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
그래도 다행히 반응은 잘 나와주었다.
야유였지만.
[Boooooooooooooooooooooo-!!]
[러셀 하트! 러셀 하트가 2007년의 킹스 럼블에서 우승을 차지합니다!!]
[말도 안 돼! 이건 사기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확실히 눈을 찔렀어요! 팬들이 야유를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링 위에 서있는 건 러셀입니다! 그가 레슬 임페리움으로 직행해 시나를 상대로 타이틀에 도전합니다!]
해설자들의 마지막 코멘트와 함께 올해의 킹스 럼블이 그대로 종료되었다.
전생과는 전혀 다른 결과.
하지만 지금이 훨씬 더 좋았다.
이번 럼블 매치 우승을 기점으로 러셀은 커리어 최대의 기회를 받게 되었다.
앞으로도 잘만 한다면 아이콘이 되는 시나의 라이벌로 활약할 수도 있겠지.
그리고 나는 러셀이 그러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녀석을 축하해주러 갔다.
고릴라 포지션 앞.
수많은 관계자들이 모여 러셀을 축하해주는 가운데, 신기하게도 녀석은 나를 알아보고는 곧장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녀석을 와락 끌어안았다.
“축하한다. 러셀.”
“고마워. 신.”
“유니버스 타이틀, 따는 거냐?”
“그건 아직 모르지.”
녀석은 주변의 시선을 살짝 의식하며 대답했고, 나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시나 좀 잘 돌봐줘.”
“오히려 내가 그래야 할 판인데.”
“그럴 리가.”
나는 러셀의 어깨를 툭 쳤다.
“너 잘하잖아.”
“……조금은 질투할 줄 알았는데.”
“내가 왜?”
“나는 하고 있거든.”
녀석이 반대로 내 어깨를 툭 쳤다.
“테이커와 레슬 임페리움에서 맞상대를 하다니. 나보다 더 큰 푸시잖아. 이제 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비밀.”
“짜식이.”
바로 그때, 뒤쪽에서 나타난 누군가가 러셀의 머리 위로 양동이를 쏟아부었다.
촤악-!
차가운 소리와 함께 그 안에 가득 담겨 있던 얼음물이 러셀을 적셨다.
“크흑~?!”
“축하해! 러셀!”
바로 챔피언인 시나였다.
물론, 나는 뒤쪽에서 녀석이 나오는 시점부터 빠져서 얼음물을 맞지 않았다.
“시, 시나.”
“잘 부탁해.”
의연한 얼굴이었다.
현재 러셀은 악역으로서 설득력 있는 커리어를 이어나가면서 마니아 팬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오는 부담이 있을 텐데도 시나는 러셀을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참 괜찮은 놈이라니까.’
러셀과 시나가 악수를 주고받자 주변의 버닝콩 멤버들이 왁자지껄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축하해주는 게 보였다.
버닝콩은 최악의 시간을 나름대로 의기투합해서 헤쳐 나가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촤아악!
“너도 축하한다!”
정신이 번쩍 드는 감각.
물벼락을 맞고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본 나는 양동이를 손에 들고 서있는 오튼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니 오튼은 꾸러기처럼 콧잔등 밑을 살살 긁으며 TMI를 늘어놓았다.
“헤헤, 사실 시나가 러셀한테 둘이서 물 양동이 붓자고 했는데. 나는 역시 우리 팀의 에이스를 축하해줘야지!”
“…….”
좀 감동인데?
그렇게 생각하더니 뒤쪽에서 나온 테이커가 나에게 천천히 주먹을 뻗었다.
“우리도 해야지.”
“뭐야. 이거 경쟁이야?”
약간 당황해 중얼거리며 다시 버닝콩 쪽을 돌아본 나는 전의를 불태우며 서있는 그쪽 선수들을 발견했다.
어쩔 수 없군.
여기에서는 저쪽에 보란 듯이 테이커의 주먹을 툭 건들며 우리의 기세를 알려주도록 하자.
아마 이번 레슬 임페리움의 메인이벤트는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시나 vs 러셀.
테이커 vs 신.
물론 그 승자는 우리가 될 것이다.
왜냐면 나는 벌써부터 다음 주 금요일이 기대돼서 참을 수가 없거든.
* * *
그리고 킹스 럼블의 바로 다음주.
우리는 레전드를 경신했다.
“신, 무려 30배라고 30배!”
고릴라 포지션으로 향하는 내 뒤를 따라오며 각본팀장이 흥분해 소리쳤다.
원래 표 값의 30배.
이번 위클리쇼의 암표 가격이었다.
“확실히 잡았죠?”
“물론 잡기는 잡았지! 하지만 대단하지 않나! 그 표를 사고 싶어서 온갖 미친놈들이 줄을 서있었단 말이야!”
그야말로 초유의 사태였다.
레슬 임페리움도 아니고 일반 위클리쇼에서 암표 가격이 이 정도로 크게 형성된 것은 정말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물론, 위클리쇼와 레슬 임페리움 간의 티켓 가격 차이를 감안을 해야겠지만,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놀라운 결과였다.
“모두가 직접 듣고 싶어 하는 거라고! 자네가 테이커를 배신한 이유를!”
“배신이 아니라니까요.”
“아참참, 그렇지.”
팀장이 씨익 웃어 보였다.
내 의견대로 각본을 진행한 결과가 이렇게까지 나왔다. 덕분에 나는 한시라도 빨리 링에 올라가고 싶었다.
‘정말로 오랜만이군.’
악역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릴라 포지션 안으로 들어서자 케인이 내게 소리쳤다.
“신!”
엄지를 치켜세우는 케인.
마찬가지로 엄지로 화답하며 나는 각자의 위치에서 함교의 군인들처럼 앉아있는 직원들의 모습을 확인했다.
말하자면 나는 폭탄이다.
이들의 도움을 받아 슈퍼 멋지게 링이라는 착탄 지점에서 터지면 그만이다.
막 쇼의 오프닝이 끝나고 흑백으로 처리된 내 배신 영상이 흘러나갔다.
여전히 팬들의 반응은 없었다.
그게 오히려 좋았다.
“빨리 갑시다!!”
내가 버럭 소리치자 함교 내에 있던 직원들이 누구 하나 빠짐없이 웃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내 턴 힐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그들이지만.
뭐 어쩌랴.
지금 이 화끈한 반응은 턴 힐을 안했으면 절대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고고고!”
음향팀장의 외침과 동시에 음악 하나가 경기장 안에 울려 퍼졌다.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다른 곳에서 이걸 듣고 있자면 그냥 좋은 음악일 수도 있다.
하지만 프로레슬링 팬들에게는 적그리스도가 강림하는 음악이었다.
거기에 더해.
‘Man On Fire’라는 내 새로운 별명에 맞춰 입장로 위에 설치해둔 파이로 머신으로부터 힘차게 불길이 치솟았다.
빠밤-빠밤-빠밤-빠밤-빠밤-빠밤-!
어두운 조명 속.
내 얼굴을 비추는 건 불길뿐.
그 상황에서 입장로 위로 나가자 수많은 시선들이 나를 향해서 쏟아졌다.
의문을 보내는 팬들.
[Waaaaaaaaaaaaaggggghhhh!!]
나를 믿는 자와.
[Boooooooooooooooooooo-!!]
그러지 못한 자들.
그런 가운데에서 나는 천천히 링으로 올라가 곧장 마이크를 손에 쥐었다.
테마곡이 끝나고 조명이 돌아왔다.
파이로의 연기가 시야를 흐리게 해서 팬들의 얼굴은 딱히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느껴졌다.
모두가 궁금해하고 있다.
내가 왜 그랬는지.
‘어떻게 시작할까.’
사실 슈퍼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지금, 말 그대로 이들의 감정을 통제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연기가 조금씩 걷혔다.
그리고 나는 관객석의 소년 하나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거대한 피켓을 하나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WHY?’
아.
저것으로 시작하자.
“내가 왜 그런 짓을 했는가.”
나는 소년을 가리켰다.
“그게 궁금한 얼굴이로군. 소년.”
관객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럼에도 소년은 의연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라, 그 상황 자체가 어쩐지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리고 들어줬으면 해. 나는 지금 여기 사과하기 위해서 나온 거야.”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안타깝게도, 너희에게 하는 건 아니야. 나는 지금, 집에서 쉬고 있을 테이커에게 사과를 해야만 하는 거야.”
그리고 고개를 들며.
“내가 좀 더 빨리 데뷔를 했으면, 당신은 지금쯤 나에게 자리를 넘겨준 뒤에 푹 쉬고 있었을 텐데 말이야.”
내 본성을 드러냈다.
“그게 안 되니 고생만 하고 있지. 안타까운 일이야. 미안해. 테이커.”
순간 놀라는 관객들.
반응은 아예 없었다.
다들 이걸 각본의 이야기를 넘어서서 현실적으로 반응하고 있는 것이었다.
난 그것을 설명했다.
팬들이 왜 나에게 화를 내야만 하는지를 차근차근 설명하면서 그들에게서 야유를 끌어내고자 했다.
“무려 반년이었어. 테이커와 태그 팀을 하면서, 정말로 즐겁게 보냈지.”
하지만 말했듯이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다. 나와 테이커의 팀은 삐걱거리면서 말도 안 되는 패배를 반복했다.
원인은 하나.
내가 테이커와 붙고 싶어서였다.
나는 누군가와 우정을 쌓기 위해서 이 업계에 들어온 게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한판 붙었지. 속 시원하게 붙고 나면 좀 괜찮아질까 싶었는데.”
그걸 팬들이 망쳤다.
“너희는 테이커의 이름을 계속 외쳤어. 그리고 이전까지 환호를 보내주던 나에게 심지어는 야유까지도 보내더군.”
그런 반응이 심리적인 영향을 끼쳐 나는 결국 테이커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그때 깨달았어. 테이커에 대한 너희의 신앙은 광신에 가깝고. 난 개자식이라 그걸 박살 내고 싶단 걸 말이야.”
[Boo……!]
야유가 나오기 시작했다.
“말했듯 이제는 내 시대야. 하지만 너희는 광신에 빠져 그걸 알지 못하기에 내가 증명을 할 필요가 있었던 거야.”
충격을 넘어서서.
팬들의 감정이 증오로 바뀌었다.
“나는 테이커를 박살 내버릴 거야.”
나는 어깨에 메고 있는 U.S. 챔피언 벨트를 떨어뜨리며 나를 보여주었다.
SIN.
랙다운의 루키.
환상적인 실력을 지녔지만 절대로 테이커 같은 남자를 이길 수 없는 놈.
이제는 아니다.
“좀 어때? 너희의 신앙을 박살 낼 적그리스도가 바로 여기에 서있는데. 그것도 너희가 만들어낸 적그리스도가.”
[Boooooooooooooooooo-!!]
나는 팬들의 감정을 비집고 열었다.
분노가 나왔다.
나는 모두를 기만하고 모욕했다.
이 반년이 즐거웠다고 말하면서, 그때를 단지 이용했을 뿐이라고 했다.
“왜, 두렵나?! 테이커의 연승이 레슬 임페리움에서 깨지는 게 두려워?! 이를 어쩌나!! 나는 그렇게 할 생각인데!!”
[Booooooooooooooooooooo-!!]
“나는……!!”
[Fu-k you SIN! Fu-k you SIN! Fu-k you SIN! Fu-k you SIN! Fu-k you SIN! Fu-k you SIN! Fu-k you SIN!]
이런, 제기랄.
말을 할 수가 없다.
최악의 상황이다.
팬들은 각본의 틀을 넘어서서 나라는 선수 자체에 압도적인 증오를 보냈다.
손바닥을 뒤집듯이 재빠르게.
하지만 그게 도리어 기뻤다.
테이커는 그 정도의 남자라는 이야기였고, 나는 그를 쓰러뜨리기 위해 지금 이 자리에 서있으니 말이다.
같잖은 태그 팀 파트너.
같잖은 도전자.
같잖은 후배.
그런 게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팬들의 주목을 순간 끌어 모으며 이 상황을 넘겼다.
이게 일류였다
“테이커가 말하더군.”
야유가 순간 멎었다.
테이커가 나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그 호기심이 팬들을 순간적으로 조용하게 만든 것이다.
“나라는 남자가 나타나서 다행이었다고. 그래, 맞아! 나는 너의 레슬 임페리움 14연승을 끊어낼 남자라고!!”
[Boooooooooooooooooooooo-!!]
가장 큰 야유가 나왔다.
그 한가운데에서 마이크를 머리 위로 내던진 나는 그대로 링에서 퇴장했다.
그래, 이 반응이다.
[You Su-k! You Su-k! You Su-k! You Su-k! You Su-k! You Su-k!]
욕설과 증오.
분노.
그 안의 두려움.
팬들은 느끼고 있었다.
내가 이 업계의 후배로서 최초로.
테이커를 쓰러뜨릴 남자라는 걸.
* * *
그리고 몇 주 뒤, 텍사스 오스틴.
낡아빠진 브라운관 TV에서 한 남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돌아오라고! 테이커! 지금 내가 두려워서 숨어버린 건가? 네 연승 기록을 지키기 위해서 관 속에 들어가셨나?!]
[Booooooooooooooooooooo-!!]
압도적인 야유.
신은 링 위가 그야말로 제집인 양 날뛰면서 팬들의 분노를 사고 있었다.
예술적인 수준의 마이크워크였다.
선수로서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평가받는 두 사람 모두가 동의했다.
디 캐스켓-테이커.
그리고 락콜드 스티비 스틴.
휴가라는 말에 락콜드의 방문으로 이루어진 두 사람의 만남. 프로레슬링 팬이라면 분명 경악할 순간이었다.
하지만 링 아래의 두 사람은 생각보다는 평범한 편이었다. 덩치가 일반인에 비해 훨씬 크다는 걸 제외하면.
더군다나 은퇴한 지 꽤 시간이 지난 락콜드는 특히나 그런 경향이 강했다.
락콜드가 맥주를 홀짝이며 말했다.
“정말 환상적이군.”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그래, 저 친구 스펙이 어떻게 되지?”
“인디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그래? 놀랍군. 내가 다시 쇼를 보게 된 게 바로 저 친구 때문인데.”
“왜 안 봤나? 고난의 행군과도 같았던 옛 시절이 떠올라서?”
“재미없으니까.”
“…….”
“아, 오해는 하지 마. 내가 주인공이었던 시대에 비하면 그랬다는 거야.”
락콜드가 낄낄 웃었다.
“하지만 시대는 변하고. 우리는 톱니바퀴에 불과하지. 누구나 시간이 지나면 내려갈 수밖에 없는 구조인 거야.”
“그렇지.”
“그리고 남은 수순은 새로운 톱니바퀴를 채워 넣는 건데. 회사는 내가 은퇴한 뒤로 몇 년간은 그 일을 잘 해내지 못했지. 그래서 재미가 없었던 거야.”
“지금은 재미있다는 말인가?”
“아니, 딱히.”
“그럼 왜…….”
“불안하거든.”
“뭐?”
“저놈, 날 불안하게 만들고 있어.”
“……신?”
“그래. 시나는 괜찮아. 그 친구는 나와 스타일이 정반대니까. 하지만 저 친구는 어딘가 나와 닮아 있어.”
“우습군. 나도 그렇게 느꼈는데.”
“생긴 건 자네랑 비슷하지. 검은색 옷 입고 폼 잡고 센 척하는 게 말이야.”
“……스티비.”
“이번에 턴 힐 한 거지?”
“보면 모르겠나?”
“그건 참으로 실수를 했군.”
“또 무슨 소리야?”
“이건 순전히 내 의견인데.”
락콜드가 맥주를 완전히 비워냈다.
“크흐. ……저 친구는 이 회사를 배신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앞으로 커리어에서 절대로 악역이 될 수 없을 거야.”
그건 또 새로운 의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