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
레슬 임페리움이 막을 내렸다.
결과는 14 : 1.
테이커의 연승은 깨졌고, 나는 차세대의 기수로서 인정을 받아냈다.
그렇게 나는 테이커와 함께 이번 레슬 임페리움의 엔딩을 장식하고는 고릴라 포지션으로 돌아왔다.
직후, 습격을 받았다.
“You Mother Fu-k……!”
쿵!
돌진해온 바트가 그대로 나를 힘차게 벽으로 밀어붙였다.
분위기가 싸늘한 걸 느꼈던 나는 딱히 저항하지 않고 받아주었다.
뻐억-!
뺨을 스치는 통증.
“이 개 같은 새끼!! 대체 내게서 얼마나 빼앗아가야 만족할 거냐!!”
“보스…….”
“테이커!! 이게 무슨 짓이냐!”
“좀 진정하시죠.”
“닥쳐! 내 저 새끼를 죽이고 나도 오늘 죽어버릴 테니까!!”
바트는 울고 있었다.
어린애처럼, 수많은 부하들 앞에서 초거대 기업의 회장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댔다.
그 감정을 이해했다.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이 가장 싫어하는 남자의 손에 의해서 무너지는 꼴을 직접 봤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번에는 말을 아끼고 얌전히 받아주었다.
바트의 꼬장을.
테이커가 그를 붙잡았다.
“단독으로 제 생각이었습니다.”
“나한테 대체 왜 그러는 거냐!!”
“어차피 언젠가 깨질 연승이라면 제가 선택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걸 위해서 이 업계의 금기를 깨버린 거냐!! 각본을 어기고 너희 둘이서 이런 배신을 저질러!!”
“죄송합니다. 보스.”
“넌, 테이커 넌……! 벌금이다!!”
바트가 흥분해 소리쳤다.
얼씨구, 그래도 징계는 하네.
“그리고 신! 너는 해고야! 당장 내일부터 짐 싸서 내 회사에서 나가!! 저 새끼 기록 다 말소해버려!!”
“보스!”
“닥쳐!! 다 꺼져! 다 꺼지라고!!”
바트는 완전히 정신이 나가 고릴라 포지션 내의 물건들을 집어 던지면서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거 꽤 큰 사건이 될 것 같았다.
바라던 바였지만.
* * *
내가 슛으로 테이커의 연승을 끊어낸 행동에 대해서는 회사 내부에서도 꽤나 극명하게 평가가 갈렸다.
팬들이 좋아하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부류.
업계의 규칙을 어겼으니 용납하고 넘어갈 수 없다는 부류.
거기에서 나아가, 업계의 규칙을 지켰으면 바트가 신이 연승을 끊는 걸 과연 허락했겠느냐는 부류.
각각의 의견이 물러서지 않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와중, 선수들은 그래도 대부분 내 편이 되어주었다.
테이커가 직접 선수들에게 이 일의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면서 나를 변호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행히 선수들과의 관계는 유지가 되었고, 오히려 친한 몇몇은 내게 앞으로 고생하겠다면서 힘든 일 있으면 이야기하라고 따로 문자를 보낼 정도였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계신 회장님이 매우 화가 나셨고.
나는 일단 무기한 정직을 받았다.
여기서 조금 아이러니한 사실이, 그러면서 바트는 이 슛이 외부로 퍼지지 않도록 엄청나게 신경을 썼다.
돈과 협박, 회유로 모든 관계자들을 구워삶고 철저하게 내가 저지른 연승 저지에 대한 진실을 봉인했다.
테이커가 업계의 불문율을 어겨가면서 직접 나에게 져주었단 사실을 퍼뜨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나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슛이란 사실이 밝혀지면 연승 저지의 순수성에 금이 간다.
내가 랙다운에서 쌓아올린 금자탑에 흠이 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대외적으로 ‘복부 부상으로 인한 장기 휴식’ 정도로 발표가 났다.
작년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팬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스타인 내가 또다시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이유도 확실하게 있었고, 이럴 경우를 대비해 나는 태그 리그 각본을 제안한 것이다.
쓸 만한 선수들을 여럿 발굴해뒀으니 내가 사라져도 랙다운은 알아서 잘들 해주겠지.
그리하여 당분간, 타의로 프로레슬링 업계에서 떠나있게 된 나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줄곧 미뤄두었던 외부 일정을 소화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몸도 다 안 나았는데.
“으윽, 으그으으윽…….”
“버텨요. 버텨.”
티파니가 잔혹하게 말했다.
그녀는 아직도 멍이 채 가시지 않은 복부에 연고를 발랐고, 그 위에 붕대를 칭칭 휘감아주었다.
그렇게 일련의 작업(?)이 끝나자 나는 다시 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맨 뒤 재킷까지도 걸쳤다.
아리마니 정장.
또 다시 사교계의 파티였다.
“슬슬 돌아가죠.”
“……좀만 쉬었다 가면 안 될까.”
침대에 누워 늦장을 부리고 있자니 드레스 차림의 티파니가 내게 다가와 옆에 털썩 걸터앉았다.
오늘도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
틀어 올린 금발, 새하얀 도자기 같은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붉은색의 드레스가 환상적이었다.
그게 너무도 아름다워서 순간적으로 장난을 칠 수밖에 없었다.
“오늘 컨셉은 순두부찌개야?”
“아니거든요.”
“오랜만에 생각나네.”
“……먹어볼래요?”
“으, 응?”
“여기 있는데.”
살짝 유혹하는 그녀.
거기에 순간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은 나는 벌떡 일어나면서 티파니의 팔을 당겨 침대에 눕혔다.
눈을 동그랗게 뜨는 그녀의 위에 팔을 대고 슬쩍 속삭였다.
“내가 작년에는 몸이 아파서 그런 거였지만, 이번에는 그때만큼 심하게 다친 건 아니거든?”
“으, 응?”
티파니의 뺨이 붉어졌다.
거기에서 살짝 연기.
“혼날래?”
“응!”
“……?”
“시계 방향으로.”
“뭐? 웁……?!”
입술 사이로 혀가 파고들었다.
순간 당황해 있자니 어? 어? 왜 혀가 진짜 시계 방향으로 돌……?
“끅?!”
순간 복부를 쿡 찌르는 손길.
“아픈 거 맞잖아요.”
슬쩍 입술을 뗀 티파니가 의기양양하게 중얼거리며 나를 밀어냈다.
방심하고 있던 찰나에 찌르니 나도 모르게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눈물을 찔끔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옷매무새를 깔끔하게 정돈하고 서있는 티파니를 발견했다.
그녀가 당당하게 말했다.
“그쪽이 직접 요구했던 파티잖아요? ‘혼내’느라고 늦으면 안 되지.”
“그, 그래.”
어쩐지 내가 혼난 기분인데.
얼결에 대답하자니 슬쩍 팔짱을 껴온 티파니가 그대로 날 이끌었다.
문을 열고 나가자.
파티장의 복도였다.
영화 속에 나오는 부호의 저택.
우리는 그곳에 있었다.
그나저나.
“왜 침실을 드나들게 두는 거지?”
“쓰라는 거죠.”
“……뭐?”
“‘파티’잖아요. 당연히 그런 걸 바라고 오는 사람들 역시 있다고요.”
섹슈얼한 무언가.
티파니는 그렇게 에둘러 말했다.
여기에서 남자를 잡고 싶어 하는 여자도 있고, 반대로 여자를 안고 싶어 하는 남자도 있는 법이란다.
물론 여자는 미인, 남자는 부자라는 게 전제되어야 한다지만.
“허어.”
“웨이터들한테 이야기하면 비아그라도 챙겨줄걸요. 그거 없이는 그걸 못하는 아저씨들도 많이 있어서.”
참 놀라운 인간들이다.
내가 회귀한 뒤 어마어마한 부자들을 보면서 느낀 건, 욕망이 비틀린 이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점이었다.
성性이나 음식 같은 쾌락에서 그들은 일반인들보다 더 연약했다.
하긴, 돈이 그만큼 있으면 자기가 원하는 만큼 욕구를 채울 수 있을 테고, 거기 중독이 될 수밖에 없는 거겠지.
“우리 회장님이 정상이라니.”
“어머나, 애꾸눈 세상에서는 정상이 병신이라는 말도 몰라요?”
“그, 런가?”
“예, 그래서 아버지는 이런 쪽으로는 언제나 비주류였죠. 돈은 많지만 괴짜처럼 여겨진다고 해야 하나.”
티파니가 슬쩍 내게 더 붙었다.
“그래서 사실, 이렇게 말은 해도 저 역시 그다지 익숙하진 않아요.”
“나만 믿으라고.”
“그러니 함께 온 거죠.”
배시시 웃는다.
그런 말을 듣자니 또 어깨가 으쓱해졌다. 나는 당당하게 티파니를 데리고 파티장으로 돌아갔다.
거대한 홀.
쾌락에 눈먼 야만인들이 정장과 드레스를 입어 신사숙녀의 모습을 가장하고 있는 가운데.
나를 알아본 사람들이 다가왔다.
이 파티는 미국의 사업가, 은행가, 주식투자가들이 모인 파티였다.
물론 파티의 흥을 돋우기 위해 할리우드 스타들 역시 다수 참석했고.
나는 그 할리우드 스타의 하나로.
티파니는 내가 소속된 에이전시의 사업가의 입장으로 초대를 받았다.
거기에 더해, 액플의 최대 주주라는 포지션 또한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수많은 부자들이 모인 이 파티에서, 나는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 몇 가지 일을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내가 선수로서 나름대로 커리어를 쌓아오면서 많은 일이 변했다.
분명 하락세를 겪어야 할 WWF, 프로레슬링은 이전과 같은 인기를 되찾고 오히려 더 떡상 중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한 가지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몰랐다.
가능성은 아마 희미하겠지만.
그래도 확인을 해야만 했다.
나는 그렇게 파티를 즐기고 있는 사업가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적당한 타이밍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아, 신! 축하드립니다.”
“이번에 표지 장난 아니던데요.”
다들 그 이야기뿐이었다.
내가 테이커의 연승을 끊어낸 것은 미국 내에서 큰 화젯거리였다.
심지어는 미국 내에서 가장 저명한 스포츠 매거진인 ‘스포츠 일러스트’의 표지를 장식할 정도였다.
쓰러진 테이커와 포효하는 나.
그 옆에 문구는 간단했다.
‘Streak Is Over.’
연승이 끝났다.
그와 함께 발매된 어나더 버전 표지에서는 다른 문구가 사용되었다.
‘New Era Is coming.’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
참고로 우리는 둘 다 여러 권 사뒀다.
물론 자리가 자리인 만큼 대화의 주제는 내 연승 저지만이 아니었다.
“이번에 액플에서 발표한 제품이 과연 시장을 뒤흔들 수 있을까요?”
“전 과장되었다고 봅니다. 그 사람은 언제나 그랬죠. 광대처럼 퍼포먼스나 보일 줄 알지. 기업가로서의 생명은 솔직히 말해 끝났다고 봅니다.”
“그래도 꽤 흥미로운 제품이던데요. 손가락을 대면 움직인다니요.”
“하지만 배터리 문제가 크죠. 다섯 시간이라고요? 제기랄, 손바닥만 한 양초가 더 느리게 녹겠군요.”
“주목은 끌고 있지만 제대로 된 제품이 나오려면 그보다 훨씬 더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거기다 그런 기술이 애초에 이전까지 없었던 것도 아니잖아요?”
“글쎄요.”
바로 그때, 새로운 인물이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던 무리에 들어왔다.
그 얼굴을 알아본 나는 슬슬 이야기가 진행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백발을 깔끔하게 넘긴 백인 남성.
깔끔하게 콧수염을 길렀고, 선한 눈매와 젠틀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괴팍한 야수와 같은 우리 영감님하고는 완전 정반대의 스타일.
“내가 핸드폰은 잘 모르지만, 그런 제품이 있어야 IT시장이 죽지 않고 살아나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 말도 맞군요. 체드.”
“저는 개인적으로 기대가 큽니다. 그렇게 선구자가 있고 다른 사업체가 계속해서 경쟁을 하면서 상품과 시장이 커지는 셈이니까요.”
그가 날 돌아보았다.
“그렇지 않습니까? 신.”
“정론이군요. 체드.”
“호오, 날 아나요?”
“물론 알고 있습니다.”
체드 터너.
TBS라는 방송국의 사장이자, 유능한 사업가로서 정통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또한.
머나먼 과거에 GCW를 두고 바트 맥센과 대립을 벌였기도 했다.
“영광이군요. 현재 미국에서 가장 핫한 사나이가 날 알아봐주다니.”
“이런,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시대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원하죠. 당신은 미국의 흐름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고. ……그렇지 않나요? 티파니 맥센.”
“……오랜만이군요. 터너 씨.”
티파니의 표정이 굳어졌다.
일부러 한껏 무시했다가 대화를 걸어오는 방식. 아직까지도 바트에 대한 감정이 남아있다는 증거였다.
“아버님은 잘 지내시는지.”
“예, 물론 건강하시죠.”
“그거 참 다행이군요. 저도 이제 늙어서 묵은 감정을 해소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습니다만.”
“나중에 자리를 마련해볼까요?”
“젊고 유능한 3세대 사업가가 그래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죠.”
체드가 젠틀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가 물러간 뒤, 티파니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저 양반이 왔다니.”
“사이가 안 좋나 봐?”
“지옥이죠. 사실 제가 직접 겪은 일은 아니지만, 그때 당시에 정말 어마어마했다고 들었어요.”
거기다 눈이 죽지 않았다.
티파니는 그렇게 설명하며 담배를 하나 꺼내 천천히 불을 붙였다.
푸른 눈매가 진지해졌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얼굴이다.
“그리고 알아보는군요. 당신이 지금 왜 인기를 얻고 있는지를.”
“감이 안 죽었다는 건가.”
“예, 지금 터너는 시대정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거잖아요.”
티파니는 그렇게 설명했다.
세대와 인종, 계층 간의 갈등.
사람들이 직접 겪고 있으며 지긋지긋하게 느끼고 있는 사회 현상.
“당신은 그걸 깨부수고 있기 때문에 인기를 얻는 거잖아요?”
“그런가?”
“그럼요. 그에 걸맞은 실력도 가지고 있고. 당신에게 사람들이 느끼는 쾌감은 바로 그거란 말이에요.”
아메리칸 드림.
미국인의 영원한 로망.
개척 정신.
새 시대의 개막.
현재 미국의 대다수는 나를 그 주인공이 될 만한 인물로 인정했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건 실력이죠. 당신이 그만한 실력을 보여줬기 때문에 다들 납득하는 거예요.”
“하긴, 실력도 없이 무작정 민다고 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긴 하지.”
나는 뺨이 붉어진 채 대답했다.
“어쨌든, 그걸 알아봤다는 건 좀 전에 한 말은 단순한 너스레라는 뜻이겠죠.”
“뭐?”
“자기는 다 늙었다고 말하지만, 아직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아.”
담배 연기가 천천히 피어올랐다.
솔직히 좀 놀랐다.
아직 어린 나이였음에도 이 정도까지 깊은 통찰력을 발휘할 줄이야.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파티장 반대편에 서있는 체드 터너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어차피 확인할 필요가 있으니까.
이야기를 좀 나눠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