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
같은 시각.
캐나다의 캘거리에 도착한 티파니 맥센은 여기는 사시사철 추운 것 같다는 생각을 지워내지 못했다.
사실, 미국은 좀 후덥지근해서 얇은 청바지와 반팔 셔츠를 입었는데.
생각보다 쌀쌀했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가 찾아간 곳은 그 유명한 ‘하트 던전’이었다.
스카웃 제안을 하고 싶어서였다.
“어서 와요. 맥센 양.”
“만나서 반갑습니다. 미세스 하트. 편하게 티파니라고 불러주세요.”
“호호, 메이플 수프는 많이 끓여뒀으니까 많이 먹고 가요.”
“……예?”
그렇게 환대(?)가 이어졌다.
하트 부인의 메이플 수프를 억지로 밀어 넣은 뒤, 티파니는 그렉에게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그렉. 잘 지냈어요?”
“그야 물론. 아가씨는 어땠어.”
“저야 뭐, 당연히 잘 지냈죠.”
“그 꼬마가 정말 대단한 일을 했더군. 순간 피가 끓어올랐어.”
“엄청난 사고를 쳤죠.”
“……그거 슛이지?”
“역시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티파니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이곳에 하트 던전의 선수 몇몇을 포함해 TMA에 소속된 선수들을 스카웃하기 위해서 왔다.
프로레슬링 업계에서 명망이 자자한 하트 던전이 중계를 해주었고.
“그분은 어디에 있나요?”
“링에서 지금 한창 몸을 풀어두는 중이야. 아무리 그래도 실력은 제대로 보여줘야겠지 싶어서.”
그렉은 티파니를 데리고 저택 반대편에 있는 건물 안으로 안내했다.
땀으로 절은 온갖 기구들.
하지만 정성스럽게 손질되었다.
중앙의 링 위에서는 금발의 여자 선수가 한창 몸을 풀고 있었다.
일단 이렇게 한 명.
그렉이 그녀를 소개했다.
“나탈리 네이드하트.”
그 부름에 이쪽을 눈치챈 나탈리가 숨을 몰아쉬며 링에서 내려왔다.
“바, 바바바, 반갑습니다!”
어깨를 꼿꼿이 세웠다.
“아, 티파니 맥센이에요.”
“영광입니다!”
사실, 신의 제안이었다.
선수에 관해서는 그가 안목이 뛰어났기 때문에 믿고 온 것이었다.
하지만 링에서 로프에 몸을 맡기는 걸 보자니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실력이 있다고.
“제안을 하나 드리고 싶어서 왔는데.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돼요.”
“옙! 안 하겠습니다!”
“나탈리…….”
쓰게 웃는 그렉.
“보시다시피, 작은 단체에서 선수로서 뛰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많이 부족한 상태야. 괜찮겠어?”
“자기 장점만 제대로 있으면 괜찮아요. 한번 볼 수 있을까요?”
“그럼 물론이지. 나탈리, 링으로.”
“옙! 삼촌!”
티파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그렉 하트에게 레슬링을 배우다니. 정말 환상적인 상황 아닌가.
그러니까 영입을 제안했나?
잠깐 어안이 벙벙해져 있던 티파니는 이어 진지한 눈으로 두 사람의 레슬링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여성 선수들은 남성 선수에 비해서 ‘레슬링’만큼은 분명히 부족하기 마련이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팩트였다.
기술 구사에는 힘과 체력이 필요했으니까. 분명 같은 단련을 해도 남자 선수가 더 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나탈리 네이트하트는.
잘한다.
쿵-!
그렉 하트의 체인 레슬링에도 겁 없이 쫓아가며 그 실력을 발휘했다.
물론 당연히, 전 시대를 통틀어 넘버원 아이콘인 그렉 하트에게는 당연히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를 쫓아간다는 것만으로도 확실히 실력이 있단 거였다.
무엇인가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티파니는 얼마 전 굴욕적인 은퇴를 했던 전설 하나를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만.”
그 말에 멈추는 두 사람.
티파니는 링으로 올라갔다.
나탈리와 마주보고 선 그녀는 싱긋 웃으며 물어보았다.
“나탈리, 제 뺨을 때려요.”
“네?”
눈을 동그랗게 뜨는 나탈리.
옆의 그렉은 이마를 짚으며 황당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티파니는 다시 말했다.
“제 뺨을 인정사정 봐주지 말고 때려 봐요.”
“어, 어…….”
“바트와 같군.”
그런 그렉의 말에 순간적으로 기분이 나빠졌던 티파니였지만.
그녀는 지금 눈앞의 이 재능 있는 선수를 시험해보고 있는 것이었다.
고민하던 나탈리가 이어 두 눈을 꽉 감고 힘차게 티파니를 때렸다.
쫘악-!
날카롭게 울려퍼지는 소리.
눈물이 찔끔 날 정도의 타격.
“……아프네.”
“죄, 죄송합니다!!”
“작년 링 서바이벌 봤어요?”
“예? 그건 왜……?”
“봤냐고요.”
“아, 예! 물론 봤습니다!”
“리키타의 은퇴가 어땠죠?”
“…….”
침묵하는 나탈리.
그 은퇴는 굴욕적이었다.
리키타는 분명히 아이 캔디로서 시작해 한 사람의 선수로서 팬들에게 크나큰 인정을 받은 전설이었다.
이후 나오는 여성 레슬러들 대부분이 그녀를 우상으로 지목할 정도.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WWF는 리키타의 은퇴에 온갖 성적인 모욕을 가하며 오물을 퍼부었다.
여자로서 그 상황에 대해서 말하는 것조차 하고 싶지 않을 정도.
나탈리의 눈도 진지해졌다.
“모욕이라고 느꼈습니다.”
“그걸 뒤집어줄 수 있겠어요?”
“예?”
“……바트와 같은 화법이군.”
흥분하면 아무런 맥락 없이 자신의 감정부터 전하는 바로 그 화법.
하지만 그렉은 티파니의 그 화법에서 선수에 대한 존중을 느꼈다.
“저희가 만들 새 단체에, 리키타가 선수로서 복귀할 예정이에요.”
“…….”
“전설과 싸울 준비는 됐나요?”
“물론입니다!!”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나탈리.
분명 부족한 부분은 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티파니는 신이라면 그 단점을 쥐도 새도 모르게 고쳐줄 것 같다고 느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 단점을 커버하는 방법 또한 빠삭하게 알겠지.
“리키타라. 벌써부터 시청률이 올라가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리는군.”
“물론 그녀뿐만이 아니죠.”
그렉의 말을 들은 티파니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한 순간이었다.
문이 벌컥 열리며 바깥에서 외투를 걸친 하트 부인이 들어왔다.
“어, 그렉? 손님이 왔는데.”
“누구라고 하던가요?”
“TMA 선수들이라던데.”
“이거, 올 것이 왔군.”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티파니는 곧바로 바깥으로 나갔다.
거대한 봉고 앞의 두 사람.
한쪽은 컸고 다른 쪽은 작았다.
익숙한 얼굴에 신이 준 자료에서 두 사람의 이름을 떠올린 티파니는 그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
“안녕하세요.”
인사를 해온 건 작은 쪽.
큰 쪽은 약간 경계하는 태도.
큰 쪽은 GCW에 있다가 인디계의 거물이 된 후, 현재에는 TMA에서 슈퍼스타로 활약하고 있는 선수.
사모아 고.
작은 쪽은 AK 스타일스.
신의 말에 의하면 두 사람 다 ‘천부적인 솜씨를 가진 선수들’이었다.
사모아 고와는 달리 AK 스타일스는 아직 계약 기간이 좀 남았지만.
그래도 신이 부탁을 한 만큼 확실히 영입을 해야겠지 싶었다.
다행히도 두 사람 다 TMA와 계약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 * *
베이다와의 계약을 성사시킨 뒤.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체드 터너로부터 만나자는 전화가 걸려왔다.
어찌나 다급한지 시간은 다 이쪽에 맞춰주겠다는 표현을 할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일단 여독을 풀기 위해서 조금 휴식을 취했다.
아무리 그래도 거의 2주 가까이 한국과 일본에서 고된 스케줄을 소화하고 돌아와 무척 지친 상태였다.
그렇게 호텔 방을 하나 잡고 한숨 푹 자고 일어나자, 티파니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해있었다.
한국으로 떠나기 전 이야기를 해뒀던 선수들과의 계약이 긍정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멋진 소식.
그 말에 미소가 지어졌다.
큰 키와 근육질의 선수만 선호하는 WWF에서는 기회를 받지 못했지만, 전생에는 분명히 자신만의 매력을 가지고 스타가 되었던 두 선수.
사모아 고와 AK 스타일스.
거기에 한 사람 더.
나는 그렇게 세 명의 선수들을 중심으로 단체를 키워갈 생각이었다.
물론 그 중심에서 나 역시 선수로 크게 활약할 예정이지만 말이다.
테이커의 연승을 끊어낸 남자로서 이후로도 나는 줄곧 업계의 최전선에서 활약해나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플랜도 짜두었고.
‘장소’와 ‘선수’에 대한 협의가 차근차근 되어가는 와중.
나는 GCW를 찾아갔다.
체드 터너와 거래를 성사시키기 전에, 지금 상황에 대한 말을 미리 전해두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있던 시절의 선수들 대부분은 콜 업 되거나 회사를 나가서 대부분 물갈이가 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크루는 그대로였다.
할리 레이시.
바쿠.
그 외 내가 알던 직원들.
그리고.
업계의 혁명가. 폴 헤이건도 함께.
하지만, 그들은 다들 그렇듯이 변화해가는 사태에 대해서는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내가 도착하자 반가운 인사보다도 일단 의문을 표시해왔다.
“신,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
“설명하겠습니다.”
그리운 훈련장.
대부분의 직원들이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몰려든 가운데, 나는 링 위에 올라가 로프에 팔을 기댔다.
그대로 링 아래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모여서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어, 일단. 향간에 떠도는 소문에 관해서 먼저 확실히 해두겠습니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GCW는 저희 S&T가 구매해서 독립 단체로 경영할 예정입니다.”
순간 좌중이 웅성거렸다.
크루원들 대부분이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와중, 눈썹을 찡그리고 있던 할리 레이시가 손을 들었다.
“우리는 어떻게 되지?”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회사에 계속 남던가.
아니면 날 따라오던가.
물론, 바트는 GCW에 소속된 직원들을 높게 평가하지 않고 있어서 우리에게 넘겨줄 생각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나는 직원들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
“연봉은 최대한 맞춰드릴 예정입니다. 하지만 뭐, 재무건전성 좋은 회사를 떠나 모험을 해야겠지만요.”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나?”
헤이건이 손을 들었다.
“뭘 어쩔 셈이지?”
“사실, 저희 쪽 계약서에 사인하신 분들께만 말씀을 드릴 수 있어서.”
나는 쓰게 웃었다.
ACW라던가.
그 사이에서 이득을 보려는 우리 단체의 행보에 대해 지금 당장 자세히 말해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설득할 자신은 있었다.
“이렇게 해보죠.”
나는 그들의 분노를 자극했다.
“쟈니 에이스를 데려올 겁니다.”
“쟈니……?”
“예, GCW에서 애들 코 묻은 돈을 쪽쪽 빨아먹었던 슈퍼스타, 쟈니요.”
그런데 그 쟈니가 어떻게 되었나?
“WWF에 올라가서는 자버 짓만 실컷 하다가 지금 겨우 이상한 MNM 태그 팀 짓으로 연명하고 있죠.”
하지만 확실히 말하겠다.
“쟈니에게는 재능이 있습니다. 마이크워크가 좀 부족하지만, 그건 뭐 얼마든지 나아질 수 있는 문제죠.”
차세대 존 마이클스.
전생의 나는 쟈니를 그 정도까지 성장할 수 있는 인재라고 평가했다.
외모 면에서는 많이 밀리지만, 그건 전성기의 마이클스가 진짜 세기의 미남이라서 가능했던 거고.
쟈니도 그에 못지않은 재능이 있기는 했다. 그걸 잘만 살리면 충분히 슈퍼스타가 될 수 있었을 거다.
“진짜 문제는, 온갖 정치질로 자신의 재능을 보이기도 전에 가라앉았다는 겁니다.”
그뿐이랴.
“저 또한 계약 조건에 자유롭게 한마디를 할 수 있다고 추가하지 않았더라면 쿵-퓨리로 영원히 묻혀버렸겠죠.”
그리고 러셀은?
“그 녀석도 제가 이끌어주지 않았더라면 분명히 헌터에게 잡아먹혔을 겁니다.”
GCW는 그런 곳이었다.
산하 단체로서 최선을 다해 선수를 길러냈지만, 그 대부분은 메인 쇼에서 자버로 전락하고 말았다.
시나까지도.
만약 랩퍼 기믹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스무스하게 묻히고 말았겠지.
그 대신 회사에서 밀어준 것은 GCW 출신이 아닌 오튼이었고.
다들 눈빛이 변했다.
분노를 느끼기 시작했다.
쟈니 에이스.
그는 분명히 GCW의 보물이었다.
하지만 회사는 그런 선수를 메인 쇼로 콜 업 하고 완전히 묻어버렸다.
덕분에 GCW는 우리들이 데뷔하기 전까지 기나긴 암흑기를 겪었다.
“화나지 않으십니까?”
산하 단체의 의견은 묵살하고 스타들을 빼가서 망쳐놓는 행태가?
“저희의 새 단체에서는 그럴 일은 없습니다. 저희는. WWF와는 전혀 다른 쇼를 만들어나갈 겁니다.”
그렇다고 단점이 없지는 않았다.
“아마 운영하다가 망하면 한순간에 백수 신세가 되겠죠. 그건 뭐, 분명 부담이 가는 리스크입니다.”
물론, 나는 전생의 기억을 알고 그걸 바탕으로 사업을 전개해나갈 생각이기에 성공할 자신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 사실을 이들에게 말할 수 없으니 날 따라오라고 하는데 이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지만 괜한 이야기였다.
대부분 직원들의 얼굴은 분노와 복수심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기껏 멋진 선수들을 길러내더라도 빼앗겨 완전히 삽으로 파묻어버렸던 WWF의 행보를 생각하면서.
물갈이가 되어 아직 WWF에 대해 꿈과 희망을 가진 신인 선수들만이 좀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뿐.
그런 와중.
가장 뒤쪽에 앉아 있던 할리 레이시가 손가락 끝에 반짝거리는 뭔가를 걸어 내게 튕겨 보냈다.
팅-!
회전하며 날아온 그것을 붙잡은 나는, 확인하고는 씨익 웃었다.
50센트짜리 동전.
할리 역시 씨익 웃었다.
“난 NWA 출신이지.”
현재는 이름만 남았지만.
70년대에는 할리 레이스라는 거물을 앞세워 북미를 점령했던 단체.
“말하자면, 항장(降將)이다.”
항복한 장수.
그보다 나은 그 표현이 있을까 싶을 만큼 적절했다.
“새 캡틴을 내세운 반란에는 동참할 수밖에 없지.”
그러고 보면 오랜 방식이었다.
50센트는 자신의 목숨 값.
얼마든지 사지로 내몰아도 좋다.
그런 의미를 담은 우리의 의식.
씨익 웃은 나는 이어 바쿠가 동전을 튕겨 보내는 것까지 붙잡았다.
쫘악-!
……할리 때와 달리, 일직선으로 날아온 동전을 잡을 때의 충격이 어마어마했다.
그가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출항이다!!”
그래, 그 컨셉이 좋겠군.
우리는 해적이다.
원하는 건 뭐든지 빼앗는 해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