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
에보니 수.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그녀는 오랜만에 만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특유의 쾌활한 미소가 여전했다.
“오랜만이에요. 신.”
“그러게요. 이게 얼마만이지?”
“글쎄다. 당신이 GCW 떠나고 한 번 만난 이후로 처음인가?”
“그동안 잘 지냈어요?”
“물론, 바빠졌지만.”
“좋은 일로 바빠진 거죠?”
“이게 좋은 일이려나.”
자연스럽게 우리 사이에 섞여든 그녀는 그간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일단 딸이 고학년이 되었지.”
“제시?”
“네, 그리고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음악 한다고 난리에요.”
“무슨 음악?”
“랩.”
“어쩌다가 랩을 하게 됐대?”
“그야 당연하지.”
에보니가 키득키득 웃으며 한 말에 나는 아주 잠깐 말을 아끼고 기다렸다.
자칫 인종적인 뉘앙스가 섞일 수 있었고, 그렇다면 조심을 해야 했다.
그러자니 킥킥 웃는 에보니.
“아니, 애가 당신 팬이라서 스눕-덕 뮤직 비디오를 봤단 말이죠?”
“아, 그래서?”
“예, 그 교육에 안 좋은 거.”
“…….”
“여자를 ●●하고 아주 몸에 좋지 않은 나쁜 걸 피우라는 그 노래.”
“죄, 죄송합니다.”
“그쪽이 미안할 게 뭐 있어요~.”
아니, 그래도 좀 미안했다.
뭐, 어쨌든.
그 때문에 제시에게 신디사이저를 하나 선물해주려고 이번 위클리 쇼에 지원을 하게 됐단다.
“구급요원이에요. 옛날에 공부할 때 자격증 따놓은 게 있거든.”
“그럼 내일 대기하겠네요?”
“그럴 예정이에요. ……그래서 말인데, 내일도 러셀하고 싸웠던 것처럼 하드코어하게 할 건가요?”
“예?”
“그때 러셀이 철창 위에서 뛰는 거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또 그런 짓 하는 건 아니죠?”
“…….”
이걸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나는 내일 분명 러셀과의 경기는 어린애 장난으로 느껴질 정도로 하드코어한 경기를 치를 예정인데.
만나서 반가운 건 사실이지만 나는 그 물음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 * *
4월 2일. 일요일.
미 동부시 기준 17시.
모든 선수들의 드림 스테이지.
세계 최대의 프로레슬링 이벤트.
레슬 임페리움 2006이 그 성대한 막을 열며 폭죽 쇼가 시작되었다.
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펑-!
막 저녁놀이 지기 시작한 하늘을 향해 쏘아진 불꽃이 연기와 꼬리를 남기며 힘차게 폭발했다.
오늘 경기장의 컨셉은 ‘감옥’.
두껍고 검은 쇠창살로 만들어진 입장로 세트장은 척 보기에도 위험하고 또한 강렬하게 뇌리에 남았다.
[Waaaaaaaaaaaaaaaaggghhh!]
환호를 보내는 20만 명의 관객들.
거대한 경기장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만원사례를 기록했다.
아침부터 내내 그 열기에 취해있던 나는 이제야 시작된 레슬 임페리움을 보며 전율에 몸을 떨었다.
하지만 아직 한참 남았다.
케인과 나의 경기는 무려 프로레슬링 업계에서 가장 영광스럽다고 말할 수 있는 ‘메인이벤트’였다.
“잘들 하겠지?”
“분명 멋진 쇼가 될 거예요.”
티파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메인이벤트도 완벽하겠죠.”
그럴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자리에 앉아 경기가 하나하나 지나가는 걸 보았다.
레슬 임페리움의 오프닝 매치는 WWF 월드 태그 팀 챔피언십이었다.
[Well-!! It’s The Big Jyo-!]
먼저 링에 입장하는 것은 현 태그 팀 챔피언인 빅 죠와 카인이었다.
경기의 목적은 간단했다.
짧고 박력 있는 경기를 통해 최대한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그처럼 상대 선수들로 나온 두 사람은 최대한 일방적으로 당해주었다.
이것이 프로레슬러다.
이렇게 강하다.
그것을 보여주는 듯한 경기.
그 뒤로 몇 개의 경기가 더 지나갔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자신의 경기에 최선을 다해 임했다.
그리고 내 친구들도 제각기 맡은 역할에 충실히 각각 경기를 치렀다.
개중에서도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끄는 건 역시나 입장 방식이었다.
레슬 임페리움은 프로레슬링 업계 최대의 프로파간다로서도 기능했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 급이 되는 선수들은 회사에 제안해 특별한 입장을 연출하는 것이 가능했다.
오튼의 입장 때는 그 등 뒤로 불꽃의 비가 떨어졌고, 러셀이 입장할 때도 화려하게 폭죽이 터졌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회사의 정치 끝판왕, 트리플H.
그는 로난 더 바바리안을 본 따서 만든 야만스러운 가죽 망토와 왕관을 쓴 채 옥좌에 앉아 있었다.
[Time To Play The Game……!]
왕 중의 왕.
그는 엄숙할 정도로 멋진, 그야말로 제왕적인 입장 씬을 선보였다.
그리고 그 상대인 시나.
아직까지 그래도 악동의 이미지가 남아 있던 시나는 마피아들을 호위로서 내세운 채 링에 나왔다.
이어서 그는 손에 들고 있던 토미 건을 실제로 허공에 다섯 발 정도 쏴갈기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구세대와 신세대.
왕과 챔피언의 대결.
그렇게 두 사람의 경기가 시작되는 동안, 나는 천천히 몸을 풀었다.
케인 쪽의 상황을 살피러 갔던 티파니가 얼마 후 이쪽으로 돌아왔다.
“그쪽은 어떻게 됐대?”
“준비 끝났대요.”
우리 둘 역시도 두 사람 못지않은 특별한 입장씬을 준비해두었다.
하지만 두 사람과는 달리 전혀 돈이 들지 않은 순수한 연출이었다.
티파니의 물음에 나는 대답을 미루고는 계속해서 몸을 풀었다.
경기는 20분에 걸친 혈투였다.
헌터의 느릿한 리드 아래 시나가 언더 독 스타일로 맞춰서 이어지는 경기는, 솔직히 재미없었다.
팬들도 시나와 헌터의 네임벨류 때문에 환호를 보내준다는 눈치였다.
그렇기에 난 의욕이 더 샘솟는 것을 느끼면서 마지막으로 자리에 앉아 마음을 다잡기 시작했다.
케인 맥센과의 헬 인 어 셀 매치.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버렸다.
롤러코스터는 낙하하기 직전이다. 이제 와서 내릴 순 없었다.
죽어도 좋다.
하지만 절대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이제까지 준비해온 것이었다.
내 영혼을 담아.
* * *
레슬 임페리움의 세미 메인이벤트는 챔피언인 숀 시나가 성공적으로 벨트를 방어해내면서 끝났다.
그리고 찾아온 광고 시간.
하지만 관객들은 자리를 뜨지 못하고 경기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헬 인 어 셀.
천장에 펼쳐진 채 걸려 있던 철창 구조물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마치 펼쳐진 주사위처럼 되어 있는 헬 인 어 셀 철창이 시설팀의 주도하에 재빨리 조립되어 나갔다.
“빨리 빨리 하자!”
[Yeeeeeeeeeeeeeeeeaaaahhh!]
어찌나 다들 기대하는지, 링 위에 서있는 시설팀장이 소리를 질렀을 뿐인데도 큰 환호가 쏟아졌다.
그렇게 조립되는 지옥의 철창.
6.5미터의 높이. 5톤의 무게.
천장까지 모두 막혀, 그야말로 빠져나갈 공간이라고는 없었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헬 인 어 셀 매치는 절대 안에서 끝나지 않는다.
바로 그게 업계의 룰이었다.
회색의 철창 안에는 카메라 한 대와 심판, 두 명의 선수가 들어갈 예정으로, 바깥에 있던 보조 심판들이 철저하게 자물쇠를 채워둔다.
그렇게 완성되어가는 구조물의 모습을 보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까.
아니, 이 안뿐일까?
그렇게 셀이 완성되었고, 링 벨이 올리며 아나운서가 입을 열었다.
[다음 경기는 이번 레슬 임페리움의 메인이벤트인 헬 인 어 셀 매치입니다!!]
[Waaaaaaaaaaaaaaggggghhh!!]
[규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반칙이든 허용되며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핀 폴과 서브미션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의 뒤를 이어 케인 맥센의 음악이 울려 퍼졌다.
[Here Come’s The Money-!]
[Money Talk!]
[Booooooooooooooooooo-!!]
당연하다는 듯 연잇는 야유.
하지만 케인은 나오지 않았고.
그 대신 영상이 하나 재생되었다.
링에서 케인이 보인 활약들.
내던져지고 굴려지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과거의 케인 맥센을 담아낸 멋진 영상이 흘러나왔다.
자신은 이미 훌륭한 레슬러다.
열등감에 찬 케인의 주장을 본 팬들의 야유는 이전보다 더 커졌다.
[Booooooooooooooooooo-!]
하지만 본인은 꿋꿋했다.
미식축구 저지에 농구화라는 특유의 경기복 차림을 한 케인이 입장로를 통해서 경기장으로 나왔다.
터져 오르는 폭죽.
특유의 폴짝폴짝 뛰는 스텝.
그렇게 링으로 올라가기 직전, 케인은 랙다운의 선수들을 불러냈다.
그에 응한 대부분이 악역이었다.
오늘 벨트를 빼앗긴 랜스 오튼, JBL과 올랜도 도슨에, 하이든리히와 마크 진랙 같은 떡대들까지.
그런 식으로 선수들의 인정(?)을 받은 케인이 이어 셀 안에 들어왔다.
방금 신이 했던 말대로, 돈은 아끼면서도 자신의 현재 상태를 멋지게 보여주는 듯한 퍼포먼스였다.
케인 맥센은 억지를 부리고 있다.
자신은 에디처럼 인정받을 가치가 있는 선수라고 있는 힘껏 주장했다.
하지만 팬들은 냉정했다.
[Booooooooooooooooooo-!]
그 음악이 멈추었음에도 팬들의 야유는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20만이 보내는 대합창.
그것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조지아의 아들.
쿵-쿵-쿵-쿵-쿵-쿵-쿵-!!
빠밤-빠밤-빠밤-빠밤-빠밤-!
그 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하자 조지아를 포함해 전 세계에서 모인 팬들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Waaaaaaaaaaaaaaaggghhhh!!]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GCW! GCW! GCW! GCW! GCW! GCW! GCW! GCW! GCW!]
케인 맥센의 반대편에 위치한 남자.
그 음악과 영상이 재생되고 있는 가운데, 본인은 나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팬들에 의해 만들어진 그 엄청난 콜은 그조차 입장씬의 일부라고 느껴질 정도로 훌륭했다.
인디에서 시작해.
GCW를 거쳐.
버닝콩을 지나.
랙다운에 이르기까지.
그는 계속해서 싸워왔다.
그것을 모두가 알았고 당당한 한 사람의 프로레슬러로 인정받았다.
마침내 다가온 그의 입장에 앞서, 케인이 그랬던 것처럼 대형 스크린에 영상이 재생되었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었다.
실시간이었다.
[Uoooooooooooooooohhhhh!!]
조지아 주의 깃발과 미국의 깃발 아래에 있는 그가 지금 위치한 곳은 바로 경기장 바로 앞이었다.
뒤로 돌아선 그가 경기장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고, 이윽고 카메라는 남자의 등을 따라 뒤에서 찍기 시작했다.
넘겨다보는 구도다.
그가 걸어 나가는 길을 비추는.
그 앞에는 팬들이 있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4시간 넘게 이어진 레슬 임페리움. 하지만 팬들은 지치지 않았다.
아니, 지금 여기에서 그의 이름을 외치지 않으면 대체 뭘 한단 말인가.
보안 요원들이 길을 막고 있는 가운데, 경기장 로비를 지나 고릴라 포지션 쪽으로 들어섰다.
[잘해라. 꼬마.]
테이커와 주먹을 맞부딪히고.
[형제여! 부탁하네!]
로건과 어깨를 부딪친 뒤.
[힘내요. 신.]
티파니와 눈빛을 나누며.
그렇게 케인과는 정반대로.
자연스럽게 수많은 이들의 인정을 받은 그는…… 고릴라 포지션을 벗어나 다시금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지쳐 앉아있는 선수들을 헤치고,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그는 탄흔이 조각된 재킷을 걸쳐 입었다.
그리하여.
그가 계속 걸은 끝에 도착한 곳은 어딘가로 내려가는 계단 앞이었다.
커튼을 걷고 나가자.
높은 천장.
널찍한 공간.
내리쬐는 조명.
열기에 찬 공기.
레슬 임페리움이 펼쳐졌다.
[Yeeeeeeeeeeeeeeeeaaaahhh!!]
20만 명의 팬들이 환호를 보냈다.
그의 음악이 계속 연주되었고.
카메라는 남자의 어깨 너머를 비추면서 경기장의 전경을 담아냈다.
그리고 전환.
먼 곳에서 빠르게 확대.
관객석을 통해 나온 남자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환호 속에서 손을 내뻗는 팬들과 하이파이브를 해주며 입장했다.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전혀 모르는, 하지만 그를 너무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남자로 인해 즐거움을, 희망과 용기를, 통쾌함을 얻은 전 세계에서 모인 각양각색의 사람들.
심지어 말이 통하지 않아도.
70억 인구 중 단 한 사람에 불과한 그는, 경기장까지 찾아온 20만 명, 프로레슬링을 좋아하는 수천만 명의 기대를 받으며 링으로 입장했다.
하지만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각 자리에 보안요원들이 서있다고 하더라도 갑자기 누군가 난입한다면 분명히 입장을 방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러지 않았다.
사람들 모두가 그저 자신들의 염원을 담아 소리칠 뿐.
그의 걸음을 방해하지 않고 길을 열어주었다.
미국 이민자인 부모님의 아들.
그저 분단된 작은 나라, 한국의 피를 타고난 미국인 한 사람이.
전 세계의 성원을 받으며 그렇게 링 안으로 들어섰다.
연기도 폭죽도 없었다.
하지만 사람은 있다.
용광로처럼 활활 타오르는.
마침내 셀 안에 들어가 로프를 밟고 올라선 남자가 두 팔을 넓게 펼치며 크게 소리쳤다.
“오늘 미쳐볼 준비됐냐?! 이 자식들아아아아아아아아!!”
그냥 한국어로 말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걸 이해했다.
[Yeeeeeeeeeeeeeaaaaaahhhh!!]
경기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흥분해 숨을 몰아쉴 수밖에 없었다.
신은 생각했다.
‘바벨탑 좆까!’
할 수 있겠다는 자신이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