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
턴 힐을 하고 한 달이 지난 시점.
랙다운이 단독으로 개최하는 페이퍼뷰, 네버 이스케이프를 앞둔 상태에서 팬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돌아섰다.
그들은 테이커와의 태그 팀 시절을 모두 부정한 나에게 큰 분노를 느꼈다.
동시에 방송에 나오지 않는 테이커를 조롱하는 나에게 계속 야유를 보냈다.
모두 우리가 계획한 대로였다.
테이커와의 대립에서 그를 상대하는 선수는 그 압도적인 팬-페이보릿에 밀려 언제나 야유를 감내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나는 애초에 환호를 받으려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은 것이었다.
악역으로 전환하고.
팬들의 분노와 두려움을 사면서 최악의 악당으로 테이커와 대립해나간다.
그게 우리의 플랜이었다.
뉴스레터의 기자들도 그 부분에 대해 큰 호평을 보내며 나를 칭찬해주었다.
[아주 지능적이라고 할 수 있겠군.]
[솔직히 말해서 딱히 복선 같은 건 없었지만, 치밀한 각본처럼 느껴져.]
[신이라는 캐릭터가 그렇기 때문이지. 충분히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남자고, 그걸 설득력 있게 전하고 있어.]
그렇기에 그 배신은 놀라웠지만 개연성이 없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신은 결국, 테이커를 레슬 임페리움에서 쓰러뜨리겠다는 목표 하나만을 보고 이 순간까지 달려온 것이었다.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테이커와 팀을 맺고 그보다 더 활약하며 타이틀 두 개를 따냈다
[사실 이게 악역인가 싶긴 한데.]
[악역은 맞지. 링에서 테이커를 먼저 배신하는 비겁한 짓을 저질렀잖아?]
[그건 그래. 하지만 동기가 불순하지는 않잖아. 오히려 좀 그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은 느낌이야.]
[하지만 부킹이 그런 식으로 안 이루어지고 있지. 신은 테이커를 조롱하면서 팬들의 어그로를 팍팍 끌고 있잖아.]
[정작 테이커는 안 나오고 있지만.]
[언제 나올까?]
[아마 시기적으로 보자면 이번 네버 이스케이프에서 복귀하지 않겠어?]
[그리고 한 달 대립하고 레슬 임페리움에서 맞붙는다는 시나리오인가.]
[아마 그럴 거야.]
내가 흘린 소스를 가지고서 네버 이스케이프에 대한 홍보를 해주는 렐처.
이 방송을 들은 관계자들이 내일 연관 기사를 쓸 테고, 자연히 네버 이스케이프의 판매량도 좋게 나올 터였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위클리쇼에서 내내 테이커가 장의사 기믹으로 복귀하는 것에 대한 복선 역시 깔아나갔다.
경기를 마치고 락커룸으로 돌아온 내 앞에 갑자기 관이 등장을 한다거나.
‘Rest In peace’라고 적힌 익명의 편지를 받고는 식겁해 난동을 부린다거나.
그 모두가 전설 그 자체인 테이커의 장의사 캐릭터를 상징하는 것들이었다.
팬들은 내가 그런 상황을 겪는 걸 즐기면서 테이커의 귀환을 기다렸다.
또한, 거기에 맞서기 위해 나 역시도 어느 정도는 변화를 꾀할 생각이었다.
네버 이스케이프를 일주일 앞두고.
경기장에 도착한 나는 곧바로 케인을 찾아가 내 아이디어를 전달했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복장을 바꿀 생각이라고?”
“예, 네버 이스케이프 이후에는 조금 더 치열한 느낌을 주고 싶어서요.”
“일단 의상팀장하고 말해보지.”
“그렇게 할까요.”
복장은 프로레슬러의 개성이자, 그 자체로도 기믹을 전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것을 알기에 케인은 딱히 내 말에 토를 달지 않고 의상팀장을 불렀다.
이후 자기 사무실에서 불려온 의상팀장은 내 생각에 동의를 표했다.
“나쁘진 않을 것 같네요.”
“그렇죠?”
“예, 이번에 턴 힐도 기념하면서 캐릭터의 ‘외양’을 수정하는 것도 좋잖아요? 구체적인 아이디어가 궁금해지네.”
“너무 바꿀 생각은 없고요.”
나는 캠핑 버스에서 시간이 날 때 그려온 아이디어 스케치를 내밀었다.
그것을 본 케인과 의상팀장이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건…….”
나는 씨익 웃었다.
“멋지죠?”
“지렁이에요?”
“…….”
상처 받는데.
“아니, 그, 사람이거든요……?”
여기 손과 발, 머리.
“아. 이게 머리였구나. 나는 무슨 철퇴 같은 거 그려놓은 건 줄 알았네.”
“그렇게 말하면 저 녀석 상처받아요.”
옆에서 케인이 쓰게 웃었다.
그사이 의상팀장은 내 스케치를 무슨 고대의 유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분석하며 하나하나 확인했다.
“이게 다리?”
“예, 경기복은 그대로고. 위에 재킷을 입는 것도 모두 이전과 똑같은데.”
하나가 바뀌었다.
“후드 집업을 입을까 합니다.”
“재킷 아래에요?”
“예, 이렇게 후드 부분을 좀 크게 해서 눈을 가리는 거죠. 머리카락도 손질 안 하고 거칠게 내려서 좀 더티한 느낌을 주고 싶고요.”
“아~ 이게 지렁이가 아니었구나!”
“……너무해.”
“아무튼, 그럼 후드 집업 디자인은 제가 하는 걸로 할게요. 이것도 나름대로 잘 팔릴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하지만 재킷을 위에 덧입으면 딱히 디자인을 해도 티가 날까 싶은데요.”
“그래도 해야죠. 이거 잘만 하면 불티나게 팔릴 거예요. 후드 집업 자체가 사람들이 티셔츠만큼이나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이니까.”
의상팀장의 의견은 그랬다.
이어, 날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슥슥 스케치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검은 롱 팬츠에 가죽 재킷.
거기에 더해 재킷 안쪽에 후드 집업을 뒤집어쓰게 만들어 변화를 주었다.
“선글라스는?”
“안 쓸 겁니다.”
“머리를 그냥 내버려두는 식으로 한다고 했지만, 사실 제대로 더티해 보이려면 스프레이로 좀 잡아야 해요. 그 디자인은 내가 분장팀하고 이야기해서 잡아볼게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음. 실례.”
의상팀장이 내 턱을 쓰다듬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의아해하자니 그녀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면도는 언제 했어요?”
“오늘 아침이요.”
“수염을 길러보는 건 어때요?”
“……힘들 것 같은데요.”
전생에 나이를 먹고서 수염을 꽤나 덥수룩하게 길러보기도 했던 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인종이 인종이다 보니 털쟁이들에 가까운 다른 녀석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렇기에 도저히 시간에 맞출 수 없을 터였다.
적어도 한 달 정도는 길러야 괜찮은 모양이 나오는데, 그때는 이미 레슬 임페리움 직전일 테니 말이다.
“그럼 그건 됐고.”
케인이 끼어들었다.
“디자인을 보자니 분명히 카리스마가 느껴지기는 하지만…… 굳이 이렇게 바꾸고자 하는 이유가 뭐지?”
“지금 테이커는 절 심리적으로 완전히 몰아붙이고 있는 상태 아닙니까?”
“그렇지.”
“그리고 이제 네버 이스케이프에서 테이커가 장의사 기믹으로 복귀하면, 분위기는 완전히 그쪽으로 넘어가겠죠.”
동시에 대립 자체의 스케일이 이전과 비교해서 몇 배는 더 상승할 터였다.
그리고 그걸 반반으로 맞추기 위해서는 나 역시도 변화를 꾀해야만 했다.
“그게 바로 이겁니다.”
후드 집업.
“어떻게 활용할 생각인가?”
“테이커의 장의사 기믹을 보고 저 역시도 진지해질 필요성을 느끼는 거죠.”
이전까지의 나는 선글라스를 쓰면서 다소 경박한 이미지가 있는 선수였다.
하지만 장의사 버전의 테이커에게 한 번 크게 당한 뒤, 깨닫게 되는 거다.
“절대로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대립하는 거지.
“확실히, 후드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으면 분위기가 살겠는데.”
긍정적인 대답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 * *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네버 이스케이프가 개최되었다.
테이커의 깜짝 등장을 엔딩으로 삼기 위해서 나와 오튼의 U.S. 챔피언십 매치는 자연히 메인이벤트가 되었다.
티켓은 당연히 모두 팔렸다.
5만여 명의 관객들이 운집한 가운데, 준비된 경기들이 하나하나 이어졌다.
그 내용 하나하나를 모니터링TV로 확인하고 있던 나는 텅 빈 락커룸을 확인하고는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오늘은 중요한 밤이다.
그러므로 다들 집중을 위해서 딱히 같은 락커룸에 모여 있지 않은 것이다.
나도 그랬다.
내 커리어 최대의 싸움.
그게 시작되려고 했다.
다행히, 킹스 럼블 이후로 잘 쉬어서 몸 상태는 현재 완벽하게 올라왔다.
몸도 다 풀어둔 상태였기에 얼른 경기장으로 나가고 싶은 기분만 들었다.
[코디와 체드가 오튼의 도움을 받아 타이틀을 방어해냅니다!!]
신인 두 사람이 얼싸안고 기뻐했다.
[레이 미스테리우스가 결국에 킹 부커의 왕좌를 무너뜨리고 맙니다!]
고참끼리의 싸움.
[바티스타가 승리를 가져갑니다!]
포효하는 근육질의 짐승.
그렇게 세미 메인이벤트까지 끝나고 광고 타임이 이어졌다.
“후우.”
깊게 심호흡한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고릴라 포지션으로 향했다.
* * *
챔피언은 보통 뒤에 입장하는 법이다.
그렇기에 팬들의 반응을 보고서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를 정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오튼이 먼저 링에 오를 때의 반응을 본 나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환호’가 나왔다.
[Waaaaaaaaaaaaaaaaggggghhhh!!]
[R.K.O.! R.K.O.! R.K.O.! R.K.O.! R.K.O.! R.K.O.! R.K.O.! R.K.O.!]
본인도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하지만 당연했다.
팬들은 지금 오튼이 나를 제발 흠씬 두들겨 패주길 바라고 있는 상황이니까.
그것을 본 고릴라 포지션 내의 직원들은 모두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신이 한순간에 탑 힐이 되었는데요.”
“아무리 팬들 변덕이 심하다고 하지만 어떻게 이런 반응이 나오는 건지.”
그리고 다들 날 돌아보았다.
이해를 할 수 없다는 얼굴.
하지만 사실, 간단한 이유였다.
‘나는 힐 포지션에 더 능하거든.’
나는 지금까지 쌍욕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테이커를 잘 조롱해왔다.
그러니 이런 반응들이지.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Boooooooooooooooooooooo-!!]
테이커가 평소 받는 환호에 절대 뒤지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야유가 나왔다.
‘할 수 있다.’
씨익 웃어 보이며 나는 그대로 커튼을 걷고 천천히 입장로 위로 나아갔다.
야유가 한층 더 커졌다.
하지만 나는 어깨에 U.S. 챔피언 벨트를 걸친 채 그런 야유들을 받아냈다.
링 위로 입장하고 소개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야유는 계속 이어졌다. 그것은 심지어 경기에까지도 영향을 끼쳤다.
압도적인 야유 속.
반대로 오튼에게는 환호가.
그런 상황에서 나는 팬들의 반응을 철저히 무시한 채 경기를 풀어나갔다.
온갖 기술들이 오가는 동안 팬들은 내가 지기를 염원하며 계속해서 야유했다.
[Taker! Taker! Taker! Taker! Taker! Taker! Taker! Taker! Taker! Taker!]
심지어는 그의 챈트까지도 나왔다.
그렇기에 나는 오튼과의 경기를 쉽게 풀어나가면서 팬들의 어그로를 끌었다.
그래야만 이후의 복귀에서 팬들이 상상 이상의 환호를 보낼 테니까.
10분 이상 이어진 경기, 오튼과 나는 완벽한 합을 선보이며 계속 싸웠다.
그리고 내게 기회가 찾아왔다.
쿠웅-!
오튼에게 순간 주도권을 내주었던 나는 멋진 스쿱 파워 슬램으로 반격하며 피니시 기술을 먹일 찬스를 얻었다.
바닥에 쓰러진 오튼.
[Booooooooooooooooooo-!]
야유 속에 코너 로프를 붙잡고 서있던 나는 오튼이 일어서는 것을 보며 달려가 스팅거를 먹이고자 움직였다.
하지만.
내가 달려가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대-앵──.]
만종晩鐘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순간 놀라 돌아보는 관객들.
그들의 환호성에 발이 멈췄다.
이건 각본이 아니다.
실제로 그 압도적인 존재감에 내 몸이 굳었고, 나도 모르게 입장로로 시선이 향했다.
죽음을 고하는 천사.
아즈라일.
장의사임에도 선역으로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가지고 있는 테이커는, 바로 그렇게 정의될 수 있는 선수였다.
번개가 치는 소리.
비가 내리는 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불길한 사운드.
장송곡.
검은 중절모.
검정색 코트.
검정색 롱팬츠에 검은 러닝셔츠.
캐스켓-테이커가, 돌아왔다.
[U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hhhhh!!!]
완전히 미쳐 날뛰는 관객들.
보랏빛 조명 아래에 서있던 그가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링으로 걸어왔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나는 이어 누군가 다리 사이로 손을 넣고 휙 잡아당기는 감각을 느꼈다.
바로 오튼이었다.
몸이 휙 뒤로 기울면서 넘어진 내 양쪽 어깨가 그대로 바닥에 닿았다.
삽시간에 벌어진 롤 업.
조명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심판이 달려와 카운트를 셌다.
[Waaaaaaaaaaaaaaaaggggghhhh!!]
팬들이 순간 놀라 환호를 보냈고.
1……!
2……!
3……!
땡땡땡-!
나는 허망하게 타이틀을 빼앗겼다.
“이런, 제길……!!”
쓰리 카운트가 끝난 순간 오튼의 몸을 떨쳐낸 나는 황당한 기분을 느끼며 링 위에 멍하니 주저앉아있었다.
테이커에게 눈길이 팔린 순간, 롤 업으로 내 타이틀을 훔친 오튼이 곧바로 도망치듯 링에서 빠져나갔다.
그 승리를 축하하는 테마곡은 울려 퍼지지 않았다. 링 위는 아직까지도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바로 저 남자.
[Taker-! Taker-! Taker-! Taker-! Taker-! Taker-! Taker-! Taker-!]
나에게 죽음을 고하러 온 천사.
장의사이자, 동시에 선지자.
캐스켓-테이커로 인해서.
“이런 개 같은 새끼가-!!”
나는 분노를 토해내며 곧바로 링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테이커가 곧바로 링 위로 미끄러지듯 올라왔다.
나는 곧바로 그 뺨을 후려쳤다.
쩌억-!
하지만 테이커는 끄떡도 않았고.
황당해 뒤로 주춤 물러서는 날 보며 통쾌한 기쁨을 느낀 팬들이 크게 환호성을 내질렀다.
[Yeeeeeeeeeeeeeeeaaaaahhhh!!]
그런 가운데.
테이커는 곧바로 주먹을 휘둘렀다.
뻐억-!
턱을 정통으로 맞은 내가 링 위에 쓰러졌다. 테이커는 곧바로 코트와 중절모를 벗어 던지며 나를 일으켜 세웠다.
[Taker! Taker! Taker! Taker! Taker! Taker! Taker! Taker! Taker! Taker!]
팬들의 챈트.
정말로 열 받는 상황이었지만, 조금 전까지 오튼과 싸웠던 내게 저항할 기력은 없었다.
이윽고 테이커가 내 몸을 번쩍 들어 올려, 한쪽 어깨에 짊어졌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무엇이 일어나려는지 알아차린 팬들이 모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렉 하트의 샤프 슈터처럼.
락콜드의 스터너처럼.
테이커를 상징하는 기술.
상대방을 거꾸로 든 상태에서 그대로 링 바닥에 정수리부터 꽂아버리는, 그야말로 지면에 묘비를 박는 듯한 필살기.
툼스톤 파일 드라이버.
그것이, 시전되었다.
테이커가 무릎을 꿇음과 동시에, 다리 사이에 있던 내 정수리가 그대로 링 바닥에 힘차게 충돌했다.
콰앙-!
[Yeeeeeeeeeeeeeeeeeeeaaahhhh!!]
팬들의 환호는 그야말로 한 달 동안의 어그로가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