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
C.M. PUNK.
향후 숀 시나의 커리어를 바꾼 일생일대의 대립으로 프로레슬링 역사에 당당히 그 이름을 새긴 선수.
동시에 한 시대의 주역이 될 뻔했지만, 정치 싸움에서 밀려 결국 비참한 꼴로 회사를 나가고 만 선수.
……그리고 그 성질머리가 무척 고약했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간에.
펑크는 날 특유의 건방진 얼굴로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돈 쥐어주고 그쪽한테 엿이나 먹으라고 사람들 불러 모은 겁니까?”
“C.M. 펑크. 맞지?”
“그런데요. 당신은 누굽니까?”
모를 리가 없는데.
그런 식으로 시비를 트는 걸 보자니 역시나 내가 아는 그놈이 맞았다.
펑크는 성격 자체가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도 강해서, 자주 다른 사람들과 분쟁을 빚고는 했으니까.
전생의 나도 거기에 실컷 당해서 상대하는 법은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때의 나는 찌질한 쿵-퓨리였지만 지금은 그런 남자가 아니었다.
“나는 신이라고 하는데. 요새 프로레슬링을 아예 안 본 모양이로군.”
“다 챙겨 보는데요. 안타깝게도 그런 이유로 WWF는 보지 않았고요.”
하하, 이 개자식.
WWF를 프로레슬링 취급도 안 한단다. 자기가 하는 하드코어한 인디 스타일이 진짜라고 믿는 거겠지.
나는 웃으며 그 말을 돌려주었다.
“그래서 시청률이?”
“…….”
“연봉이? 우리와 계약해서 겨우 트레일러 차량에서 벗어나지 않았나?”
펑크는 대답하지 못했다.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오늘 밤 나를 총으로 반드시 쏴버리겠다는 마음을 방금 품은 것 같았다.
물론, 개의치 않고.
“다들 인정하십니까? 여러분이 메이저 쇼에서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을 재목이라는 사실을 말이죠.”
다들 대답하지 못했다.
거기에서 나는 실망을 좀 했다.
하지만 이해한다.
사람을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건, 바로 누적된 패배감이었다.
넌 안 돼.
너는 할 수 없어.
온갖 머저리들이 단지 감투 하나 걸쳤다고 타인을 평가하고 절하한다.
그것이 자존심을 짓누르고 뒤덮으면서 끝내 사람을 바꿔버리는 거다.
나 역시도 겪어본 일이다.
쿵-퓨리.
동양인.
누구보다 진하게 겪어봤다.
그리고 왠지는 몰라도, 삶을 재조립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이전에도 누군가 ‘넌 할 수 있다.’고 말해줬더라면.
난 그래도 나름 괜찮은 선수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누구도 그렇게 해주지 않았다. 모두가 나를 멍청한 동양인 쿵푸쟁이로 규정했다.
단 한 명이라도.
나를 정말로 인정해줬다면.
난 더 노력했을 것이고.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 생의 나는 이들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주고 싶었다.
성공을 좀 더 빠르게.
무리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재능을 잘 살리며 더 나아진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응원하고 싶었다.
그래서 말했다.
“왜 그걸 받아들이십니까?”
사람들이 날 바라보았다.
“여기, 프로레슬링 업계에서 가장 성공할 수 없는 인재도 팬들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하지 않았습니까?”
동양인.
미국의 주류 문화에서 철저하게 소외를 받는 소수 인종.
그런 내가 팬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가 뭘까?
“WWF의 시선이 틀렸단 거죠. 그놈들이 돈이 많다고 해서 절대적으로 옳은 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는 다시 고를 바라보았다.
“사모아 고. 사모안 파괴 전차. 당신의 파괴적인 경기력과 화끈한 마이크워크는 시대의 보물이죠.”
조금 전과 달리 칭찬이 이어졌다.
“AK 스타일스. 당신만큼 환상적인 기술을 가진 선수가 어디 있어?”
그래서 붙은 별명이 경이로운 자.
“C.M. 펑크! 경기 운영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 리키타! 당신만큼 위대하고 카리스마 있는 선수가 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 그래?!”
“Yeah~! SIN!”
붉은 머리의 리키타가 환호성을 내질렀고, 나는 그렇게 선수들 하나하나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WWF.
물론 세계 최고의 회사다.
하지만 무조건 다 옳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옳은 건 뭔가.
“바로 내 눈이야!”
혼자만의 오프 더 레코드로 말하자면, 나는 미래를 알고 있으니 분명 내 시선이 가장 정확한 게 맞았다.
“나는 여기 모인 선수들 하나하나가 저 하늘의 별이 될 수 있는 인재라고 생각해! 그리고 그걸 보조하기 위한 최고의 팀을 여기에 모았지!”
할리 레이시.
바쿠.
폴 헤이건.
베이다.
“그리고 한 사람 더!”
이건 사실 티파니의 공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입장로를 돌아보자, 완벽한 타이밍에 날카로운 기타 연주가 시작됐다.
키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그리고 링으로 나온 건 내가 2년 전에 커리어를 끝내주었던 남자.
전설의 슈퍼 테크니션.
그렉 하트였다.
우리의 계획을 들은 그가 기꺼이 이 프로젝트에 합류해준 것이다.
링 위로 올라온 그가 나에게 다짜고짜 포옹을 하고는 환하게 웃었다.
“신, 많이 컸군. 꼬마.”
“……머리가 희끗한데요. 그렉.”
“탈모는 아니라 괜찮아. 마이클스는 이번에 도장 경영이 악화되면서 M자 탈모가 시작되었다고 들었는데.”
“호오.”
나중에 데려올까.
순간 큰 매혹을 느끼며 웃은 나는 이어 계속해서 선수들에게 설명했다.
“단체 출범은 내년 1월!”
그때까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이 선수들을 업계 최고로 만들어낸다.
“Let’s Break The Damn World!!”
[Oooooooooooooooohhhhh!!]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소리쳤다.
* * *
일단 직위가 정해졌다.
회사 외부의 대장이라고 할 수 있는 총괄 프로모터는 티파니 맥센.
회사 내부의 대장이라고 할 수 있는 총괄 프로듀서는 할리 레이시.
그 아래 선수 총괄 팀장에 바쿠.
직원 총괄 팀장에 폴 헤이건.
선수들을 가르치고 경기를 짜는 링 프로듀서에 베이다와 그렉 하트.
또한 5년 이상 GCW에서 손발을 맞춰온 최고의 크루들이 함께했다.
이 정도면 드림 팀이다.
하지만 티파니는 이런 구조에서 뭔가 의문을 하나 느낀 모양이었다.
“왜 바쿠가 선수 팀장이죠?”
“의아해?”
“어, 바쿠의 실력은 인정하지만 그렉 하트가 워낙 실력자니까요.”
“성격이 좋잖아. 그렇다고 해서 무시를 당할 사람은 절대로 아니고.”
“아, 하긴.”
납득하는 티파니.
나는 GCW에 입사 시험을 보러 갔던 날, 바쿠가 까불던 선수 지망생들을 참교육하던 순간을 잠시 떠올렸다.
“그리고 그렉이 사실 엘리트주의가 강해서 못하는 선수를 다독여줄 수 있는 캐릭터는 아니란 말이지.”
“그건 확실히 그래요.”
“거기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베이다와 분명히 좀 티격태격할 거야.”
“흐음……. 내가 그렉을 스카웃한 게 좀 안 좋은 선택이었을까요?”
“아니, 더할 나위 없었어.”
“와! 그럼 다행이고.”
티파니가 뺨을 붉히며 웃었다.
귀엽다.
“두 사람은 정반대 스타일이니까.”
베이다는 프로레슬링에서 ‘싸움’의 영역을 담당한다면, 반대로 그렉은 ‘기술’을 담당해줄 수 있을 터였다.
“두 사람에게 제각기 자기 스타일에 맞는 경기 방식을 배우고 성장한다면 분명히 다들 일취월장하겠지.”
그렇게 생각한 구성이었다.
“기믹이나 스타일 정립은 헤이건이 알아서 해줄 거고. 우리는 그들을 믿고 문제가 생길 때마다 개입하면…….”
바로 그때였다.
복도를 지나던 중 우지끈! 하고 철문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다.
실제로 박살이 나지는 않고 경첩이 빠져 문이 크게 덜컹거렸는데.
“이 자식이!!”
“폭력밖에 쓸 줄 모르나!”
그 문을 뚫고 베이다와 그렉 하트가 서로의 멱살을 쥐고 나왔다.
“어…….”
“신. 경첩 수리비는 베이다의 연봉에서 빼는 게 좋겠죠?”
“어, 음. 그, 그래.”
“안 그래도 병원비로 나가는 돈이 상당한데 저런 짓을 해준다면 앞으로 좀 ‘교육’이 필요하겠어요.”
“티파니, 분명 선수 복지를 향상시키고 싶은 거 아니었어……?”
“하하, 저건 선수가 아니라 야만인이죠. 선수들 앞에서 뭔 짓이래.”
그건, 맞는 말이다.
나는 선수들이 문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다들 황당해하는 얼굴이었고.
확실히 좋은 광경은 아니다.
말려야 하나.
싶던 찰나, 허겁지겁 문밖으로 나온 바쿠가 그렉과 베이다를 붙잡고 무슨 종잇조각처럼 떼어놓았다.
거기서 또 황당해졌다.
“그만들 해! 애들 보고 있는 앞에서 별것도 아닌 걸로 싸워?!”
손목을 우드득 꺾자 베이다와 그렉은 조용해져 바쿠에게 끌려갔다.
티파니가 물었다.
“저기, 신.”
“응……?”
“당신 아버님이랑 바쿠랑 만약에 진심으로 싸운다면 누가 이길까요?”
“브리 로건.”
한숨을 섞어 진심으로 대답하며, 나는 사라진 세 사람을 대신하기 위해, 훈련장 안으로 들어섰다.
스무 명이 모두 모였지만, 그들을 지휘할 선수는 없는 상태였다.
“자자, 주목.”
나는 그들 앞에 섰다.
편한 운동복 차림의 선수들은 오늘 첫 미팅을 통해서 앞으로의 훈련 방향을 체크 받으려는 듯했지만.
‘다들 없어졌는데 내가 해야지.’
나머지는 티파니가 자본주의의 따끔한 맛을 보여주리라고 생각하며.
나는 먼저 그녀를 불렀다.
“리키타.”
“응, 신.”
“앞으로 나와주세요. 저와 같이 진행을 좀 해주셨으면 하는데.”
“무슨 진행?”
“앞으로 방향성?”
사실 시간 벌기다.
이쪽 일은 선수 팀장 세 사람에게 맡겨둔 터라 사실 뭔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 수가 있나.
“근데 왜 싸운 거예요?”
“아, 프로레슬링이 뭔지 정의하다가 갑자기 막 서로 치고받던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그게 정의할 수 있는 거였어?”
“뭐, 그 말이 맞죠.”
나도 동의했다.
역시 이야기하기가 편했다.
리키타.
트리쉬 스트라토와 함께 WWF에서 여성 프로레슬링 역시도 흥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레전드 선수.
여성 선수가 아이 캔디였던 시대에 데뷔해, 막강한 카리스마와 터프함으로 수많은 팬들을 끌어 모았지만.
실제로는 그냥 착한 성격이다.
리더십도 있기 때문에, 명실상부 여성 선수들의 총괄 팀장은 그녀였다.
“뭐, 훈련 방식에 대해서 말하자면 정론으로 크게 두 가지 방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네요.”
나는 손가락을 들었다.
“하나는 장점을 키우는 것. 나머지 하나는 단점을 지우는 것. 그리고 여러분은 제가 봤을 때 각자 확실한 재능이 있기 때문에 여기 온 거고.”
따라서 나는 향후 훈련의 방향성이 단점을 지우는 방향성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베이다와 그렉이 알아서 그렇게 해주리라고 믿기는 했지만.
“나도 그렇게 생각해.”
“여성 선수들의 컨셉은 선배님이 좀 맡아주셨으면 하는데요.”
“내가? 해본 적 없는데.”
“별건 아닙니다. 그렉이나 베이다가 너무 ‘아이 캔디’적으로 가려고 할 때 옆에서 개입을 좀 해주세요.”
물론 선수로서 확실한 인기를 얻고 팔리기 위해서는 남성이나 여성이나 외형적인 섹시함이 필요하겠지만.
그럼에도 경기력에 문제가 생길 정도로 다이어트를 하거나 가슴에 보형물을 넣는 건 필요 없겠지 싶었다.
그리고 내가 그걸 직접 입 밖으로 내기는 그래서 리키타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고 말이다.
“뭐, 대장의 생각이 그렇다면.”
“우리 대장은 지금 직무 태만과 사내 폭력 사태를 일으킨 세 사람을 처벌하려고 갔는데 말이죠.”
“푸하하! 그래, 그래.”
왠지 납득을 못하는 얼굴이다.
그걸 잠시 바라보고 있자니, 누군가 무표정한 얼굴로 앞으로 나섰다.
사모아 고.
“다이어트라도 하라는 건가?”
“……첫 만남에서 지적했던 걸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네가 단점이라고 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 사모아인 특유의 두터운 체형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사모아인들은 서구권의 미적 기준에서 벗어나 두꺼운 체형을 선호했다.
그건 존중한다.
“하지만 고, 당신은 너무 쪘어요.”
“…….”
“솔직히 말하죠. 지금 젊은 시절과 비교했을 때 운동 능력이 크게 떨어져 있는 상태 아닙니까?”
체중이 많이 나가면 연골 문제뿐만 아니라, 범프를 수행할 때 부상을 입을 위험성 역시도 크게 높아졌다.
“당신이 미국인들에게 못나 보이니 살을 빼란 게 아니란 말이죠.”
그 가공할 만한 레슬링 능력을 보호하기 위해서 살을 빼자는 말이었다.
그걸 위해서 구성된 팀이었고.
고 역시 내가 그렇게까지 이야기하자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흠, 확실히 맞는 말이군.”
“그렇죠?”
“하지만 설득력이 부족해.”
고가 손가락을 들었다.
“나도 두 개다.”
“음……?”
“난 일단, 너하고 같은 나이다.”
“네?”
“28살. 1979년생.”
“………….”
와 35살은 된 줄 알았는데.
순간 말문이 막힌 내가 어색하게 웃자 고가 그대로 손가락을 접었다.
“그리고 내 운동 능력은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전성기지.”
“죄, 죄송. 죄송합니다.”
“원한다면 시험해봐도 좋아.”
당황해 사죄(?)를 하던 나는 고의 제안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가 링을 가리켰다.
“저 위에서.”
“호오.”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사모안 디스트럭션 머신.
폭주 기관차.
플라잉 포크찹.
각기 다양한 별명을 가진 고는 분명히 흥미로운 상대였다.
거기다.
주변의 선수들마저 그런 우리 두 사람을 기대해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 응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