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
그로부터 정확히 하루 뒤.
락커룸에 소속된 선수들에게 문자 메시지로 지령이 하나씩 떨어졌다.
나와 오튼에게도 왔는데.
그 내용을 읽은 뒤, 제안했던 각본이 받아들여졌음을 알아차렸다.
[전 선수들에게 알립니다.
태그 팀으로 활동해보고 싶은 선수를 뽑아 이 번호로 답장을 보내주세요.
3시간 뒤에 마감하겠습니다.]
“이게 뭐야?”
오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학교 시험도 아니고 뭘 마감해.”
“다들 피곤했겠지.”
“뭐?”
“해석하자면 이런 의미야.”
어제 밤새 회의를 해서 지금 죽을 것 같으니까 3시간만 자겠다. 그동안에 너희도 각본에 힘 좀 보태라.
“대충 그런 거지.”
“……넌 어떻게 그런 걸 아냐?”
“아, 뭐.”
나도 해봤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것과는 달리 적당히 대답을 회피한 나는 핸드폰 자판을 꾹꾹 눌러 한 사람을 적어 보냈다.
물론 캐스켓-테이커였다.
옆에 있던 오튼은 그런 내 재빠른 행동에 뭔가 이상한 기대를 했지만.
“어, 야. 설마 나 썼냐?”
“……뭐?”
“하, 어쩔 수 없네! 나도 네 이름 써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인마! 근데 이거, 우리 태그 팀 하는 건가?”
그럴 일은 없을 거다.
하지만 착각을 그냥 놔두는 것도 안쓰러웠으므로, 나는 적당히 오튼(멍청이)에게 조언을 건네주었다.
“몇 사람 더 써서 보내.”
“응? 왜?”
“당연히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도 있어서지. 나랑 태그 팀 못 되면 다른 선수랑 맺어야 할 거 아냐.”
“흠, 누가 좋을까. 바티스타?”
“좀 재미있는 조합 없어?”
“글, 쎄다.”
고민에 빠진 오튼.
“……레이 선배는 어떨까?”
“뭐?”
“너와 러셀처럼 툭탁툭탁하면서 서로 잘 맞는 태그 팀인 거지.”
“나쁘지 않은데.”
나는 솔직하게 감탄했다.
레이와 오튼의 조합이라.
굉장히 신선하게 느껴졌다.
한 번 대립을 진행해봐서 서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데다가, 레이라면 저 만사가 태평한 오튼을 잘 이끌고 나가주지 않을까.
‘역시 대단한 놈이라니까.’
하긴, 전생의 일로 이미 재능은 확실하게 증명이 된 오튼이니까 이런 아이디어를 낼 수도 있는 거겠지.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은 이어진 오튼의 말을 듣고는 후회로 변했다.
“그 양반은 외골수니까 나보다 훨씬 더 경기를 많이 뛰어주겠지?”
이런 놈이 월드 챔피언이었다니.
* * *
내가 슬쩍 제안한 아이디어는 현재의 회사 사정에 정통한 각본팀에 의해서 적절하게 변주가 되었다.
일단, ‘킹 오브 더 태그’라는 뻔한 이름으로 작명된 태그 팀 리그전은 석 달에 걸쳐 진행될 예정이었다.
그 이유는 이러했다.
“섬머 수플렉스에서 마지막 경기를 치르면 관심도가 높을 테니까요.”
나를 포함해 메인급 선수들 몇 명이 모여서 그 설명을 듣고 있었다.
6월 페이퍼뷰는 버닝콩 단독 개최.
우리는 7월 페이퍼뷰인 리벤지에서 그간의 성과를 보인 뒤, 8월의 섬머 수플렉스로 나아갈 예정이었다.
“리그는 A블록, B블록으로 나눠서 진행할 예정이고요. 7월 페이퍼뷰 이후에 스왑을 하려고 합니다.”
“리벤지에서는 어떻게 되지?”
테이커의 물음에 각본팀장이 최대한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각 블록의 우승자를 가려내서 태그 팀 챔피언과 트리플 스렛 태그 팀 매치를 열려고 생각 중입니다.”
“차라리 2연전은 어때요?”
내가 의견을 꺼냈다.
“메인이벤트로 태그 팀 챔피언 매치를 넣고, 오프닝 경기에 리그 최종전을 편성하는 거죠. 여러모로 재미있는 구도가 나올 것 같은데요.”
“그게 더 나으려나?”
“나도 그 편이 나을 것 같군.”
부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수들 대부분은 세 ‘팀’이 맞붙는 건 그림이 좀 어색하게 나오기 때문에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태그 팀 트리플 스렛이라고는 하지만, 링 위에 서있는 건 두 명뿐.
경기를 진행하다가 상대 선수와 태그를 할 때도 있어서 솔직히 말도 안 되는 경기 방식이었다.
어쨌거나.
“리그는 점수제로 진행되고, 7월 페이퍼뷰 후에 초기화가 되는…….”
“아, 그것도 초기화하지 말죠? 극적인 그림을 위해서는 점수 차가 계속 나야지 어떻게든 될 거 같은데.”
“……그런가?”
“이, 일단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이런, 각본팀장이 내 계속된 지적에 자신감을 잃었다.
또한 옆의 선수들도 그편이 드라마틱하고 생각해서 동의를 하니까.
최종전인 8월 섬머 수플렉스를 설명할 때 각본팀장은 거의 잦아드는 목소리로 아이디어를 설명해나갔다.
“사실 8월에도 트리플 스렛으로 갈까 생각을 했거든요.”
“…….”
“괘, 괜찮을까요?”
“…….”
“신, 어떠냐.”
“그, 그게 말이죠.”
사실 아이디어가 있기는 했다.
“건틀릿 매치는 어떨까요.”
“건틀릿 매치?”
“호오.”
주변 선수들이 내 아이디어를 듣고 무척 큰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건틀릿 매치.
두 팀이 경기를 가져 승자가 나오면 패자는 퇴장하고 곧장 새로운 도전자가 나타나는 방식의 경기였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팀이 최종 승자가 되는데.
다시 말해, 첫 경기 주자가 불리하단 것이다.
그럼에도 드라마틱한 경기를 만드는 데에는 또 이만한 규칙이 없었다.
그런 내 말에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크리스 젠코가 말을 꺼냈다.
“하지만 마지막 경기를 건틀렛 매치로 하면 그때까지의 리그전이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되지 않나?”
“그렇죠. 그렇기 때문에 경기나 부킹에 신경을 써서 팬들이 모두 자격이 있다고 느끼게 해야만 합니다.”
“그거 어렵겠군.”
“하지만 대단할 겁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 리그전, 어쩐지 스포츠 팀끼리 대결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나요?”
“그것도 그렇군.”
“선수 출신지를 강조하면서 팀 티셔츠도 만들어서 팔면 꽤나 짭짤하게 이윤이 남을 것 같고요.”
“귀신같은 놈.”
피식 웃은 테이커가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각본팀장을 바라보았다.
“어떨 것 같나?”
“아, 네. 확실히 그게 훨씬 더 좋겠군요. 거기다 그렇게 하면 전체적인 각본의 부킹 방향도 자연스럽게 정해지는 법이니까.”
고개를 끄덕인 그가 가지고 온 노트에 내 아이디어를 받아 적었다.
이제는 아예 자존심 같은 건 다 내려놓고 나를 신뢰하는 눈치였다.
물론, 그게 끝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덟 팀 모두가 건틀릿 매치로 붙는 건 너무 복잡해요. 각 블록에서 상위 두 팀이 나와서 총 네 팀이 붙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태그 팀 챔피언이 나오는 시스템인가?”
“그렇습니다.”
“흠, 확실히 그편이 낫겠네요.”
나도 동의했다.
여덟 팀이 다 붙으면 5분씩 싸운다고 하더라도 경기에 어마어마한 시간이 소모된다. 그래서는 안 되지.
그렇게 대충 계획이 정리되고.
각본 팀장은 일단 이번 주 금요일 위클리 쇼를 위해 짜온 아이디어를 우리들에게 보여주었다.
“태그 팀은 완전히 랜덤으로 선발된 것처럼 연출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여기 영상을 봐주십시오.”
각본 팀장이 사무실 한쪽에 있던 벽에 빔 프로젝터를 쏘아보냈다.
A블록 네 팀.
B블록 네 팀.
그렇게 총 여덟 팀.
열여섯 명의 선수들.
“원래부터 태그 팀이었던 MNM이나 메가 훌리건즈는 그대로 출장하되, 다른 선수들의 선발이 마치 지금 뽑은 것처럼 연출하려고요.”
각 블록의 팀칸이 강조되면서 그 옆에 프로필로 찍은 선수들의 사진이 빠른 속도로 바뀌어 지나갔다.
효과음도 있군.
드르르르르르르르, 땡!
A블록 1번 팀의 선수 A는 현재 월드 챔피언인 레이 미스테리우스.
“물론 이렇게 되면서 리그전과 챔피언 방어를 병행해야만 하는 레이에게는 스케줄 부담이 있겠습니다만.”
“그조차 흥미로운 드라마가 나올 수 있을 것 같은데? 거의 모든 선수가 이 리그전에 참가하니까.”
A블록에 소속된 1팀의 선수 B로는 랜스 오튼이 나왔다.
그걸 본 순간 관객들의 반응이 눈에 훤히 그려졌다.
‘재밌겠는데.’
그런 식으로 각 블록의 선수가 채워지면서 나와 테이커도 나왔다.
B블록의 마지막 팀.
그리고 기왕 영화 촬영 후의 복귀전인 만큼 첫 번째 경기는 이기게 해줄 모양이었다.
그렇게 해서 최종적으로 정해진 태그 팀과 블록은 다음과 같았다.
[A블록]
1팀 : 레이 미스테리우스 & 랜스 오튼
2팀 : 하드코어 말리 & JBL
3팀 : 킹-부커 & 바비 애슐리
4팀 : ‘투 쿨’
[B블록]
1팀 : ‘MNM’
2팀 : 크리스 젠코 & 빌리엄 리걸
3팀 : ‘와이엇 패밀리’
4팀 : 신 & 디 케스켓-테이커
어라?
“팀장님?”
“응, 왜?”
“와이엇 패밀리가 있네요?”
“아, 이번에 복귀 예정이다. 드디어 부상 완치 판정이 떨어져서.”
반가운 기분이었다.
와이엇은 GCW 시절부터 함께해온 동료인 만큼, 다시 일하게 될 순간을 지금까지 기대해왔다.
‘에디는 방출되었지만.’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GCW 시절 동기인 에디 모리스가 나가고 브로큰 와이엇은 현재 다른 두 부하를 영입해 활동 중이었다.
팬들에게도 나름대로 미드 카더로 그 기괴한 매력을 알리고 있는 선수였지만, 공백기가 너무 길었다.
그래도 이번에 복귀하면 서로 좋은 대립을 뽑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쁘지 않은데.’
나는 손에 들려 있는 팀원 구성 표를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 * *
그리고 그 주 금요일 랙다운.
방송은 밤새 제작한 ‘킹 오브 더 태그’ 홍보 영상과 함께 시작되었다.
랙다운의 레전드 선수들이 각자 어둠 속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 파트너와 함께 전의를 다지는 형식.
그와 함께 섭외한 성우가 갖가지 미사여구로 이 이벤트를 포장했다.
[최고의 옆에 있는 최고.]
[WWF 랙다운 온리, 지상 최대의 태그 팀 프로레슬링을 맛보는 시간.]
[킹 오브 더 태그.]
빠바밤~!
킹 오브 더 킹즈를 패러디한 멋진 로고와 함께 랙다운이 시작되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쾈-!
터져오르는 폭죽.
“캬!”
“좋아! 가자고!”
“멋진 영상이고만!”
새로 시작된 대형 이벤트와 각본.
거기에 마음을 모아 의기투합한 선수들은 크게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다들 애들 같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옆에 앉아 있던 바비가 말을 걸어왔다.
오랜만에 만난 그는 GCW 시절과 딱히 달라진 게 없는 모습이었다.
초롱초롱한 눈매.
각진 근육질의 잘생긴 흑인.
“분위기가 갑자기 좋아졌는데.”
“응? 그래요?”
“분명 지난주만 하더라도 딱히 이렇게까지 좋은 건 아니었는데.”
그렇게 말한 바비는 뭔가 어색한 듯 주변을 힐끔거리면서 돌아보았다.
그리고 부커에게 걸렸다.
“어이, 바비!”
“예, 선배님!”
황급히 달려가는 바비.
GCW 입사 선배지만 메인 콜 업은 내가 훨씬 더 빨라서 우리의 관계는 뭔가 이상해지고 만 것 같았다.
……당분간은 저렇게 두자.
어쨌거나.
의사의 권고에 따라 체중을 조금 감량한 와이엇도 건강하게 돌아왔고.
아직 단순한 감에 불과했지만, 왠지 이번 이벤트는 대박을 칠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느껴졌다.
새로 전개되는 각본에, 새로운 팀 업! 복귀하는 선수들!
듣기만 해도 여러 드라마가 기대되는 구성이었다.
화면 속에서는 해설자들이 한창 오늘 룰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킹 오브 더 태그! 랙다운에 소속된 선수 전원이 참가하는 이벤트입니다!]
……안 참가하는 선수들도 있지만, 원래 쇼란 게 과장을 하는 법이다.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선수들이 나오죠! 캐스켓-테이커! 킹-부커! 레이 미스테리우스에 이르기까지!]
[잠깐만요! 신은 어디에 있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신 역시 돌아온다는 이야기가 있군요! 하핫! 대체 누구와 태그를 맺게 될까요!]
[아아, 이번 태그는 공정성을 위해 미리 짜여 있는 태그 팀을 제외하고는 전원! 랜덤으로 팀이 구성됩니다!]
[이런, 저는 신과 레이의 팀 업을 보고 싶었는데 아쉬운 일이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그 둘이 팀이 된다면 꽤나 골치 아프겠어요!]
……뭐, 대충 그런 식이었다.
과장된 화법으로 설명을 계속 이어나가는 목소리 좋은 두 해설자들.
그걸 보고 있자니 이어, 방송이 지난번에 각본팀장이 보여준 ‘랜덤 뽑기 화면’으로 전환되었다.
[누가 첫 번째일까요!]
그와 함께 돌아가는 룰렛.
근육 보정을 조금 한 선수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고, 특유의 쌈마이한 효과음과 함께 레이에서 멈췄다.
그 순간 터지는 환호.
[Yeeeeeeeeeeeaaaaaahhhh!!]
[Boo-Ya-ka! Boo-Ya-ka!]
팬들의 엄청난 지지 속에 레이 미스테리우스가 입장로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파트너를 기다리는 레이.
다시금 화면이 돌아가고.
팬들이 기대하면서 그걸 바라보는 가운데, 오튼의 모습이 나타났다.
당연하다는 듯 야유가 나왔다.
[Booooooooooooooooo-!!]
하지만 오히려 당사자들이 그런 상황에 훨씬 더 놀란 것 같았다.
입장로 위에서 서로를 경계하면서 서있는 오튼과 레이.
언제나 쓰였던 클리셰지만.
‘언제나 좋구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관객들은 그런 상황이 혼란스러운지 두 사람이 멀찍이 떨어져 링에 오르는 동안 반응은 반반으로 갈렸다.
야유와 환호가 뒤섞여 엉망진창.
그게 이 팀의 시작이었다.
‘우리도 만만찮겠지만.’
나는 구석진 자리에서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테이커를 힐끔 보았다.
캐스켓-테이커와 신.
구와 신의 조합.
일명 신-테이커 팀.
분명 압도적인 환호를 받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