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282화 (282/634)

282.

“GCW를 팔겠습니다.”

“……?”

“필요하시잖아요? GCW.”

자신의 속내를 훤히 꿰뚫어 본 이야기에 놀랐는지, 체드 터너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창백하게 물들었다.

TBS의 본사, 회장실.

이른 오전, 약속을 잡고 방문한 나는 은근히 간만 보는 터너에게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도와주었다.

ACW 출범의 마지막 패.

바로 그게 GCW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지역감정’.

WWF는 미국의 부자들이 모여 사는 동부를 거점으로 형성된 단체였다.

하지만 프로레슬링은 결국 남부 레드넥들이 주로 즐겨오던 문화다.

그러므로 현재 WWF에 맞서 그 시청자층을 빼앗아 오기 위한 구심점이 바로 GCW라는 ‘남부’ 단체였다.

ECW와 비슷한 경우였지만.

그 ECW조차, 결국 현재는 WWF에 소속되어 있다는 점에서 반발을 느끼는 사람도 없지는 않았다.

딱히 다른 대체제가 없는 상황이라서 어쩔 수 없이 보기는 했지만.

결국 WWF는 전 세계를 기점으로 삼는 거대한 왕국을 세운 만큼 적들 또한 무척이나 많은 상황이었다.

단지 지금까지는 딱히 준비가 되지 않아서 터져 나오지 않았을 뿐.

그 준비는 곧 끝나 남부와 과거에 대한 영광을 되찾는다는 슬로건을 내세우면서 ACW가 출범되었고.

그들은 한동안 WWF의 큰 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오래 가지 못하고 내부에서부터 멸망하기는 했지만.

결국 끝까지 남은 WWF의 승리로 일단락되고, 프로레슬링은 시나라는 아이콘이 사라진 이후 천천히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뭐, 거기에 대해서는 이렇게 저렇게 할 이야기가 많기는 하지만.

일단 나는.

이 이야기의 전후 사정을 모두 알고 있는 자로서, 좀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난입할 생각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요?”

당황하던 터너가 물었다.

애써 평온을 가장한 표정.

콧수염이 귀엽군.

“말 그대로 GCW가 필요하다면 조건에 따라서는 넘겨드릴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말했듯 저는 프로레슬러가 아니라 S&T의 S로서 여기 온 겁니다.”

“S&T가 설마…….”

“아, 대외적으로는 Social Justice&Terror Rising인데. 아닌가. Standard&Twinkie lovers였던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말에 눈썹을 찡그리는 터너.

이런 순간에 장난을 치는 내 모습에 아마 약간 화가 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 지론인데.

착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은 꼭 열 받게 만들어봐야만 하는 법이다.

그래야 알 수 있거든.

그 감춰둔 본성을.

“어쨌든, 사실래요?”

“그게 무슨…….”

“다 알고 왔습니다. 대리자를 내세워서 GCW를 사고, 그걸 가지고 단체를 출범시키려고 하는 것쯤은.”

나는 슬쩍 테이블 중앙에 놓여 있던 손님용 시가를 하나 꺼내들었다.

불을 붙이고 입담배를 즐겼다.

물론 근거는 없는 이야기다.

아예 조사해보지도 않았다.

ACW의 출범은 철저할 정도로 비밀리에 붙여진 이야기였으니까.

WWF도 그 출범 사실을 홍보 사진이 뜨기 전까지는 몰랐을 정도다.

하지만 괜찮았다.

“무슨 근거로 그런 헛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신. 왜 내가 프로레슬링 단체를 산다고 생각을…….”

“All Championship Wrestling.”

“…….”

“캡틴 로건, 랭 새비지, 케빈 제시, 스컷 홀, 슈타이너 브라더스. 또 누가 있더라. 아, 그 남자도 있었죠.”

그렇게 나는 황당해하는 터너의 앞에서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NWA를 비롯해 지금 명목만 이어지고 있는 각종 단체를 인수하고, 이 업계를 뒤집을 생각이시잖아요?”

나는 빙긋 웃었다.

딱히 별다른 필요가 없었다.

굳이 사람을 써서 조사할 필요가 없이, 나는 터너가 가진 사업가로서의 상상력을 이용했다.

“어떻, 게.”

머릿속으로 계속 생각하겠지.

어떻게 내가 그 정보들을 알고 있는지. 대체 어디서 새어나간 건지.

모두를 의심하고 내 말을 믿겠지.

우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로서 난 이득을 본다.

WWF와 ACW의 사이에서.

새 단체를 출범시킨다.

그리고 계속 그들을 이용한다.

그게 내가 그리고 있는 시대.

이름도 정해뒀다.

War Era.

전쟁 시대.

나는 시가를 끄고 일어섰다.

재킷을 툭툭 털어내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터너를 바라보았다.

“뭐, 생각해보고 연락주시죠.”

“자, 잠깐…….”

터너가 날 붙잡았다.

“어떻게, 알아냈지요?”

말도 안 되는 질문이다.

내가 대답할 리가 없는데.

하지만 그걸 통해 나는 터너가 엄청나게 당황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기서 뭐라고 대답하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뭐?”

“지금 GCW의 가치 말입니다.”

“아니, 잠깐. 애초에 지금 GCW의 소유주는 바트…….”

“그 문제를 해결했으니 지금 제가이 자리에 와있는 거겠죠?”

나는 빙긋 웃었다.

“그리고 저는 GCW의 가치를 그쪽만큼이나 잘 알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그에 걸맞은 값을 불러주셔야만 이치에 맞겠죠.”

“끄으…….”

신음을 흘리는 터너.

80년대에 WWF에 팔린 이후, 가치를 잃고 유명무실해진 산하 단체.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내가 그 단체가 얼마나 큰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몰래 대리인을 내세워 GCW를 날치기하려고 했던 터너는 완전히 닭 쫓던 개가 된 상황이었다.

“그럼 회장님, 가격에 대한 확신이 서면 이야기를 진행해보죠.”

나는 그렇게 한마디를 남겨두고는 그대로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재킷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내가 안에 있는 사이 종이와 펜을 준비해두었던 터너의 비서들에게 사인을 하나씩 해주고는.

“엘리베이터로 모시겠습니다.”

끝까지 안내를 받았다.

웃음과 함께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주면서 인사를 나눈 나는 그대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벽에 기대어 섰다.

‘끙.’

긴장이 턱 풀어졌다.

최대한 쿨하게 대응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역시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전생의 나는, 터너와 같은 인간에게 있어 길거리에 다니는 개미와도 같은 인간이었다.

그런 내가, 한 번 인생을 겪고 귀환하면서 얻은 정보를 무기로 삼아 그에게 대응하고 있다.

그게 재미있으면서도, 역시 안 입어본 옷이라 그런지 긴장되기는 했다.

거기다 터너의 비서들 같은 미녀들이 은근히 나에게 추파를 던지는 것도 이제는 좀 익숙해질 법한데.

전혀 그렇지를 않아서 말이지.

그래도 괜찮았다.

이게 나다.

날 믿고 가자.

……아, 그리고 제기랄.

솔직히 여자한테 인기 많으면 기분 좋잖아.

안 그래?

그렇게 생각하며 감정을 정리하던 찰나.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고 동시에 허벅지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누군지 확인해본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님(?)이시다.

설마 들었나.

내 생각을.

“어, 죄송해요?”

[……뭐예요?]

“아, 아니. 그냥 순간.”

[너 또 나쁜 생각했지.]

“아뇨, 그건 아닌데.”

[집에 오면 혼날 줄 알아.]

구체적으로 어떻게요.

그렇게 말하려다가 순간 이 상황이 웃겨서 그만 킥킥 웃고 말았다.

요새 기분이 좀 좋기는 했다.

차근차근 뭔가가 만들어져가는 과정이 이전과 달리 즐거워서 말이다.

“이쪽은 끝났어.”

[저도요. 당신 말대로 껄껄 웃으면서 좋다고 받아들이던데요.]

“그거 다행이네.”

[‘둘’이 참 비슷한 성향이네요.]

티파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그녀가 만나고 온 사람은 바로 로널드 트럼프였다.

바트 맥센과의 거래는 진즉에 끝났고, 우리는 GCW와 선수 몇 명을 거래 끝에 넘겨받기로 했다.

동시에 몇 명을 주기로 했고.

[그래도 차이는 있었어요.]

“뭔데?”

[아버지와의 거래는 잘 끝났어요. ‘준호’의 링네임이나 테마곡, 캐릭터 컨셉까지 모두 다 받아왔죠.]

“믿고 있었다구. 티파니.”

[하지만 트럼프는…… 아직 조건을 좀 더 맞춰야겠다 싶었죠.]

“서로 원하는 게 다르니까.”

바트는 승부를 원하고 있다.

반면 트럼프는 이득을 바란다.

그러므로 트럼프와의 거래가 삐걱거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이런 면에 있어서 난 우리 회장님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편이었다.

호탕하거든.

사업가답지 않게.

[그런데, 괜찮을까요?]

“어떤 의미에서?”

[‘라스베이거스’라니. 거기에서 과연 제대로 단체 운영이 될까요?]

“걱정 마. 그쪽 사람들도 즐거워할 만한 쇼를 뽑아내면 그만이잖아?”

[아뇨, 그건 당신을 믿어요.]

티파니는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말하는 건 그쪽에 사업체를 정착시키는 문제에요. 분명히 그쪽 마피아들이라던가, 카지노의 경영자들이 접촉을 해올 것 같은데.]

“어, 뭐 그거라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몇 명 있겠지.”

[누구요?]

“일단 트럼프.”

우리는 현재 라스베이거스의 트럼프 호텔과 제휴를 맺고 새로운 단체의 운영에 도움을 받을 예정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 더.

이건 솔직히 너무 황당한 이야기라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싶었는데.

얼마 전, 부모님과 전화를 하면서 이제 라스베이거스 쪽에 있을 거라 자주 뵐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더니.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내가 그쪽에 아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나중에 안부나 전해다오.]

‘라스베이거스에요? 무슨 카지노 경영하시는 분은 아니겠죠?’

혹시 그렇게 일이 풀리나 싶어서 낄낄 웃으며 농담을 건넸더니만.

[아, 무슨 조직을 경영한다던데.]

‘……?’

[사막에 묻어버리고 싶은 놈 있으면 연락하라고 했지. 음, 생각해보니 네가 만나는 건 위험하겠구나.]

아니, 그런 사람을 어떻게 알아요?

순간 당황해서 물어보자니 아버지는 ‘일’ 때문이라고 대답하실 뿐이었다.

그래서 나도 묻어두기로 했다.

[신?]

“아, 미안. 순간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하나 떠올라서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쪽과 내가 딱히 얽힐 일은 없겠지.

어쨌거나.

동부를 거점으로 삼은 WWF.

남부를 거점으로 삼은 ACW.

거기에 맞춰서 우리도 미국 서부를 기점으로 단체를 출범시킨다.

“우리는 두 거대한 단체 사이에서 나름대로 줄타기를 하면서, 이 업계 자체의 생태계를 변화시킬 거야.”

보다 나은 미래가 되도록.

슬슬 무대는 갖춰져 가고 있다.

[그러면 이제 남은 건…….]

“출연진이지.”

물론, 내게는 답안지가 있었다.

* * *

로스 엔젤레스 국제공항.

일주일 정도 숙박할 짐을 챙긴 나는 국제선 바로 앞의 벤치에 앉아 핸드폰을 확인하고 있었다.

조심해서 다녀오라는 메시지.

그 외, 동료들에게서 지금 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를 묻는 메시지가 한가득 온 상태에서.

나는 나중에 다 설명하겠다고 답장을 보낸 뒤 핸드폰을 끌려고 했다.

아니, 일단 그전에.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일단 먼 여행을 떠나는 거니까 마지막으로 전화를 해둬야겠지 싶었다.

거기다 이 여행지는 부모님과도 나름대로 큰 연관이 있는 곳이고.

[준호냐.]

“예, 아버지.”

[잘 다녀와라.]

“……저 가는 김에 두 분도 같이 가셨으면 어떨까 싶었는데요.”

[네 엄마는 딱히 한국에 좋은 기억이 없어서 말이다. 나는 들어가고 싶어도 못 가는 입장이고.]

“…….”

그 이유가 무척 궁금했지만.

역시 안 물어보는 게 좋겠지.

[그리고 갈 수 있어도 네 엄마가 안 가는 이상 나도 안 갈 거다.]

“왜요?”

[이제 내가 지켜야 할 유일한 조국은 네 엄마가 되었으니까.]

문득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면 부모님은 언제나,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부부 금술이 무척 좋았다.

“저는요?”

[너는 이제 다 컸잖냐. 게다가 남자고. 네 무리를 찾아 떠날 때지.]

“뭐, 있긴 있네요.”

[그 애 말이냐?]

“예, 그리고 사실, ‘제 무리’가 아니라, ‘우리 두 사람’의 무리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다.

나는 그녀에게 도움을 주고, 그녀는 또한 나를 도와주는 관계였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피식 웃으며 대답하는 아버지.

물론, 거기에 차이는 있을 터다.

아버지는 나보다 훨씬 옛날 사람이고, 나는 현재를 무대로 살아가니까.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존중했다.

우리가 각자 가장 가까운 곳에 서있는 상대를 존중하는 것처럼.

[아, 그러고 보니.]

“예, 아버지.”

[거기 가면 서울 풍물 시장이라고 있을 텐데, 거기 가서 내 아들이라고 말하면 정씨에게 데려가줄 거다.]

“아니, 아버지. 저 딱히 이상한 거 사오다가 CIA한테 붙잡혀서 고초를 치르고 싶지는 않거든요.”

[아니, 가서 풀빵 찍어내는 틀 좀 사오라고.]

“……?”

[네 엄마가 좋아해.]

“예에.”

나는 황당해하며 대답했다.

어, 그렇게 되면.

한국에 가서.

각종 방송에 출연하고.

풍물, 뭐시기에.

풀빵 기계?

이걸 다 기억할 수 있을까.

그 뒤로 일본 쪽에 건너가서 사람도 하나 데려와야 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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