슬 임페리움 사이에 위치한 이 두 개의 페이퍼뷰는 내부에서 일명 ‘징검다리 페이퍼뷰’라고도 불렀는데.
“보통 이 회사는 전반기와 하반기로 나뉘어져서 굴러간단 말이죠.”
나는 이번 레슬 임페리움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기 위해 일단 두 사람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케인 맥센과 티파니 맥센.
오랜만에 경기장에 온 티파니는 그리움과 함께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고 한껏 들뜬 모습이었지만.
내가 이야기를 시작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경청을 시작했다.
이 회사의 4대 페이퍼뷰.
1월의 킹스 럼블.
4월의 레슬 임페리움.
8월의 섬머 수플렉스.
11월의 링 서바이벌.
“이게 재미있는 게 뭔지 아세요?”
“뭔데?”
“이 구성만으로도 그 브랜드의 한 해를 그릴 수가 있다는 거예요.”
한 선수가 메인 이벤터로서 브랜드를 이끌어 나가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메인 이벤터란 무엇인가.
쇼의 가장 마지막 지점에 수많은 사람들의 기대감을 받으며 등장해, 그걸 충족시켜주는 존재였다.
“숀 시나를 예로 들어보죠.”
그는 작년에 회사의 탑 페이스로서 아주 모범적인 한 해를 보냈다.
1월의 킹스 럼블에서 우승하고.
4월의 레슬 임페리움에서 메인급 벨트인 유니버스 타이틀을 따냈다.
“이후 8월까지 또 길고 짧은 대립을 이어가면서 타이틀을 지켜내고.”
8월의 섬머 수플렉스에서 초대형 대립을 진행하면서 평가를 받는다.
그 사이사이에 챔피언으로서 부적격하다고 평가받으면 타이틀을 잃고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거고.
잘했다고 하더라도 자신보다 더 높은 모멘텀을 쌓은 선수가 있으면 타이틀을 빼앗길 수도 있다.
아니면 그날따라 바트의 기분이 좋지 않거나, 회사에서 화제성을 끌어 모으려고 하다 잃을 수 있고.
그만큼 어려운 자리였다.
하지만 시나는 그런 타이틀을 1년 가까이 지켜왔다. 그만큼 챔피언으로서 인정받고 있다는 뜻이었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내 친구인 애덤이 ‘엣지’라는 이름으로 1월에 타이틀을 잠깐 탈환하게 되지만.
현재 시점에서 애덤은 이제 갓 버닝콩에 콜 업 된 신예 선수였다.
거기에 러셀이 있으니 전생과 똑같은 성장세는 보이지 못하리라.
“이번에도 지킨다고 했죠?”
“그럴 예정이라고 들었어. 트리플H를 상대한다고 했었지. 아마?”
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니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티파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새 시나가 역반응이 나온다고 들었는데. 과연 괜찮을까 싶네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시나의 유니버스 챔피언 집권기에는 반발하는 팬들도 무척 많았다.
시나가 그간 회사를 이끌어온 레전드 선수들을 ‘정정당당한 방식’으로 쓰러뜨려왔기 때문이었다.
거기에서는 회사의 노골적인 푸시가 느껴졌고, 시나가 그것을 잠재울 정도로 완벽한 선수인 것은 아니었다.
시나는 아직 성장하는 도중에 있는 선수였고, 그렇기에 오랫동안 레슬링을 시청해온 팬들은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회사가 시청 등급을 PG로 내리면서 예전과 같은 자극적인 짓은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까.
팬들은 그렇게 방송이 밋밋해진 원인을 ‘재미없는 정정당당한 챔피언’ 숀 시나에게서 찾았다.
그럼에도 시나가 회사를 이끌어가는 선수로 있을 수 있는 건 간단한 이유였다.
“시청률 등급을 내리면서 회사가 정한 방침을 정확하게 수행할 수 있는 선수이기 때문이죠.”
“회사의 방침이요?”
“그래, 시나는 지금 옛날의 캡틴 로건처럼 ‘어린아이들의 영웅’으로서 활약해주고 있잖아.”
회사가 원하는 새로운 시청자층을 끌어들이면서 동시에 그들에게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이게 나쁜 건 아니지. 시나의 역반응은 현재 받고 있는 지지에 비하자면 거의 미미한 수준이니까.”
“……그래서.”
케인이 눈썹을 찡그렸다.
“말인즉슨, 시나처럼 우리도 이번 레슬 임페리움에서 브랜드의 얼굴이 될 선수를 제시해야 한다는 건가?”
“예?”
내가 놀라 되물었다.
“아니야?”
“예에?”
“……그래, 제기랄. 너라고.”
케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우리 신밖에 없죠.”
“그렇지?”
“…….”
티파니의 칭찬에 내가 웃으며 대답하자 사나운 시선이 쏟아졌다.
케인의 시선을 피한 나는 크게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반응을 따져보자면 레이도 그에 못지않게 훌륭한 선수지만, 랙다운을 주도할 선수는 저밖에 없죠.”
“자신만만한데.”
“그럼요. 상대가 상대인데.”
“……누구? 나?”
“예, 저는 이 대립은 말하자면 해방 운동에 가깝다고 생각하거든요.”
“거창하군.”
“하지만 실제로 그렇죠.”
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 역할이 중요해요. 케인.”
“내가 킹메이커인 셈이군.”
“동시에 당신은 옛날의 감성을 간직하고 있는 남자라고 볼 수도 있죠. 그걸로 얼마 전 사고가 발생했던 바로 그 구시대 말입니다.”
케인이 침묵했다.
자극적인 각본을 통해 난관을 타개하고자 했던 랙다운은 도리어 팬들의 외면을 받게 되었다.
지금은 지나간 일이었지만 확실히 마무리를 지을 수 있다면 좋겠지.
태도 불량 시대.
환상적이었던 순간.
하지만 지금은 먹히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 계속해서 그런 각본을 사용하기에는 프로레슬링은 너무 대중적인 매체가 되고 말았다.
“언제까지 CZW 같은 짓을 텔레비전에서 보여줄 수는 없잖아요?”
CZW.
Combat Zone Wrestle의 줄임말로 뉴저지를 거점으로 삼는 악마적인 프로레슬링 단체였다.
거의 대부분의 경기가 하드코어 매치로 형광등, 유리, 포크, 칼날을 뽑은 전기톱을 무기로 쓰는, 그야말로 폭력의 극한에 달한 단체였다.
“그건 그렇겠지.”
케인 역시 씁쓸하게 웃었다.
주류로 올라온 문화는 더 이상 예전처럼 극단적인 방식을 취할 수 없게 된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만큼 책임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니 저희는 이번에 확실히 보여줘야만 하는 거죠. 저희가 그 시대에서 무엇을 가져올 것인지를.”
다소 표정이 굳어진 케인의 앞에서 나는 가볍게 웃으며 위로했다.
“저 또한 그 시절을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니 확실히 물려받을 수 있는 건 받아가야겠죠.”
“그게 뭐라고 생각하는데?”
“치열함입니다.”
그 시대에는 확실히 경기마다 선수들이 지독할 정도로 싸워댔다.
그건 분명히 지금의 시대에서도 확실하게 매력적인 가치였다.
그 말을 들은 케인은 또 금방 표정이 환해져서 날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역시…….”
“물론 헬 인 어 셀로 가야죠.”
그것밖에는 없었다.
그 의도가 어쨌든, 시나는 버닝콩에서 과거의 잔재들을 물리치면서 ‘전체 이용가 시대’를 열고자 했다.
그렇다면 난 그와는 반대로.
과거의 잔재들과 융합해 올해의 랙다운을 이끌어나갈 생각이었다.
버닝콩의 선택에 상처를 받은 수많은 팬들과, 그 밖의 새로운 팬들을 모두 수용하는 형태로.
이번 레슬 임페리움.
나와 케인 맥센의 경기는 분명 그 가치를 시사하는 장이 될 터였다.
* * *
헬 인 어 셀.
스틸 케이지 매치보다 훨씬 거대화된 철창 구조물 안에서 펼쳐지는, WWF 역사상 가장 ‘비싼’ 경기였다.
구조물이 워낙 커서 경기를 한 번 치를 때마다 들어가는 돈이 어마어마했다.
그만큼 위험했고, 굳이 따져보자면 가장 하드코어한 경기를 치를 수 있는 방식이었다.
6미터 높이에 5톤 무게의 철창.
그 안에 들어간 두 선수는 온갖 무기를 사용해가며 서로 싸워댄다.
이 작은 버전인 스틸 케이지 매치와는 다르게 ‘탈출’이라는 승리 방법이 없는 게 가장 큰 특징이었다.
그렇기에 선수들은 그야말로 구조물 안과 밖을 오가며 서로를 완전히 박살 내려는 각오로 싸워댔다.
헬 인 어 셀.
철창 안의 지옥.
태도 불량 시대의 상징과도 같은 그 경기에서 케인 맥센과 나는 기나긴 대립을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이 긴 악연의 시작은 킹스 럼블이 아닌 그보다 훨씬 이전. 바로 작년 9월의 섬머 수플렉스부터였다.
2월 2주차의 랙다운.
쇼의 오프닝에서 미리 촬영해둔 백스테이지 세그먼트가 나갔다.
우리는 오늘 케인 맥센의 패악질을 제대로 보여줄 생각이었다.
[로건! 로거어언!]
사무실에 앉아있던 케인의 모습이 나오자 관객들이 야유를 보냈다.
[Booooooooooooooooooo-!]
[어디 갔어! 이 영감탱이!!]
모든 팬들의 영웅인 캡틴 로건을 저런 식으로 막 대하는 케인의 모습은 링 위의 모습과는 달랐다.
이를 통해서 케인에게 이중적인 면모가 있음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잠시 후, 긴 한숨과 함께 GM인 캡틴 로건이 화면에 나타났다.
팬들의 환호가 이어졌다.
[Waaaaaaaaaaaaaggghhh!!]
[그래, 케인. 무슨 일이지?]
[아까 말한 거 다 해놨어요?]
[……보안 요원 배치 말이지?]
[그래요. 신 그 녀석이 절대 경기장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세요.]
[왔다는 보장도 없는데.]
[분명 왔을 겁니다. 그놈이 지금까지 회사가 하는 말 듣는 거 보셨습니까?]
그 말을 들은 관객 몇몇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카메라가 살짝 훑고 지나갔다.
나의 해고.
그로 인해 링 위만이 아닌, 경기장 전체가 무대로 변한 셈이었다.
[어쨌든 절대로. 그놈 오늘 경기장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세요.]
[네가 대체 뭘 근거로 녀석을 해고시킨 건지는 모르겠지만…….]
[뭐? 허어, 아. 그러고 보니 둘이 친구라고 했죠? 와, 이거 내가 어쩌면 가장 위험한 걸 내버려 뒀나?]
케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놈이 관객들의 야유 속에서 한숨을 쉬고 있는 로건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기억해둬요. 만약에 신이 경기장에 나타난다? 당신 역시 해고야.]
[Boooooooooooooooooooo-!]
관객들이 커다란 야유를 보냈다.
케인이 화면 밖으로 사라졌고 영상은 고민에 빠진 캡틴 로건의 모습을 비추면서 마무리가 되었다.
그리고 뒤를 이어.
관객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자신들의 의지를 외치기 시작했다.
[We Want SIN! We Want SIN! We Want SIN! We Want SIN!]
나를 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방송뿐만이 아니라 경기장 외벽을 타고 쩌렁쩌렁 울리는 챈트였다.
분명 신은 이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을 통해 기대감을 주었기에 반응은 계속해서 나왔다.
심지어는 내가 아닌 다른 선수들이 대립을 진행할 때조차 관객들이 내 이름을 불러댈 정도였다.
그건 꽤나 곤란한 상황이었다.
[We Want SIn! We Want SIN! We Want SIN! We Want SIN!]
크리스 젠코와 JBL의 싱글 경기.
팬들이 경기에 집중을 못하고 계속 내 이름을 외쳐대자 젠코와 JBL은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것도 다 각본이었다.
경기가 끝난 뒤 또 다시 이어진 백스테이지 세그먼트.
숨을 몰아쉬며 케인에게 다가간 젠코가 곧바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케인, 뭐라도 좀 해보라고!]
[무슨 소리야? 젠코.]
[지금 바깥에 저 멍청이들이 신, 신, 신, 계속 외쳐대는 탓에 귀가 멀어버릴 지경이라고!]
[We Want! SIN!]
팬들이 다시 소리쳤다.
[그냥 무시해. 젠코. 팬들이 쓰레기라는 건 너도 아는 사실이잖아.]
[Booooooooooooooooo-!]
[그들은 단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고 있을 뿐이야. 얼마 못 가서 분명히 신의 존재를 잊을 거야.]
[그 생각 때문에 작년에 랙다운이 어땠는지 잊어버렸어? 또 무슨 헛짓거리를 하려고 하는 거야! 그놈은 그냥 가만히 내버려두라고!]
[후우.]
한숨을 내쉬는 케인.
그 앞에서 계속해서 욕설을 섞어가며 분노를 토로하는 젠코.
결국 듣다 못한 케인이 젠코에게 한마디를 건넸다.
[넌 해고야.]
[……뭐?]
[그렇게 신이 좋으면 둘이 레슬링 단체라도 하나 세우던가. 괜히 맥센의 단체에서 이러고 있지 말고.]
[야, 너……!]
그걸 기점으로 케인은 선수들에게 갖은 행패를 다 부려대기 시작했다.
자신도 신경이 쓰이는지 신을 원하는 팬들의 목소리를 지우지 못한 선수들에게 괜히 화풀이를 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고, 위클리 쇼의 메인이벤트 시간이 찾아왔다.
그 직전, 광고 타임에 들어가기 앞서, 케인 맥센은 결국 분통을 터뜨리며 로건을 다시 찾아갔다.
그라면 현재 거의 유일하게 신에 대한 팬들의 반응을 지워낼 수 있는 선수였기 때문이었다.
[로건! 로건!]
[……또 뭐냐. 케인.]
[나가서 뭐라도 좀 해요. 관객 놈들이 헛소리를 해대는데, 이대로 가면 오늘 쇼 완전히 망하겠어.]
[We Want SIN!]
팬들이 다시금 목소리를 냈다.
물론,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진짜 의도였다.
팬들이 반발하고 있는 케인을 계속해서 세그먼트 전면에 내세운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우리의 랙다운을 위해 이번 레슬 임페리움에서 확실하게 신을 띄워야만 한다.
그것이 모든 랙다운 크루들이 동의한 사항이었다. 거기에 나는 마음이 든든해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쇼 전체가 나 하나를 위해서 움직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자 책임감 역시도 느꼈다.
영상에서 긴 한숨을 내뱉은 로건이 이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알겠다.]
[Booooooooooooooooooo-!]
얼핏 케인에게 굴복을 하는 듯한 그의 모습에 야유하는 관객들.
정확히 말해 로건 자체보다 그런 각본을 쓴 회사에 대한 야유였다.
하지만 잠시 후, 이 야유는 분명 얼마 가지 못해 낼 수 있는 최대의 환호로 뒤바뀌게 될 것이었다.
케인의 참교육과 동시에.
나를 이 브랜드에서 가장 핫한 선수로 띄워주기 위해 모두 자원했다.
정말로 ‘모두’가.
서른 명에 가까운 랙다운의 선수들이 모조리 링으로 나선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위클리 쇼를 완전히 뒤집어 놓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