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
2007년 8월 23일.
‘황금 시간’이라 불리는 저녁 시간대에 방영된 신규 프로그램 광고 하나에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ACW.
우주를 배경으로 거대한 금속 질감의 로고가 떨어지며 그 아래로부터 힘차게 불똥이 튀어 올랐다.
그리고 이어지는 멘트.
[All Championship Wrestling!!]
그와 함께 프로레슬링의 팬이라면 누구나 다 알 정도로 유명한 선수들의 모습이 화면을 스쳐지나갔다.
[랭 새비지!]
[케빈 대시!]
[스카티 홀!]
[그리고 이 남자!]
까악-! 까악-!
까마귀가 우는 소리와 함께 페이스 페인팅을 칠한 사내가 돌아섰다.
새하얀 얼굴에 검은색 라인.
어둠의 사도.
자경단.
[크로우-!]
반 WWF 정서의 수장 같은 사내.
TMA에서 활동하면서 카리스마 넘치는 다크 히어로 기믹까지 장착한 그가 이 ACW에 합류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앞선 선수들이 프로레슬링 팬이라면 누구나 알 존재라면, 이 선수는 그보다 한 단계 더 위에 있었다.
모든 미국인이 아는 존재.
불멸자.
아이콘.
황금시대의 주인공.
미국인의 영웅.
캡틴 로건이 나타나서 카메라에 대고 자신의 선수 복귀를 알렸다.
[모두 기다리게 했군! 2007년 9월! 링에서 다시 만나도록 하지!]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프로레슬링의 역사를 다시 쓰기 위해! 2007년 9월 3일! 월요일 밤! 슈퍼스타들이 당신을 찾아갑니다!!]
그런 내용의 광고.
미국 전역이 발칵 뒤집혔다.
이전까지 프로레슬링 업계는, WWF가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구조였다.
최고의 선수들은 결국 WWF와 계약하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었다.
하지만 그 압도적인 메이저 기업에 대항할 새로운 단체가 탄생했다.
모회사를 TBS로 두고.
그 중심지는 조지아의 아틀랜타.
과거, 미국 남부 프로레슬링의 중심지. 그 정보를 입수한 바트 맥센이 미쳐 날뛴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자신이 상대하겠다며 전화를 받은 티파니는 능청스럽게 바트의 분노를 받아내고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미안해요. 아버지. 하지만 단체를 만드는데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이 필요하더라고요.”
[너희가 GCW를 토대로 내게 대항하겠다고 말해서 넘겨줬더니!!]
“어머나, 그랬던가요?”
[뭐……?!]
“저희는 어디까지나 ‘새 단체’를 만들어서 대항하겠다고 했지. 그게 GCW라고 했던 적은 없는데요.”
[끄극, 끄그그그그극……!!]
“왜 그렇게 흥분하세요. 아버지. 이건 어디까지나 비즈니스라고요.”
[너희, 너희들이 감히!!]
“걱정 마세요. 저희의 신생 단체도 확실히 준비되고 있으니까요.”
[짓밟아주마! 반드시 짓밟아서 너희를 내 앞에 무릎 꿇리겠어!!]
거기까지 들은 나는 티파니에게서 전화기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이야기했다.
“바트, 접니다.”
[신! 이 은혜도 모르는……!]
이어진 F-word는 그 수위가 너무 과격해서 한 귀로 흘려들었다.
“진정하시고. 저희한테 이렇게 말씀하실 때가 아닐 텐데요?”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저희는 당신보다 한 발 앞서서 ACW에 대한 정보를 들었어요. 말인즉슨, 향후 대응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알고 있다는 말이죠.”
[…….]
침묵하는 바트.
솔직히 감탄했다.
저렇게 흥분한 상황에서 순간적으로 이성을 되찾다니 말이다.
역시 사업가다.
[제일 좋은 정보를 내놔라.]
그가 이야기했다.
거기에 피식 웃은 나는 분명히 지금 가장 필요한 정보를 이야기했다.
“ACW가 출범한 뒤, 메인 이벤터는 분명히 캡틴 로건이 맡을 겁니다.”
[뭐?]
“분명 가장 중요한 정보입니다.”
[아니, 이 빌어먹을 새끼야! 그건 당연한 이야기지 무슨……!!]
어우, 듣기 싫어.
나는 전화를 끊고 곧바로 버튼을 꾹 눌러 핸드폰의 전원을 꺼버렸다.
그걸 본 티파니가 쓰게 웃었다.
“되게 잘 다루시네요.”
“바트를?”
“아니, 그거.”
티파니가 가리킨 것은 올해 6월 29일 발매된 액플의 에이폰이었다.
우리는 그냥 받았다.
“저는 아직도 어색하더라고요.”
“쓰다 보면 익숙해질 거야.”
나는 쓰게 웃었다.
어찌 보자면, 내 손안에 쥐어져 있는 이 에이폰이 지금 상황과 절묘하게 들어맞는다고 볼 수 있었다.
나는 미래의 지식을 알고 돌아왔기에 조금 전의 정보가 가진 힘을 알았고 활용할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마치 이 에이폰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걸 잘 모르는 바트, 거기에 티파니는 막상 앞에 두고도 보물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한 거 아닌가요?”
“……캡틴 로건이 ACW의 메인 이벤터로 회사를 이끌어간다는 게?”
“예,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로건은 미국 문화의 아이콘이잖아요? 지금 ACW가 화제를 모으는데 로건을 필두로 한 전설들의 복귀가 클 텐데.”
“그건 그렇지.”
하지만 화제를 모으는 것과 꾸준한 인기를 모으는 건 다른 문제였다.
“미래가 없잖아.”
“그건 그렇죠.”
“지금 복귀한 선수들을 보면 크로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노장들이야.”
경기력도 개판이고 말이다.
화제성은 있어도 지속적으로 인기를 끌고 흥미를 끌기에는 부족했다.
“과거의 영광을 재현한다. 취지는 좋지만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어.”
“그렇다면 어떻게 하죠?”
“우리가 그걸 생각해줘야 해?”
“그게 아니라, 당신 분명 우리가 WWF와 ACW의 사이에서 이득을 챙기는 구도로 가야 한다고 했잖아요?”
“그랬지.”
“그런데 ACW가 힘을 못 쓰면 우리로서도 안 좋지 않나 싶어서요.”
“그래, 분명히 안 좋겠지.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ACW가 잘 나가는데 우리와 손을 잡을 이유가 있을까?”
“……설마 굳이 내년 1월에 단체를 출범시키겠다고 한 이유가.”
“그래, 집이 활활 타야 소방수를 부를 마음이 생기는 거 아니겠어?”
“악당이군요. 신.”
티파니가 미소를 지었다.
“해적이라면서?”
“절묘하네요. 실제로도, 그리고 각본 상으로도 우리는 상대 단체에 가서 그쪽을 털어먹고 오게 될 테니.”
“단체 이름이나 컨셉에도 그런 스타일을 적용해도 좋을 것 같은데.”
분명 그렇게 될 것이다.
ACW는 출범 이후, 약 반 년에 걸쳐서 그렇게 1차 암흑기를 겪는다.
하지만 이후, 캡틴 로건의 파격적인 턴 힐과 스테이블 결성을 바탕으로 치고 올라가 WWF를 추월했다.
오래 가지는 못했지만.
말했듯 프로레슬링은 서부극이다.
하지만 ACW는 캡틴 로건의 스테이블이 만들어낸 흥행력에 취해서 새로운 카우보이를 준비하지 않았다.
크로우도, 복귀한 실버백도.
모두가 그 아래로 그려졌다.
백스테이지를 휘어잡은 캡틴 로건이 ACW를 다시금 암흑기에 빠뜨렸고, 이후 무책임하게 회사를 나갔다.
그리고 뒤를 이은 게 WWF를 나간 코디를 중심으로 한 신세대 선수들.
WWF에 맞선 그들은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WWF를 넘어서지 못하고 합병당하고 말았다.
그게 ACW의 역사였다.
하지만 말했듯, 나는 이번 생애에서 업계 전체를 키울 생각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프로레슬링이.
전 세계의 탑으로 우뚝 올라서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분명히 건전한 경쟁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어찌 보자면 옛날과 같지.”
“저도 그 생각을 했어요.”
티파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말하는 걸 듣자니, 아주 오랜 옛날…… 닉 플레어가 챔피언이었던 시절이 떠오르는데요.”
“그래, 바로 맞췄어.”
그때는 지금과는 양상이 달랏다.
바트 맥센의 아버지가 WWF의 총괄 프로모터였던 시절이다.
당시에는 미국 전역에 마치 스포츠 팀처럼 여러 단체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각자 협력하면서 나름대로 공생하고 있었다는 것까지는 이미 알고 있지?”
“예, 그렇죠.”
“여기에서 문제는 그거지.”
‘누가 가장 강하냐’.
“티파니, 너 고향이 어디지?”
“코네티컷 주 하드포드요.”
“제일 좋아하는 선수는?”
“그렉 하트.”
“…….”
“아, 아니! 물론 신이죠!”
내가 눈을 가늘게 뜨며 바라보자 곧바로 티파니는 말을 바꿨다.
“뭐, 그렉이 ‘두 번째’로 좋아하는 선수라 치고. 그가 코네티컷 주의 챔피언이라고 쳐보자.”
반대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존 마이클스가 캘리포니아 주의 챔피언이다.
“싸웠을 때 누가 이기게 할까?”
“당연히 그렉이죠!”
“나는 마이클스를 밀겠어.”
이렇게 되면 승부가 안 난다.
그때는 전국 중계도 이루어지지 않아서 한 번 자기 주의 챔피언이 졌다가는 시청률 하락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나온 게, 바로 NWA와 같은 초대형 프로모터야.”
그들은 미국 전체를 아우르는 챔피언, 다시 말해 ‘월드 챔피언’을 만들고 거기에 닉 플레어를 앉혔다.
악당 챔피언의 시대였다.
“그렇게 플레어 같은 거물이 전국을 돌고 지역구 챔피언과 싸우면서 단체 간의 협력이 이루어진 거지.”
물론 이기는 건 닉 플레어였다.
팬들은 거대한 악에 맞선 우리 챔피언이 ‘졌지만 잘 싸웠다.’라고 생각하며 애착심을 가지게 되는 구조.
그 시절엔 그게 프로레슬링이었다.
“우리도 그렇게 간다는 건가요?”
“아니, 오히려 정반대지.”
더 이상 사람들은 ‘졌지만 잘 싸웠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겨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모은 선수들은, 팬들이 간절히 ‘이기기를’ 바라는 자들이었다.
나처럼, 자기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WWF의 눈에는 들지 못한 선수들.
다시 말해.
“이 시대가 원하는 선수들.”
“시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한 시대를 만들어내는 선수는 그 시대가 원하는 길을 따라가는 거다.
캡틴 로건은 베트남전의 패배에 지쳐 있던 미국인들의 희망이 되었고.
그게 황금시대가 되었다.
락콜드는 갑질에 당하기만 하는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싸웠다.
그것이 태도 불량 시대.
마지막으로 시나는 좀 독특한데.
이건 아직 녀석의 시대가 제대로 오지 않았으니 다음에 설명하는 걸로.
“지금 미국인들이 원하는 건, 특별한 배경 없이 오로지 자신의 실력만으로 성공하는 사람인 거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기에 나는 호응을 얻었다.
우리 역시도 호응을 얻을 거다.
* * *
WWF와 ACW가 맞부딪힌 이후로 첫 주 만에 놀랄 만한 결과가 나왔다.
같은 시간대, 서로 각기 다른 채널에서 맞붙은 시청률 한 판 승부.
향후 ‘Monday Night War’라고 불리는 엄청난 시대의 서막.
그 승자는 ACW였다.
ACW 650만 : WWE 630만.
20만의 차이.
첫 번째 방송의 어드밴티지가 있었다고 한들 정말로 놀라운 결과였다.
왜냐면 WWF도 ACW가 걸어온 싸움을 피하지 않고 가장 강한 패를 테이블에 올려놓았기 때문이었다.
포커로 치면 에이스.
바로 ‘더 팍’이었다.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역사상 가장 짜릿한 남자’.
그 복귀에 사람들의 채널은 WWF 쪽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더 팍은 막상 경기 같은 건 하지 않고 쇼의 중간쯤 나타나 세그먼트만 짧게 펼친 뒤 떠나갔고.
그 시간대를 기점으로 사람들은 ACW로 채널을 돌려 복귀한 캡틴 로건이 악을 쓰러뜨리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때, 우리 역시 텔레비전 두 개를 들여놓고 두 방송을 모두 틀어 그 역사적인 순간을 지켜보고 있었다.
[캡틴 로건이 돌아왔습니다! 여러분의 영웅! 미국의 히어로가 자신이 아직 건재함을 보여줍니다!]
[숀 시나가 러셀 하트를 메다꽂습니다!! 그대로 쓰리 카운트를 빼앗는군요! 환상적입니다!!]
사실 전생에 이 순간을 직접 겪었던 나는 ACW가 첫 전투에서 승리할 것임을 미리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방송을 보자, 분명히 그럴만한 쇼였음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또 미봉책을 쓰는군.”
“미봉책……?”
옆에 앉아있던 그렉이 관심을 가졌고 나는 그에게 대답을 해주었다.
“바트가 자주 하는 방식이죠. 급한 불을 끄려고 자기가 아는 최대한의 카드를 데려와 쇼를 벌이는 거.”
“그랬지.”
“문제는, 그걸 보기 위해서 TV를 켠 관객들은 그게 끝나는 순간 다른 채널로 돌린다는 겁니다.”
“네 말이 맞다. 하지만.”
그렉은 눈썹을 찡그렸다.
“역사적인 단체가 될지도 모르는 ACW의 첫 번째 쇼에 대항해서, 너라면 과연 어떠한 수를 쓸 거냐?”
“할 거라면 저번 주에 했어야죠.”
“뭐?”
“저번 주의 위클리 쇼에서 이번 주 쇼를 안 보고는 못 배길 정도로 멋진 스토리라인을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만 더, 괜찮겠나?”
“뭐죠?”
“만약 네가 그대로 WWF에 남아있었다면, 더 팍을 불렀을 것 같나?”
이미 이 시점부터 그렉은 ACW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렇기에 질문은 사실, ‘내가 있었다면 ACW가 이겼을까?’와 비슷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못 불렀겠죠.”
그 말에 그렉이 피식 웃었다.
* * *
9월 3일을 시작으로, ‘월요일 밤의 전쟁’은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나는 팀원들과 함께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하며 그 흐름을 지켜보았다.
알고 있는 대로였다.
WWF나 ACW나 이것저것 다양한 시도들을 하긴 했지만, 결국 두 단체의 방향성은 완전 정반대였다.
WWF는 선수들을 믿지 않았고.
ACW는 너무 믿었다.
그렇기에 WWF는 스토리를 보강하고 진행하는 대신, 게스트를 부르면서 점점 지루한 쇼를 만들어갔다.
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시나도 딱히 활약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레이트 칼라이 같은 선수와 대립하면서 자기 힘을 과시하는 정도.
그나마 가족 단위의 팬들은 계속해서 시나를 응원하며 쇼를 보았지만.
내실을 다지기에는 좋을지언정 ACW에 대항할 만한 카드는 아니었다.
반대로 ACW는 캡틴 로건을 중심으로 해서 단체의 초석을 다져나갔는데.
80년대의 영웅을 2000년대에 써봤자 추억팔이밖에 되지 않는 것이었다.
첫 주 이후, 두 달간은 어떻게든 화제성을 바탕으로 남부 팬들의 충성심을 끌어 모으며 순항을 했지만.
그 뒤로는 오픈 빨이 빠져서 WWF와 엎치락뒤치락 싸우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한 해가 넘어갔고.
아마 두 단체 모두, 상대를 죽이기 위해 혈안을 뜨고 있는 상황일 터.
2008년 1월 1일.
‘전통’대로 링에 모여 다 같이 먹고 마시며 시간을 보내던 중, 나는 할리의 권유로 한마디를 하게 되었다.
할 말은 미리 생각해두었다.
“말하자면, 대항해시대의 최강국이었던 영국과 스페인이 해전을 벌이고 있는 셈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 말을 경청하는 우리 크루들.
아니, 여기에서 콘셉트대로 ‘해적단’이라고 하면 너무 오그라들려나?
“다들 한창 싸우고 있는 데 끼어 들어서 모조리 빼앗고 불태워버리자고.”
벽에 걸려 있는 프로레슬링 스타일의 졸리 로저 깃발이 눈에 들어왔다.
링의 삼단 로프를 상징하도록 대퇴골이 각각 세 개, 엑스자로 교차했고.
그 위에는 버닝 스컬의 얼굴이.
이것이 우리의 졸리 로저.
“슬슬 출항하자.”