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
금요일 아침.
버닝콩 쪽 업무를 끝마친 뒤 전용기를 타고 날아온 바트 맥센은 곧바로 랙다운을 총괄하기 시작했다.
요 몇 년간 앓던 이가 오늘 빠지게 된 상황에서 그는 슈퍼 행복한 표정으로 온갖 꼰대(?) 짓을 자행했다.
일단 그는 최종 점검에 들어가려는 크루를 모두 불러모아 며칠 전 끝마친 리허설을 다시 하게 했다.
그것도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만 몇 번이고 확인하면서 말이다.
링 위.
“야야, 3번 조명 켜봐!!”
헤드셋을 낀 그가 호통을 치자 고릴라 포지션에서 조명을 변경했다.
그걸 또 무슨 매의 눈으로 관찰하면서 일일이 지적을 해대는 덕에 모두가 지쳐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신은 한숨을 내쉬었다.
거 대충 하지.
굳이 저렇게 열내가면서 하지 않아도 WWF의 크루들은 현장 공연에 있어서는 최고의 인재들이었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알아서 멋진 쇼를 만들 텐데, 굳이 저렇게 끼어들어서 사기를 깎는 이유가 뭘까.
이유는 분명 하나였다.
그냥 괴롭히고 싶은 거다.
회사를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처음부터 한 번 더 해봐라.”
“에휴.”
일부러 들으라는 듯 큰 한숨과 함께 링 아래로 굴러 내려가는 오튼.
눈치를 살피던 코디와 체드가 그 뒤를 따라 자기 위치로 이동했다.
옆에 서있던 테이커가 고생이 많다는 듯 내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그렇게 리허설이 다시 진행되었다.
레갈리아의 세 사람이 링으로 올라와 나에게 쓸 기술을 확인했고.
바트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뭐하는 거냐!”
“……예?”
“리허설은 실전처럼! 몰라?! 기술을 쓰는 시늉만 하면 어쩌잔 거냐!”
처음 듣는 소리다.
분명 방금 떠올린 거겠지.
그렇기에 모두 우물쭈물하는 가운데, 눈을 가늘게 뜨고 서있던 오튼이 신의 뒷목을 잡고 팔을 뻗었다.
뻐억-!
유로피언 어퍼컷.
오튼의 팔꿈치 안쪽이 신의 턱을 올려붙이자 바트가 박수를 보냈다.
“좋아! 바로 그거다!”
이어서 R.K.O.까지.
콰앙-!
신의 목을 붙잡고 뛰어 바닥에 힘껏 떨어진 오튼은 이어 뒤로 물러나며 코디, 체드에게 사인을 보냈다.
두 사람이 쓰러진 신을 짓밟기 시작하자 바트가 껄껄 웃어 보였다.
“좋아! 좋아!”
심기가 불편한 보스의 앞이라 적당히 할 수도 없는 상황. 신의 몸에 레슬링 부츠 자국이 새겨졌다.
기술도 여럿 맞고.
쇼를 시작하기도 전에 넝마조각이 되어가는 신. 그걸 한동안 지켜보던 바트가 다음 신호를 보냈다.
“여기서 테이커가 나온다!”
그 말에 코너에 기대어 서있던 테이커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툭, 툭, 툭.
레갈리아 멤버 세 사람에게 꿀밤을 먹여 링에서 내보낸 테이커는 이어 쓰러진 신을 일으켜 세웠다.
“여기서 툼스톤!”
바트가 활짝 웃으며 말했고.
테이커는 별다른 거부감을 내비치지 않고 신에게 툼스톤을 날렸다.
꽈앙-!
바닥에 정수리부터 꽂힌 뒤 이어 그대로 넘어가며 대자로 뻗은 신.
기술 시전은 완벽했지만 욱신거리는 통증에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
그런 그의 앞에 다가온 바트 맥센은 씨익 웃으며 이야기했다.
“좋아, 여기까지 할까.”
“……마음에 드십니까?”
“들다마다. 자네도 불만은 없겠지?”
“물론입니다. 회사를 나가게 된 입장에서 계속 남아있을 선수들에게 존중을 보이는 건 당연하죠.”
“크하하! 말은 잘하는군.”
“회장님.”
자리에서 일어선 신은 호탕하게 웃고 있는 바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몸 잘 챙기십쇼.”
“……?”
“꼭 건강하셔야 됩니다.”
그 말에 순간 바트는 어안이 벙벙해져 대답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간 그토록 자신을 괴롭혔던 놈이 이렇게 몸 걱정을 해주다…….
“그래야 제가 부자가 되어 돌아와 당신을 죽여버릴 수 있으니까요.”
아, 그거였나.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은 바트는 신을 올려다보며 대답을 했다.
“자네야말로, 어디 객지에서 죽지 말고 꼭 나에게 돌아오도록 하게.”
노예처럼 부려먹을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손을 뻗은 바트. 신은 씨익 웃으며 그와 악수를 나눴다.
물론 그걸 지켜보고 있는 주변의 인물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두 사람의 관계를.
테이커만 어렴풋이, 바트가 신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걸 느낀 정도.
하지만 왠지 이렇게 되었다.
* * *
그렇게 오후 6시.
2만이 넘는 관객들이 경기장에 모두 입장하자 바로 쇼가 시작되었다.
나는 메인이벤트에 나가 굴욕을 맛볼 예정이었으므로, 그냥 마음 편히 쇼를 감상하면서 기다렸다.
이전에 폴 헤이건이 뉴스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프로레슬링은 결국 서부극이다.
악당이 벨트라는 권력을 가지고 온갖 패악질을 부리는 사이, 차세대를 책임질 영웅이 힘을 키운다.
그리고 종국에는 그와 맞서 결국에는 승리를 쟁취해내는 것이다.
그게 기본적인 프로레슬링의 구조라고, 폴 헤이건은 설명했었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지금 상황은 묘하게도 닮았다.
내가 차세대 영웅이라면, 현재 바트 맥센이라는 악당과 맞서 싸우기 위해 힘을 키우고 있는 거니까.
물론 이게 각본은 아니지만.
그래도 분명 각본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나라는 인간의 드라마임이 분명했다.
성공하고자 하는 남자.
거대한 벽을 넘어서는 남자.
그렇게 봤을 때, 사실 오늘 내가 수행할 링 세그먼트의 대사들은 분명히 이질적이기는 했다.
그동안 내가 이 업계에 보인 존중 같은 건 싹 다 무시하고 ‘이룰 건 다 이뤘으니 나간다.’고 하는 정말 이상한 세그먼트였으니 말이다.
개연성이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프로로서.
그리고 그동안 날 키워주고 미래를 맡긴 랙다운과 그 선수들도 향후 불편한 일을 겪지 않도록.
나는 그 연기를 해야만 했다.
……아 물론, 그렇다고 아주 등신 같이 당하고 나갈 마음은 없었다.
내가 욕을 먹을 건 어디까지나 받아먹을 거 다 받아먹고 랙다운을 나간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나머지는 알 바 아니지.
그렇게 쇼가 이어졌고.
메인이벤트가 찾아왔다.
‘가볼까.’
TV 광고가 이어지는 걸 보고 밖으로 나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수많은 선수들이 락커룸 복도에 나와 내 마지막 입장을 지켜봐주었다.
레슬 임페리움과 같아 보이지만 사실 그때와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다소 이기적인 선택을 했음에 다들 내 미래를 축복해주려고 나왔다.
왠지 눈물이 날 것 같군.
“신.”
부커가 주먹을 뻗었다.
레이, 젠코, 바티스타, JBL, 마크 진랙, 하이든리히, 케인 맥센까지.
일을 끝마치고 온 나의 동료들.
곧 전(前) 동료가 되겠지만.
싱긋 웃은 나는 제각기 주먹을 내미는 사내들과 브로피스트를 주고받으며 고릴라 포지션으로 향했다.
덕분에 좀 흥분했다.
“신…….”
바트가 뭘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나 는 거기에 반응하는 대신 주먹을 뻗어 브로피스트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소리쳤다.
“마지막! 잘 해봅시다!!”
[Uoooooohhhh!!]
함선의 선원들이 의기를 보였다.
슬쩍 돌아보자니 그런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바트의 얼굴이 보였다.
하긴, 자기가 지휘하는 버닝콩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이렇게 모두가 하나의 의식을 가지고 출항하는 광경이 말이다.
직원들이 각자 역할을 수행했다.
“광고 끝납니다!”
“5, 4, 3, 2, 1!!”
“Back In Stage!!”
“음악 내보냅니다!!”
“Go!! SIN! Go!!”
순식간에 이루어진 상황.
나를 위한 상황.
쿵-쿵-쿵-쿵-쿵-쿵-쿵-쿵-쿵-!!
“Let’s Get That Fu-ker’s.”
나는 커튼을 걷고 나아갔다.
[Waaaaaaaaaaaaaaaggghhh!!!]
열화와 같은 환호가 쏟아졌다.
레슬 임페리움의 ‘부상’ 이후 2개월 만에 이루어진 슈퍼 리턴이었다.
그리고 당분간 이 WWF에서 내가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입장이다.
푸슈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욱-!!
연기를 헤치고 나아간 나는 팬들의 환호 속에 링으로 올라갔다.
복장은 ‘vs 테이커 버전’이었다.
내 열정과 분노를 보여주기 위한 후드 집업. 그 안에 나는 하고 싶은 말들을 감추고 마이크를 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오랜만이군.”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좀 다쳤어. 눈치가 빠른 친구나 내 복근에 정신이 팔린 여자들, 혹은 게이들이라면 알았겠지.”
자료 화면이 나왔다.
레슬 임페리움에서 배가 까맣게 물든 내 모습이 나오자 팬들이 탄식이 섞인 비명을 내뱉었다.
경기가 끝난 뒤 몸에 분비되었던 다량의 아드레날린이 사라진 이후, 나는 통증으로 좀 고생을 했었다.
“그래도, 딱히 심각하게 다친 건 아니라 이렇게 돌아오게 되었군.”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그리고 난 나갈 거야.”
그 말에 환성이 뚝 멎었다.
팬들이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의심하면서 날 바라보았다.
“확실히 말하지. 이룰 건 다 이뤘고, 나는 더 이상 이 단체에 미련이 없어. 내가 여기에서 이 짓을 더 한다고 해서 과연 의미가 있겠어?”
팬들이 충격에 빠졌다.
그들은 순간적으로 말을 잇지 못하고 나를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앞자리에 내 티셔츠를 입고 있는 조그마한 소녀의 얼굴이 보였다.
난 그 얼굴을 보고 말했다.
“그거 갖다 버려. 꼬마야. 내가 없는 WWF는 구리거든. 누가 이런 애새끼들 장난질에 돈을 쓰겠어? 아, 여기 있는 너희들 모두구나!”
[BOOOOOOOOOOOOOO-!!]
야유가 터져 나왔다.
난 마이크를 들고 소리쳤다.
“테이커의 연승을 끊고! 집에서 항생제 처먹고 끙끙 앓으면서 생각했지! ‘내가 왜 이런 헛짓거리를 하고 있지?’ 그 말이 맞아! 나는 더 이상 이 짓을 할 필요가 없어진 거야!!”
지금 하는 마이크워크의 대부분은, 바트 맥센이 써준 구린 대사를 버리고 내가 재구성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곳에 모인 팬들의 마음을 빡돌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이 등신 같은 단체를f 나갈 거야! 정해진 사항이고, 다들 잘 있으라고! Little Toy Cowboy’s!”
마이크를 휙 내던졌다.
배신감을 느낀 팬들이 나에게 팝콘과 콜라를 내던지기 시작했다.
링 위에서 서서 그걸 적당히 피하고 있자니 레갈리아가 등장했다.
하지만 팬들은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나는 오튼을 믿으면서 슬그머니 옆을 돌아보았다.
원래대로라면 이 시점에서 녀석들은 마이크를 쥐고 지리멸렬하게 날 조롱하며 밟아야 하는 시점이었다.
하지만 오튼은 역시.
링 위로 곧장 달려 올라와서는 내 머리를 붙잡고 R.K.O.를 날렸다.
[Yeeeeeeeeeaaaaaaahhhh!]
통쾌한 한 방에 터지는 환호.
그리고 마이크를 쥔 오튼이 예정되었던 마이크워크를 이어나갔다.
“곱게 내보낼 수는 없지.”
짧은 한마디를 내뱉은 오튼은 부하들과 함께 나를 린치했다.
나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느낀 팬들은 그들에게 큰 환호를 보냈다.
이어서 테이커가 암전 속에서 나타나 레갈리아를 몰아내고 난 뒤.
투콰앙-!
[Waaaaaaaaaaaaaagggghhhh!!]
WWF를 배신한 내게 툼스톤을 먹이는 시점에서 절정에 치달았다.
나는 완벽하게 공격에 당해주면서 업계의 관행을 철저하게 수행했다.
분명히 팬들은 지금의 사태를 혼란 속에서 따라오고 있을 터였다.
부상에서 회복해 2개월 만에 복귀한 내가 뜬금없이 회사를 그만둔다고 말하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이게 각본의 일부인지, 아니면 정말로 내가 회사를 그만두는 건지, 그마저도 확실하지 않은 와중.
테이커가 퇴장하고 링 위에 널브러진 비참한 나를 보여주면서, 위클리 쇼 방송이 그렇게 종료되었다.
‘정말? 이게 끝이야?’
당황하는 관객들.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마이크를 다시 쥐었다.
“아직 할 말이 남았어.”
[Boooooooooooooo……!]
쏟아지는 야유.
“미안하지만, 들어줬으면 해. 이건 각본이 아니라 실제 내 삶의 이야기니까. On Air 마크는 꺼졌다고.”
그 말에 관객석이 조용해졌다.
역시 멋진 팬들이다.
그런 생각을 한 나는 천천히 내 안의 감정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게 내 자유로운 ‘한마디’였다.
일반적인 의미보단 더 길겠지만.
* * *
‘놔둬라.’
그 말은 참으로 다행이었지만.
동시에 의문을 느끼게 만들었다.
고릴라 포지션 안.
케인은 옆에 서있는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동시에 신이 하는 마지막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그래. 모두 여러분 덕이야. 물론 나도 충분히 대단하지만, 그런 날 알아본 여러분의 눈 역시도 훌륭해.]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각본을 넘어선 이야기가 나왔다.
프로레슬러의 마지막.
팬들은 크게 아쉬워하면서도 신의 설명을 듣고는 박수를 보내주었다.
우는 사람도 보일 정도였다.
[고마워. 지금은 이 회사를 잠시 그만두게 되지만, 반드시 다른 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군.]
박수와 챈트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얼마 후, 뭔가를 발견한 영상팀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회장님. 오튼이 링으로 나가고 있는데요?”
“놔둬라.”
대답은 간결했다.
그 말은 또 이해하기 힘들었다.
선역과 악역의 케이페이브를 깨고 링에 오른 오튼이 신과 포옹을 하자 다시 한 번 큰 박수가 쏟아졌다.
모두 그걸 가만히 놔두고 있는 바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간단한 이유였다.
어차피 방송에 나가지 않으니 무슨 소리를 해도 그다지 큰 영향력이 없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거기다.
이 회사를 나가면서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할지가 좀 신경이 쓰였고.
그리고 솔직히.
멋졌다.
바트 맥센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자신의 프로레슬러로서의 인생을 담아낸 멋진 마이크워크였다.
……하지만.
그 감상은 정확히 10초 뒤 신이 한 말로 인해 무너져 내렸다.
[말 나온 김에 이야기하는데! 이 회사는 좀 구리긴 해! 솔직히 바트 맥센 그 영감탱이가 실권을 잡고 자기 멋대로 휘두르는데 뭐 제대로 된 각본이 나오기나 하겠어?!]
[Yeeeeeeeeeeeeeaaaaaahhhh!!]
“어, 회장님?”
“…….”
[이 회사는 바트 맥센이 뒤진 다음에 그 자랑스러운 딸과 사위에게 사업을 물려줘야 제대로 굴러가게 될 거야! 어때?! 그때가 기대되지?!]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Yes!]
결국 바트 맥센은 분노를 참아내지 못하고 힘차게 호통을 쳤다.
“당장 저 개새끼 마이크 끊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