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
바 테이블 앞에 서있는 체드의 옆으로 다가갔지만, 그는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술을 홀짝거렸다.
위스키였다.
그렇기에 나 역시도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니 쿵, 하는 소리가 났다.
아이스볼이 담긴 술잔.
입에 시가를 문 테너는 거기에 오크통의 향취가 스며든 술을 따랐다.
그리고 밀어냈다.
스르륵.
바 테이블 위를 미끄러져온 잔을 받은 나는 그대로 한 모금 마셨다.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맛이 괜찮은데요.”
“좋은 술이죠. 그만큼 값도 있고.”
“얼마나 하죠?”
“그걸 말하면 흥미가 식지요.”
터너가 싱긋 웃었다.
“사실, 모든 것의 가치가 그래요. 사람이 매기는 거지만, 사실 거기에 모두가 납득하는 건 아니에요.”
“어차피 납득하는 사람만 값을 치르고 구매하는 게 아닐까요?”
“하지만 모두가 납득하면서 동시에 가장 비싼 가격으로 제품을 팔고 싶은 게 우리의 마음이죠.”
그게 바로 사업가로서의 마인드다.
그렇게 설명한 터너는 이어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신, 당신은 당신 스스로가 얼마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시죠?”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프로레슬링 업계에 악역으로 한 획을 그었던 밀리언 달러 가이.
그의 명대사에 비슷한 말이 있다.
‘Everybody's Got A Price.’
모든 것에는 값을 매길 수 있다.
그것과 비슷하게 들리는 말이다.
“글쎄요.”
나는 일단 받아넘겼다.
아마 역사가 내가 기억하는 것처럼 흘러가고 있다면, 터너에게 굳이 그걸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다.
방금 말한 술의 가격과 비슷한 거다.
내가 여기서 내가 정가를 제시한다면 그 순간 흥미는 사라지고 만다.
“어려운 문제기는 하죠.”
슬쩍 넘기는 터너.
“하지만, 현재 프로레슬링의 가치에 비하자면…… 내 생각보다는 낮은 연봉을 받을 것 같은데.”
맞는 말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 업계에 WWF 이외에 그 정도로 큰 연봉을 줄 수 있는 회사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아무리 회사에서 갑질을 하고 몸값을 깎더라도 선수들은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대체제가 없기에.
터너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예전에 폴 헤이건이었나? 그 친구가 바트 맥센에게 링 위에서 했던 말이 문득 기억나는군요.”
“아, 그거라면…….”
전설적인 세그먼트였다.
헤이건의 진심이 담긴 그 세그먼트는 역사에 기록될 명장면이었다.
바트 맥센의 기업가로서의 면모를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세그먼트.
그걸 재미있다며 하도록 허락했다는 점이 바로 바트의 기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바트 맥센!! 넌 캡틴 로건의 피를 빨아서 타이탄 타워를 세웠어!!]
여기서 헤이건이 말한 타이탄 타워는 WWF 본사 건물을 의미했다.
[또한 그렉 하트의 꿈을 빼앗아서 WWF 로고가 치장된 비행기를 샀지! 끝이 아니야! 넌 존 마이클스의 미소를 훔쳐서 회사를 유명하게 만들고 억만장자의 대열에 이르렀어!!]
그리고 폭로가 계속 이어졌다.
이 업계.
황금시대의 이전.
바트 맥센의 윗세대.
바트 맥센 시니어의(현재 우리 회장님은 주니어다.) 이야기가 나왔다.
그때까지 프로레슬링 단체는 각각의 주(州)를 거점으로 삼은 브랜드가 하나씩 운영되는 시스템이었다.
마치 스포츠 팀처럼 말이다.
큰 쇼가 있으면 다른 단체 선수들이 와서 경기를 갖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 계속 교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바트 맥센 ‘시니어’는 뉴욕을 근거지로 삼아 자신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단체를 성장시켰다.
그때까지 단체는 CWC라는 이름이었고, 다른 단체들과 삐걱거려도 나름대로 공존하며 일을 해나갔다.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프로레슬링 단체 경영을 가업으로 물려받은 바트는, 공격적인 확장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절대로 단체를 확장시키지 말고 잘 공존해라.’라고 이야기했지만, 아들은 코웃음을 쳤다.
바트는 캡틴 로건과 파이널 워리어, 랭 새비지 같은 선수들을 내세워 미국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프로레슬링은 전 세계적인 문화로 크게 성장했지만.
바트는 공공의 적이 되었다.
확실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아마 스테로이드 파동에는 체드 터너와 같은 사내들의 입김이 있었을 거다.
그는 이 업계와 관련된 인물은 아니었지만, 바트 맥센의 공격적인 확장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이니까.
나름의 근거도 존재했다.
황금시대의 아이콘으로서 당시까지도 잘 나가던 캡틴 로건이 갑자기 회사를 배신한 이유, 흑막이 있었다고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때쯤 해서 사실 WWF만큼 거대한 단체가 하나 더 생길 예정이었는데, 어딘가 꼬인 것이 아닐까.
어쨌든 돌고 돌아서.
이렇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얼마 후.
신생 단체가 출범된다.
TBS라는 초거대 방송국과 각종 자본들이 합세해 만들어진,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프로레슬링 단체.
반 WWF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ACW(All Champioship Wrestling).
전생의 이 시점에서, WWF는 시나의 역반응으로 무너져가고 있었다.
그때를 노려서 만들어진 이 단체는 WWF가 잃어버린 자극적인 요소를 바탕으로 대박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번 생애에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절정기였던 태도 불량 시대처럼 회복이 된 상황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그럼에도 ACW는 전생과 다를 바 없이 출범할 계획인 것 같았다.
내 옆에 선 터너의 태도가 점점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헤이건 그 친구, 지금 뭐하죠?”
“GCW에서 링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습니다.”
“호오, 그거 참 흥미롭군요.”
“왜 그러시죠?”
“아니, GCW는 예전에 바트 맥센과 내가 소유권을 두고 다툰 곳이거든요.”
“제가 태어나기도 전 일이네요.”
“그래서 사실, 얼마 전까지도 GCW는 꾸준히 챙겨봤었는데. 당신 활약이 정말로 환상적이었죠.”
“감사합니다.”
“그립진 않나요?”
“……글쎄요.”
“바트가 당신이 테이커를 이기게 그냥 뒀을 리는 없고. 요새 좀 힘든 상황을 겪고 있을 것 같은데.”
“억측입니다.”
“뭐, 어쨌든. 감당하기 힘든 일이 있다면 이쪽으로 연락해줘요.”
그가 명함을 내밀었다.
슬쩍 받아 챙긴 나는 그대로 웃으며 멀어져가는 테너를 바라보았다.
이걸로 확인은 끝났다.
역사는 바뀌지 않았다.
ACW는 출범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노골적으로 내게 접촉해올 리가 없었다.
공격적인 마케팅과 돈으로 선수들을 사들여, 한순간이었지만 WWF를 제치기도 했던 문제적 회사.
‘물론 이번 생애에서는 호락호락하게 추월하지는 못할 테지만.’
그리고 동시에, 이전처럼 허무하게 망하지도 않을 거다.
확실히 바트보단 나은 인간이다.
돈은 있고 열정은 없다.
어쩌면 나와 꽤나 죽이 잘 맞을 듯했다.
만약 나에게 파트너가 없었더라면, 협업을 고려해봤을 정도로.
터너가 떠나가자 저 멀리에서 담배를 피우던 티파니가 다가왔다.
“무슨 이야기를 했어요?”
“서로를 조금 떠봤지.”
“소득은 있었어요?”
“물론.”
나는 씨익 웃어보였다.
“티파니.”
“예, 신.”
“우리는 GCW를 살 거야.”
“……무슨 그런 걸 차 타고 집에 가다가 맥로날드 드라이브 스루에서 치즈버거 산다는 듯이 말해요.”
황당해 대답하는 티파니.
하지만 난 진심이었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선글라스를 써서 눈을 가린 티파니 맥센이 리무진 뒷좌석에서 내렸다.
흰색의 바지 정장.
검은 셔츠의 단추 윗부분을 적당히 풀어낸 그녀는 변하지 않는 풍경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성조기와 검은색 바탕에 WWF 로고가 들어간 깃발이 함께 흩날렸다.
‘정말 그대로네.’
WWF 본사.
온통 유리창으로 된 건물을 올려다보던 그녀는 이어 안내를 나온 직원과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또각, 또각.
대리석 복도에 하이힐의 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를 알아본 사람들 몇몇이 인사를 건넸다.
“아, 반가워요.”
거기에 우아하게 답한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으로 향했다.
회장실.
약속 시간에 딱 맞춰서 왔지만, 무려 30분 동안 그 앞의 소파에서 기다렸다.
이게 아버지의 방식이었다.
요새 담배가 늘었다.
긴장하거나 생각을 할 때.
혹은 기분이 안 좋을 때.
그런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있기에, 그녀는 최근 들어 앞선 두 가지 일이 자주 일어났음을 느꼈다.
그렇게 고민하다 케이스에서 담배를 빼물고 불을 붙였을 때였다.
“아가씨, 회장님께서…….”
빌어먹을.
담배를 구깃구깃 눌러 끈 티파니가 자리에서 일어서 안으로 들어섰다.
드넓은 회장실.
바트 맥센은 레슬 임페리움의 사건 이후로 폭삭 늙은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냐.”
“잘 지내셨어요?”
“후우, 그래 보이냐?”
한숨을 내쉬는 바트.
“그 개자식은 내 작품을 부쉈어.”
“테이커는 변하지 않았어요. 아버지. 그대로 위대한 선수라고요.”
단지 이번 일을 통해 또 한 명의 위대한 선수가 나온 것뿐이었다.
그것도 프로레슬링에 대한 크나큰 열정을 지닌 젊은 선수가 말이다.
하지만 바트는 인정하지 못했다.
“너에게 훈계를 들을 마음은 없다. 티파니. ……무슨 일로 왔지?”
“이제 어쩌실 거죠?”
“네가 그 개자식의 대변인이로군.”
“아마도요? 어쨌든 신은 그쪽의 상품인 동시에 우리의 상품이기도 하니까.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서요.”
“나도, 모르겠다.”
바트는 백기를 들었다.
“그냥 이대로 둘 거야. 팬들이 뭐라고 하더라도 신경 안 쓸 거다”
“케인이 그렇게 했었잖아요?”
“체면 때문에 그리 했다가 이 사단이 나고 말았지. 애초부터 이 회사에 들이면 안 될 놈이었는데.”
“……아버지.”
티파니가 어이가 없어져 웃었다.
결국 뭐가 남았는가.
추한 자존심이다.
신은 이미 팬들에게 한 시대의 주연이 될 인물로 낙점을 받았다.
바트가 그렇게 놔두었다.
월드 타이틀 하나만 안 주면 된다며 선을 긋고, 적당히 신을 이용해서 돈을 벌어보려다.
이렇게 되었다.
그런데도 인정하지 못했다.
테이커의 연승마저 훌륭하게 소화를 해냈는데도 불구하고, 바트는 신을 완전히 묻어버릴 생각이었다.
그 심리가.
모조리 신의 판단대로였다.
‘귀신같네.’
티파니는 그 말을 떠올렸다.
[바트는 이제 직접 자신이 나서서 날 이 회사에 묶어두려고 할 거야.]
자존심도 뭣도 다 버리고.
다른 회사에 넘겨주기는 싫고, 그냥 뒀다가는 뭘 저지를지 모르는 인물로 완전히 찍혀버렸으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이적.
하지만 어디로?
그 또한 정해두었다.
티파니는 다리를 슬쩍 꼬았다.
지금 그녀는 무척이나 어려운 거래를 성사시켜야 하는 시점이었다.
그렇기에 머리가 핑핑 돌았다.
“신이 좋아하겠네요.”
“뭐……?”
“아버지가 그렇게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걸 보면 좋아하겠어요.”
“그게 무슨 소리냐? 나는 지지 않았어. 오히려 계약에 묶여 있는 그 개자식이 내게 빌어야 할 판이지.”
“신은 제게 매번 그랬거든요. 아버지가 역시 감은 안 죽었다고.”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시나를 보면 알 수가 있다고 했죠. 그는 환상적인 선수에요. 아버지가 발굴해낸 작품 중 최고가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재능이 있죠.”
“그런 반푼이가?”
“이걸 또 모르시네.”
티파니가 쓰게 웃었다.
“프로레슬러에게 필요한 재능은 하나에요. 압도적인 카리스마. 시나는 그 엄청난 역반응 속에서도 반대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잖아요.”
그런 선수는 없었다.
이 WWF 역사에서 단 한 명도.
시나처럼 압도적인 환호와 야유를 동시에 받는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말인즉슨, 상품 가치가 엄청나다는 뜻이죠. 시나를 욕하기 위해, 시나를 지지하기 위해. 수많은 팬들이 지금 텔레비전을 틀고 있잖아요?”
“………….”
“그래서 말인데, 신은 아직 아버지와의 승부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나와의, 승부?”
“예, 그리고 저도 그래요.”
“……무슨 제안이 하고 싶지.”
바트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이렇게 끌어내는 게 정답이었다.
신의 말대로였다.
티파니는 바트 맥센이라는 존재를 이해하는 그의 통찰력에 경외감을 느끼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GCW를 저희한테 파세요.”
“뭐?”
“랙다운을 달라는 말도 않겠어요. 지금 GCW 선수단과 함께 완전히 독립 단체로 인정해주고, 신을 이적시켜준다면…… 저희의 싸움은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겠죠.”
바트는 침묵했다.
사업가의 안광이 빛을 되찾았다.
“헐값에 넘길 마음은 없다.”
“저희 S&T가 끌어 쓸 수 있는 돈이 얼마인지 알고 계시지 않아요?”
“그걸로 그런 소규모의 프로레슬링 단체를 사서 운영하겠다고? 다들 박수를 치면서 환영하겠구나.”
“아버지, 더 이상 프로레슬링은 우리가 알던 그 컨텐츠가 아니에요.”
숀 시나.
그리고 신.
두 사람의 아이콘에 의해 다시금 주류 문화로 올라서고 있었다.
“지금 코리아에서 시청률이 30퍼센트 이상 나오는 거 알고 계시죠? 그쪽 국민들은 지금 신을 국가적인 영웅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놈은 미국인…….”
그 말에 기가 차 웃는 티파니.
바트 맥센이 직접 저런 말을 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역시 속으로는 신을 한 사람의 아이콘으로 인정하고 있는 주제에.
그와 계속 척을 지기를 택하다니.
하지만 그게 드라마틱했다.
이 싸움은 이어져야만 했다.
“GCW를 넘겨요. 아버지. 그렇다면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반드시 이 회사를 먹어치우고 말 테니까.”
“……푸하하하하하하하!!”
티파니의 자신만만한 선언에 호쾌한 웃음을 터뜨리는 바트 맥센.
콰앙-!
자신의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일어선 그가 야수의 엄니를 다시금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래, 어디 해보자.”
그가 보기에, 고작 작은 단체 하나 가져가봤자 자신에게 대항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물론.
S&T는 그에 대한 대비도 철저하게 해둔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