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
눈에 보이는 모든 게 하얗다.
“어우! 어우! 어우!!”
나보다 앞장서 캠핑 버스에서 내린 오튼이 잔뜩 앓는 소리를 내며 경기장의 후문을 향해서 달려갔다.
입기 귀찮다면서 이 쓰라린 한겨울에 반팔 티셔츠만 걸친 대가였다.
‘패딩 하나 걸치는 것조차 귀찮아해서 경기복은 어떻게 갈아입을 건데.’
그런 생각이 들어 물어봤더니, 녀석은 바지를 슬쩍 내리고 그 안에 입은 ‘바이퍼’ 경기복을 내게 보여주었다.
뭔가 엄청나게 천재적인 아이디어라고 생각하는 듯한데, 말인즉슨 지난주부터 저거 안 빨았다는 이야기겠지.
정말 창피한 녀석이다.
그렇기에 일부러 녀석을 먼저 보내고, 캠핑 버스에서 좀 더 시간을 보낸 뒤에 스포츠 백을 챙겨서 내렸다.
‘이번 주 각본이…….’
허옇게 나오는 입김을 약간 신경 쓰면서 후문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던 중.
“신!!”
누군가 나를 크게 불렀다.
돌아보자 캠핑 버스의 운전수인 잭슨이 뭔가를 낑낑 들면서 서있었다.
얼마 전부터 우리 버스의 운전수가 된 그는 어린데도 불구하고 태도가 싹싹해서 마음에 들었다.
문제는 손에 든 물건이었다.
“이거요! 이거!”
“아.”
깜빡할 뻔했군.
쓰게 웃은 나는 다시 캠핑 버스 앞으로 돌아가 잭슨의 양쪽 손에 들려 있던 ‘벨트’를 건네받았다.
그래, 두 개다.
검은 가죽 재질에 황동에 금을 입힌 형태의 플레이트가 박힌 벨트 두 개.
두 근육질의 남자가 팔을 엮고 있는 WWF 랙다운 태그 팀 챔피언 벨트.
성조기가 중앙에 크게 새겨진 WWF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챔피언 벨트.
생각보다 무게가 나가는 편이었다.
“고마워요.”
“예! 그럼 저는 쉬고 있겠습니다!”
“편히 쉬어요.”
나는 싱긋 웃으며 돌아섰다.
우리가 쉬는 동안 내내 달렸으니 많이 피곤할 터. 다행히 위클리 쇼가 끝날 때까지 시간이 있으니 피로를 푹 빼둘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추위를 뚫고 경기장 안으로 들어선 내가 가장 먼저 만난 것은, 바로 현재 월드 챔피언인 사내였다.
게이브 바티스타.
얼마 전, 선수로 복귀한 링 프로듀서, 핀레이와 이야기를 나누던 그는 내가 다가가자 반색하면서 돌아보았다.
“왔군, 챔프.”
“계셨군요. 챔프.”
“춥진 않았나, 챔프?”
“…….”
바티스타의 옆에 서있던 핀레이 역시 날 그렇게 불렀다.
챔프.
더블 타이틀 홀더가 된 이후로 자연스럽게 내게 따라붙은 별명이었다.
동시에 숀 시나의 공식적인 별명이기도 해서, 들을 때마다 뭔가 묘했다.
뭐, 어쨌거나.
“나와 바티는 폭설이 쏟아지기 전에 도착해서 어제 같이 훈련 좀 했지.”
48세의 나이에 선수로 돌아온 핀레이는 링 프로듀서였던 때보다 더 열정적이고 즐거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다.
나도 비슷한 입장이었던 적이 있었고, 그와 마찬가지로 선수들을 기르는 것보다 스스로 직접 뛰는 것에 훨씬 더 큰 기쁨을 느꼈다.
남자란 그런 생물이다.
자기가 하고 싶어 하지, 남들이 하는 걸 보면 근질근질한 존재들이다.
그런데 말이다.
“핀레이. 왜 바티스타는 바티로 부르고 저는 챔프라고 부르시는 겁니까.”
“넌 챔프니까.”
“뭐 당연한 걸 물어.”
“…….”
말을 말자.
옆에 있던 바티스타까지 당연하다는 듯 말해 나는 황당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도, 뭐.
좀 부담스럽기는 해도 이들에게 인정을 받아서 기쁘기는 했다.
전생에는 어디를 가도 선수로서 반쯤 없는 사람 취급을 받은 나였는데.
이제는 반대로 이들의 중심에 서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2006년 7월부터 약 5개월이 지나, 한 해의 마지막을 코앞에 둔 지금.
12월 7일.
랙다운은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일단 레이, 킹 부커를 거쳐서 바티스타가 월드 챔피언에 다시 등극했고.
그리고 핀레이 같이 새로운 선수 몇 명이 랙다운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선수가.
‘저기 있군.’
나는 락커룸 앞에 멍하니 서있는 거한을 발견하고 그 곁으로 다가갔다.
그레이트 칼라이.
인도 출신.
2미터 16센티미터.
신인은 아니었고, 여러 인디 단체에서 선수 생활을 하다가 올해 이쪽으로 오게 된 몬스터 기믹의 레슬러였다.
딱히 WWF에서 큰 족적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테이커를 올려다보게 하는 저 덩치만큼은 확실히 인상적이었다.
그렇기에 데뷔 직후부터 확실히 괴물 레슬러로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런 위압적인 겉모습에 비해서 성격 자체는 무척 신사다웠다.
사실 대부분의 빅 맨들이 덩치와는 정반대로 신사다운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힘들 정도로 큰 덩치에 성질마저 불같았으면 이 업계에서는 절대 일할 수 없었겠지.
나는 먼저 인사를 건넸다.
“칼라이.”
“챔프.”
이 사람도 그런다.
영어 실력이 부족한 칼라이는 자신이 가로막고 있는 락커룸을 가리켰다.
“이 방, 안 된다.”
“어, 왜요?”
“부커, 혼낸다. 꼬마들.”
“…….”
일단 좀 확인해둘까.
“잠깐 콜라라도 마시고 올래요?”
“챔프가 말하는 거라면.”
그런 내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서히 멀어져가는 거한, 칼라이.
나는 곧장 락커룸 문을 열었다.
“너희들은 말이야. 어? 제정신이냐? 내가 확실히 연습해오라고 말했지?”
“예, 그렇습니다!”
“네, 넵!”
앳된 인상의 선수 두 명이 킹-부커의 앞에 긴장해 서있는 것이 보였다.
코디 로스.
체드 디비아시 주니어.
두 사람 다 아버지가 전설적인 레슬러로, 이번에 막 데뷔한 신인들이었다.
기초 훈련은 착실하게 받았지만, 긴장 때문인지 요새 실수를 남발했다.
그래서 부커가 전담 마크를 요새 하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그게 역효과나 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긴장을 하는 녀석은 다독여줘야지, 갈구면 오히려 더 겁을 집어먹게 된다.
그러므로 도와주자.
“부커.”
“엉? 아, 왔냐?”
“예, 잠깐 괜찮으실까요?”
“어? 음…… 니들 운 좋은 줄 알아라. 저 녀석 때문에 오늘 봐준다.”
“옙!”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렇게 말한 코디와 체드, 두 신인은 존경심이 담긴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게 또 묘한 기분이었다.
둘 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서 전생에는 날 거의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던 녀석들인데, 지금은 정반대니까.
‘나쁜 기분은 아니군.’
특히 코디가 그랬다.
체드는 딱히 빛을 보지 못하고 이른 나이에 선수 생활을 끝마쳤지만, 반대로 코디는 WWF가 아닌 다른 신생 단체에서 메인 이벤터에 등극했다.
그런 녀석이 지금 나를 어렵게 여기는 동시에 존경하고 있는 상황.
나중을 생각해서라도 계속 이런 식으로 신경을 써주는 편이 좋겠지.
‘그것도 얼마 안 남았고.’
싱긋 웃으며 락커룸을 빠져나온 나는 먼저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금세 옆으로 따라온 부커가 말을 붙여왔다.
“아, 맞다. 네 영화 봤다.”
“……정말요?”
“그래. 재미있던데?”
“가, 감사합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대사가 ‘당신을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해.’였지.”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난 얼굴이 빨개지는 걸 느꼈다.
얼마 전 개봉한 내 영화, ‘더 스코프’는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반응을 거둬들이면서 순항을 하는 중이었다.
문제는 선수들이 내가 한 로맨스 연기를 보고는 자꾸 놀려댄다는 건데.
일반 대중들의 반응은 좋았다.
평소 레슬러로서 터프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내가 그와 반대되는 로맨스 연기를 통해 신선함을 보여줬으니까.
“피자맨도 어울렸고.”
“……제가 뭐 잘못했습니까?”
“애들 교육하는데 끼어들어서.”
“제기랄, 지난주에도 하루 종일 갈구지 않으셨습니까. 적당히 좀 하십쇼.”
“저 녀석들 실력이 늘어야 그만하지.”
툴툴거리는 부커.
그러면서도 완전히 날 놀려먹으려고 작정했다.
피자맨.
피자 훗의 지분을 크게 구매해 경영에 개입하기 시작한 트럼프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브랜드 이미지 캐릭터.
WWF의 슈퍼스타들이 돌아가면서 맡기로 한 슈퍼히어로로, 놀랍게도 나는 그 1대째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참고로 말하자면, 거절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돈이었다.
그나마 나는 낫지.
피자맨 세계관의 빌런, 닥터 베지터블 역을 맡은 건 오튼이었는데.
녀석은 파프리카 모양의 탈을 머리에 쓰고 내 기술을 받아줘야만 했다.
[피자를 돌려줘! 닥터 베지터블!]
[음후하하핫! 세상은 야채가 지배한다! 피자 따위는 다 없어져야 돼!]
과격한 비건 같은 발언과 함께 내게 실컷 얻어터지는 빌런, 닥터 베지터블.
그렇게 피자를 지켜낸 내가 소년소녀들과 함께 씨익 웃으며 피자를 맛있게 먹는 어처구니없는 내용의 광고.
왠지 모르게 피자와 야채의 상황이 정반대가 되어버린 것 같았지만.
그걸 지적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돈이었다.
결국 자본주의에 굴복한 대가로, 지금도 전국 어딘가의 TV에서 피자를 먹는 내 얼굴이 나가고 있겠지.
“끝나고 피자나 먹자.”
“……I Hate You.”
“I Know, Ni-ga.”
낄낄 웃은 부커가 날 툭 때렸다.
뭐, 이런 느낌이었다.
챔프로 불리며 존경을 받는 반면, 또 이렇게 반대로 놀림을 당하기도 했다.
악의가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다들 평소에는 내게 감탄하면서도, 이렇게 인간적(?)으로 망가지는 모습에서 친근함을 느끼는 거겠지.
랙다운에서의 생활은 즐거웠다.
이 브랜드는 버닝콩과 차별화된 매력을 가진 채 각계각층의 팬층을 긁어모았고, 그 중심에는 내가 서있었다.
그리고 이번 주 역시도.
나는 그렇게 해나갈 예정이었다.
* * *
더블 타이틀 홀더.
그 책임은 막중했다.
한 브랜드에 세 종류로 나뉜 타이틀 중 혼자서 두 개를 독식한다는 건, 그걸 노리는 이들 또한 많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 캐릭터가 가진 특유의 물불 안 가리는 면모를 내세우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이 상황에서 자칫 개연성이 떨어지거나 팬들이 만족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줄 경우, 역반응이 나올 수도 있었다.
말 그대로, Man On Fire.
불길 속에 서있는 남자.
내가 그 대사를 처음 언급한 것은 얼마 전부터 U.S. 타이틀을 걸고 오튼과 대립을 시작하면서였다.
그리고 오늘 역시.
나는 그 대사를 입에 담았다.
“나는 불길 속에 서있는 셈이지.”
마이크를 손에 쥔 나는 링 위에서 오튼과 마주보고 서있었다.
2만이 넘는 팬들이 챈트를 보냈다.
[Man On Fire!]
짝! 짝! 짝짝짝!
[Man On Fire!]
짝! 짝! 짝짝짝!
[Man On Fire!]
짝! 짝! 짝짝짝!
박수 소리와 함께 연잇는 맨 온 파이어 챈트. 거기에 씨익 웃으며 반응한 나는 팬들을 향해서 버럭 소리쳤다.
“Yeah! I’m On Fire-!!”
[Yeeeeeeeeeeeeaaaaaahhhhhh!!]
팬들이 환호를 보냈다
Man On Fire.
불길 속, 위험한 곳에 서있는 남자.
하지만 동시에 I’m On Fire는 내가 지금 불붙었다는 중의적인 표현이다.
그렇게 재치 있는 멘트를 친 나는 두 개의 벨트를 각각의 어깨에 걸친 채 다시금 오튼을 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봐봐. 오튼. 나는 너 같은 놈들을 모조리 쓰러뜨리면서 이 두 개의 타이틀을 계속해서 지켜왔어. 그리고 동시에 멋진 팬들의 인정 또한 계속 받았지.”
그 말은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페이퍼뷰에서 오프닝과 메인이벤트에서 두 경기를 뛰면서 하드워크를 소화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각각의 경기에서 까탈스러운 팬들을 모조리 만족시켜왔다.
피로가 누적되었다고 해서 조금이라도 부족한 모습을 보였다가는 팬들의 야유를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하지만 그게 좋았다.
“힘든 일이지! 하지만 난 거기에 감사해! 내가 실력으로 정당하게 평가 받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껴!!”
[Waaaaaaaaaaaaaaggghhhh!!]
“나는 아무 동정도 받지 않고 실력으로 이 자리까지 올라왔고!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지!”
사실, 몇 년 전 이후로 딱히 접점이 없었던 우리가 지금 이렇게 U.S. 타이틀을 놓고 대립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현재 오튼이 두 사람의 신인, 코디와 체드를 데리고 ‘레갈리아’라는 이름의 스테이블을 결성했기 때문이었다.
위대한 레슬러 가문에서 태어난 선수들이 한데 뭉쳐서 만들어진 스테이블.
코디와 체드가 신-테이커의 태그 팀 타이틀에 도전하는 동시에, 오튼이 U.S. 타이틀을 빼앗아가려는 상황.
링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하지만 너와 그 멍청한 부하들은 어떻지? 레갈리아라고?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다는 이야기인가?”
“그래, 우리는 너 같은 어중이떠중이들과는 달리 이 업계의 미래가 될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지.”
“하나 가르쳐줄까?”
나는 오튼을 향해 다가갔다.
“나는 그렇게 착각하는 멍청이들의 엉덩이를 걷어차면서 여기까지 왔다고!”
[Yeeeeeeeeeeeeeeaaaaaahhhhh!!]
팬들의 환호가 쏟아졌다.
싱긋 웃으며 서있자니 곧장 조롱을 참지 못한 오튼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이마를 긁고 지나가는 주먹.
[Waaaaaaaaaaaaaaaagghhhh!!]
팬들의 환호와 함께 나는 곧바로 지지 않고 녀석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진짜로.
퍼억-!
힘을 약간 뺀 펀치를 맞은 오튼이 이어 잠깐 황당하다는 듯 나를 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 녀석은 있는 힘껏 내 안면에 펀치를 꽂아 넣었다.
짜릿한 통증.
‘역시 이래야지.’
믿을 수 있는 녀석인 만큼, 이런 식으로 진짜 치고받는 게 훨씬 더 어울렸다.
서로 적당히 때렸다가 팬들의 몰입이 깨지면 더 어색해질 상황이니까.
오튼은 그런 면에서 서로 앙금이 남지 않고 치고받을 수 있는 상대였고.
퍼억-!
[Yeeeeeeeaahhhh!]
쩍-!
[Boooooooooo-!]
우리가 주먹을 주고받을 때마다 팬들은 환호와 야유를 번갈아 보내주었다.
물론, 오튼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끝나고 왜 진짜로 때리냐면서 나에게 짜증을 부리겠지. 하지만 레슬링 게임 몇 판 같이 해주면 금방 풀어진다.
그렇게 팬들의 열광적인 반응 속에서 싸우고 있자니, 링 위로 달려 나오는 레갈리아 멤버들의 모습이 보였다.
자, 한번 링에 불 좀 붙여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