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263화 (263/634)

263.

1990년 11월.

링 서바이벌의 제거 매치였다.

캐스켓-테이커라는 이름으로 소개된 선수가 경기장에 등장한 순간 장내는 그야말로 공포와 경악에 휩싸였다.

바-바바-바바밤-!

음산한 장송곡과 함께 205cm에 달하는 검은 코트의 거한이 나타났다.

해설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Oh! Take A Look!]

[Holy Coward!!]

[Look At That Size Of Him!!]

진짜 사나이들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프로레슬링 업계에 그야말로 ‘장송곡’처럼 등장한 것이 바로 그였다.

그 모습을 본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렸고 옆의 부모들은 달래주느라 순간적으로 쇼가 엉망진창이 되었다.

정의로운 영웅과 얄미운 악역이 싸우던 프로레슬링 업계에 등장한 테이커는, 그야말로 ‘절대악’과도 같았다.

얼굴은 무표정했고.

피부는 새하얗게 질렸으며.

눈깔을 까뒤집어 흰자만 보이게 하는 그 퍼포먼스는 당시 쇼를 보던 어린이들의 여벌 팬티를 희생시켰다.

하지만 그때 당시, 캐스켓-테이커는 막 산하 단체 생활을 끝마치고 메인 쇼로 콜업이 된 상태였다.

그래서 사실 ‘개쫄아’ 있었다.

창백한 얼굴을 만들기 위해 회장의 지시로 얼굴에 바른 파운데이션이 땀으로 녹아내렸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당시 락커룸은 선수간의 알력 다툼이 엄청나게 심한데다가 선후배 관계도 지금보다 거칠었는데.

테이커는 링에 나가기 직전까지 선배였던 ‘코코 제이’에게 갈굼을 당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테이커가 경기에서 코코를 완벽하게 제압하는 부킹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분풀이를 당했다.

코코 제이는 말했었다.

네가 뭐하는 놈이고 어디서 왔는지는 몰라도 경기 중에 실수라도 한 번 하면 아예 반 죽여버리겠다고.

……그리고 그로 인해 잔뜩 긴장한 테이커는 실수를 저질렀다.

링으로 나온 코코 제이를 로프로 던져버리고 피니시 무브인 툼스톤 파일 드라이버를 먹이면 되는 건데.

로프 바로 앞에서 기술을 쓰는 바람에 코코 제이의 발이 로프 쪽으로 떨어져서 허둥지둥 옆으로 옮겼다.

바로 카운트를 세고자 달려왔던 심판이 그렇게 허둥지둥 움직이는 테이커를 보고 당황해서 물러나는데.

어떻게든 코코 제이의 가슴에 양손을 올리고 특유의 커버 동작을 취하긴 했지만 눈을 뒤집는 걸 까먹었다.

최악의 기억이었다.

하지만 테이커는 지금 이 순간, 어쩐지 그때를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마치 그때처럼.

하지만 달라진 게 하나 있다.

15년이 지났다.

데뷔 후로.

“Go Taker!!”

직접 고른 테마 음악에 맞춰 테이커는 바이크를 몰고 링으로 나갔다.

장의사 캐릭터와는 달리 현재 쓰는 바이커 기믹은 보다 자유롭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가능했다.

2004년쯤에 다시 원래의 장의사 기믹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나왔지만.

GCW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버닝콩으로 콜 업 되어 활약하고 있던 한 꼬마를 보고는 생각이 변했다.

그게 바로 신이었다.

바트의 심술로 쿵-퓨리라는 말도 안 되는 기믹을 부여받았지만, 그걸 또 어처구니없는 방식으로 소화해낸 녀석.

그 모습을 본 테이커는 장의사 기믹으로의 복귀를 좀 더 거대한 대립을 위해서 잠시 봉인해두기로 결정했다.

……바이크 타는 게 좋기도 했고.

그렇게 링으로 들어서자 팬들은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한 채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현 랙다운의 라이징 스타.

그리고 얼티밋 스타.

그 둘의 페이스 투 페이스.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이 탄생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드디어 나오셨군. 파트너.”

겁을 먹지 않는다.

연기를 넘어서서 테이커와 같은 거물을 앞에 두고도 긴장하지 않는 선수는 지금껏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나타났다.

그것도 새파란 애송이였다.

테이커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하지만 연기는 완벽했다.

마치 만종晩種과도 같은 목소리.

“나와 싸우고 싶다고.”

“그래, 나는 지금껏 당신 같은 남자들을 쓰러트려 오면서 내가 누군지, 왜 여기에 있는지를 증명했으니까.”

“그리고 나는 반대로 너 같이 겁 없는 애송이들에게 내가 계속해서 최고의 자리에 있음을 증명해왔지.”

[Taker! Taker! Taker! Taker! Taker! Taker! Taker! Taker! Taker!]

챈트가 이어졌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두 개의 챈트였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두 선수는 각자 팬이라는 이름의 강력한 우군들을 등에 업은 채 서로를 노려보았다.

물론, 테이커가 우세했다.

두 사람은 계속해서 한마디씩 주고받으면서 세그먼트를 이어나갔다.

“물론, 당신이 파트너로서 싫단 건 아니야. 오히려 과분한 존재지. 그렇기 때문에 난 싸워야겠다는 말이야.”

“내가 거기서 널 짓밟는다면?”

“뭐, 그것도 나름대로 속이 시원하겠지 싶은데. 그럼 당신은 어때?”

“뭐?”

“나에게 진다면 어떨 것 같아?”

“……고려해본 적도 없군.”

“제기랄! 그러시겠지! Phenom!”

신이 황당하다는 듯 돌아섰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링 위의 두 사람은 ‘한번 붙어보자!’며 협의를 해나갔지만 거기에 서로에 대한 악의는 없는 상태였다.

선의의 경쟁 구도와 같았다.

그렇기에 팬들은 그 싸움을 기대하면서도 가벼운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이후로 분명, 비가 온 뒤 땅이 굳듯 두 사람이 좀 더 나은 태그 팀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렇게 대결이 성사되었다.

One On One.

Single Match.

Casket-Taker vs SIN.

In Revenge.

* * *

티켓이 완판되었다고 한다.

테이커와 나의 싱글 경기가 확정되고 정확히 이틀이 지난 시점이었다.

리벤지의 메인이벤트.

그와 함께 다른 경기도 하나둘씩 정해지면서 랙다운 크루에서는 리벤지의 막바지 준비가 한창이었다.

마지막 위클리 쇼가 열릴 경기장.

나는 일단 훈련장에서 레이 미스테리우스와 월드 챔피언십을 두고 경기를 가지게 된 오튼을 가르쳤다.

녀석이 자신의 긴 팔과 다리, 근육질의 체격을 살릴 수 있도록 말이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핀레이에게는 말이다.

“자, 한 번 더!”

“제기랄!”

내 요구에 달려든 오튼이 곧바로 뒤쪽에서 내 허리를 세게 움켜쥐었다.

일단은 기초 중의 기초.

체인 레슬링부터 다시 잡아서 오튼을 더 나은 선수로 만들 생각이었다.

벌써 두 시간째.

오튼이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서로 몸을 엮으며 체인 레슬링을 이어나간 나는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자니 링 아래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핀레이가 감탄했다.

“정말 대단하군.”

“체인 레슬링이요?”

“아니, 구슬리는 능력이.”

“크헤엑! 허억……! 허억!”

핀레이는 링 바닥에 털퍼덕 드러누워 있는 오튼을 잠시 바라보았다.

“저 녀석의 느긋한 성격은 나로서도 컨트롤하기 영 어려운 문제였는데.”

“뭐, 별건 아닙니다.”

“응?”

“불안하게 만들면 되죠.”

나는 사악하게 웃었다.

그러자니 숨을 몰아쉬고 있던 오튼이 상반신을 들며 동시에 물어왔다.

“야, 신. 나 어땠냐.”

“좀 더 해야겠는데.”

“끄윽……!”

사실 내가 말할 것도 없었다.

시나가 끔찍한 밤을 보냈던 2006 ECW 원데이 스탠드 이후, 자신도 그렇게 될지 모른다고 느낀 것이었다.

적당히, 대충.

딱히 욕심은 없고.

그런 상황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묘한 습성.

말하자면 나무늘보와 같은 놈이다.

존나 아무것도 안 하는데 아직도 방출이 안 됐다.

아니, 오히려 슈퍼스타가 되지.

어쨌거나.

그런 식으로 오튼을 가르친 뒤, 나는 이어 와이엇 패밀리와도 만났다.

무척이나 오랜만이었다.

“그렇죠?”

“그러게 말이다.”

다이어트에 성공한 브로큰 와이엇은 반가운 얼굴로 내게 악수를 건넸다.

그러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네가 날 위해서 노력해준 만큼 잘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야.”

“아뇨, 멋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랬다면 에디도 함께였겠지.”

“그건 어쩔 수 없는 문제고요.”

와이엇의 잘못은 아니었다.

지금은 아쉬운 사건보다는 더 급한 일인 리벤지의 경기를 준비할 때였다.

현재, 와이엇의 부하 역할을 맡고 있는 선수는 두 사람이었다. 동시에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날 모르지만.

나는 그들이 어떤 선수인지, 향후 어떤 식으로 되는지 다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실, 선수가 링 프로듀서 대신 조언하는 상황에 당황했던 두 사람이 감탄하는 게 꽤나 즐거웠다.

……사실 반쯤 치트를 쓰는 거라서 아주 약간은 죄책감이 들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이 모든 게 좀 더 나은 프로레슬링 업계를 만들기 위함이니까.

‘사소’한 건 넘겨야지.

“일단, 선배. 몸 좀 풀어보죠.”

와이엇과 함께 경기에 출전하게 될 하퍼가 기술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와이엇의 부하는 두 명이다.

하퍼와 로완.

그중, 하퍼는 인디 단체에서 경력이 꽤나 길어 경기력이 부족하다는 와이엇의 단점을 커버할 수 있었다.

한편 로완은 와이엇보다 후배라 경기력이 부족해, 아무래도 둘이서 태그 팀 경기를 하면 단점 곱하기 단점으로 재미없는 경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퍼의 리드 아래에 레슬링을 해나가던 와이엇은 금방 지쳤다.

풀 스로틀로 당기고 레슬링을 해나간다고 쳤을 때 대략 5분 정도다.

‘역시, 살이 빠졌다고 해서 체력이 확 올라오는 건 아니군.’

이 양반, 프로레슬러 평가를 통해서 생각하자면 대충 7/1/9 정도였다.

외모 7점.

기술 1점.

언변 9점.

10점 만점에.

경기에서도 그 9점을 최대한 보여주면서, 기술력이 1점밖에 되지 않는 단점을 커버해야만 했다.

나는 그런 사실을 포장해서 이야기하며 와이엇보다는 하퍼에게 주로 경기를 리드해나갈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리더가 와이엇이라는 건 잊지 않도록 해주세요.”

“알겠다.”

이 정도만 말해두면 나머지는 알아서 잘 이해하고 수행하겠지 싶었다.

와이엇 패밀리는 어디까지나 브로큰 와이엇이라는 교주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기괴한 느낌의 스테이블이었다.

“좋아! 한 번 더 해보자고요!”

나는 이어서 우리를 찾아오는 다른 선수들에게도 조언을 아끼지 않으며 리벤지를 계속해서 준비해나갔다.

선수들은 일단 눈앞의 목표가 주어지자 역할에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

긍정적인 현상이다.

바비와 부커까지 각자 상대할 선수들과 함께 와서 내게 어떤 식으로 경기를 하면 좋을지 자문을 구했고.

나는 거기에도 나름대로 생각했던 플랜을 제시하며 계속 준비를 해나갔다.

7월의 단독 페이퍼뷰.

리벤지를.

* * *

그렇게 다시 시간이 흘렀다.

랙다운은 리벤지 직전에 열린 위클리 쇼까지 성공적으로 방영을 끝마쳤다.

모두 계획한 대로였다.

태그 리그의 파이널과 테이커 vs 신이라는 카드로 일단 큰 주목을 끌고.

나머지 카드들도 하나를 제외하고는 기대감을 가질 수 있는 매치들이었다.

그 제외된 한 가지는, 바로 여러 번 매치가 부킹되면서 신선함이 떨어진 레이와 오튼의 월드 챔피언 경기였다.

하지만 막상 경기가 끝난 뒤에는 대부분의 팬들이 훌륭했다고 호평할 터.

그런 식으로 구성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리벤지에서 열리게 된 모든 매치에 적어도 한 가지씩은 관여했다.

절대 악평은 받지 않겠지.

대부분 호평을 받을 테고.

남은 문제는 하나였다.

메인이벤트로 계획된 테이커와의 경기를 어떤 식으로 해나갈 것이냐.

다른 일들을 먼저 해결하느라고 딱히 그에 대한 회의는 안 해뒀지만.

딱히 걱정은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이번 경기는 길고 긴 대립의 시작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따라서 테이커와 내가 그에 대해 대화를 한 것은 7월 첫째 주의 일요일.

리벤지가 열리는 날의 아침이었다.

거대한 할리 바이크를 타고 경기장에 도착한 테이커는 그것을 안까지 가지고 들어와 훈련장에 주차시켰다.

“오늘은 이건가요?”

“그래, 어떤 것 같나?”

“멋진데요.”

유광 검정으로 도색된 할리 바이크는 확실히 눈길이 가는 물건이었다.

이런 걸물을 타고 입장하는 퍼포먼스도 사실 테이커와 같은 거물이 아니면 허락받기 힘든 일이겠지.

이런 남자와 싸우는 거다.

바로 오늘.

테이커와 나는 곧바로 링 사이드에 나란히 앉은 채 오늘 있을 경기 구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어떻게 할까?”

“글쎄요. 선배님 생각은 어떠세요?”

“너부터 말해봐라.”

“…….”

나는 대답을 잠시 미뤘다.

사실, 고민을 좀 했었다.

현재 시점에서 테이커와 나의 위상 차이를 생각해보자면 물론 경기 주도권을 내준 상태에서 시작해야겠지.

‘그게 개연성 있는 전개니까.’

사실, 테이커와 경기를 하는 상대방은 그 누구라도 경기의 주도권을 내준 채 끌려 다니는 게 일반적이었다.

테이커의 상징성과 위상, 거구에서 오는 막강한 포스로 인해 정면으로 맞붙는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

그나마 현재 당당하게 맞붙을 수 있는 선수라고 한다면 트리플H 정도?

그것도 사실 조금 밀리는 상황에서 자기 정치력을 발휘해 어떻게든 비슷한 방식으로 부킹을 한 것이지만.

헌터 역시 내가 올려다봐야 하는 위상을 가진 선수인데, 그렇다는 건 나와 테이커의 차이는 더 크다는 말이다.

그리고 계속 그랬다.

지금의 이야기는 아니고 전생에.

나와 비슷한 세대의 선수들은 테이커라는 거대한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 누구도.

시나, 엣지, 오튼, 바티스타까지.

한 시대를 상징하는 슈퍼스타들.

모두 테이커로부터 정정당당한 방식으로는 절대로 승리를 따내지 못했다.

테이커와의 대립은 거물에게 도전했다는 사실 자체에 의의를 두고 끝난다.

시나의 경우에는 한창 상승세일 때 이미지를 보호하기 위해서 아예 테이커와의 대립 자체가 없었고.

하지만 나는 그들과는 다르게 정점에 군림하고 있는 테이커를 정정당당한 방식으로 쓰러뜨리고 싶었다.

‘이번 경기는 패배하지만.’

나와 테이커의 차이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전초전이 될 터였다.

그러므로 나는, 도전한다는 어휘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일반적인 경기처럼 정정당당하게 부딪쳐보고 싶었다.

“테이커. 솔직히 말해도 될까요?”

“그래, 말해봐라.”

“전 당신이 두렵지 않습니다.”

“호오…….”

“링 위에 나서는 신으로서도 그렇고, 여기 앉아있는 저로서도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나와 동등하게 치고받는 식으로 부킹을 해달란 이야기로군.”

“예, 허락해주신다면.”

나는 씨익 웃어 보였다.

“제가 그만한 능력이 있는 남자임을 확실히 보여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테이커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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